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네레스타 가의 초대
엘릭이 청연의 진궁을 빠져나오기 직전.
“이 새끼는 진짜 빠져도 이딴 데로 빠져서…!”
션은 갑자기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진 엘릭을 두고 욕지기를 뱉고 있었다.
청연의 진궁.
하필 휘말려도 저기에 휘말린 건 또 뭐란 말인가.
구하러 가고 싶어도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저긴 6써클의 마도사 급은 되어야 헤쳐 나올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으니까.
평상시에는 단순히 길을 잃는 정도의 미로 형태의 기환진일 뿐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안개에 독을 섞거나 환영을 실어 갇힌 대상을 천천히 죽일 수도 있는 절진이었다.
작은 조부님께서 직접 거둬주시거나, 구조를 잘 아는 누군가가 직접 들어가서 데려와야만 했다.
실제로 조금 전에 션의 명령을 받은 가신이 입장한 상태.
무사히 같이 빠져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그래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푸핫!”
갑자기 옆에 있던 타샤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걸까. 션은 뿔이 난 얼굴로 그런 누이를 노려보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냥 무시해버리고 말았을 테지만, 지금은 자신보다 친구를 비웃는 건가 싶어 날이 설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보다 대체 ‘마중’은 왜 나와 있던 걸까?
평상시에는 황실에서 사람이 나와도 시종을 보낼 뿐, 직접 움직일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정말 엘릭에게 무슨 관심을 가지기라도 한 걸까?
“왜 웃어?”
날이 잔뜩 선 말투였지만.
타샤는 오히려 그런 동생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귀여워서.”
“뭐?”
“입으로는 싫다고 구시렁대도, 표정은 걱정되어 죽겠다인데?”
“….”
“타인한테는 그렇게 무심하기 짝이 없는 우리 동생님을, 이렇게 걱정 끼치게 하다니. 당대 찬성공작도 참 간이 커, 그렇지?”
순간, 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거, 걱정하긴 누가…!”
션은 발끈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다 말고, 도중에 꾹 참아야만 했다.
타샤의 웃음보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녀에게 말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하여간 너무 걱정 말렴.”
“그러니까 누가 걱정을 했다고…!”
“그래. 그렇다 치고. 근데 넌 네 친구를 너무 모르는구나?”
겨우 화를 삭이던 션은 다시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무슨 말이야?”
“청연의 진궁. 무섭긴 분명히 무섭지. 하지만 정말 넌 네 친구가 저길 못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
순간, 션의 눈이 커졌다.
뒤통수를 무언가로 세게 두들겨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타샤의 입꼬리가 더 크게 말려 올라갔다.
“내기할까?”
“…무슨 내기?”
“나올 수 있나 없나.”
“난 있는 쪽으로.”
“양심은 있니?”
타샤는 어이없다는 투로 웃었지만, 션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주 잠깐 작은 증조부님이 나서셨다는 사실에 동요했던 것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엘릭은 그 험난했던 용의 둥지에서도 살아남았던 존재였다.
청연의 진궁이 아무리 대단해도, 설마 용아병과 사룡이 날뛰던 곳만큼 위험할까 싶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누나는 어떻게 엘릭이랑 대화 한 번 안 해봤으면서…?’
션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샤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나도 나오는 쪽인데… 그래서야 내기는 안 될 것 같고. 그럼 얼마 만에 나오나로 결정할까?”
“12시간.”
“그거 어림짐작이지?”
“그런데?”
“하여간. 마법사나 되면서 그런 건 계산으로 맞춰야지 않겠어? 10시간 12분이야. 그쯤 걸릴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고.
화아아!
두 사람의 예상대로 엘릭은 별다른 구조 없이 홀로 청연의 진궁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다만, 둘 다 틀린 점이 있다면.
“….”
“….”
빠져나오는 데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정확하게 46분이었다.
* * *
다시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와서.
션의 입장에서, 마도사라도 된 거냐는 질문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였다.
사실 아무리 똑똑한 마도사라도, 청연의 진궁을 분석하고 해(解)를 도출하는 데는 최소 24시간은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만큼도 안 된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고.
아니, 해를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들도 수두룩할 터였다.
괜히 작은 증조부님이 만든 물건이 아닌 것이다.
저마저도 작은 증조부님이 수식을 강화하겠다고 나서신다면, 무기한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션이 12시간이라고 말한 것도 사실 엘릭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절반으로 딱 잘라 말한 것일 뿐,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미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는데….
그걸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처리하고 나왔다고?
타샤는 이미 충격을 먹은 채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션은 처음 보는 누이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진궁의 해를 찾는데 얼마나 걸렸었지? 4시간이었나, 5시간이었나? 그 정도쯤이었던 것 같은데.’
희대의 천재라 꼽히는 타샤도 꺾은 기록이라니. 앞으로 저것보다 앞당길 사람이 있을까?
여하튼 이런 이유로 마도사가 되었냐며 묻게 되었는데.
“글쎄.”
엘릭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거기까진 아직 아닌 것 같고.”
“그… 럼?”
“턱걸이쯤?”
“…!”
“여기서 조금만 더 발버둥 치면 가능할 것도 같고.”
“….”
션은 순간 타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 얼어붙어 있었냐는 듯, 타샤의 두 눈이 어느새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입가에는 웃음기마저 살짝 걸려 있었고.
‘또… 불붙었네.’
션은 누이가 한창 호승심에 불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평생 또래 중에는 이렇다 할 적수가 없었고, 선배들마저도 대다수는 발아래에 뒀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간만에 자극을 주는 상대를 만났으니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애당초 누르면 누를수록 크게 튀어 오르고, 적수가 있으면 어떻게든 꺾으려 드는 승부욕의 화신이 바로 자신의 누이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션의 짐작대로.
타샤는 한창 재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여태 엘릭에게 흥미를 느꼈던 건, 용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달라졌다.
‘이 남자, 재밌잖아?’
그래서일까.
보다 도도한 걸음으로 엘릭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타샤는 직접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도 당연히 자신을 알고 있을 거란 투로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고.
“네. 반갑습니다. 션, 어디로 가면 되냐? 길 헤매서 그런가, 출출한데.”
“…?”
엘릭은 타샤의 예상과 다르게 그냥 간단하게 고개만 까닥하고는 션을 돌아보면서 배를 매만졌다.
설마 그걸로 끝이야? 타샤의 얼굴에는 당연히 그런 불신이 걸릴 수밖에 없었지만.
션은 누이보다 한 수 위인 엘릭을 보면서 튀어나오려는 웃음기를 억지로 참으면서 길을 다시 안내했다.
“푸흐… 흡! 이… 쪽으로 따라와라. 가족들 전부 기다리셔.”
* * *
엘릭이 받은 초대장은 정확하게 따지자면 네레스타 ‘가주’의 초대장이 아니었다.
네레스타 ‘가문’의 초대장이었지.
『음? 그게 그것 같은데.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거지?』
메피스토는 엘릭의 설명을 듣고 난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이가 큽니다. 아주.]
『어떻게?』
[전자는 네레스타라는 일가(一家)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육망성의 일인으로서 직접 메르빙거의 가주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는 뜻입니다. 가주 대 가주의 만남인 거죠.]
『으음?』
[반면에 후자는 어른이 자식의 친구에게 식사나 한 끼 하자며 찾아오라고 권유한 것에 가깝습니다. 여기선 절 아래로 두는 거죠.]
『네레스타 따위가, 메르빙거를 아래로 둔다고?』
메피스토가 한창 활약하던 시절에 마탑의 육망성은 감히 메르빙거에 비빌 게 아니었다.
물론, 당시에도 육망성은 마법을 선도하던 곳이었고, 메르빙거와 함께 이대 주축으로 꼽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최전선에서 마족들과 전쟁을 치르던 메르빙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서 메르빙거의 말에나 따르던 곳이었는데….
그런 메르빙거를 ‘아래’로 둔다고?
메피스토의 상식으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게 정치란 겁니다.]
『흥! 하여간 허례허식을 깊게 따져서 신경전을 벌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너희 인간들에게는 여전하구나!』
메피스토는 괜히 자신이 불쾌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유일하게 메르빙거만 인정하는 그로서는 자신도 같이 무시를 당하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더 안 됩니다.]
『어째서?』
[지금 메르빙거는 힘이 없으니까요.]
『….』
[아무리 그동안 메르빙거가 재기를 시작하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대도, 실제로 중앙에서는 그렇게 안 볼 겁니다. 그냥 여태 눈 밖으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하이에나가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다시 자기네 밥그릇을 노린다고만 생각할 뿐이죠.]
『허! 하이에나?』
[뭐, 높이 쳐줘도 호랑이가 될 가능성이 있는 하이에나? 그렇게밖에 안 볼 겁니다. 제가 아무라 잘났다고 뛰어다녀봤자, 지금 제게는 가솔도 가신도 없잖습니까?]
『…흠.』
[그러니까 더더욱 저는 더 잘나져야 하는 겁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하구요.]
『그럼 따지자면, 넌 지금 친구의 아비로부터 무시를 당한 것이라고 봐도 되지 않느냐? 한데, 왜 초대에 응한 거지?』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아요?]
『음?』
[사적으로는 친구 집이기는 해도, 결국 언젠가 반드시 제가 넘어야 할 난관에 불가합니다. 그럼 어떤 곳인지, 분위기는 어떤지, 마법사들 수준은 어떤지, 수장은 어떤 사람인지… 제가 직접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메피스토는 엘릭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아무리 많은 조사를 하고 보고를 받아도, 결국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에는 미치지 못할 테니.
[덕분에 청연의 진궁인지 뭔지 하는 것도 볼 수 있었고… 네레스타 가의 마법이 대략 어떤 구조로 이뤄졌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디어도 실컷 얻었구요. 전 여기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남는 장사였습니다.]
『확실히 그도 그렇군.』
메피스토와 나눈 대화처럼.
엘릭은 초대에 응한 것에 크게 만족해하고 있었다.
거기다 저들이 자신을 ‘아래’로 둔다고 말하긴 했어도, 실제로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존중받는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음식은 훌륭했고, 가솔은 정중했다.
분위기도 따뜻했다.
식사 자리에는 가주 부부를 비롯해 션과 타샤, 그리고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빠진 이들 외에 션의 형제들도 전부 참석해 있었다.
‘아래로 쌍둥이 동생이 있다더니, 얘네들인가 보네. 근데… 대체 왜들 이러는 거지?’
듣기로 션의 형제는 4남2녀라고 했다. 그중 션은 삼남으로, 위로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를, 아래로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이제야 겨우 열 살쯤 된 늦둥이들.
각각 ‘릴’과 ‘탐’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아와 남아였는데, 흔히 그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밥을 먹는 내내 한 시도 조용할 일이 없었다.
신기한 점은 그러면서도 두 쌍의 눈은 항상 엘릭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귀엽고 동글동글한 눈들에서 별무리라도 금방 쏟아질 것 같아, 오히려 엘릭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호호! 요즘 들어 얘들이 그렇게 라센트 영웅 노래를 불러댔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신기한 모양이네요. 많이 부담스러우시죠?”
네레스타 가의 안주인, 데이지 네레스타는 기품 있게 웃으면서 막내자식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아들의 친구를 대하면서도 계속 존대를 썼다. 엘릭이 말씀을 놓으시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런 자리일수록 예의를 지켜야하는 것이라며 거절했다.
듣기로는 어느 후작가의 여식이었다던가. 말투에는 기품이 묻어나고, 행동에는 교양이 섞여 있었다.
네레스타 가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 임에도, 어째서 그녀가 가문 내에서 존경을 많이 받고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뭘!”
“맞아, 맞아! 난 아무것도 안했어! 잘못한 게 있다면 릴이 잘못한 거지!”
“우씨! 야! 내가 뭘!”
“에베베. 네가 그렇게 엘릭 형을 쳐다보니까, 엘릭 형이 싫어하잖아!”
“네가 더 많이 엘릭 오빠 보고 있었거든! 스파게티도 다 흘려놓고!”
“지는!”
“내가 뭘!”
“뭘!”
“이런! 보다시피 이렇게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답니다. 엄마가 뭐라고 했었죠? 식사 시간에는 정숙해야 착한 어린이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어요! 릴은 착한 어린이가 될 거예요!”
“탐도! 탐도 착한 어린이 될 거예요!”
엘릭은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면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션에게 이렇게 귀여운 동생들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에 자주 놀러 올 걸 그랬습니다.”
“그런가요? 좋게 생각해주시니 고마울 따름이네요.”
그렇게 훈훈했던 식사 시간이 전부 끝나고 난 뒤.
데이지는 두 아이를 재워야겠다며 엘릭의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릴과 탐이 엘릭과 더 놀고 싶다며 가기 싫다고 아등바등했지만, 엄마의 완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음식은, 입에 잘 맞았나?”
가이가 후식으로 나온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면서 입을 뗐다.
식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뗀 한 마디.
그런데.
『이놈, 정말 인간이 맞나?』
메피스토가 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