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청연의 미궁
처음 엘릭을 봤을 때.
가이가 받은 첫인상은 아주 간단했다.
‘물건이군.’
너무 단순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성격이 무던한 편인 그로서는 최고의 찬사나 다름없는 평가였다.
처음에 엘릭을 불렀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워낙에 주변이 온통 엘릭의 이야기로 들썩이니 당대 메르빙거가 어떤 역량을 지녔는지만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청연의 진궁을 단 한 시간만에 헤쳐 나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소소한 깨달음까지 얻은 것을 확인한 순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녀석은 천재라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당장 가문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라는 장녀와도 비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야.’
그러니 가이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의 인재 수집욕은 세간에도 소문이 자자한바.
덕분에 가신이 아닌 ‘빈객’의 자격으로 가문에 상주 중인 존재만 해도 백 명이 넘었다.
그중 상당수가 마법사가 아닌 무도가나 행정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무리 육망성과 오랫동안 대척점을 이뤄왔던 메르빙거라고 해도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런 생각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션과 절친한 사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고, 타샤도 엘릭에게 흥미가 많은 눈치였다.
다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식사하는 내내 타샤가 토라진 듯한-그러면서도 이따금 살짝 째려보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야 관심에서 빚어진 태도이니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여하튼 이런 식으로 접점이 많아진다면 이쪽으로 끌어들이기가 수월해지니, 훨씬 더 많은 접점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엘릭이 던진 제안을 더 크게 만든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아이디어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후원 제도는 네레스타 가가 정치적 입지를 확장하고 빈객의 명성을 끌어올릴 때 종종 사용하는 수법.
앞으로 엘릭과 네레스타 가는 나란히 놓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에 작은 할아버님까지 더해졌으니…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는군.’
가이는 이 엉뚱하면서도 기발하기 짝이 없는 천재가 또 어떤 재미를 줄 수 있을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해졌다.
* * *
노인, 오거스틴을 보는 동안.
‘…강해! 어쩌면 가이 네레스타보다도 더!’
엘릭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켜야만 했다.
그만큼 오거스틴의 부리부리한 눈매를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살이 떨리는 것 같았으니까.
휘이이!
마정석도 떨리고, 인장도 빛무리를 뿌렸다. 당장이라도 마력이 뛰쳐나갈 듯이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어. 션에게.’
-아버지가 제일 유명하지 않냐고? 그건 그렇지. 아무래도 가주시니까. 그런데… 본 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알아. 더 큰 괴물이 계신다는 거.
-따지자면 그분이 나나 형제들한테는 첫 스승이나 다름없으셔. 첫 지도를 그분이 해주셨으니까.
아카데미에 갓 입학했을 무렵이었던가.
션이 지나가듯이 자신의 가문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원래는 가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그때만큼은 무슨 일인지 술에 잔뜩 취해서는 엘릭을 붙잡고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사연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아마 ‘인간 션’이 아닌 ‘네레스타의 삼남’에게 관심을 보이는 동기들에게 실망했던 나머지, 그동안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엘릭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는데.
그 뒤로 션은 가문의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고, 엘릭도 굳이 거기에 관해 묻지 않다 보니, 네레스타 가의 사정도 자연스레 잊고 말았다.
그러다 기억 한쪽 구석에 박혀 있던 그 날의 말이 떠올랐으니.
션은 수수께끼로 점철된 원로원주를 이렇게 불렀다.
네레스타의 모든 마법사를 가르친 대스승이자.
때로는 그들을 잔뜩 괴롭히는 꼬장꼬장한 노괴라고!
『푸흐흐. 여기도 괴물이 하나 더 있군. 혹시 복마전이라는 말, 아느냐?』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겉보기엔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실은 마귀들이 아주 득실대는 곳을 뜻하지. 여기가 딱 그런 곳인 것 같구나.』
[그럼 그 말은…?]
엘릭의 질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원로원주 님, 이곳은 가주실입니다! 이런 짓은 불경한 짓이니 이만 물러나십시오!”
가이를 지키듯이 선 시종장이 잔뜩 노기를 띠며 마력을 잔뜩 개방하고 있었으니까.
츠츠츠-
발아래에 놓인 그림자가 불길하게 일렁이면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다른 시종이며 호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차하면 지금 벽을 부수고 들어온 노인을 공격할 태세.
하지만 수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엘릭은 어쩐지 시종들과 호위병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노인은 여유롭기만 했다.
“오냐. 그건 미안하게 되었다. 이 노인네가 마음이 급해서 서두른 나머지 큰 실수를 하였다. 가주, 미안하게 되었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노인은 가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도 전혀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말만 미안하다고만 할 뿐이지, 그냥 고개만 살짝 까딱이고 시선도 여전히 엘릭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게 당연하다는 듯한 투.
그러자 시종장도 더 이상 따지지 못하고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애당초 압박이 통할 상대도 아닐뿐더러, 가주도 별달리 신경 쓰시는 투가 아닌데 자신이 계속 나서는 것도 모양이 이상했다.
“한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말했던 그대로요. 이 늙은이는 저기 있는 아이를 제자로 삼고자 이곳에 왔다오.”
“션의 옆에 있는 아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자신은 이 일과 전혀 무관하다는 듯,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짝을 가지고 있는 아이 말이오.”
노인은 자신의 눈을 마주치고도 놀란 것처럼 행동하는 엘릭을 보면서 콧방귀를 꼈다.
“저 보시오.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낯짝을 하고 있지 않소?”
가이는 난감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저 아이는 션의 친구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오?”
“메르빙거이기도 합니다.”
“저런 두꺼운 낯짝을 가질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지. 딱 봐도 알 것 같소만.”
“따지자면 당대 공작 위를 물려받은 존재입니다. 단순히 메르빙거의 자제인 게 아니라, 가주라는 것입니다. 한데, 어떻게 제자로 받아들이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마도명문의 명성이 아무리 많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일가의 가주다. 그리고 제국 내에서 단 네 명밖에 없다는 공작이다.
의전상 서열로 네레스타 가보다 더 위면 위였지, 절대 아래가 아닌 곳의 주인을 제자로 들이겠다니.
그렇다고 해서 엘릭이 그러겠노라고 허락한 것도 아니고, 저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댄다고 해서 이뤄질 일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네레스타 가가 메르빙거 가를 무시한다며 가문 간의 분쟁으로 빚어질 수도 있는 일.
그 때문에 션과 타샤 등은 물론, 시종들까지도 괜히 긴장한 얼굴이 되어 노인과 엘릭을 번갈아 볼 정도였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그런 자신의 생각을 바꿀 기미가 없는 듯 보였다.
두 눈에는 고집마저 가득 담겨 있었다.
“메르빙거의 가주, 엘릭 메르빙거가 네레스타 가의 원로원주이신 오거스틴 님을 뵙습니다.”
그때, 엘릭이 지금이 나설 타이밍이라 여기고 천천히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영 쉽지 않아 보이는 노인네인데. 뭘 어떡하려고?』
[어휴!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한심하다는 투.
메피스토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뭘?』
[호구 잡을 기회요.]
『엥?』
[상대는 네레스타 가의 대스승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마법을 배울 좋은 기회 아닙니까? 그걸 왜 놓쳐요?]
엘릭의 두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언젠가 그는 몸을 치료하고 난 뒤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길을 올바르게 인도해줄 스승이 필요하다고.
가문의 안배가 있고, 메피스토의 도움이 있다지만…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다.
어쩌면 그걸 채워줄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여긴 육망성이다만?』
[그게 뭔 상관입니까? 떡밥이 던져지면 날름 받아먹어야죠. 이건 네레스타 가에다가 빨대를 꽂다 못해 아예 밑천까지 쭉쭉 뽑아먹을 기회에요. 자존심은 그 뒤에 세워도 되는 겁니다.]
『허!』
메피스토는 기가 차다는 얼굴이 되었다.
원래 메르빙거가 원체 오랫동안 마족과 전쟁을 벌여와 가풍이 실용주의에 가깝긴 하다지만, 그래도 엘릭은 그 이상인 것 같았다.
[물론, 가문에 걸린 명망과 자존심은 어떻게든 지켜야죠. 줄다리기는 잘해야겠죠. 두고 보십쇼.]
메피스토는 지금부터 어떻게 눈앞에 있는 노인을 발가벗겨 먹을 건지 잘 지켜보라는 투로 들렸다.
어째 속마음은 이게 웬 떡이냐며 손바닥을 비비고 있지 않을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 오거스틴의 눈이 빛났다.
“호오! 이 노인네를 알고 있는 모양이지?”
“네레스타 가의 최고 어른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선친께서 떠나시기 전에 누누이 하셨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본 가에도 만약 네레스타 가의 원로원주 같으신 큰 기둥이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흥! 네 아비는 이 늙은이와 이렇다 할 인연도 없었다만?”
“명성이 워낙에 자자하시니, 귀동냥으로도 들으셨던 게 아니겠습니까?”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아주 술술 잘 굴러가는 놈이로구나. 그만큼 머리도 영민한 것 같고.”
“칭찬 감사드립니다.”
“영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만?”
“그런 제 면모가 어르신께 마음에 들었으니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나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레스타 가의 사람들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엘릭과 오거스틴의 말싸움을 기가 차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특히 엘릭에게는 혀를 내두르기까지 했다.
네레스타 가에서도 오거스틴의 괴팍한 성정을 저렇게까지 맞받아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건만.
나이도 어린 녀석이 저렇게 능구렁이처럼 술술 넘어가니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럼 내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냐?”
“어르신께서는 네레스타 가의 대스승 같은 분이라 들었습니다. 반면에 저는 메르빙거의 가주인데 어떻게 산하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게는 과분한 제안입니다. 거둬 주십시오.”
『야. 발가벗긴다면서? 그걸 왜 거절해?』
[아, 좀 가만히 계십쇼. 지금 약 치는 거 안 보입니까?]
『…음?』
[전 지금 저 노인한테 절 제자로 삼고 싶으면 알아서 명분을 만들라고 말하는 겁니다.]
『호!』
[그냥 순순히 알겠다고 하면 뭔 재미입니까. 적당히 튕겨줘야 몸값도 같이 오르죠. 저 보세요. 입질이 슬슬 올라오는 게 보이잖습니까? 흐흐.]
『역시 잔대가리 하나는….』
메피스토는 어쩐지 엘릭을 엮으러 왔다가 도리어 엮이게 생긴 오거스틴이 안 되었다는 투로 바라봤다.
어째서 자처해서 제 발로 무덤으로 걸어 들어오겠다는 건지.
그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내 배움을 가져가지 않았더냐!”
“청연의 미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아이디어를 빌린 것은 사실이지만 저 역시 미로를 빠져나오기 위해 고생하면서 우연히 얻은 것이니 그 정도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가주께서도 이미 승인해주신 사안입니다.”
가주도 봐줬는데 네가 따져서야 되겠냐는 말.
여기서 따졌다간 원로원주가 가주의 권한을 침범하는 꼴이 된다.
오거스틴은 약이 바짝 올라야만 했다.
“이이…! 그럼 본 가의 학맥만 잇지 않으면 된다, 이 말이렷다?”
“그건….”
“이 늙은이는 네레스타 가의 원로원주로 있긴 하다만, 사사로이는 ‘녹야(綠夜)’의 학맥을 잇는 수장이기도 하다. 그곳은 비인부전에 일인전승으로 이어지니 네레스타와도 무관하고, 아직 진전을 이을 후계자도 찾지 못하였으니 너로 이어진다면 괜찮지 않겠느냐?”
오거스틴의 두 눈이 부리부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녹야?’
아무리 마법계가 역사가 오래되어 그만큼 수많은 학파들이 있다지만, 웬만한 곳은 다 기억하고 있는 바.
하지만 엘릭은 난생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저 늙은이가 자신을 꾀어내려 없는 학파를 지어낸 건가 싶었지만.
『녹야… 라고? 허!』
[아는 뎁니까? 전 처음 듣는데.]
『본 왕이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 한창 머리를 아프게 했던 곳이다. 마법(魔法)이라기 보단 마투(魔鬪)에 가까웠던 곳이지.』
[마투?]
『그런 게 있다. 한데,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메피스토가 직접 기억하고 있을 정도라면 절대 작지 않다는 뜻.
‘이거 월척이잖아?’
물론,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은 채 뒤로 슬쩍 한 발을 뺐고.
“죄송합니다.”
오거스틴은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에잉! 시끄럽다. 그냥 어른이 가자고 하면 같이 가면 될 것이지, 뭐가 이렇게 재잘재잘 말이 많누!”
가뜩이나 부족한 참을성이건만.
그래도 처음으로 들이는 제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텼던 것이, 결국 한계치를 넘어버렸던 것이다.
쐐애액-
오거스틴이 빠르게 손을 뻗어왔다.
엘릭은 본능적으로 물러서다가 어느새 오거스틴이 자신의 앞까지 도착해있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빠르다!’
마법이 발동되는 마력향이나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게 정말 무도가가 아닌 마법사가 낼 수 있는 속도라고?
그런 경악이 스쳐 지나갔지만.
퍽!
어느새 목 뒤쪽으로 날아든 손날에 엘릭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오거스틴은 풀썩 주저앉은 엘릭을 한팔로 낚아채고, 메모라이즈 해뒀던 공간 전이를 사용해 원로원으로 되돌아갔다.
“푸하하! 넌 내 꺼다!”
그가 사라진 자리로, 그의 웃음소리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원로원주가 손님을 납치해서 사라지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모두가 황망해 하는 가운데.
“너, 뭐 하는 거야?”
타샤는 뒤늦게 션을 돌아봤다.
어째 션의 태도가 심드렁했다.
“뭘?”
“친구가 잡혔잖아? 안 가봐도 돼?”
“누나, 아직 엘릭을 잘 모르는구나?”
“뭐?”
션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거 엘릭이 약 친 거야. 원로원주 님이 당하신 거라고. 곧 땅을 치고 후회하실걸?”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