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네레스타 가의 초대
“손님이 오셨다고?”
네레스타의 가주, 가이는 결재 서류를 꼼꼼히 살피다 말고, 시종장이 가져온 소식에 고개를 들었다.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가늘게 좁혀진 그의 두 눈이 보였다.
“예. 그렇습니다.”
“한데? 그냥 이리로 데려오면 되지 않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가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려 가주가 직접 초대한 사람이다. 작위만 따지면 당대 4공작 중 한 사람이고, 사적으로는 션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누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거지?
“‘청연(靑煙)의 진궁(陣宮)’이 열렸습니다.”
그제야 가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작은 할아버님께서 나서셨다고?”
“예.”
“허!”
가이는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외부에는 그리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네레스타 가의 원로원에는 ‘괴물’이라고 할 만한 존재들이 수두룩하게 있었다.
하지만 성미도 괴팍하기 그지없는 그런 괴물들이 그동안 별다른 소란을 벌이지 않았던 건, 그들을 꽉 쥐고 있는 더 큰 괴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거스틴 네레스타.
가이에게는 사사로이 작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가이의 나이가 올해 쉰여섯이었으니, 벌써 백에 다다른 노괴(老怪)인 셈이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그를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왕성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이따금 내놓는 결과물들은 가전 마법 체계를 진일보시킨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성격이 괴팍하고 사람 상대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외부로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건만.
갑자기 엘릭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또 병이 도지셨나 보군.”
“어찌할까요?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시종장은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끝을 흐렸다.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손님이 가문 내에서 다쳤다는 것만큼 귀족가로서 수치가 될 만한 것도 없었으니까.
하물며 마법에 있어서 영웅이라 꼽히는 우스던 메르빙거의 손자임에야.
“그건 자신의 팔자가 아니겠나.”
시종장의 눈이 살짝 휘둥그레지는 가운데.
딸칵!
가이는 결재를 마친 만년필의 뚜껑을 도로 닫으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새로운 메르빙거가 왔어. 이참에 한 번 시험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다 생각하지 않나?”
* * *
알고서 보는가, 모르는데도 보는가?
엘릭은 아주 잠깐 노인이 던진 질문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그 말뜻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이거…?’
분명히 심안을 눈치챈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대답해줄 이유가 없잖아? 무슨 말을 해도 나에 대한 정보를 내어주는 것밖에 더 되겠냐고.’
엘릭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잘못한 것도 크게 없고. 심문을 당할 이유는 전혀 없어. 주눅들 필요가 전혀 없다.’
이상한 기환진에 갇혀서 당황했기 때문에 노인의 목소리에 압박감을 느낀 것일 뿐.
잘잘못을 따지자면, 오히려 제대로 안내하지 못한 네레스타 가 쪽에 문제가 있었다.
자기네들 가전 마법을 엿보지 않았냐고 따져도, 길을 잃게 만든 쪽이 일차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겠나.
설사 이것을 문제 삼는다고 해도, 당장 책임을 물지는 못한다.
자신은 메르빙거의 가주. 따지자면 가이 네레스타와 같이 서야 격이 맞았다.
‘그냥 무시하자.’
그래서 엘릭은 못 들은 척하고 걷기 시작했다.
[음! 혹시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분명히 주파수도 맞게 돌아가고 있고… 안개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고. 아, 아. 내 말 안 들리느냐? 아이야?]
정체 모를 노인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지만, 엘릭은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두 눈 쪽으로 마력을 잔뜩 끌어올렸다.
휘이이!
[아닌데. 분명히 이쪽 말에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혹시 이 늙은이의 말을 무시하는 겐가? 메르빙거 놈들의 핏줄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음?]
심안을 통해 비치는 세상이 좀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결이 짙어지고, 더 미세한 결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호오! 시야를 좀 더 구체화하고 있는 겐가? 눈깔에 힘이 꽤 많이 들어가는…!]
“…【가려라】.”
[으, 응?]
한순간, 엘릭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확 움직이더니 몸을 가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처음으로 당황해했다.
분명히 이곳에 깔린 안개들은 전부 자신이 개인적으로 설치한 마동력기(魔動力機)로 움직이는 것일 텐데, 갑자기 내리지도 않은 명령어를 수행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엘릭을 관찰할 수가 없잖은가.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가 확인해보는데.
[해, 해킹?]
그러다 마동력기에 외부 침입이 있었던 흔적을 감지하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설마…?]
목소리의 주인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가 되었다.
아무리 심안을 열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정확하고 면밀하게 구성 요소들을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재빨리 분석해서 약점을 찾아 역 침입까지 시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수정된 부분은 아주 미약해서 이걸 두고 ‘해킹’이라고 표현하기엔 아주 미약하긴 했다. 8중으로 구성된 방어 체계를 한 개라도 해제시킨 것도 아니고.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네레스타 가의 최고 마법사인 자신이 만든 마법진이라는 게 문제였다.
청연의 진궁은 분명히 목소리의 주인이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으니까.
그래서 한순간 목소리의 주인은 엘릭이 아닌 다른 손님이 있어 청연의 진궁을 파훼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그쪽이 더 개연성이 있었다.
하지만.
[재미난… 아이가 들어온 것 같군.]
목소리의 주인은 어쩐지 엘릭이 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거는 좀 더 찾아봐야겠지만, 어쩐지 그런 것 같다는 확신이 많이 들었다.
[우스던. 그리 쉽게 가버리고 말더니, 실은 뒤에서 이리도 똑똑한 호박씨를 까고 있었던 게냐? 허허. 그럼 그렇지.]
그렇게 목소리의 주인이 어딘지 모르게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저벅.
저벅.
엘릭은 빠르게 안개 속을 헤집으면서 걷고 있었다.
‘보인다.’
앞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길이 보였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진은 온통 헝클어진 결들이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고.
자신은 그 강물들 사이사이로 난 빈 공간을 내딛기만 하면 되었다.
언제부턴가 껄껄 웃어대던 노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마력은 단순히 한 가지 성질만을 띠고 있는 게 아냐.’
그리고 거기서 엘릭은 기환진이 품고 있는 마법의 새로운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바람이란 속성 하나에 묶여 있지만, 변화는 너무 자유분방해.’
‘농도 조절만이 아니라, 낙폭에 따른 엔트로피의 변화와 거기에 따른 다른 원소들의 유동도 끌어내고 있고. 나비 효과를 일부 따왔어.’
‘열풍은 지면의 수분들을 바싹 마르게 해서 수증기를 한데 끌어모은다.’
‘미풍은 수증기를 하나로 모아 안개를 형성한다.’
‘냉풍은 안개를 더욱 두껍게 만들고, 그 사이로 강풍을 흘려서 길을 어지럽게 만든다.’
‘이 안개들은 시전자의 의도에 따라 태풍이 되어서 모든 것을 쓸어낼 수도 있다.’
‘바람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무한한 자연 동력이 되니, 마력의 재순환으로도 이어진다. 여러 마법이 이 흐름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자연스럽게 맞물리고 있어.’
‘그렇다면.’
‘내가 가진 빙계 마법에 접목할 수는 없는 걸까?’
‘이 마법진은 바람이란 속성을 이용해서 수증기를 다루고, 미로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 역시 빙계의 사용에 따라 바람이나 불꽃 따위의 다른 속성들을 다룰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속성까지 가지 않더라도… 언령에서 인장으로 이어지는 마력 순환을 재배열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낭비되는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다면.’
‘일단 이 순서에 있는 코딩을 재배열해서….’
엘릭은 모르고 있었지만, 청연의 진궁은 네레스타 가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진.
거기서 따올 수 있는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했다.
청연의 진궁 내에 흐르는 마력 흐름을 마나 로드에 빗대고.
바람의 변화를 빙계 마법으로 치환하며, 순서대로 맞물리는 마법들을 언령과 인장으로 대치했다.
구조 회로를 그대로 따와 자신에게 맞게끔 개량한 것이다.
규모가 아주 작아진 청연의 진궁이 고스란히 이식된 셈.
물론, 똑같이 베꼈다간 추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용의 지식을 더해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수정을 가하기도 했다.
수식 변화를 주고,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했다.
그러니 ‘냉혹의 진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화아아!
덕분에 엘릭은 모르고 있었지만.
냉혹의 인장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여태껏 비효율적이던 마나 로드가 재배치되면서 효율적으로 변해 이전보다 더 많은 마력이 원활하게 인장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고.
여태 마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던 구석구석까지 마력이 스며들면서 잠들어있던 기능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냉혹의 인장이 빛무리를 토했다. 시리도록 빛나는 하얀 빛. 그러다 인장이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츠츠츠-
강의 형태가 좀 더 선명해지고, 세 개의 산 위로 만년설로 보이는 형태가 조금씩 자리 잡았다.
5성.
안배가 끝난 뒤로, 인장을 직접 수집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냉혹의 인장이 발전한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완전한 5성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길을 뚫어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휘휘휘!
냉혹의 인장이 화려하게 빛나면서 차디찬 냉기가 그의 주변으로 불었다.
희뿌연 수증기가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올라왔다.
“….”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빙거! 대… 어… 로 …냐!』
메피스토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저벅!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안개가 한순간 확 하고 사라졌다.
『이놈! 대체 어딜 갔다 나타난 것이야!』
메피스토가 갑자기 나타난 엘릭을 발견하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엘릭도 똑같이 그쯤에서 냉혹의 진궁을 이식하던 것을 멈추고, 현실로 되돌아왔다.
‘하아!’
그 역시 자신의 몸에 있었던 변화를 모를 수가 없었기에 입가에 웃음꽃이 펴있었다.
‘기분 좋다.’
그러다 잔뜩 뿔이 난 메피스토가 보였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걱정했어요?]
『거, 걱정은 무슨! 네놈이 완전히 사라지면 본 왕이 부활할 방법이 사라지고 말지 않더냐! 그러니 찾은 것이지!』
메피스토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버럭 소리를 지르다, 뒤늦게 엘릭의 변화를 눈치채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데 너…?』
[예. 5성 됐습니다. 여기 완전히 노다지던데요?]
『말도 안 되는…!』
메피스토 역시 네레스타 가를 둘러싼 수준 높은 여러 마법진을 보고 있기에 적잖게 놀라는 중이었지만.
설마하니 그중 하나를 날름 훔쳐서는 이렇게 갑자기 발전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으니.
이건 아무리 메르빙거라 해도 너무 한 수준이었다.
홀라당 요체(要諦)를 빼앗긴 원주인은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얼마나 황당할까 싶기도 했다.
“너 도중에 어디로 갔…!”
그러다 션도 뒤늦게 엘릭을 발견하고,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다가오다가 도중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후두둑!
갑자기 엘릭의 주변으로 얼음 결정들이 잔뜩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안개 속 수증기가 인장이 내뿜던 한기에 얼었었던 것들.
그리고.
휘휘휘!
션은 엘릭의 몸 위로 치솟는 새하얀 빛무리를 보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 설마 6써클 이룬 거냐?”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