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청연의 미궁
“이놈은 잘 떨어지고 있으려나? 후후!”
오거스틴이 뒷짐을 쥐며 살벌하기 짝이 없는 낭떠러지 아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이쿠야!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그새 사고를 치셨네. 이래도 되는 거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오거스틴이 고개를 돌렸다.
오거스틴보다 조금 어린 연배로 보이는 노인.
다만, 그의 행색이 아주 특이했다.
웬만한 집채보다도 더 큰 크기를 자랑하는 백호의 목덜미 위에 올라타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좌우 어깨에는 대륙 남단에서는 길조로 여겨진다는 쌍두독수리와 동방에서도 아주 귀한 보라매 등, 서로 다른 새들이 올라타 있었고.
목에는 코끼리도 한입에 집어삼킨다는 보아뱀이, 머리 위에는 갈색 털의 족제비가 누워 있었다.
‘야수왕’ 길리티 텐즈.
한때, 제국을 들썩하게 만들었던 자유혁명군 간부 출신의 현상수배범이었지만, 지금은 네레스타 가의 빈객이자 원로로 있는 존재였다.
오거스틴에게는 구명의 은혜가 있어서 호형호제를 하는 절친한 관계이기도 했다.
“자네 왔는가?”
“아니,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요? 듣기로는 본격적으로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지 반년도 안 되는 생초짜라더만!”
“그전부터 다져왔다는 소문도 있긴 하지.”
“그래도 제대로 된 스승이 없었던 건 사실이지!”
길리티는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거스틴이 ‘드디어 녹야의 후계자를 찾았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때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거스틴이 항상 저렇게 호들갑을 떨 때면 사건 사고가 벌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바.
그래서 노파심에 온 것인데, 아무래도 늦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거스틴은 여전히 뒷짐을 쥔 채로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흥! 말하지 않았나. 이 늙은이가 드디어 후계를 찾았노라고. 이 정도 시련으로 당할 아이가 아니야.”
“퍽이나.”
“아니, 정말이라니까?”
“그 말 벌써 몇 번째인지 아시우? 대충 기억하기로도 열댓 번은 될 거요. 일 년 전이었나, 그때도 좋은 인재 찾았다면서 여기서 떨어뜨렸다가 도중에 머리부터 떨어져서 하반신이 불구가 되지 않았소! 그거 때문에 치료해주느라 나나 가주가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데!”
“…그, 그거야 재수 없게 바로 근처에 돌부리가 튀어나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잖나.”
“그 전에 오 년 전이었나, 육 년 전이었나 쌍둥이 데려와서는 떨어뜨렸다가…!”
“그만하게! 그때와 지금은 정말 다르다니까!”
오거스틴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크게 쳤다.
여전히 길리티는 영 못 미덥다는 얼굴이었지만.
“자네는 좀 전에 부탁했던 대로 아래에다 다이어 울프들만 풀어주게.”
“사람 고기 맛 들이면 큰일 나는데….”
“아, 그럴 일 없다니까 정말로! 못 믿겠으면 아래를 보면 되잖나!”
길리티는 끝까지 큰소리를 뻥뻥 쳐대는 오거스틴의 호언장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절벽 끄트머리를 굽어다 봤다.
“아무것도 안 보이오만? 벌써 피떡이 된 거유?”
“거기 말고! 바로 아래! 절벽 쪽을 봐야지!”
“거기에 사람 있으면 저번처럼 돌부리에 걸릴… 엥?”
길리티는 투덜거리다 말고 도중에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조금 먼 곳. 절벽에서부터 고드름이 아주 길쭉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끝에는 한 청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정말 살아 있잖아?”
청년은 위쪽을 슬쩍 보더니, 안 되겠다 여겼던지 아래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극소량이지만, 마나 스트림이 조금씩 딸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허! 메르빙거란 말은 들었지만, 고놈 참 물건일세.”
길리티의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살짝 묻어났다.
저만한 인재를 가르치는 건 사실 모든 마법사가 가질 법한 소망 중 하나였으니까.
“미궁, 저놈은 몇 단계나 버틸 것 같소?”
“3단계.”
“허미! 그렇게나?”
청연의 미궁(迷宮).
녹야가 자랑하는 수련 장소로, 총 5단계에 걸쳐 입궁자를 시험한다.
청연의 진궁도 바로 이곳의 기본 골자만 가져와 만들어질 정도로 대단한 내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오거스틴이나 길리티 쯤 되면 그냥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끝날 장소일 테지만.
그래도 초보자들-물론, 이들의 기준에서-에게는 역량을 기르는데 이만한 곳이 없었다.
길리티가 ‘수재’라며 자랑하던 제자도 이곳에 들어갔다가 2단계에서 빈사 상태로 발견된 것을 감안한다면, 그만큼 극악의 난이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오거스틴의 얼굴에는 깊은 믿음이 걸려 있었다.
“두고 보게. 저놈은 우리 학파가 천년 넘게 간직해야 했던 비원(悲願)을 이뤄줄 동량이 틀림없으니까.”
오거스틴의 주름진 눈동자에는 짙은 신뢰가 맺혀 있었다.
* * *
“여기서는… 안 되겠죠?”
『될 것 같으면 해보고. 떨어져봤자 아픈 건 네놈이지, 본 왕은 아니지 않느냐.』
“젠장.”
엘릭은 절벽에서부터 직각으로 단단히 맺힌 고드름 위에 올라서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다시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생각은 접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모를까, 대기 중 마나만 겨우 끌어올 수 있는 지금 상태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날개 녹은 이카루스 꼴밖에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엘릭은 아래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에 얼음 계단을 천천히 만들어내면서 하강을 시도했다.
오거스틴 옆에 못 보던 다른 노인이 나타난 걸 얼핏 본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일단 이 절벽에서 탈출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겨우겨우 땅의 표면에 발이 닿았을 때,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참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으…! 내가 다시 절벽으로 떨어지면 사람이 아니다.”
가문의 안가로 가기 위해 크레바스 아래로 뛰어내린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자의였다.
지금은 타의였고.
그 차이는 아주 컸다.
그렇게 숨을 두어 번 고르고 나니, 엘릭은 다시 평온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주변 지형도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여기도 청연의 진궁인지 뭔지 하는 곳처럼 안개가 심한데. 뭐가 좀 보이느냐?』
“잠시만요.”
다행히 심안은 마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력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긴 해도, 필수는 아니었다.
거기다 엘릭은 이미 청연의 진궁의 해를 찾은 적이 있었던바.
다행히 이곳은 그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미로… 같은데요.”
『미로? 그건 진궁도 그렇지 않았나?』
“아뇨. 조금 달라요. 그건 그냥 여러 마법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환영만 그려냈다면, 여기는 그냥 지형 구조 자체가 미로에요. 엿 됐네, 이거.”
절벽은 엘릭이 떨어진 곳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은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덕분에 시야가 닿는 곳은 온통 좁고 가파른 협곡과 그 사이사이를 잇는 잔도(棧道, 벼랑 사이에 난 길)뿐.
문제는 그마저도 안개가 자욱하게 껴있어서 시야를 분간하기 힘들고, 얼마나 황량한지 풀 한 포기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절벽 곳곳, 응달이 진 곳에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었지만, 식량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식수나 식량도 없는 곳.
대체 여기서 뭘 하라는 걸까?
‘황도나 근방에 이런 지형을 가진 곳이 있었나? 왜 기억에 없지?’
여기가 어딘지 짐작이라도 간다면 길이라도 가늠해보겠건만.
아카데미에서 A+를 받았던 ‘대륙지리학’의 지식을 아무리 들춰봐도, 여기가 어딘지 당최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결국 엘릭은 생각을 중단하고,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려했다.
우선은 마력부터 되찾아야 할 것 같은데….
그 순간.
[역시 기대했던 대로 입관하는 데는 별 무리 없이 성공한 모양이구나.]
위쪽에서 오거스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고개를 위로 들렸다.
[역시 이 늙은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진궁에 있을 때는 왜 들리지 않은 척 했누.]
“저 죽을 뻔했습니다.”
[예서 계속 지켜보고 있단다.]
지켜보고 있으니 죽을 걱정은 하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감시하고 있으니 그냥 시험에나 집중하라는 건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이곳은 청연의 미궁이라 한단다.]
“미궁….”
[이름처럼 청연의 진궁은 바로 이곳에서 나왔지. 정확하게는 네가 지금 입관한 장소의 열화판이라 보면 될 것이다.]
순간, 엘릭의 눈빛이 달라졌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그가 도용한 ‘냉혹의 진궁’을 더 크게 발전시킬 수도 있단 뜻이기도 했다.
[허허! 역시 눈빛부터 달라지는군. 그곳에서 너는 지금부터 백일 간 생존을 해야 한다.]
『뭐? 백 일 동안 이 갑갑한 곳에 있으라고? 미친…!』
메피스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위쪽을 쳐다봤지만, 아쉽게도 오거스틴은 그를 볼 수 없었다.
“여기는 식수도 식량도 없습니다만?”
[그건 알아서 구해야지. 그것까지 이 늙은이가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으냐.]
『얼씨구?』
[그리고 그동안 심심하지 말라고, 다이어 울프들을 차례로 몇 마리씩 풀어둘 생각이란다.]
『절씨구?』
엘릭도 메피스토처럼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다이어 울프는 이름만 늑대일 뿐이지, 실제로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다른 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납고, 거칠다. 또한, 일반 늑대보다 덩치는 3배나 되는 주제에 무리 생활까지 해서 어디서는 몬스터로 분류하기도 했다.
[1단계 시험을 통과하는 법은 총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기존에 말한 대로 백일 간 생존하는 것.
두 번째는 투입되는 다이어 울프들을 조련하거나 전부 사냥해서 대장까지 잡는 것.
세 번째는.
[…출구로 빠져나오는 것이다만. 허허. 그리 쉽지는 않겠지?]
엘릭은 오거스틴이 말한 ‘출구’가 바로 위쪽, 하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할지는 네가 결정하면 된다. 그럼 기대하고 있으마.]
오거스틴의 목소리는 거기서 끝났다.
그리고.
크르르-
크릉, 크르릉!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꺾인 모퉁이에서부터 다이어 울프 두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두 눈은 흉흉하게 빛나고, 입가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딱 봐도 며칠은 굶은 게 분명한 녀석들.
엘릭은 와락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지형 탐색이나 계획을 짤 시간이라도 줄 것이지, 이렇게 다짜고짜 넣어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난 그냥 가르쳐주는 마법들이나 넙죽넙죽 받아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구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고!’
이미 오토 한이 줬던 안배에서 실컷 굴렀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편하게 가나 싶었더니.
아무래도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크와앙!
다이어 울프가 땅을 거세게 박찼다. 뒤따라 다른 놈도 지지 않겠다며 달려왔다.
“젠장!”
엘릭은 뒤로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오히려 사냥감처럼 보여 날 물어달라는 꼴밖에 되지 않을 테지만, 허세는 어디까지나 탐색전을 벌일 때나 통용되는 일이었다.
저처럼 허기로 눈이 뒤집힌 녀석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무기! 무기는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엘릭은 오거스틴에게 들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것도 알아서 해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 * *
“헐? 시작한 지 뭐 얼마나 됐다고 벌써 두 마리나 집어넣는 거요? 저러다 진짜 죽소!”
다이어 울프를 직접 길렀기에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길리티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다이어 울프를 투입하는 건 하루가 지난 뒤.
그동안 입관자는 지형을 탐색하고, 곳곳에 숨겨진 ‘안식처’를 찾아 식량을 비축하고 무기를 만들어둬야 했다.
그러고 나서 밀어 넣는 다이어 울프도 한 마리였고.
그런데 엘릭의 시험은 기존 난이도와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거스틴은 아무 대답 없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엘릭의 한계를 쥐어짜 그가 어디까지 기량을 보일지 확인해보겠다는 듯.
그리고 그때.
“어, 어어?”
수정구를 보던 길리티의 눈이 흔들렸다.
엘릭이 갑자기 잘 달리다 말고 도중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호기를 놓칠새라, 앞서 달리던 다이어 울프가 풀쩍 뛰어 엘릭을 덮쳤으니!
저대로 있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일어서는데.
퍽!
“…엥?”
길리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엘릭을 덮친 다이어 울프의 뒷덜미에 시퍼런 얼음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으니까.
비록 강도가 단단하지 못한 나머지 금세 바스러지고 말았지만.
다이어 울프가 피를 게워내면서 옆으로 쓰러지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아무래도 넘어진 ‘척’을 한 건, 저렇게 다이어 울프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저런 위급한 상황에 저만한 임기응변이라니.
길리티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오거스틴을 돌아봤고.
“말했지? 저놈은 다르다고.”
오거스틴은 재밌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