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네레스타 가의 초대
[인간이 맞냐니요? 그게 무슨…?]
무슨 마족 같은 인외의 존재에 손을 대기라도 했다는 걸까?
당연히 엘릭의 눈에 의문이 스칠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 않고서야 메르빙거가 아닌 인간이 이만한 격을 성취했을 리 없…!』
메피스토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도중에 그쳐서는 피식 웃었다.
『아닌가? 지난 천년 간 인간들이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겠군.』
[…?]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피스토는 대체 무슨 헛바람이 든 건지 실실 웃기 바빴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정말이렷다?』
[뭐가요?]
『이 인간이 현시대에서 강한 축에 속하긴 해도, 절대적인 강자는 아니라던 말.』
[그런 거라면 비슷한 급은 더 있긴 한데….]
이 시대는 과히 ‘괴물’들이 들끓는 세상이라 할 수 있으니.
최소한 다른 육망성만 따져도 하나하나가 네레스타 가주와 비견할 만하며, 각 가문에는 그와 비슷하거나 이상이라는 은거고수들이 있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랴?
마탑과 대척점을 이루는 사자공가 쪽은 순수한 무력만 따진다면 마탑을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고, 제국의 질서를 지키는 황실의 전력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
제국의 틀을 벗어나도 마찬가지.
자유혁명군이니, 이종 연합이니, 신교 동맹이니 하니 잘 알려지지도 않은 수많은 세력과 나라들이 도사리고 있다. 현재는 그림자 속으로 숨은 마족 진영도 빼놓을 수 없다.
『파하하! 그렇단 말이지. 어쩌면! 어쩌면 이 메피스토가 이 시대에 깨어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엘릭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나 몰래 어디서 약주라도 했어요?]
『너 같은 애송이가 뭘 알까! 수많은 맹수가 서로가 왕이 되겠다며 상대의 목덜미를 뜯을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야생을! 거기서 퍼지는 혼란과 적의를! 그리고 그들을 전부 짓밟고,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기쁨을…!』
메피스토는 하루라도 빨리 힘을 되찾아야겠다느니, 그러기 위해서는 본격적으로 너를 빨리 굴려야겠다느니, 한껏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바빴다.
하지만 메피스토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가이 네레스타가 메피스토도 ‘괜찮다’고 인정할 만큼 뛰어난 강자라는 것.
그리고 한창 호승심에 들끓고 있다는 것.
덕분에 자신의 귀는 터져 나갈 것처럼 아팠고.
‘그냥 묵언 마법 걸어버려?’
마나의 맹세를 한 게 있어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인상을 팍 찡그리는데.
“왜 그러지? 입에 잘 맞지 않았나? 주방장에게 신경 써달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무래도 따로 이야기를 해야겠군.”
가이 네레스타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엘릭을 바라봤다.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을 담담한 시선.
하지만 엘릭은 왠지 자신의 속내가 전부 꿰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맛있어서 아직도 입에 맴도는 것 같아서 그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 죄송합니다.”
“그런가? 그럼 다행이군.”
가이는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늘 잠깐 들어오는 와중에 불민한 일을 겪었었다지? 시종장에게는 따로 따끔하게 일러뒀으니 용서를 바라겠네.”
가이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엘릭은 데이지에게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가의 가주가 가진 ‘무게’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가이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중한 예의가 갖춰져 있으면서도,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쯤 되는 사람이 직접 사과를 입에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숙이고 들어왔다기보다는 외려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만이 아니야. 주변에 받쳐주는 것들이 전부 완벽해.’
이따금 보이는 시종이나 가신들은 물론, 자식들도 행동에 예의와 절도를 갖추고 있었고.
말투에는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위기가 오면 이들이 어떻게 한 몸이 되어 움직일지 불에 보듯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이것이 ‘명문가’가 가진 저력이 아닐까.
‘부럽다.’
언젠가 자신도 이만한 가문을 일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가문을 그려나가야 할 지 얼추 그림도 그려지는 것 같았다.
“너무 채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제가 마법진에 취한 나머지 실수를 한 것 같아 죄송할 뿐입니다.”
“이해해준다니 고맙네. 그리고… 둥지에 대한 발굴권을 우리에게 넘겨준다고 들었는데.”
‘이제부터 본론인가.’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션에게 그동안 너무 많은 빚을 졌으니까요. 오히려 이게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조건이라도 있나?”
엘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건까지는 아니고, 부탁 혹은 청이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뭔가?”
“이번 베럭스 학장의 사기극 때문에 황도에 많은 피해자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피해자라? 난 욕심에 눈먼 불나방들이었다고 보네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그래서?”
가이는 메피스토와 똑같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날 시험하고 있어.’
엘릭은 가이의 담담한 눈빛이 자신을 낱낱이 파악하려 한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건 그냥 단순히 아들의 친구가 어떤지를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새롭게 일어날 준비를 하는 메르빙거의 역량을 살피려는 걸까?
“그들을 구제해주셨으면 합니다.”
“기금이라도 출연해달라는 건가?”
엘릭은 한순간 가이의 눈가에 아주 잠깐 스친 실망을 놓치지 않았다.
고작 이런 걸 부탁하냐는 것이겠지.
션이나 다른 실무자에게 부탁해도 충분한 급의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엘릭은 개의치 않았다.
“아뇨. 재단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재단? 그게 그거 아닌가?”
“아닙니다. 다릅니다. 재산과 직장을 잃은 사람이 많으니, 입에 풀칠하기도 벅찰 겁니다. 그들을 싼값에 고용해서 조사에 써먹는 겁니다.”
그제야 엘릭의 생각을 읽은 가이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명성은 메르빙거가 가지겠단 뜻이로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네레스타도 함께 하는 공익사업의 일환일 뿐이죠.”
둥지는 발견되었지만, 그 규모는 역대 최대라 알려질 만큼 크기가 방대하다.
그것을 탐색, 발굴, 관리, 보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일손이 필요할 것이고, 여기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네레스타 가라고 해도, 이것을 한꺼번에 충당하기엔 부담스러울 테지.
그래서 엘릭은 인건비라도 아낄 겸 해서 베럭스 교수의 피해자들을 고용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투자’를 했던 정도라면 대게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거나, 학식을 갖춘 이들이니 어떻게든 쓸모가 있을 테니까.
듣기로는 은퇴한 고위 관료나 교수 출신들도 더러 있다고 하니, 원래대로라면 꽤 비싼 값을 줬어야 할 이들도 싸게 부릴 수 있을 터였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단순 잡무나 힘든 노역을 맡겨도 충분할 테고.
거기다 공익사업 운운한다면 여론도 챙길 수 있으니, 네레스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둥지의 소유주가 엘릭이란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가이의 지적대로, 공익사업의 혜택은 오히려 네레스타가가 아닌 메르빙거 쪽으로 쏠릴 게 분명했다.
사람은 누구나 주인만 신경 쓰지, 사용인은 안중에 없는 법이니.
네레스타 가로서는 돈은 돈대로 쓰고, 수고도 수고대로 하고도 명예는 홀라당 메르빙거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 되는 것이다.
『한 가지 깜빡한 게 있었어. 메르빙거의 낯짝은 아주 두껍기로 유명했지. 생색은 생색대로 내고, 손가락만 까닥해서 부려 먹기까지 하니, 하!』
[부려 먹다니요. 말씀이 심하십니다. 다 같이 잘 살자고 하는 거죠.]
『가증스럽기까지. 완벽한 메르빙거로다.』
메피스토와 마찬가지로,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두꺼운 엘릭의 얼굴에 혀를 차면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션은 ‘저놈이 또?’라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하지만.
가이만큼은 재미있다는 듯이 더 크게 미소를 지었다.
여태 담담하기만 하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맛있는 먹이라도 발견한 듯한 맹수의 눈빛.
저게 아마 진짜 네레스타 가주의 눈빛이리라.
짝!
가이가 크게 박수를 치자 시종장이 다가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재단 설립, 절차 알아보게. 설립자, 운영자, 소유주, 전부 여기 있는 엘릭 메르빙거로 잡아두고.”
“…!”
순간, 엘릭의 눈이 커졌고.
가이가 그를 돌아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왜 그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다만, 자본은 네레스타에서 내는 것일 텐데, 제가 재단에 이름을 올린다는 건 어불성설인 것 같습니다만.”
“걱정하지 말게. 발굴권에 대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친구 아버지로서 주는 선물이니까.”
“….”
『파하하! 한 방 먹었구나, 애송아! 능구렁이 같은 작자로고.』
메피스토는 이 광경이 우스워 죽겠다는 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릭은 머리 아픈 재단 소유와 경영은 전부 네레스타 가에 떠넘기고 맛난 과실만 따 먹을 생각이었지만.
도리어 가이는 모든 명의를 엘릭 앞으로 달아놔, 권한과 책임을 같이 지게끔 만들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가 발을 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로써 엘릭과 네레스타 가는 운명 공동체가 된 셈이니.
앞으로 엘릭이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재단의 명성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고, 공동 운영자인 네레스타 가의 이름도 거기에 같이 딸려갈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메르빙거와 네레스타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비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명성 면으로 따진다면.
네레스타 가가 ‘떠오르는 영웅’인 엘릭을 후원하는 것처럼 비치지 않을까?
『어쩌면 메르빙거를 한입에 꿀꺽 삼키려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메피스토는 잔수를 쓰려다 도리어 위기에 처한 엘릭이 어떤 얼굴을 할까 싶어 키득거렸다.
그런데.
[아뇨.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는데요?]
『…음?』
[저도 네레스타를 등에 업은 만큼 입지가 상승할 테니까요.]
『…!』
[오히려 네레스타로서는 손해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저를 가까이하는 것만큼 도박도 없을 텐데…?]
『어째서?』
[메르빙거는 그동안 잘났었던 만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곳도 아주 많거든요. 특히 육망성에는 더더욱.]
『호오.』
엘릭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 걸 감수하면서까지 저와 손을 잡겠다는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하여간 이거 뜻밖의 수확이네요.]
엘릭은 가이의 생각이 궁금했다.
대체 무엇이 그에게 자신에 대해 고평가를 하게 만든 걸까?
처음 초대했던 목적은 그저 새로운 메르빙거의 얼굴이나 확인하려던 것 같았는데.
도중에 생각의 방향을 크게 확 튼 것 같았다.
무엇일까?
단순히 아들 친구라서?
아니다. 고작 그런 사정으로 사리판별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가문이 있어서?
설마. 현시대에 네레스타 가의 명성은 절대 메르빙거에 못지않다.
재단에 대해 거론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설마, 이건가?’
엘릭은 슬쩍 소맷자락을 끌어올렸다.
손등에 박힌 냉혹의 인장.
이 속으로 청연의 진궁이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가이는 청연의 진궁을 단시간에 빠져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몰래 개량해서 써먹은 것까지 눈치챈 게 아닐까?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이것 때문에 생각을 달리 먹은 거라면?
그래서 여기에 관해 물어보려는데.
콰아앙!
별안간 가주실의 한쪽 벽면이 큰 폭발과 함께 터져나갔다.
돌가루가 튀고, 분진이 치솟았다.
‘그림자’의 수장이라던 시종장이 어느새 션과 타샤를 보호하듯이 서 있었고, 대기하던 병사들도 가주를 호위하듯이 둘러있었다.
엘릭도 미리 메모라이즈 해뒀던 ‘차가운 벽’을 일으켜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뭐야, 이거…?’
그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감히 네레스타 가의 한복판에서 가주를 테러할 생각을 하다니!
미친 게 아니고서야 똥배짱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웃는다고?’
뒤늦게 가이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가이의 시선이 벽 쪽이 아닌, 엘릭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지금부터 재미난 일이 벌어질 거라는 듯.
순간, 엘릭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등골이 쭈뼛 섰고.
“너!”
곧 터진 벽 쪽에서 들린 어느 노인의 외침에 고개가 저절로 그쪽으로 쏠렸다.
‘설마, 그때 그…!’
청연의 진궁에 갇혔을 때 들었던 노인의 목소리.
로브를 푹 뒤집어쓴 초로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마치 값진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내 제자가 되어라!”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