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청연의 미궁
『마투술의 기본기를 가르쳐 달라고?』
엘릭은 다이어 울프가 남긴 분비물을 체크하다 말고, 메피스토가 던진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체술이랑 마투술을 따로 전개하려니까 영 어긋나는 게 적지 않아서요. 서로 연결할 수 있으면 시키려고요.”
현재 엘릭이 익힌 마투술은 단순히 호흡법일 뿐이고, 강체술도 육체와 감각에 국한되어 있어 당장 두 가지가 크게 충돌할 일은 없지만.
어쨌거나 두 기술은 연원이 전혀 달랐다.
앞으로 추가로 익힐 기술들이 많아질 걸 감안한다면, 어떻게든 상충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니 엘릭은 그 전에 두 기술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있으면 미리 만들어 놓을 참이었다.
초기에 미리 잡아놔야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나중에는 번거롭게 따로따로 스위칭(Switching, 전환)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야 진짜 치열하게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는 위험해지잖아?’
그런데 메피스토의 표정이 영 꺼림칙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원죄의 인장이 아무 변화가 없는 것에 엘릭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엘릭은 여전히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지만.
『맨입…!』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구요.”
『…으응?』
“사실 따지고 보면 제가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메피에게도 이로운 거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돕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냥 제가 알아서 방법 찾아야지.”
엘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녹야를 본격적으로 배울 때 상황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든 되겠죠.”
『…제기랄!』
메피스토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여기서 뭐라고 반박하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휘둘릴 게 불에 보듯 뻔했지만.
그로서도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으니 술술 부는 수밖엔 없었다.
사실 여기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저 재능 넘치는 메르빙거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재능충 같으니라고…!’
메피스토는 욕지기를 삭이면서 억지로 말했다.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본 왕도 그리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니다…!』
“뭐, 어때요. 용언도 잘 몰랐지만, 제가 알아서 익혔잖아요? 기본기나 가르쳐주세요.”
엘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비물 조사도 끝나 다이어 울프가 어디로 이동했는지도 알았으니, 가면서 강의를 들을 생각이었다.
* * *
『마투(魔鬪)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마(魔)를 이용한 싸움 방식(鬪)이다. 단단한 호흡법을 근간으로, 싸움에 좋다 싶은 방식은 모조리 끌어다 쓰지. 오거스틴이라는 놈이 다크 엘프의 팔을 갖고 있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엘릭은 붉은 이끼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좁아지는 협로를 걸었다.
빙열초.
아낙수나문의 화초 군락지에 인근에서 발견한 것으로, 음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냉혹의 인장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약.
“그렇다는 건 포용성이 좋다는 말이네요?”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지. 단, 너무 혼잡하게 섞여서 말년에 입마증으로 고생하는 경우도 꽤 많지만.』
엘릭은 직접 마투술을 단련하면서 가졌던 의문들을 전부 메피스토에게 던졌고, 그때마다 괜찮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메피스토로서는 아주 기본기에 불과한 지식이었지만, 엘릭에게는 여러 번 겪었어야 했을 시행착오를 확 줄일 수 있는 좋은 조언이 되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섞을 수 있겠는데?’
마력 분배만 잘한다면, 마투술과 강체술을 병용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술식 계산이 그리 쉽지는 않을 테지만.
‘그거야 나한텐 누워서 떡 먹기고.’
더블 캐스팅도 가능한데, 그게 뭐가 어려우랴.
그래서 엘릭은 내친김에 두 가지를 한번 이어보자는 생각에 마투술의 마력 순환에 변화를 조금씩 주면서 강체술의 감각 쪽으로 흐름을 유도했다.
파장이 어긋나는 부분에서는 술식 계산을 통해 아주 조금씩 미세 조정에 들어가니.
찰칵.
찰칵.
그러자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 때, 무언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호흡에 맞춰 마력 순환과 감각 기능이 일치되는 듯한 느낌.
덕분에.
엘릭은 심안이 한결 더 또렷해지고, 육체가 더 예민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얼마나 예민했던지, 마력의 흐름까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화아아!
『…빌어먹을 재능충.』
메피스토는 엘릭의 주변으로 잔잔하게 느껴지는 마력장을 감지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많이 가르쳐준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또 엘릭이 한 단계 더 성장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엘릭이 그런 감각을 어느 정도 갈무리했을 때쯤.
『여긴가 보군.』
엘릭은 미궁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다이어 울프의 터전이라 생각되는 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크르르?
크르, 크르르르!
허기진 배를 가지고서 입구 쪽에서 어슬렁대던 다이어 울프들은 가장 먼저 엘릭을 발견하고 덤볐다.
개중에는 엘릭에게 상처 입고 도주했던 녀석들도 섞여 있었다.
크와앙!
팟-
엘릭은 날을 잔뜩 날카롭게 벼린 뗀석기를 들고서 달려들었다.
호흡이며 마력까지 일치되어서 그런지, 강체술의 본능적인 감각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훨씬 더 확실하게 가르쳐주었다.
피하고, 스치며, 찍길 여러 차례.
엘릭은 처음 미궁에 떨어졌을 때와 다르게, 이제는 다이어 울프의 행동 방식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사뿐히 놈들 사이를 통과하며 중심지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그곳은 여태껏 엘릭이 지나쳤던 좁은 협곡이 아닌, 호리병 형태의 원형 회랑(圓形回廊)이었다.
‘역시 예상대로야.’
마나 로드로 치면 마나 서클이 뭉치는 심장에 해당하는 곳.
절벽 앞에는 다른 다이어 울프보다 족히 서너 배는 더 큰 것 같은 우두머리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배가 잔뜩 부푼 걸 봐서는 새끼를 밴 것 같았다.
‘하나같이 굶고 있었던 게 저 때문이었나?’
아무래도 그동안 무리가 잡은 사냥감은 전부 우두머리에게로 갔던 모양이었다.
엘릭은 그동안 가졌던 마지막 의문을 해소하면서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 다이어 울프는 모두 사십여 마리.
밖으로 나갔던 녀석들도 다급히 이쪽으로 몰려오는 게 보였다.
출구는 꽉꽉 막힌 상태.
투다다다-
크르르, 크와앙!
어디로도 엘릭이 빠져나갈 길 따윈 없었다.
아무리 엘릭이 날고 긴다고 해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없을 전력이었지만.
피식!
엘릭은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불쌍한 것들. 쯧!』
메피스토가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콰아아앙!
갑자기 저만치 높은 협곡 곳곳에서 거친 폭음이 울리더니 모래 기둥이 치솟았다.
경사를 따라 낙석이 우수수 쏟아졌다.
엘릭이 이곳으로 오기 전 곳곳에다 설치했던 마법들이 동시에 발동한 것이다.
심안을 통해 협곡의 결을 짚어내고, 그런 곳에다 마력을 잔뜩 응축시킨 마력탄(魔力彈)을 심어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사실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결과물은 절대 그렇지 않았지만.
콰르르르-
크왕!
아우우! 아우!
다이어 울프들은 낙석 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누구 맘대로?”
이미 거기까지 예상했던 엘릭이 그것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나면서 유일하게 남은 출구가 완전히 무너졌다.
결국 오도가도 못하게 되어버린 다이어 울프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그대로 낙석 더미에 깔려 피떡이 되고 말았다.
몇몇은 신경질적으로 엘릭에게 달려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엘릭의 마투술을 당해내지 못하고 모조리 떼죽음을 맞았으니.
엘릭은 심안을 이용해서 위험 지역만 골라 쏙쏙 피하면 그만이었으니 크게 다칠 것도 없었다.
이따금 흩날리는 먼지 때문에 숨쉬기가 버거운 건 있었지만.
쿠쿠쿠쿠…!
그렇게 요란하던 산사태가 전부 끝나고 난 뒤.
엘릭은 먼지구름을 헤집으면서 바위 더미 위를 지나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던 우두머리에게로 다가갔다.
크르르!
간신히 숨만 붙어있을 뿐, 다른 녀석들처럼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하체는 전부 박살이 난 채로 커다란 낙석에 깔려 있었으니.
머리만이 빼꼼 나와서 엘릭을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단숨에 자신의 수하들은 물론, 배 속에 있던 새끼들까지 전부 앗아간 원수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푹!
엘릭은 가차 없이 녀석의 목덜미에다 ‘얼음칼’을 새긴 돌멩이를 쑤셔 넣었다.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하아!”
엘릭은 그제야 다이어 울프를 전부 제거했다는 생각에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하늘 쪽으로 번쩍 들었다.
마치 이곳을 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자랑하듯이.
* * *
‘미궁을 이런 식으로 통과할 줄이야. 허!’
오거스틴은 엘릭이 협곡을 무너뜨려 다이어 울프들을 전부 처치했을 때부터 자리를 박차고 미궁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실 마력이 어느 정도 돌아오면 1단계를 통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절벽을 그냥 타고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물론, 그 1단계도 통과하지 못하는 시험자들이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그저 다이어 울프의 습격으로부터 몸만 보호하고, 이리저리 시간을 끌면서 생사초만 꾸준히 섭취하기만 하면 되는 일.
그러니 엘릭처럼 협곡의 구조도를 전부 파악하고, 다이어 울프를 전부 제거하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문제는.
‘이것이 바로 2단계 시험에 해당한다는 점이지.’
마투술은 마력 순환과 실전에 기반을 둔다.
그러니 반드시 미궁의 구조를 전부 파악하고, 다이어 울프들과도 여러 차례 실전을 겪어서 이를 극복해 내야지만이 비로소 입문(入門)의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엘릭이 이것을 해낸 것이다.
단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물론, 그 때문에 다이어 울프를 제공했던 길리티가 제 자식들이 떼죽음을 당한다며 길길이 날뛰기도 했지만.
오거스틴이 차후에 불사조의 알을 구해주겠다는 말로 꼬드겼으니 문제는 없었다.
더군다나.
오거스틴을 들뜨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수정구도 정확하게 보고 있었지, 아마?’
분명 협곡 곳곳에 보이지 않게끔 설치해둔 ‘박쥐의 눈’의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이것만으로도 이미 엘릭은 녹야의 전승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못해 아주 넘쳐 흐르는 자격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그렇게 오거스틴이 무너진 협곡에 다다랐을 때쯤.
“호오.”
그는 어느새 절벽을 전부 타고 올라와 끄트머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엘릭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꾀죄죄한 몰골이 되어 있었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눈빛이 아주 매서웠다.
‘흘흘. 그놈, 눈빛이 참 날 잡아먹고도 남겠는걸.’
다른 학파에서야 도제 교육의 중요성 때문에 사제지간에 예의를 철저하게 따지니, 절대 제자가 스승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지만.
녹야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죽음의 위험으로 내모는 경우가 워낙에 많다 보니, 오히려 저런 눈빛을 보이는 게 수련이 제대로 먹혔다는 증거처럼 여겨져 뿌듯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엘릭의 질문은 더더욱 오거스틴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으니.
“…다음 시험은 뭡니까?”
당연히 여기가 끝이 아닐 거라고 여기는 엘릭의 태도에서.
오거스틴은 입가가 찢어지려는 걸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 * *
바로 이어지는 3단계와 4단계 시험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다이어 울프보다 더한 마수(魔獸)들이 대거 쏟아지는 공터에서 마지막까지 생존하고, 그 안에 마력 순환법을 완전히 완성하는 것.
하지만 이미 강체술을 통해 감각이 벼려질 대로 벼려진 엘릭으로서는 그리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었고.
이틀이 지났을 때는 이미 마지막인 5단계에 다다라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