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네레스타 가의 초대
황도 인근의 카노이.
청사자.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럽고 공명정대하며, 불의를 참지 못해 항상 정의를 실천한다는 의인(義人).
그래서 무도가들 뿐만 아니라, 뭇 백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다는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하아!”
내뱉는 숨결에는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탁기를 비롯해 근심 및 걱정 따위도 같이 섞여 있었다.
“아버… 지?”
이사벨은 조심스레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지난 몇 달 동안 입마증에 시달리며 정신이 혼미하던 아버지의 눈빛이 처음으로 단단해져 있었다.
그런 동공 위로 자신의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 비치는 게 보였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너무하는구나.”
“…?”
“세상에 대체 어느 누가 자기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더냐?”
청사자, 헤르만 바일의 웃음에 이사벨이 눈물을 흘리면서 와락 안겼다.
“아버지!”
“허허. 녀석도, 원. 다 큰 처자가 이렇게 어리광이 많아서야 어쩌누?”
헤르만은 품에 안긴 딸의 등을 조용히 다독여주었다.
그때, 첸과 에드가 조용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주군…!”
“쾌차하셔서 다행이십니다.”
“둘 다 이사벨을 이렇게까지 지켜줘서 고맙네.”
헤르만은 고개를 끄덕이다 텅 빈 주변을 둘러보면서 쓰게 웃었다.
“다른 녀석들이 없는 건… 역시나 파울 때문인가?”
헤르만은 그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눈을 뜨진 못했어도, 이따금 정신이 들 때면 이사벨과 첸 등이 나누는 대화는 어렴풋하게나마 듣고 있었기에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얼추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크윽!”
“하지만 주군께서 이렇게 다시 눈을 뜨신 걸 알게 된다면, 가문의 기사들도 곧 생각을 달리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 아직 몸이 돌아오질 않았어. ‘사자’라고 내세우기엔 한없이 부족하다네. 이래서야 파울에게 오히려 잡아먹히기 쉬울 뿐이지.”
“…!”
“…!”
헤르만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라고 해서 어찌 당장 자리를 떨쳐 일어나고 싶지 않을까.
제아무리 친동생이라고 해도, 딸과 가문을 건드린 녀석이다. 아무리 그가 마음이 넓다지만, 그런 것까지 용서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현재 몸 상태였다.
사자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강자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건, 황금 사자가 내세운 절대 규칙이었다.
“아버지, 그럼…!”
“그래. 의제들을 불러야 할 것 같다. 되도록 그들의 손은 빌리지 않으려 했다만, 이렇게 된 이상 더 피할 수만은 없겠지.”
이사벨은 헤르만에게서 떨어지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푸른 매들.
총 여섯 명으로 이뤄진 그들 의형제는 소싯적 헤르만이 청사자에 오르기 전에 함께 대륙을 떠돌면서 정의를 실천했다는 무도가들이었다.
악인과 마주할 때면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하고서 재빠르게 해치운다기에 붙여진 별칭.
지금은 각자 유파를 세우거나 가족을 일구는 등, 검과는 전혀 무관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지만.
대형인 헤르만의 부름이 있다면 언제든 발 벗고 나서서 현역으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들에게 따로 연락을 넣어주게.”
“존명!”
“명을 받듭니다!”
첸과 에드도 그들의 전력을 잘 알기에 밝은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이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파울이 또 언제 어떻게 나설지 알 수 없으니 한 시라도 급히 움직여야 했다.
두 부녀가 해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주려는 의도도 있었고.
“한데, 대체 날 어떻게 깨운 것이냐?”
헤르만은 그들이 떠나는 보다가, 이사벨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실 그는 여태 난폭하게 굴던 마력이 갑자기 잠잠해지자 기회다 싶어 몸을 추슬렀던 것일 뿐,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엘릭 님이 도와주셨어요.”
“엘릭?”
헤르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 수많은 인물과 교분을 가졌다지만, 그중에서 그런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자(隱者)라도 되나 싶어 묻는데.
순간, 이사벨의 콧잔등이 살짝 붉어졌다.
‘음?’
헤르만은 딸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이런 적이 있었나?
그도 소싯적에 이사벨의 어미와 불같은 연애를 해본 적이 있었기에 이게 어떤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차분한 성정을 지닌 딸에게서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속으로 적잖게 놀라는데.
“그분은…!”
이사벨은 살짝 들뜬 모습을 하면서도, 차분한 어투로 엘릭과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오.’
설명이 이어질수록, 헤르만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엘릭은 아주 멋지고 화려하며, 정의로운-하지만 메피스토와 션이 들었다면 ‘그게 누구여?’라고 할- 세상에 둘도 없을 영웅상이었으니까.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에, 아주 그런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지닌 청년이 있단 말이지?”
헤르만은 흡족하게 턱 끝을 매만지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갑자기 왜 일어나세요?”
“가봐야지.”
“어딜요? 몸도 안 좋으시면서…!”
“어디 건강이 대수일까? 그만한 인재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 흑의 설원이라도 찾아가 봐야지.”
“…!”
“그리고 내 몸도 치료해주겠다고 말했다면서? 그럼 더더욱 가봐야하지 않겠느냐.”
* * *
그 시각.
정의로운(?) 청년은.
“아, 알았어.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제…! 아니, 그러니까 욕은 하지 말구. 응?”
잔소리가 한 바탕 쏟아지는 통신 수정구 앞에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응? 아, 아냐! 내가 인상을 찌푸리긴 뭘 찌푸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짜? 누나. 그러니까 좀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
엘릭은 어떻게든 수정구에 비친 누이를 달래려 애썼지만.
간만의 통화로 뿔이 단단히 난 누이의 화는 도저히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보였다.
『허!』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로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 말고 헛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저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쩔쩔매게 만드는 존재라니. 메르빙거의 끝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여태 메피스토가 보았던 엘릭은 앞으로 그 어떤 메르빙거가 태어나도 절대 저만큼 되지 못할 거라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건만.
아무래도 오늘부로 그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엘릭에게 위로 누이가 한 명 있단 말을 듣긴 했다지만, 녀석이 이렇게 전전긍긍할 줄이야!
엘릭이 유들유들하게 어떻게든 누이의 화를 달래려 해도,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욕지기밖에 없었다.
『하여간 거기서 목 씻고 딱 기다려! 지금 당장 그쪽 가는 마차 편 끊을 테니까. 도망치면 진짜 뒈진다? 알았어?』
쾅!
“누나? 누나!”
엘릭은 애처롭게 누이를 불러댔지만, 이미 꺼진 수정구는 도통 켜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환원에게 통사정해서 계속 통신을 걸어 봐도, 돌아오는 건 무응답.
누이의 성격으로 봐서는 정말 황도로 곧장 올 게 분명했다.
콰르릉!
엘릭의 머릿속에는 그런 천둥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안색도 저절로 창백해졌다.
“쯧쯧! 그러니까 내가 그랬지? 미리미리 연락 좀 드리고 그러라고. 편지 한 통만 보내두면 된다고 그렇게 뻗대더니. 잘하는 짓이다.”
션은 꼴좋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그동안 엘릭과 관련된 사건들이 좀 어수선했던가?
아무리 엘릭의 고향 집이 제국에서도 한미한 시골구석이라고 해도, 특종을 바라는 기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몇 번씩이나 들쑤셨을 테지.
그러니 아무리 엘릭이 미리 말을 해뒀다고 한들, 누이로서는 조바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자주 연락해서 달래주기는커녕, 무책임하게 두 달 가까이 거의 없는 사람처럼 지내다시피 했으니.
저렇게 화를 내지 않는 게 이상할 테지.
‘오히려 대단하신 거지. 그러고도 여태 가만히 계셨으니까. 그만큼 엘릭을 믿는다는 뜻일 테고…. 만약에 저놈이 내 동생이었으면 진즉에 죽였다, 진짜.’
세상 잃은 표정으로 있던 엘릭은 한참 뒤에야 억지로 션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고장 난 기계 인형 같았다.
“내 사랑하는 친구, 션이여! 부탁이 있…!”
“응. 안 돼.”
“내 말 끝까지 안 들었잖아!”
“안 들어도 뻔하니까 그렇지. 어디 별장에다 숨겨 달란 거겠지.”
“역시 내 베스트 프렌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구나!”
“응. 그러니까 싫어.”
“아, 왜!”
“나까지 덩달아 네 누님한테 갈려 나가고 싶진 않거든.”
“이 새끼야! 너 하나 살겠다고 소중한 친구를 버리겠단 거냐!”
“말은 좀 똑바로 해줄래? 난 자주 연락 드렸거든? 너희 누님이 여태 황도로 오시지 않았던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션은 엘릭의 누이를 몇 번 볼 기회가 있었기에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정말 저런 여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엘릭과 피를 나눈 남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소곳하고 점잖은 분이었다.
또한, 마법사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동생의 소망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은 헌신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서 늘 재수 없기만 한 누이를 두고 있는 션으로서는 부럽기만 할 따름이었지만.
이따금 그런 엘릭의 누이가 두려울 때가 있었다.
바로 엘릭이 사고를 쳤을 때.
평상시 조용한 사람이 한 번 화를 내면 무섭듯이, 엘릭의 누이가 딱 그런 과에 속했다.
“아아…!”
엘릭은 나라 잃은 표정이 되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업자득이지, 뭐.”
션은 대수롭지 않게 혀를 찼다.
* * *
션이 엘릭의 의사를 가문에 전달한 이후.
곧장 엘릭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초대장이 발부되었다.
네레스타 가쯤 되는 곳이면, 아무리 직계의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정식 초대장 없이는 절대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릭은 그것을 받아 션과 함께 네레스타 가가 있는 ‘안개의 언덕’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션이 엘릭에게 한창 걱정하고 있을 누이에게 연락은 했었냐고 물었고.
엘릭은 여태 상황이 상황이라 미루고만 있던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 네레스타 가의 마법사를 통해 허겁지겁 고향에다 연락을 넣었던 거였다.
물론, 아주 당연하게도 결과는 지금과 같았고.
“야.”
그러다 엘릭이 정신을 차린 건 통신이 끝나고 한참 뒤였다.
그의 두 눈은 비장했다.
“왜?”
“나 정했다.”
“뭘?”
“튈 거야.”
“뭐?”
“튈 거라고.”
션의 인상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미쳤냐?”
“어차피 지금 죽나 뒤에 죽나 죽는 게 똑같으면, 난 더 오래 살 길을 찾겠어!”
“닥쳐, 이 새꺄! 그럼 나한테 또 불똥 튀잖아!”
션은 큰일 날 소리를 한다면서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 말았지만.
엘릭은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어차피 누나도 황도까지 오려면 시간 걸릴 테고… 난 그사이에 북방으로 간다. 넌 그냥 내가 몰래 튀었다고 알아서 둘러대.”
“북방은 또 왜!”
“볼 일이 있어서.”
꽃의 신전이 북방에 있었다.
션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튀기만 해봐. 그랬다간 아주 그동안 네가 누님 몰래 사고 쳤던 것들, 내가 죄 일러바칠 테니까.”
엘릭이 인성 파탄자로 있으면서 저지른 전과가 꽤 깊었다.
물론, 개중 상당수는 고향에 알려지기 전에 그들이 알아서 쳐내고 있었고.
“젠장!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우리 절교한 거 아녔어?”
“이 빌어먹을 새끼…!”
엘릭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션은 턱을 높게 들면서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하여간 또 네 멋대로 하기만 해봐. 그때는 나도 아예 작정하고 너 담가버린다. 카를, 저놈 일거수일투족 잘 감시해.”
“예. 그러겠습니다.”
“젠장!”
엘릭은 옆에 있던 카를까지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다는 걸 깨달아야만 했다.
카를은 션의 비서이기 전에 네레스타 가에서 특별히 키운 ‘그림자’였으니까.
베럭스 교수를 그동안 감쪽같이 속여왔던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덧붙여 카를도 엘릭이라고 하면 평소 이를 박박 가는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누이라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러는 것이냐?』
그 때문일까? 메피스토는 더더욱 엘릭과 션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누이라는 존재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안달이 나고 말았다.
어쨌거나 부활을 꿈꾸는 그로서는 숙적인 메르빙거에 대해서 많이 알아두면 알아둘수록 좋았으니까.
그리고.
엘릭은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그냥 평범해요.]
『음?』
[그래서 더 무서운 거구요.]
『…?』
메피스토는 엘릭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릭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맞은편 좌석에 한가득 쌓여 있는 여러 서류뭉치를 보았다. 옆에는 여러 문장이 찍힌 초대장이나 편지들도 같이 놓여 있었다.
덜그럭. 마차가 흔들리면서 서류 탑도 같이 들썩였다.
“이게 전부 내 앞으로 온 것들이라고?”
“어. 이건 사업 제안서고, 이건 장학 안내장, 또 이건 초대장. 이야. 우리 엘릭, 이제 인기남이네?”
현재 한창 상승 주가를 달리고 있는 ‘라센트의 영웅’과 ‘찬성공작’에게 각지에서 보내는 러브콜들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