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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42화 (42/405)

42화

네레스타 가의 초대

사실, 라센트의 영웅은 황도의 백성들에게 있어 단순한 유흥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권세가와 재력가가 전부 모여 있는 황도가 아닌가.

당연히 소싯적에 날아다녔다고 할 수 있을 존재들은 발에 챌 정도로 많았으며, 그만큼 유망한 신예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 앞에 마도명문과 찬성공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달라지지.’

세간에는 이미 ‘스러졌던 메르빙거의 재기(再起)’니, ‘새로운 찬성공작의 귀환’이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호사가들이 붙인 호들갑일 뿐이고, 정작 중앙 정계에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서 엘릭의 행보를 지켜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듯했지만.

그래도 우스던 메르빙거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 입장에서는 기대가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취재하기 위해 병원 앞에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던 취재진이 그 증거였고.

지금 엘릭 앞에 놓인 각종 제안서와 초대장 등도 또 다른 증거였다.

“‘메르빙거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후원을 하고자 합니다’, 북방상인연합에, ‘마도명문의 굴기에 한 팔을 보태고자 합니다’, 라인 강 연합회에… 오. 르네 후작가에서도 초대장을 보냈네? 여기 안주인이 깨나 콧대 높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네가 많이 궁금한가 봐?”

션은 서류들을 가볍게 훑어보면서 웃음보를 터뜨렸다.

하나같이 엘릭에게 어떻게든 끈을 대보겠다고 들어온 것들.

여태 무시만 당하던 친구가 드디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자신의 일이라도 된 것처럼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근데 표정이 왜 그렇게 썩어있어? 이거 전부 원래 네가 바라던 거잖아?”

다만, 션은 엘릭이 뚱한 표정으로 서류들을 보고 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많이 왔는데도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 싶어서.”

“쓸 게 왜 없어? 5대 상단 중에서도 세 곳이나 연락을 넣었구만.”

“다들 그냥 찔러본 거잖아? 마땅히 나한테 필요하다 싶은 것들이 없어. 괜히 엮여서는 쓸데없이 빚만 질뿐이지. 이제 돈이 딱히 궁한 것도 아니고.”

학비는 새로운 총장이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했고, 생활비는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면 쏟아질 것들로도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였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부르는 게 값일 테니까.

“흐흐.”

엘릭은 션이 갑자기 음침하게(?) 웃기 시작하자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어?”

“우리 엘릭, 많이 컸네?”

“뭐?”

“스프 사 먹을 돈도 없어서 궁상맞게 지하 학생식당에 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까불지 말고. 하여간 이 중에서 그나마 쓸 만한 거라면… 아, 여기 있네.”

“음?”

션은 엘릭이 밑에서 끄집어낸 서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밑에 박혀 있던 걸 봐서는 초창기에 들어온 제안서인 것 같은데.

분명 처음 보는 것인데도 어째 서류 봉투가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네레스타 가를 상징하는 오얏꽃의 문장.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붉은 초승달.

“야! 그거…!”

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엘릭은 봉투 안에서 서류들을 꺼내면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내가 있는 원소학부에 대한 장학 지원과 기술 제휴 제안, 그리고 개인 실험실 제공에 일급 마도서고 개방 권한… 어휴. 이거 다 받아들였다간 목 막히는 거 아닌지 몰라?”

엘릭이 씩 웃으면서 빳빳하게 굳은 션을 바라보았다.

“이거 너희 누님이 보내주신 거 맞지?”

“이 빌어먹을 할망구가, 진짜!”

“가장 밑에 놓여 있더만. 날짜도 그렇고, 총장 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한테 제안서 넣으신 거네.”

션은 인상을 와락 구겨야만 했다.

‘그럼 그때 엘릭을 보고 있던 게 우연이 아니었던 거야? 뭐지?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야? 그리고 무슨 생각이야, 대체?’

이 정도 수준이면 그냥 단순한 인재 양성이니, 후학 발굴이니 하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그냥 대놓고 배경이 되어 하나부터 열까지 서포트를 해주겠다는 노골적인 암시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래서야 보통은 졸업 후에 곧바로 코가 꿰일 수밖에 없지만.

‘말미에 달린 조건은 또 뭐냐고!’

-위 조건들에 대한 변제 의무 및 강제 할당 사항 없음.

지원은 지원대로 받고, 나중에 입 싹 닦고 모른 척해도 법적 책임을 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래서야 학계 내에서 발도 못 붙이게 될 게 분명하지만… 총장도 제친 엘릭이 어디 그런 걸 신경 쓸 성격이던가.

문제는 타샤도 엘릭의 그런 성격을 모를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타샤도 절대 손해를 볼 성격이 아니다.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서류 봉투에 박힌 인장으로 봐서는 아버지와는 별개로 움직인 게 분명한데 말이다.

션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을 무렵.

엘릭도 자신의 머릿속을 직접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마침 필요했던 것들만 쏙쏙 담겨 있는 제안서에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자신과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고려를 많이 했단 뜻이니.

‘세 신성 중 하나인 불새의 마녀… 도착하면 마찬가지로 만나서 이야기해볼 수 있으려나?’

듣자 하니 타샤는 벌써부터 가문뿐만 아니라, 유파에서도 ‘독립’을 해서 자체적으로 사조직을 이끄는 중이라고 들었다.

뭐라더라?

‘불새의 홰? 뭐, 하여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았는데. 거기에 스카우트라도 하려는 건가?’

하여간 이렇게 좋은 것들을 알아서 떠먹여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 따윈 없었다.

네레스타 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래저래 머릿속이 꽉 찰 무렵.

“도착했습니다.”

끼익!

드디어 목적지인 ‘안개의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와! 와! 속았어!”

“뭘 속아?”

“너, 인마! 잘 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진즉에 더 빨대 꽂고 사는 건데! 젠장! 내가 너무 소심했어!”

황도에서도 동북부 끄트머리에 위치한 안개의 언덕을 본 순간.

엘릭은 가볍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만큼 션의 본가는 컸다.

아니, 이걸 단순히 ‘크다’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 걸까?

차라리 ‘거주 구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능선을 따라 8개의 크고 작은 언덕들이 솟아있고, 그 위에는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건물군들이 모여 있으며, 격자 형식으로 잘 닦인 도로를 따라 거대한 성곽이 삼중으로 처져 있다.

어디 그뿐이랴?

성곽에 새겨진 마법진들은 하나 같이 뛰어난 것들이며,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상충되지 않고 원활하게 돌아간다.

결계, 기환, 축조… 무엇 하나 철저한 계산이 가미되지 않은 게 없었다.

‘이것이 네레스타 가… 란 말이지.’

오랫동안 마탑을 지탱해온 육망성. 메르빙거가 한 번 쓰러진 와중에도 꼿꼿하게 서 있는 대가문의 일면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엘릭은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언젠가 뛰어넘어야 할 곳.’

그리고.

씩!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벽이 이만큼 크니, 주눅이 든다기보다는 그만큼 가슴 속에서 야망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호오.』

또한, 메피스토도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안개의 언덕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이 시대의 마도문명에 대한 평가를 고칠 필요가 있겠군. 본 왕의 구미를 당기게 할 만한 기술이로다.』

션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말은 좀 그만하고. 아버지가 계신 심처까지 가야 하니까 조심히 잘 따라와. 길 조금이라도 잘못 밟으면 큰일 날 수 있으니까.”

당대 최고의 마도지식이 총집합된 장소이니만큼, 션도 모르는 트랩들이 발동될 수 있었다. 그러니 외부인은 반드시 조심해야만 했다.

엘릭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호위병들의 검문을 받으며, 방명록에다 이름을 남기자 정문이 열렸다.

그리고 병사들의 안내 겸 감시의 눈길을 받으며 걷는 내내.

엘릭은 속으로 적잖게 감탄과 침음을 번갈아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심안을 열고 있어 눈에 보이는 게 많은 판국에, 용의 지식을 얻었으니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속속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도한 강처럼 흐르는 결들.

어떤 결은 강렬했다.

어떤 결은 부드러웠다.

어떤 결은 날카로웠고, 또 어떤 결은 두꺼워서 도리어 아팠다.

저마다 공통된 특징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다른 마법들.

하나 같이 수준이 높으니 분명 뛰어나다 싶으면서도, 이게 정말 네레스타 가의 마법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엘릭은 언제부턴가 이 마법들의 공통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시선을 미시적으로 보지 않고, 거시적으로 관찰하게 되자 세상이 전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바람.’

어떤 것은 강풍이었고, 어떤 것은 미풍이었다.

한풍, 열풍, 춘풍, 추풍… 태풍이며 폭풍도 있었다. 표풍(飄風, 회오리)이 치는 곳에서는 잘못 발을 들였다간 큰일이 나겠다 싶기도 했다.

그것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으니, 언제부턴가 엘릭은 션이 하는 말도 귓등으로 듣게 되었다.

가문 내에는 가솔들만 있는 게 아니라, 괴짜라 할 수 있는 원로들이며 빈객들도 더러 있으니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쫑알쫑알 대던 메피스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제거되고 있었다.

사방에서 안개가 점차 다가왔다. 성곽을 지우고, 길을 지우고, 사람을 지우고, 끝내 시야를 지웠다.

그러다.

[재미난 것을, 보고 있군?]

엘릭은 갑자기 귓가를 거세게 때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뜨였다.

그리고 그제야 달라진 주변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는…?’

[아이야. 네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서 보는 것이냐? 아니면 모른 채로 보고 있는 것이냐?]

차분하면서도 따스함이 가득 섞인 노인의 목소리.

‘누군가 날 보고 있어!’

엘릭은 등골이 쭈뼛 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한눈을 팔다가 기환진(奇幻陣, 환영이 가득한 마법진)에 휘말린 모양이었다.

문제는 자신을 발견한 상대가 자신이 심안을 열고 있단 사실을 눈치챈 것 같다는 점이었다.

사전에 양해나 허락을 받지 않고 상대의 마법을 훔쳐본다는 건 중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걸 들키고 말았으니.

빼도 박도 못 하게 된 셈이었다.

여태 심안을 열고 다니거나, 직접 싸우기까지 해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기에 버릇처럼 열었던 것이 실수였다.

아무래도 한동안 승승장구만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냉정하지 못하고 교만을 부렸던 모양이었다.

‘이 망할 마왕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잘난 척은 그렇게 하더니…!’

엘릭은 메피스토도 보이지 않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싶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보아하니 상대는 자신쯤은 손바닥 위에 올려둔 것처럼 가볍게 다룰 수 있을 최소 7써클 이상의 대마도사인 것 같은데….

여태 벌을 주지 않고 관찰만 하고 있다는 건, 자신에게 흥미를 가진 게 분명했다.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는 없을까?

[분명 정심(定心)은 말뚝처럼 깊숙하고 튼튼하게 박혀 있고, 그만큼 정도(正道)를 걷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 길을 잡아주는 이가 없어서 그런가, 머릿속의 짱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아주 쩌렁쩌렁하게 들리는 놈이로고.]

엘릭은 빳빳하게 서고 말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까지 읽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노인네가 묻지 않았더냐. 아이야, 네가 보고 있는 것은 알고서 보는 것이냐, 아니면 모른 데도 보는 것이냐?]

엘릭은 잠깐의 고민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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