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청연의 미궁
“벌… 모세수?”
순간, 오거스틴은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여태껏 엘릭이 제대로 된 연단술을 보여주고 있어 잔뜩 기대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효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으니까!
“엥? 벌모세수라면, 그거 인위적으로 마나 로드에서 노폐물과 탁기가 빠져나가게 하는 방법 아니오?”
길리티는 오거스틴 덕분에 동방에 대해서 얼추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벌모세수는 뛰어난 내공을 지닌 고수가 직접 나서거나, 극한의 효율을 자랑하는 환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는바.
그런데 엘릭은 오로지 기초로 주어진 재료만 활용해서 이를 해내고 있었다.
“이 늙은이도… 잘 모르겠군. 허허! 연단술의 기초나 알까 했건만, 이래서야 내가 저 아이를 완전히 노다지로 안내한 셈이 아닌가?”
대체 저 아이 때문에 얼마나 더 놀라야 하는 건지.
‘계속 이래서야 심정지가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허허!’
세상의 모든 이적을 거의 다 보아왔다고 자부했던 그로서도 엘릭이란 존재는 참 수수께끼 투성이었다.
오거스틴은 이제 그 때문에 더 놀라지 않겠노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게 얼마나 더 잘 이뤄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네에게 했던 말, 한 가지를 정정해야겠군.”
“뭘 말이우?”
“5단계 중에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물었었지?”
“3단계라 하지 않았수? 설마…?”
“그래. 저 아이라면 충분히 5단계까지도 가능하지 않겠나?”
“허!”
길리티는 기가 찬다면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오거스틴의 예상이 마냥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여기서 마나 로드를 바로 잡고, 마기를 깨우치며 호흡법까지 완전히 깨달아 간다면…?
정말 오거스틴의 말마따나 불가능한 것도 아닐 테니까.
‘실제로 강체술로 보이는 괴상한 체술을 보이기도 했었고. 대체 저 꼬마 놈, 정체가 뭐야?’
길리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오거스틴은 강렬한 눈을 하고서 엘릭이 하는 행동을 계속 지켜보았다.
수정구 속의 엘릭은 계속 노폐물을 배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가량 지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엘릭의 눈에 어딘지 모르게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부러졌던 팔이며 지쳤던 몸까지 거의 회복되어 있었다.
* * *
그 뒤로.
협곡에서 보이는 엘릭의 생활은 일정한 루틴(Routine)을 따라 이뤄졌다.
오전 7시가 되면 칼같이 일어나 전날 밤에 미리 훈제 처리해둔 다이어 울프의 고기로 열량을 채우고, 3시간 정도 강체술 훈련에 몰두했다.
호흡에 집중하고, 몸을 풀고, 마력을 돌리면서 최대한 신체의 변화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그 뒤로는 오후 4시가 될 때까지 미궁 탐색에 집중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구조도를 하루라도 빨리 파악해둬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곳의 구조… 만약 진궁 때와 같은 방식이라면, 마력의 순환로가 분명해.’
환단을 섭취하기 시작한 이후로, 엘릭은 아주 조금씩 마력을 되찾고 있었다.
물론, 미궁에 빠지기 전에 가졌던 용해율에 비하면 아직도 극소량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마력을 쓸 수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아주 컸다.
그리고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고, 효율을 뽑아내느냐에 따라서 차이는 훨씬 벌어졌다.
엘릭이 주목하게 된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순환로.
이미 청연의 진궁에서 얻어낸 아이디어로 마력의 효율을 크게 개선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보다 상위 호환이라는 청연의 미궁을 접목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엘릭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시련을 통과할 중요한 열쇠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메피스토의 말이 정말 맞는다면, 녹야의 마투술은 분명히 마력 순환에 근간을 두고 있을 테니까. 시련의 목적이 입문자로 하여금 녹야의 기술을 익히게 하고 시험하는 것이라면, 이게 확실해.’
그래서 미궁 탐색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탐색이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곳곳에 다이어 울프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하나같이 전부 며칠은 족히 굶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한두 마리 정도였지만, 미궁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다이어 울프의 개체 수도 계속 늘어난단 말이지.’
그리고 그런 녀석들과 부딪칠 때마다, 엘릭은 항상 크게 다쳐야만 했다.
마력이 아무리 꾸준하게 돌아온다고 해도, 다이어 울프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늑대는 원래 무리를 이루는 동물.
한 마리 보다는 두 마리가, 두 마리보단 세 마리가 더 위험했다. 개체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다양한 전술을 펼칠 수 있으니 엘릭이 감당해야 할 난이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덕분에 강체술의 성취는 이전에 비해 훨씬 빨라지고 있었으니.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마투술의 마력 순환도 얼추 익숙해지고 있었다.
‘역시 실전만이 답인 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정말이지 취향이 아닌데 말이지.
엘릭은 거친 싸움을 겪고 나면 항상 그렇게 쓴웃음을 짓곤 했다.
여하튼.
그렇게 아침에 목표로 잡은 구획까지 탐색이 끝나고 나면, 해가 지기 전에 곧장 근거지로 돌아왔다.
밤이 되면 너무 위험해지는 데다가, 몸도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해둬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때부터는 몸을 재정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치 신나게 사용한 마도구를 이따금 어디 망가진 곳이 없나 확인하며 내부 청소도 하고 코드도 정비하는 것처럼.
엘릭은 아낙수나문의 화초를 빻아 만든 환단을 차례로 삼키면서 벌모세수를 진행했다.
『인간이고 마족이고 간에 생명을 타고난 존재라면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서 마나 로드에 노폐물이 쌓이게 된다. 그것이 계속 쌓이다 보면 혈이 막히고, 맥이 닫히지. 그럼 잠재력이나 가능성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고.』
늦은 나이에 마도에 입문한 인간일수록 성취가 느린 것도 전부 그 때문이다. 메피스토는 그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벌모세수를 통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체내에서 노폐물을 배출시켜 혈을 뚫고, 맥을 연다. 그때부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져. 무엇이든지 수용 가능해지거든. 아주 큰 그릇을 가지게 되는 셈이랄까.』
엘릭은 지난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도에 기웃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입문하지 못했다.
거기다 절맥증까지 앓았으니,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연을 통해 절맥증을 치료했어도, 혈과 맥에 그동안 남은 노폐물이 이미 단단한 제방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모세수를 통해 이것을 청소해줄 수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아낙수나문의 화초는 그런 둑을 강제로 허문다. 마기로 녹이고, 마력으로 뚫어버리는 거지. 하지만 현재의 녹야는 그런 걸 전혀 모르는 것 같더군?』
메피스토는 지금쯤 경악하고 있을 녹야의 전승자에게 콧방귀를 꼈다.
『여하튼 너는 그렇게 깨끗하게 만들어진 그릇을 가지고, 강체술과 마투술이라는 새로운 내용물을 담게 되는 것이니… 아예 새롭게 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대체 이놈은 왜 이렇게 기연 복도 많은 걸까. 메피스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투술은 마력을 순환시키고, 강체술은 이것을 방출시킨다. 안과 밖, 두 가지를 동시에 완전히 갖추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메피스토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완전히 나가게 될 때. 너는 분명히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전에는 단순히 마법만 주구장창 쓸 줄 아는 샌님이었다면.
그때는 마법뿐만 아니라 싸울 줄도 아는 투사(鬪士)가 되어 있을 테니까.
* * *
메피스토는 그렇게 호기롭게 말했지만.
내심 걸리는 점도 있었다.
『…뭐지? 왜 아무 변화도 없는 거지? 분명히 마기가 들어간 흔적은 있는데?』
메피스토는 인상을 구기면서 손끝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그가 원했던 대로 엘릭의 성장은 순조롭게 이뤄지는 중이었다.
내외(內外)의 발전을 동시 끌어낼 뿐만 아니라, 환단 속에 섞인 마기를 통해 인장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발전하는 인장이 딱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냉혹의 인장.
일전에 5성이었던 인장의 모습에 다시 추가로 새로운 모습이 더해졌던 것이다.
완전한 6성이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환단을 꾸준히 삼켜준다면 머지않아 달성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원죄의 인장에는 여태 아무 변화가 없었으니….
『혹시 마기를 냉혹의 인장에만 축적하는 건가? 하지만 거기까지 알아내려면, 인장을 완전히 분석해야 할 텐데? 그건 아닐 테고. 젠장!』
아무리 엘릭이 천재라고 해도, 인장의 구조를 파악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인간의 마도 지식으로 손을 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해냈다면 원죄의 인장에 걸린 락(Lock)도 진즉에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섭취한 마기를 냉혹의 인장에만 골라서 쏙 보낸다는 게 영 말도 안 될 텐데?
메피스토는 차마 그 이유도 묻지 못하고, 혼자서 관자놀이를 쥐어뜯으면서 고민에 잠겨야 했다.
혹시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게 있나 싶어서.
“왜 그래요, 메피?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엘릭은 그런 메피스토의 좌절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면서 그 옆을 지나쳤다.
『으, 으응? 아니다! 아무것도!』
“그럼 됐구요. 슬슬 나갈 거니까, 같이 가실 거면 나오세요.”
『아, 알았도다.』
메피스토는 여느 아침때처럼 강체술 훈련을 끝내고, 10시가 되자마자 칼같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엘릭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발걸음에는 힘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흐흐! 계속 그렇게 혼자서 전전긍긍해보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전혀 없으니.’
엘릭은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메피스토가 놓친 점이 있다면, 녹야의 마력 순환 방식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는 것.
그리고 엘릭에게는 이것을 충분히 보조해 줄 만한 수단인 심안이 있다는 점이었다.
엘릭은 매일 밤 환단을 먹고, 파악한 미궁의 구조도를 바탕으로 마력을 순환시키면서 체내를 샅샅이 살폈다.
마력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 어떤 위치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신체와 마력 간의 관계를 확실하게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체와 마나 로드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지니게 되었으니.
개중에는 마력과 마기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인장으로 연결되는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인장의 트리거와 프로세스는 전혀 알아낸 바가 없었지만, 엘릭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기가 쓸데없이 원죄의 인장으로 가지 않도록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게 가능했으니.
때문에 원죄의 인장을 성장시켜 독립성을 얻고자 했던 메피스토로서는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러니까, 어? 사람이 마음을 착하게 먹고 살아야지, 어? 그냥 좋은 의도로 가르쳐주기만 했으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줬겠냐고?’
엘릭으로서는 트리거도 모르는 원죄의 인장보다는 냉혹의 인장을 발달시키는 게 훨씬 나았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타박, 타박-
엘릭은 비 맞은 대형견마냥 축 처진 메피스토가 잘 따라오는 걸 확인하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면서 미궁 탐색을 개시했다.
오늘은 평상시보다 훨씬 깊숙하게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미궁 탐색은 지금까지 70%는 해냈어. 하지만 남은 30%에는 다이어 울프 무리의 본진이 있을 게 분명해.’
최근 들어 미궁 탐색은 많이 더뎌진 상태였다.
가는 길목마다 다이어 울프가 무리를 짓고 나타나 방해를 일삼아서였다.
‘그것들이 계속 방해를 하는 한, 미궁 탐색은 실패한다. 우선 그놈들부터 전부 퇴치를 해야 해.’
강체술과 마투술도 이제 어느 정도 ‘숙달’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몸에 익은 상태.
마력도 쓸만한 정도는 되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역으로 내가 다이어 울프를 사냥한다.’
사냥감에서 사냥꾼이 되는 것이다.
3일 안으로 다이어 울프의 본진을 찾아 우두머리를 잡는 것.
그래서 녹야의 완전한 마력 순환 방식을 터득하는 것.
그것이 엘릭의 목표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