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마왕 휼(獝)
엘릭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마왕을 쫓아 서역까지 쫓아온 연단술사.
그리고 서역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대대로 그 유지를 남기면서 어떻게든 원한을 갚고자 한 학파.
그것이 천 년도 넘게 이어졌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거기에 담긴 한이 얼마나 깊을지… 엘릭으로서는 도저히 짐작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만한 한을 품고 있었다면, 인외의 힘에 손을 대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겠구나.’
오거스틴이 한쪽 팔에다 다크 엘프의 팔을 이식하게 된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괴물을 잡으려는 자는 괴물이 되고,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는 심연을 닮아가는 법이지. 녹야가 그러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녹야가 마도보다 인외에 가깝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마도니 인외니 하는 것을 굳이 구분 짓는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굳이 그렇게 딱 잘라서 나눌 수가 있나?』
마도와 인외의 경계선이라.
가문의 안배를 받기 전까지의 엘릭이었다면 당당하게 ‘다르다’고 딱 잘라 말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마를 품은 인장이 두 개나 찍혀 있었으니까.
엘릭은 공동의 벽에 등을 기댄 마왕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소용돌이치는 마기가 아니었다면, 멸종된 거인족이라고 했어도 믿었을 정도의 거구.
비록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것처럼 생기마저 느껴졌다.
“이 마왕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도 정확한 건 모른다. 동방에서부터 제국에 이르기까지, 녀석이 출몰할 때마다 불리던 이름은 저마다 달랐으니까. 하지만 우리 녹야에서는 이놈을 이렇게 부른다.”
마왕을 보는 오거스틴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휼(獝)’이라고.”
“무슨 의미입니까?”
“포악한 짐승이란 뜻이다.”
“포악한 짐승….”
“어쩌겠느냐? 이 늙은이가 새롭게 갖게 된 비원을 네가 이뤄주겠느냐?”
엘릭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옳았다.
휼은 메피스토도 인정한 마왕이다. 그런 존재의 인장을 흡수할 수 있다?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거기다 그런 마왕을 쓰러뜨린 실력자 오거스틴의 가르침도 이제부터 시작된다.
엎드려서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해도 모자랄 판국에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엘릭은 내심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우열을 가려달라던 부탁.
“만약 제가 인장을 흡수할 방법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셨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강제로 익히게 하는 거지.”
“흑마술을 익히게 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래선….”
이성이 마에 물들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엘릭은 그리 묻고 싶었지만, 오거스틴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말허리를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녹야는 대대로 강해질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닥치는 대로 집어먹어서야 거지꼴밖에 더 났을까? 정신을 보호할 수단 정도는 따로 있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엘릭은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휼의 힘을 익히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두 기예의 승패를 가리는 것도 아주 어려운 작업이 되었을 테지.”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마족의 인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아무 문제없이 발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 늙은이는 더더욱 너를 놓칠 수 없게 되었다.”
엘릭은 어쩐지 오거스틴의 두 눈가에 생기와 활력이 지나치게 많이 돌아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저 정도면 거의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네가 여태 보인 천재성이라면 녹야와 인장을 전부 대성(大成)할 수 있을 것이고.”
오거스틴은 엘릭의 손을 꽉 붙잡았다.
주름이 가득한 손에 힘이 잔뜩 실렸다.
“그러니 부디 이 늙은이의 바람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다오.”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부탁하니, 엘릭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휼의 힘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도 무작정 받을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비원을 어떻게든 이뤄드리겠습니다.”
“그럼…!”
“대신에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몇 가지 확답을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냐?”
오거스틴은 자신의 심장이라도 뽑아다 줄 기세였다.
엘릭은 손가락 세 개를 꼽았다.
“총 세 가지입니다.”
“말해보래도.”
“첫째는 녹야의 전승자이기 이전에 제 신분은 메르빙거의 가주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확고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녹야의 비원을 이루기 전에 가문의 비원이 먼저란 말이렷다?”
“예.”
“그거야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더냐. 이 늙은이는 네가 녹야를 메르빙거에 녹여도 좋고, 따로 전승자를 구해도 좋다. 맥만 끊어지지 않게 해 다오. 다른 건?”
“이번처럼 느닷없이 괴롭히지 마십시오.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흐흐! 그것도 주의하마. 다만, 녹야의 기예들은 하나같이 실전용인데 어찌 괴롭히지 않을 수 있누?”
“…그럼 최소한 주의나 경고라도 해주십시오. 마음가짐은 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릭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많은 발전을 이뤘다지만, 미궁만 해도 힘들었는데 대체 이보다 더 난이도가 올라갈 수 있을까?
“좋다. 그 정도라면. 그럼 마지막 남은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응?”
“아직은 말씀드릴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거스틴이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피식 웃었다.
“나중에 필요할 때 써먹을 생각인가 보군. 뭐, 좋다. 이 늙은이의 목숨과 가문의 생사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그런 무리한 요구는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럼 되었고. 하면 시작해볼까?”
오거스틴은 잔뜩 들뜬 기색으로 말했고.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마왕 휼에게로 접근했다.
휘휘휘!
여전히 공동을 따라 휘도는 마기의 회오리가 거칠었지만.
“【밀려나라】.”
엘릭은 간만에 언령 마법을 개방하면서 마기가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게 투명막으로 밀어냈다.
반대로 마왕 휼이 내뿜는 지독한 압박감은 더더욱 거세졌으니.
가까이 갈수록 숨이 막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지독했다.
그렇게 1미터 남짓한 위치까지 다다랐을 때.
엘릭은 고개를 들어 휼을 올려다봐야만 했다.
멀리서 보던 것보다 휼의 존재감은 더 컸다.
[메피.]
『왜?』
메피스토는 전혀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엘릭보다 몇 걸음 더 앞서서 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나 생각이 많은 얼굴.
설산왕과 마주했을 때 보이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인장, 어떻게 흡수하는 겁니까?]
메피스토의 진지했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것도 모르면서 인장을 흡수하니 마니 시건방을 떨었던 거냐?』
[어쩝니까? 인장 흡수가 되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시는데. 모른다고 말하면 쪽팔리잖아요?]
엘릭이 히죽 웃었다.
어차피 당신이 알려줄 텐데 뭣 하러 굳이 그런 말을 하겠느냐는 투.
『이런 미친놈이…!』
메피스토는 짜증이 단단히 났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아! 본 왕도 모른다.』
[무슨 말씀이세요? 마왕들도 서로 간에 인장을 뺏고 뺏기는 경우가 많다면서요?]
『너는 밥을 먹을 때 ‘어떻게’ 먹는지 배우고 먹느냐?』
[…그걸 누가 배워요?]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냥 같은 마왕과 마족을 죽여 인장을 갈취한다. 이건 너희들이 끼니 때가 되면 식사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겐 지극히 당연한 본성이다. 그걸 어떻게 가르쳐줘?』
[큰일 났네.]
엘릭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봐도 휼의 인장을 어떻게 가져와야 할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냉혹의 인장을 갈취할 때야 안배의 도움이 있어서 설인을 죽일 때마다 저절로 이뤄졌다지만.
휼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대상이니 좀처럼 방식이 떠오르질 않았다.
‘마도경식도 아무 반응이 없고.’
엘릭은 목에 건 가보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잠깐 고심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혹시나 싶어 휼에게로 손을 뻗었다.
“【흡수되어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구동된 언령.
인장이 언령 마법과 연동되어 있으니, 혹시 같은 방식으로 흡수가 가능할까 싶어서 시도해본 것이었는데.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파아아!
휼의 사체가 거무스름한 광채를 잔뜩 토해내면서 마기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더니.
퍼걱!
츠츠츠-
사체가 그대로 모래성처럼 부서지면서 엘릭에게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됐다!’
엘릭은 그것이 인장 흡수 때 발현되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허!”
그런 광경을 처음 보는 오거스틴이 탄성을 내뱉을 뿐.
그렇게.
손끝에 휼의 조각이 닿았고.
파아앗!
엘릭은 한순간 시야가 검은 빛무리로 가득 채워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다른 세상에 도착했다.
심상 세계.
아니, 정확하게는 마왕 휼이 남긴 잔존 사념의 세계였다.
‘설산왕 때처럼 인장을 얻으려면 항상 무슨 시험이나 자격을 얻어야 하는 건가?’
어쩌면 그만큼 격이 높은 존재의 진명을 흡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근데 여기서 뭘 하라는 거지?”
엘릭이 있는 곳은 온통 나무로 뒤덮인 밀림이었다.
얼마나 나무가 많고 빽빽한지, 수십 미터도 넘는 커다란 나무 때문에 하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바닥은 온갖 퇴물 등으로 늪처럼 질퍽질퍽해서 걷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표범이나 아나콘다 같은 맹수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위험천만한 장소였지만.
‘아무것도 안 느껴져.’
엘릭은 바짝 긴장하면서 감각을 곤두세웠다.
이런 곳이라면 당연히 들려야 마땅할 새소리는 물론, 작은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짐승의 기척도 더더욱 없었고.
단순히 사념 세계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이곳 전체가 마치 무언가에게 전부 잡아먹힌 것처럼…!’
엘릭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여기 어딘가에 밀림의 어떤 존재도 범접하지 못할 포식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마법 무장】.”
엘릭은 들숨을 삼키면서 마력을 강제로 돌렸다.
녹야의 독특한 순환 방식에 따라, 강체술과 마투술이 일제히 발동되면서 공명(共鳴)을 일으켰다.
“【개방】.”
화아아-
이전보다 훨씬 강력하고 방대한 양의 마력장이 파문을 그리면서 단숨에 뻗쳐 나갔다.
파문이 닿는 곳곳의 수많은 정보가 엘릭의 뇌 내로 쏟아졌다.
감각이 이전보다 훨씬 예민해지면서 인지 영역이 넓어지고, 수용할 수 있는 정보의 양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로 인해 빚어지는 심안 속 결의 숫자도 훨씬 많아졌으니.
‘어디지?’
엘릭은 이를 바탕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
늪지대가 거품을 토해내는 소리.
나뭇잎과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도 나면서… 그 너머로 음울하면서도 사나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강렬한 적의를 품은 흉포(凶暴).
그것은 분명히 정확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엘릭은 당장에라도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도록 바짝 긴장하면서도, 좀처럼 녀석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어 쉴 새 없이 주변을 둘러봐야만 했다.
‘숲에도… 하늘에도 없어. 분명한 건 이 근방에 숨어서 날 노려보고 있다는 건데. 대체 어디지?’
사방 100여 미터 안에 있는 곳들을 전부 꼼꼼하게 살폈지만,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심지어 땅 밑까지 뒤졌으니. 딱딱한 지반만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야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어 등골을 쭈뼛 세우는데.
문득 자신이 유일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림자!’
그 순간, 엘릭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을 내려다보았고.
씨익!
때마침 잎사귀 사이로 비친 빛살이 어렴풋이 만들어낸 그림자 위로, 톱니 이빨이 흉악하게 드러났다.
마치 맛난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재미난 인간이 나타났구나.』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