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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55화 (55/405)

55화

마왕 휼(獝)

엘릭은 아주 잠깐 고민에 잠겼다.

바로 공격을 해야 하나?

‘아니. 일단은 상황 판단부터.’

냉혹의 인장은 설인과 설산왕을 꺾는 방식으로 얻었다.

하지만 휼의 인장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다른 방식이 있을지도 모르고, 여기서 녀석과 싸운다고 해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무리 본체는 죽어 잔존 사념만 남은 상태라지만.

그래도 마왕은 마왕이니까.

‘만약 지게 되면 자아 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르고.’

혹은 정신 감염으로 인해 마(魔)에 물들거나.

어쨌건 간에 지금은 주의를 기울여서 나쁠 게 전혀 없었다.

『보통 메르빙거의 인간은 성정이 다급해서 먼저 대가리부터 밀어 넣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건만. 너는 특이하게 참을성이 있는 듯하구나.』

‘내 내력을 단번에 알아차렸어!’

엘릭은 등골이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결을 빠르게 헤집었다.

여차하면 바로 반격을 할 수 있게.

『그런데 품고 있는 게 상당히 특이하군. 인간 주제에 언령이며, 인장까지? 호오! 이건… 그렇군. 메피스토펠레스인가? 아무리 메르빙거가 나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지만, 이런 특성을 갖고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건만. 신기해. 아주!』

녀석의 말투 하나하나에 허기가 잔뜩 배어나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엘릭을 잡아먹을 것처럼.

『메피스토펠레스가 군침을 흘릴 만하군. 좋아. 웬만한 놈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으려 했다만, 이 정도라면 슬슬 갈아탈 만하겠지.』

그림자의 이빨이 더욱 또렷해졌다.

『인간. 항상 굶주려라. 탐(貪)하고 또 탐하여 너의 욕구와 욕망을 채워라. 그런다면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즉.』

톱니 이빨 위로 나 있는 두 개의 눈이 활짝 휘어지는가 싶더니.

『그때, 또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그 말과 함께.

퍼어엉!

사념 세계가 폭죽처럼 터졌다.

츠츠츠!

엘릭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휼의 입자가 손등에 완전히 자리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냉혹의 인장 위쪽. 검은 잉크로 줄을 그은 것처럼 ‘일(一)’자 모양의 획이 새겨졌다.

휘휘휘!

그러다 마기 폭풍이 점차 가라앉으며 고요한 적막만이 찾아왔으니.

『미친놈이로군. 자신의 진명을 저런 식으로 그냥 갖다 바치다니. 하!』

메피스토만이 못마땅하다는 눈치로 새로운 인장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이렇게 인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였습니까?]

『미쳤느냐? 마왕의 인장이라는 게 그렇게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

물론, 엘릭도 그렇게 생각지는 않았다.

마왕이 되지 못했던 설산왕의 인장을 얻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하물며 마왕의 인장이라면야.

이건 비정상적인 게 분명했다.

[그럼요?]

『잔수를 쓰는 거다.』

[잔수?]

『어차피 놈은 죽은 지 오래고, 잔존 사념만 겨우 남아 인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지. 하지만 그마저도 이대로 있다간 소멸할 위기였고. 그러니 차선책을 쓰기로 한 걸 거다.』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뜻을 이해할 것 같았다.

[기생(寄生).]

『그래. 네놈이 괜찮은 텃밭이라 판단하고, 사념 한 조각을 심어둬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한 거지. 보아하니 ‘흉신’이라는 진명도 유지하지 못한 것 같은데. 저딴 저급이 되다니. 쯧!』

과거에 메피스토는 말했다. 인장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은 아니라고.

인장에도 등급이 있고, 성취의 차이가 있노라고.

아무래도 휼이 준 건, 본래 마왕이 지녔던 인장이 아니라 그보다 몇 단계나 영락한 인장인 모양이었다.

‘이걸 계속 승급시켜서 원래의 형태로 복구하라는 건가?’

탐하고 또 탐하면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더니.

그게 이 뜻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니 지워라.』

갑자기 메피스토가 불쾌하다며 던진 말에 엘릭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마의 품위와 격은 고고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패배했다면 알아서 스러질 것이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아등바등하는 꼴이라니. 이러니 못 배운 아귀(餓鬼) 놈들은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어 봐야 해로울 뿐이니, 버려라.』

아귀.

늘 굶주림에 빠져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는 하급 마귀.

그것이 휼의 출신이라면, 그런 성질을 드러냈던 것도 얼추 이해가 되었다.

[그런 거라면 메피랑 별 차이 없습니다만?]

『뭣이?』

[메피도 호시탐탐 제 육체를 노리면서 무슨.]

『그놈과 본 왕의 격이란…!』

[아, 됐고. 이 문장, 진명이 뭡니까?]

『본 왕이 말해줄 것 같으냐!』

메피스토는 휼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것에 화가 단단히 난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엘릭으로서는 시큰둥하기만 했지만.

[그럼 딴 데다 묻죠, 뭐.]

『뭣이?』

엘릭은 오거스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혹시 휼의 진명이 뭔지 아십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엘릭이 휼을 너무 쉽게 흡수한 것에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오거스틴은 허겁지겁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아무리 마족의 인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흡수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이리 수월하게 흡수하다니! 이 아이의 손에서라면 나의 비원이 확실하게 이뤄질 수 있겠구나!’

거기다 이제는 직접 ‘스승님’이라고까지 불러 주지 않나!

제자를 보는 오거스틴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흉신(凶神)’. 흉신이다!”

[그렇다네요?]

『제길! 그래도 그 아래의 진명은 모를…!』

“제가 획득한 인장은 그보다 격이 한참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그 아래는 어떻게 될까요?”

“어디 보자. 아래로 이어지는 순서가 흉악, 흉살, 흉성이었지, 아마?”

『저 미친놈이! 인장의 계보를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게야?』

메피스토는 기겁하고 말았다.

최상위 마왕급 인사가 아니라면, 보통 마족들도 잘 숙지하지 못하는 계급도를 오거스틴이 정확하게 읊어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릭이 봤을 때는 그게 당연한 거였다.

‘천 년을 한 놈만 죽어라 쫓았는데. 그 정도 파악하는 건 당연하잖아?’

오거스틴이 외쳤다.

“‘흉포(凶暴)’. 아마 그럴 게다.”

“흉포의 인장….”

엘릭의 두 눈이 빛나며 진명을 입에 담았다.

그 순간.

화아아악!

인장이 빛을 발하더니, 엘릭의 그림자가 바닥을 따라 넓게 확 하고 퍼졌다.

그 속에서는 음울한 기운과 포악한 성질이 같이 느껴졌다.

단순히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으로 하여금 맹수 앞에 놓인 것처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림자.

덩달아 엘릭의 심장 한편에서도 뭔가가 간질간질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르르-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그림자가 잘게 떨렸다.

“제대로 흡수한 것, 맞군.”

과거의 숙적에 비하면 애교 거리에 불과하지만.

오거스틴은 그래도 허기를 토해내는 녀석을 보면서 히죽 웃고 말았다.

* * *

“흉신… 아니, 흉포의 인장은 사실 따지고 보면 한 마리의 짐승이라고 볼 수 있다.”

오거스틴은 비원을 이루기 위한 가르침에 곧장 들어갔다.

굳이 미룰 필요가 없었으니까.

『몇 번을 설명해야 알아듣겠느냐? 그놈은 탐욕에 젖은 놈이다!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다 집어삼키는 근본 없는 아귀 놈이야! 그걸 갖고 있다간 너도 언젠간 위험해질 수 있단 말이다!』

메피스토의 잔소리도 같이 따라온 게 문제였지만.

[그땐 위험해지는 건 제가 아니라 메피겠죠.]

『무, 뭐?』

[제가 안 잡아먹히려면 메피가 어떻게든 막아야죠?]

『이, 이이…!』

[아니면 원죄의 인장이 먼저 먹히려나.]

『…!』

메피스토는 자신의 생각이 들통나자 그게 아니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엘릭은 이번에도 무시하고 있었다.

대신에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오거스틴을 바라보고 있었다.

‘휼을 쫓은 만큼 지식도 깊다더니, 인장에 대한 사용법도 너무 잘 알고 계시잖아? 이만하면 마왕 본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거 아냐?’

엘릭은 오거스틴의 설명을 듣는 내내 여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흉포의 인장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기반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추가로 따라오는 마도 지식도 너무 방대하고…. 대체 이 사람은 이만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 얼마나 고된 길을 걸었던 걸까?’

오거스틴도 그런 엘릭의 시선을 너무 잘 느끼고 있었기에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짐승 한 마리를 품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품고 있다면…?”

“인장을 발동하고 있을 때, 심장이 간지럽고 모든 감각이 쭈뼛 서지 않던?”

엘릭은 그랬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거스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게 마치 마투술을 전개하기 시작할 때와 느낌이 비슷했고?”

“예. 하지만 조금 달랐습니다. 마투술은 육체적 감각이 서는 데 반해, 이건….”

“본능이 서는 느낌이고?”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가 짐승… 아귀의 감각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이란다.”

“아귀요?”

“그래. 아귀. 마족 중에서도 가장 서열 밑바닥에 위치해 언제 죽을지 몰라 눈치만 살피는 놈들. 그러면서도 허기진 본성만이 남아 탐욕만 줄줄 흘려대는 놈들.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놈들이지.”

“….”

“흉포의 인장은 아귀의 감각을 세운다. 재빨리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약점을 찾아 빠르게 물어뜯을 수 있게 하지.”

“…!”

“난 이걸 두고, ‘아귀감(餓鬼感)’이라 부른다.”

오거스틴의 말속에는 똑똑한 전승자를 향한 희열이 짙게 배어났다.

“그리고 눈치챘겠지만, 녹야의 마투술은 바로 이 아귀감을 모방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마력 순환을 통해 인간이 지닌 다섯 감각을 강제로 깨우는 것.

그리고 나아가 그 너머에 있다는 육감(六感)까지 깨워 아귀감을 터득하는 것.

그것이 녹야의 시작점이었다.

“휼을 잡기 위해… 휼을 모방한 것이었군요.”

“그게 녀석을 쫓아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

“물론, 시작은 그렇다고 해도, 그 뒤에 본 학파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마법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대부분 아귀감이 없으면 그림의 떡인 것들이지.”

아귀감만 제대로 익혀도 녹야의 마투술은 물론, 흉포의 인장도 제대로 다룰 수 있겠구나.

엘릭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강체술과도 이어져 있으니 그쪽 성취도 빨라지겠어.’

저마다 근원도 연원도 다른 마법들을 하나의 줄기로 엮어버리니, 하나만 발전해도 다른 것들까지 덩달아 발전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 늙은이가 지금부터 뭘 하려는지 알겠지?”

“마투술은 실전이라 하셨죠.”

“맞다.”

짝!

오거스틴이 크게 박수를 쳤다.

푸드득!

크르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와이번이 내려앉고, 샤벨 타이거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여태 상대했던 맹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들.

대체 어디서 끌어왔는지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무한투(無限鬪). 계속 싸우고 또 싸우다 보면 마투술은 온전히 네 몸에 체득되어 있을 것이니라. 아, 그리고 이번에는 분명히 주의를 주었으니, 조건을 해친 건 아니다?”

어째 설산왕 때와 크게 다른 게 없을까.

엘릭은 한동안 또 열심히 굴러야겠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두 눈은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아, 젠장! 이놈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타샤는 손톱을 질겅질겅 씹어대면서 안절부절못하는 션을 묘한 눈길로 바라봤다.

언제나 자존심 강하고 냉소적이던 동생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똥 마려운 개새끼처럼 대체 왜 그래?”

“아, 누님! 제발 어휘 선택 좀!”

타샤는 그레노프 산(産)의 도자기 기법으로 구운 찻잔을 우아하게 입가에다 대면서 싱긋 웃었다.

“그럼 새끼개처럼?”

“…내가 말을 말지.”

“하여간 왜 그래?”

션은 엘릭만큼이나 자신을 두통에 절게 만드는 원흉을 노려보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작은 증조… 아니, 원로원주께서 엘릭을 데려가신 지 벌써 보름이 돼서 그럽니다.”

“그게 어때서? 오히려 본인한테도, 메르빙거와 이참에 교분을 트려 하는 본 가에도 좋은 것 아냐?”

엘릭을 회유하려던 타샤로서도 그만큼 용의 둥지에 다가갈 시간이 길어지기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쪽이 쌍방에게 이득이었기에 꾹 참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친구인 션이 저러니 의아할 수밖에.

“좋죠. 좋기야… 그런데. 하아!”

타샤는 계속 말을 질질 끌기만 하는 션이 이제 조금 짜증 났다.

“말 똑바로 안 할래?”

그래서 찻잔을 들지 않은 왼손 위에다 사람 머리통만 한 화구(火球)를 떠올렸다.

화르륵!

여차하면 던져버릴 수 있도록.

얼마나 뜨거운지 찻잔 속의 차가 다시 보글보글 끓을 정도였다.

션은 질린 얼굴이 되어 뒤로 주춤 물러서야만 했다.

“…엘릭의 누이가 오늘 밤에 황도에 도착할 예정이라서요.”

“누이? 메르빙거 가의 직계 중에 혈육이 더 있었던가?”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생 그늘에서 동생 뒷바라지에만 충실하셨던 분이시죠.”

“그런데? 그만큼 아끼던 친동생이 우여곡절을 겪었으면 걱정돼서 올 수도 있는 거지. 뭐가 문제야?”

타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럴수록 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엘릭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바로 그 누이입니다.”

“그거야 누나면 당연할…!”

“아니. ‘무서워’ 한다구요. 그 지랄 맞은 엘릭이.”

“…?”

“메르빙거가 무서워하는 메르빙거, 들어보셨습니까?”

“…!”

타샤는 처음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 * *

그리고 그 시각.

뿌우우!

마도증기열차가 도착한 황도의 역사(驛舍).

“이젠 통신도 안 받는단 말이지? 그래. 이젠 정말 아예 못 쥐게 해주겠어.”

한 여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황도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또각, 또각!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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