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청연의 미궁
엘릭이 눈을 떴을 때.
“일어났느냐?”
오거스틴이 실실 웃는 낯을 하면서 바로 눈앞에 있었다.
엘릭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데.
휘이잉!
갑자기 아래에서부터 찬 바람이 불어 왔다.
이게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는데… 끝도 없이 깊숙하게 내려앉은 절벽이 보였다.
낭떠러지 위에 있었던 것이다!
엘릭은 한순간 말문이 막힌 나머지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다행히 오거스틴이 재빨리 멱살을 잡아당겨 주어 발을 헛디디지 않을 수 있었지만.
어느새 옷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버린 뒤였다.
“조심하려무나. 여기서 죽어서야 9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찾은 제자감을 잃게 되지 않겠느냐.”
“….”
아무래도 이 괴팍한 노인네는 엘릭이 다치는 것보다 제자감을 잃는다는 게 더 우려되는 모양이었다.
엘릭은 한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내가 번지수 잘못 짚은 건 아니겠지?’
네레스타 가의 대스승이라고 하기에 빨대를 꽂을 생각으로 따라온 것이긴 하다만,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그릇(?)을 지닌 모양이었다.
『네놈이 기절했을 때부터 본 왕이 저 노인네를 계속 지켜보고 나서 내린 결론은 말이다.』
[…?]
그리고 그런 엘릭의 생각에 맞장구라도 치려는 듯, 메피스토가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저 노인네는 절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다.』
[…저 나이쯤 되고, 일가도 이룬 사람이면 괴팍하지 않은 사람이 잘 없지 않을까요?]
『그것을 떠나 그냥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세상에 어느 누가 기절한 제자를 데리고 절벽에 온단 거냐.』
[….]
『하여간 하루 왼종일 골방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해서 그런가? 예나 지금이나 나이 먹은 마법사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자들이 없군. 그리고.』
[…?]
『그리고 그 노인네, 뭔가 이상하다.』
[…또 뭘요?]
『네가 잠든 동안에 몸 여기저기 마구 만져대던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아주 실실 쪼개면서 말이다.』
[…!]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바짝 움츠리고 말았다.
『흐흐. 무슨 수를 쓴 것 같던데, 몸 상태나 체크 해 봐라.』
그러다 메피스토가 자신을 골려 주고자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잔뜩 노려보면서 몸을 빠르게 확인했다.
그리고 인상을 팍 일그러뜨렸다.
‘마력이 움직이질 않아!’
마정석이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마나 로드도 마찬가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절맥증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듯한 기분.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전보다도 훨씬 더 등골이 싸늘했다.
“벌써 눈치를 챘나 보구나. 타고난 감각도 예민한 모양이로고.”
“제게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엘릭이 노려봤지만, 오거스틴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훈훈하게 웃고 있었다.
“해코지를 한 것은 아니란다. 그저 잠시 혈을 몇 개 짚어 경락(經絡)의 경화(硬化)를 부른 것일 뿐.”
혈?
경락의 경화?
엘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단어들의 나열에 좀처럼 인상을 펼 수 없었다.
『혈, 경락… 전부 ‘연단술’에서 쓰이는 용어들일 텐데? 호오. 녹야가 동방에서 유래했다던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지?』
엘릭은 메피스토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겨를이 없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원래는 네 마력량과 수준만 정확하게 체크하고, 실습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저 말인즉, 오거스틴이 자신의 비밀을 파헤쳤을 수도 있단 뜻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참으로 신기한 조화들이 여럿 들어있더구나. 둥지에서 용의 기연만 얻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휘몰아쳐라】!”
그 순간, 엘릭은 숨겨뒀던 마법을 전개했다.
비록 마력은 유동할 수 없었지만, 심안에 보인 결을 이용해 대기 중의 마나를 일부 끌어올 수는 있었다.
위력은 현저히 약하겠지만… 그래도 기습을 노린다면 저 노인을 여기다 떼어놓고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호오! 아직 미세 원소는커녕 영자(靈子)도 감지 못할 것이면서 대기의 마나 스트림을 끌어들인다고…? 역시 이 늙은이가 괜찮은 재목을 고르긴 골랐구나! 으허허!”
하지만 오거스틴은 별다른 위기감 없이 기분 좋게 껄껄 웃으면서 손을 뻗고 있었다.
콰드득!
눈 섞인 소용돌이는 오거스틴을 덮치기도 전에 마력 순환이 도중에 끊어져 흩어지고 말았다.
엘릭도 마찬가지. 갑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힘에 그대로 다시 바닥에 처박혀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손’.
단 3써클에 지나지 않는 기초 마법이었지만, 그쯤 되는 사람이 사용하니 아주 무섭게 느껴졌다.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만, 그럴 필요는 없단다. 이 늙은이도 굳이 어디 가서 떠벌릴 생각은 없고.”
하지만 엘릭은 오거스틴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바랐던 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가르침이었지, 이렇게까지 자신의 모든 밑천까지 훤히 드러내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명치에 자리 잡은 데몬 쥬얼이나 인장 때문에 그러는 것 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마법사 중에 너만 그런 비밀을 품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
“이 늙은이쯤 되는 마법사라면, 어디 가서 말 못 할 비기를 한두 개쯤은 갖고 있는 법이다. 뭐, 그래도 말만 떠벌릴 게 아니라 사제지간에 신뢰는 있어야 하니, 보려무나.”
오거스틴은 왼쪽 소맷자락을 크게 들춰 어깨를 보였다.
그 순간, 엘릭은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어깨 부근에 굵은 바느질 자국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어깨와 팔의 색이 전혀 달랐다. 생김새나 피부의 결도 달랐다.
다른 팔을 이식했단 뜻이었다.
“다크 엘프의 팔이다.”
“…!”
다크 엘프.
빛이 내리쬐는 숲에서 살아간다는 엘프들과 다르게, 오로지 음울한 지하에서만 살아가고 마(魔)를 추종한다는 종족들.
분류에 따라서는 마족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혹자는 말하지. 네레스타의 숨겨진 노괴는 마나를 다루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어권을 갖고 있어 도저히 그를 공략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이제 슬슬 관 속에 누워야 할 나이가 되도록 계속 이어지니 미친 게 틀림없다고 말이다. 사실 그 비밀이 이 팔에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지.”
“….”
“타 종족의 신체 이식은 철저하게 금지된 흑마술이라는 것, 알고 있겠지? 하물며 그것이 마족이라면 더더욱 안 되고 말이다.”
“…예.”
“이 사실은 가주 놈도 모르는 이 늙은이만의 비밀 중의 비밀이다. 이만하면 어떠하냐? 너도나도 서로 약점을 알고 있는 셈이니, 이제 어느 정도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
오거스틴의 주름진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주실에서 보였던 꼬장꼬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 모습.
엘릭은 거기서 오거스틴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데.
오거스틴이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 몸을 허락 없이 만진 건 미안하다. 하지만 이 늙은이의 마음도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가르침을 주기 전에 어떻게 교육 방향을 잡을지 체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쯤 되면 엘릭도 오거스틴의 설득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허허. 이해해준다니 고맙구나.”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전 메르빙거의…!”
“나도 말했듯이 녹야를 네게 준다 해도 절대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따로 후인을 찾아 물려주든, 아니면 네 대에서 끊든 그건 신경 쓰지 않겠다. 어떠냐? 이만하면 네게도 절대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흠.”
사실 엘릭은 이보다 훨씬 좋은 조건의 기연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네레스타에 얽매일 필요 없이 뛰어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만큼 체계 있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이쪽에서 넙죽 엎드려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탐탁지 않다면, 혈을 풀고 놓아주겠다. 이 늙은이도 억지를 계속 강요할 수는 없으니.”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제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들입니다. 그래서 그게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냥 퍼주시기만 한다는 게….”
“당연히 그런 건 아니지. 나중에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면 된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건 나중에 말하마. 단,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포기해도 좋은 것이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
그제야 엘릭도 마지막 남은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저는 메르빙거의 가주입니다. 미처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주십시오.”
“하하! 당연하고말고. 허례허식이 뭐가 중요하다고.”
오거스틴은 메아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댕이 몇 번 터는 것으로 갑을 관계를 바꾸다니. 정말 실력자로다.』
물론, 메피스토의 감상평은 그냥 무시했다.
“그럼 바로 가르침에 들어가자꾸나.”
오거스틴은 보다 편해진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다.
“혹시 경락의 경화라는 것이 첫 번째 가르침과 관련 있는 것입니까?”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오거스틴이 흡족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의 맥을 짚었을 때, 아주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용, 마, 메르빙거의 것으로 보이는 것까지… 하지만 이것저것이 잡다하게 뒤엉켜 있어 당장은 성장에 있어 좋을지 모르겠다만, 그 뒤로 가면 위험해질 소지가 컸다.”
『그럴싸한 말이긴 하군. 연원이 다른 마법들이 잡다하게 엉켜봤자 추후 입마의 위험만 커지니.』
“그래서 우선 마력의 순환부터 바로 잡을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이 늙은이가 몸담은 녹야는 마력 순행에 있어서 다른 학파들보다 훨씬 큰 깊이를 갖고 있다 자부하는 편이고.”
『이 역시 옳다. 녹야는 원래 실전적이라 다양한 마법을 융화하는데 특화되어 있거든. 거기다 내공 개념을 발달시킨 동방에 뿌리를 둔다면 두말할 것도 없고… 하여간 네놈, 아무래도 스승 운이 괜찮은 것 같구나.』
엘릭은 메피스토의 부연 설명에 괜히 들뜬 기분이 들었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연을 얻게 된 셈이었지만, 그로서는 가장 필요했던 것이기도 했으니까.
거기다 ‘마력 순행에 특화’라는 말에 와닿는 게 있었다.
‘청연의 진궁이 그랬었지?’
이미 거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번 좋은 결실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가르침을 주려고 마력을 잠근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틀부터 바로 잡을 것이다.”
역시.
엘릭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고.
오거스틴은 재밌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러니.”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살아남으려무나.”
“…?”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퍽!
갑자기 오거스틴이 그를 냅다 걷어찼다.
“…어?”
엘릭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땅바닥이… 느껴지질 않았다.
“잘 다녀오거라.”
오거스틴은 마치 제자를 산책이라도 보내듯이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하고 있었다.
엘릭은 그대로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젠자아아아앙!”
그래, 어쩐지 너무 일이 쉽게 풀린다고 했어!
가주 집무실에서 깽판을 치고, 기절시키고, 갑자기 절벽 끝으로 끌고 왔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던 건데!
오거스틴이 대체 뭘 노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마력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이대로 있다간 시체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
『푸하하핫! 아무래도 네놈이 임자를 제대로 만난 모양이구나!』
메피스토는 똑같이 엘릭 옆에서 떨어지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엘릭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계속 그렇게 가만히 있을 겁니까?”
『본 왕이 네놈을 도와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냐?』
“제가 죽으면 메피도 끝이잖습니까!”
『음! 그래. 확실히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본 왕이 이런 상태를 하고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냐?』
“원죄의 인장 사용법! 그거 알면 이거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메피스토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놈이 어디서 약을 팔아?』
“쳇! 안 통하네.”
엘릭은 아깝다고 혀를 차면서 언령을 발동시켰다.
“【흘러라】!”
결이 요동치면서 엘릭의 낙하 속도를 조금씩 조절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능구렁이가 따로 없는 놈이로고.』
메피스토는 빈틈을 보였다간 코가 베이겠단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