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청연의 미궁
츠츠츠-
엘릭은 손으로 붙잡고 있었던 고드름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기도를 관통했나?’
넘어진 척하면서 녀석이 위에서 덮치도록 유도하고, 미리 심안으로 읽은 결을 찌르려던 계획.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었더라면 자신이 도리어 당했겠지만.
어차피 계속 이대로 쫓겨봤자 죽는 건 똑같으니, 이판사판으로 시도해 본 작전이 유효했던 모양이었다.
힘이 빠진 다이어 울프는 엘릭의 가슴팍에다 머리를 묻은 상태.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얼마나 덩치가 큰지 더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으윽!”
엘릭은 녀석을 억지로 옆으로 밀어내면서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카악, 퉷! 무겁긴 더럽게 무겁네.”
하지만 문제는 손에 입은 상처였다.
급속도로 꽁꽁 얼린 고드름을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손으로 붙잡았으니 동상을 입고 만 것이다.
거기다 다이어 울프의 체중까지 실리면서 손아귀가 크게 찢어지기까지 했으니.
이걸 놓치면 정말 죽는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버텼던 터라, 손은 이미 온통 피투성이였다.
손목도 뼈에 무리가 간 건지, 통증이 찌릿찌릿하게 울렸지만.
엘릭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다른 한 마리가 주변을 뱅글뱅글 배회하고 있었으니까.
“…미치겠네.”
크르르르!
녀석은 이미 한 마리가 죽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졌는지 섣불리 덤빌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과 군침이 뚝뚝 흘러내리는 주둥이는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놈은 분명히 똑같은 방법으로 덤비지는 않을 거고… 그럼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건데.’
절대 완력으로는 안 된다. 지구력으로도 안 된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이라도 열심히 해둘걸.’
강체술.
이미 이론상으로는 완벽하게 복원해뒀던 기예가 이렇게 간절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마법 무장이란 편법으로 강체술을 모방하긴 했다지만.
이렇게 마력 운용이 불가능해진 상태가 되고 보니, 자신이 그동안 너무 안일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위기가 닥칠지도 모르지 않나.
어떻게든 몸을 보호할 만한 비장의 한 수는 마련해둬야 할 것 같았다.
크와앙!
그러던 그때, 여태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다이어 울프가 움직였다.
엘릭은 반사적으로 움직이려다 말고, 한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어느 생각에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잠깐.’
눈이 커졌다.
‘어차피 강체술의 주요 요체는 이미 다 알고 있잖아? 그럼 그걸 따라하면 되는 거 아냐?’
강체술은 신체를 강화하는데 가장 큰 효력을 가졌지만, 그중에는 그것을 활용한 투술(鬪術, 싸움 방법)도 담겨 있었다.
마력은 호흡으로 소량이나마 끌어들일 수 있고, 적의 약점은 심안으로 얼마든지 파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지 않을까?
숙련도는 떨어지더라도, 다이어 울프 한 마리 정도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차례로 들었다.
그리고.
파앗!
엘릭도 다이어 울프에 맞서 똑같이 앞으로 몸을 튕겼다.
수인족의 왕인 호족은 용맹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으며, 그런 특성상 그들은 자신들의 무용(武勇)을 드러내기를 절대 꺼리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자신이 언젠가 집필했다가 발표하지 않은 논문의 구절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육체가 ‘신이 아주 작게 빚은 세계’라는 세계관을 가진다. 그 속에도 자연 만물의 이치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이어 울프는 엘릭이 도망치지 않고 직접 맞선다는 것에 놀라워했지만, 곧 콧방귀를 뀌면서 무시했다.
이미 엘릭이 다른 능력이 없다는 건 확인한 상태.
그렇다면 이런 반항이 단순한 저항에 불과하다고 여긴 것이다.
대자연에 생명의 근간인 마나 스트림이 흐르듯, 육체에는 호흡이 흐르고 있음이니.
하지만 엘릭의 눈빛은 고요했다.
여태껏 늑대들에게 쫓기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신도 집중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는 고드름이 들려 있었다.
그 호흡을 어떻게 삼키고, 여기에 어떻게 의념을 집중하느냐에 따라 육체도 달라진다고 보았다.
엘릭의 시선은 분명히 다이어 울프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지만, 정신은 전부 고드름, 정확하게는 뾰족한 끝에 온통 쏠렸다.
그리고 숨을 깊게 쉬었다.
후웁, 하아…!
단 한 번의 호흡.
그런데 심안으로 그려내는 세상이 한순간 확 달라졌다.
그렇게 한 점으로 집중된 의념은 도리어 그 밑바탕에 수많은 무의식을 그려내게 된다. 호족은 바로 그중 하나를 ‘본능적으로’ 선택하고, ‘직감적으로’ 움직인다.
심안은 여전히 많은 결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엘릭은 한순간 그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탁!
그래서 그 결을 따라 발을 밟았다.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발목에 힘이 바짝 들어가면서 몸이 크게 회전했다.
여기서 다이어 울프가 어떻게 달려들지 그 궤적은 알 수 없었다.
다리를 노릴 수도, 옆구리를 물 수도, 혹은 뒤로 크게 원호를 그려서 노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엘릭은 별다른 예상 없이 그저 ‘직감적으로’만 움직였다.
그러자 아주 신기하게 다이어 울프의 주둥이가 그가 있던 자리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훤히 드러나는 녀석의 좌측 목덜미.
다이어 울프는 엘릭이 이렇게 쉽게 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고.
‘지금!’
엘릭은 호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오른손에 잡고 있던 고드름을 그대로 다이어 울프의 옆쪽 목덜미에다 꽂았다.
호흡과 직감.
그 둘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빚어내는 싸움 방식이 바로 호족의 투술(鬪術, 싸움 방식)이었다.
퍼억!
케케켕!
‘이런!’
하지만 정면에서 찌른 게 아니라 그런 건지, 고드름은 녀석의 무게를 당해내지 못하고 도중에 뚝 부러지고 말았다.
피가 튀었다.
다이어 울프는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내뱉으면서도, 도중에 방향을 꺾어 다시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엘릭을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직감적으로!’
엘릭은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도 여전히 당황하는 기색 없이 몸을 반 보 뒤로 물러났다가, 왼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계획도, 이유도 없었다.
그냥 그게 맞다고 여겨서였다.
콰직!
당연히 이런 호기를 놓칠 리 없는 다이어 울프는 바로 그런 왼팔을 세게 깨물었고.
엘릭은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고통에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어느새 역수로 쥔 고드름을 그대로 녀석의 눈깔에다 세게 박았다.
크아아앙!
다이어 울프는 아가리를 다시 벌리면서 뒤로 엉거주춤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엘릭은 더더욱 깊숙하게 왼손을 녀석의 아가리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 다음, 고드름을 마구잡이로 찍어댔다.
퍽!
퍽!
퍼억!
고드름이 몇 번이나 녀석의 눈과 안면을 있는 대로 찍어댔다.
그때마다 피가 쏟아지고, 살점이 튀었다. 고드름도 몇 번씩이나 부서졌지만, 이내 다시 얼어붙었다.
뾰족한 끝자락에 시뻘건 핏물이 잔뜩 묻었다.
깨갱, 깨깨갱!
다이어 울프는 여기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뒤로 주춤 물러서다가.
퍼어억!
엘릭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마지막 일격에 두개골이 그대로 박살나면서 바닥에 철퍼덕 무너지고 말았다.
“헉, 헉, 헉…!”
엘릭도 똑같이 그 위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왼팔은 팔꿈치 아래가 완전히 넝마가 되다시피 하고, 그나마 성한 오른팔도 고드름을 억지로 쓰면서 손아귀가 다 찢어진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아파하기는커녕 실실 웃는 모습이, 마치….
『미… 친놈이로군.』
가만히 엘릭이 하는 꼴을 지켜보던 메피스토는 그렇게 정의했다.
원래 정상이 아닌 줄 알았지만, 갈수록 더 정상이 아니었다.
『그새 ‘본성의 상(像)’이라도 깨달은 건가? 수인이야 원래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야생의 비루한 것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인간이 되어서?』
심안을 열었다고 해도, 감각을 예민하게 갈고 닦아 ‘본능’과 ‘직감’의 영역을 뛰어넘지 않으면 저러기가 어려울 텐데.
메피스토는 자신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의문을 던졌지만.
『아니군. 저놈이면 가능할 수도 있겠군.』
곧 아주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엘릭이니까.
미친놈은 평균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 그게 메피스토가 진즉에 내렸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거스틴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허! 허허! 역시 다르구나, 달라. 그냥 재주껏 피해 달아날 줄 알았는데. 하루 새에 두 마리를 전부 다 잡을 줄이야.]
오거스틴의 칭찬을 들으면서 메피스토가 히죽 웃었다.
『저 영감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을 이리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고 좋다고 웃는 꼴이라니. 너 혹시 저 노인에게 잘못한 거 있는 거 아니냐?』
엘릭은 대답할 기력도 없다는 듯이 이쪽으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대로 계속 몸을 놔둔다면 진짜 이튿날부터 위험해지겠지. 원래는 네가 미궁을 탐색하면서 직접 알아내야 하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만큼 높은 성과를 이뤘으니 보상으로 힌트를 하나 주마.]
오거스틴의 말을 듣는 내내.
엘릭의 얼굴에는 온갖 짜증이 어려 있었다.
[절벽을 보면 응달이 진 곳에 이끼가 무성하게 껴 있는 게 보일 게다. 그걸 유심히 잘 살펴보려무나.]
오거스틴의 말은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풀어준다거나, 난이도를 낮춰준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네.”
엘릭은 이곳을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말겠다며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왼팔을 바로 맞추고, 빙결 마법을 걸었다.
일단 출혈은 막아야 했으니까.
물론, 이런다고 해서 낫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응급처치는 될 터였다.
“개 같은 노인네.”
엘릭은 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나면서 오거스틴을 욕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에서 열불이 날 것 같았다.
물론, 오거스틴에게 들으라며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협곡이 좁아서 그런지 메아리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사기꾼, 치매 환자, 인성 파탄자, 메피스토 같은 노인네…!”
『거기에 본 왕은 왜 들어가는 것이냐!』
당연히 메피스토의 항의는 듣지 않았다.
“으아아! 열 받아, 열 받아, 정말 열 받아아아!”
하지만 정작 그를 더 열 받는 점은 오거스틴의 말을 전혀 듣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서는 그가 던져준 떡밥을 덥썩 받아먹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대체 이끼에 뭐가 있다는 거야!”
높다란 절벽을 따라, 톡 튀어나온 돌부리 아랫부분에는 이끼가 잔뜩 껴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를 알 수 없었다.
이슬이 잔뜩 껴있는 걸 보니 식수대용으로 쓸 수는 있겠지만, 이걸로 대체 상처를 어떻게 치료하라는 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약빨 잘 듣는 약초라도 되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눈살을 좁혔다.
‘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문제는 그가 여태 수강한 강의 중에는 약초학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원소학부와 마도의학부는 엄연히 다른 학부였으니까.
그래서 일일이 이끼를 종류별로 뽑아서 실험이라도 해봐야 하나 싶었는데.
『음? 이것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갑자기 메피스토가 놀란 눈으로 이끼를 매만졌다.
-왜요? 아는 겁니까?
엘릭은 당장 전음을 쓸 만큼 마력을 모을 수가 없어 허공에다 글자를 휘적였다.
『‘아낙수나문의 화초’라는 것이다.』
-아, 뭐요?
『아낙수나문의 화초. 아마 잘 모를 것이다. 마기를 잡아먹고 자라는 마계 생물이니까. 인간들에게는 거의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이게 이렇게 군락을 이룰 정도로 많이 자랄 수가 있나?』
메피스토는 응달을 따라 무성하게 자란 까만 이끼를 보면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엘릭의 귓가에는 딱 한 가지 문장만 맴돌 뿐이었다.
마기를 먹고 자란다!
-마기가 양분이라면, 그럼 마기나 마력도 품고 있겠네요?
『흥! 그럴 리가.』
-어? 그럼 없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순도 높은 마기가 잔뜩 담겨 있어서 문제지.』
순간, 엘릭은 아픔도 잊고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 말뜻은 하나.
이 많은 이끼가 전부 영약이라는 것!
‘심봤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