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스포트라이트
“….”
“….”
“….”
투표가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선거 대표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주고받기 바빴다.
[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뭐 사실 따질 게 있겠소? 다들 베럭스 학장이 그동안 그렇게 논란이 많았어도, 결국 뜻을 한데 모았던 건 사실 발굴권 때문이었잖소? 그런데 그게 무효화 됐으면 당연히 가치도 없어진 거지.]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기본적으로 마도사 급 이상인 그들은 따로 통신 채널을 열어 발 빠르게 메시지를 나누는 중이었다.
[더구나 엘릭… 메르빙거 대표의 말투로 봐서는 그동안 알려진 것과 다르게 갈등도 상당한 것 같고…. 흠!]
[그런데 저렇게 멀쩡한 걸 봐서는 완치된 지 오래된 것 같은데, 대체 그동안 왜 혼수상태로 발표가 됐던 거지?]
[아주 조금이지만, 마력향도 느껴지는 것 같고… 흠? 그동안 절맥증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소?]
[찝찝한 게 너무 많은데. 네레스타의 대표! 대체 어떻게 된 거요?]
[글쎄요. 메르빙거 대표와 관련 있는 건 제 동생이라. 저도 방금 알았답니다.]
[그러기엔 이미 알고 있던 눈치던데?]
[호호. 그럴 리가요.]
[그…!]
[그만, 그만! 메르빙거 대표에 관련한 궁금증은 추후에 풀도록 하고, 지금은 투표에만 집중합시다! 다들 어떡할 거요?]
[저흰 그동안 나눈 거래들이 있어서… 일단 그대로 가겠습니다.]
[불가.]
[저희도 불가.]
[흠! 어떡한다?]
[그렇다고 이미 가치도 없는 자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잖소? 다들 쉽게 생각합시다. 저울 왼쪽에는 용의 둥지, 오른쪽에는 베럭스 학장. 어디요?]
[그렇게 이야기가 나오니 결정이 너무 쉬워지는군.]
몇몇 선거 대표들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당연히 저울추는 왼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히려 지금은 그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가 관건인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바로 그때, 타샤가 던진 말에 선거 대표들의 시선이 마침 메르빙거 석에 앉고 있던 엘릭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 포기했다가 갑자기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 다른 후보들도 또랑또랑한 눈으로 앞다퉈 엘릭을 바라봤다.
이미 그들의 안중에 베럭스 교수 따윈 들어 있지도 않았다.
피식!
엘릭은 그들의 시선을 한껏 받으면서 가볍게 실웃음을 흘리다가 푯말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면서 입술을 달싹여 후보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총장 자리 팝니다. 선제시 부탁드리겠습니다.]
“…!”
“…!”
“…!”
* * *
“개, 개, 개표 결과… 2번 후보이신 후안 마타 님이 초, 총 득표율 67%를 기록하시면서… 2차 선거 없이 초, 총장 단일 후, 후보로 내, 내, 내정되셨습니다….”
리번은 결과를 발표하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창창할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미래도 똑같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찰칵, 찰칵!
찰카닥!
별 기대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덜컥 총장 자리에 앉게 된 후안 마타는 감격에 겨운 소감을 발표했지만.
정작 사람들의 관심은 갑자기 나타나 대세를 바꿔버린 엘릭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기자들의 촬영 도구도 그쪽으로 향해 있는 상태였다.
‘이슈 좋고, 그림도 좋고. 이만하면 자릿값도 두둑하고. 좋네, 좋아.’
보는 눈이 많아 최대한 자제하고 있어서 그렇지, 엘릭은 입술을 타고 번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중이었다.
『기가 차는군. 거기서 대놓고 거래를 할 줄이야. 아무리 메르빙거라고 해도 배짱이 좋은 건지, 그냥 정신이 나간 건지….』
메피스토는 이번에도 옆에서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누적된 학사 경고 전면 취소와 남은 학기에 대한 전액 장학금같이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해서.
국가 지원 프로젝트에 대한 메인 스태프 자격, 차후 진행될 사료 연구의 전폭적인 지원 및 관련 논문 작성 시 1저자 등재, 그리고 졸업 후 평생 객원교수 임용 등등.
그가 앞으로 학계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을 만한 스펙을 전부 얻어냈던 것이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이렇게 많은 거래를 성사시킨 것도 대단했지만, 절대 뒤로 발을 뺄 수 없도록 마나의 맹약까지 맺게 한 건 정말 기가 찰 정도였다.
[그럼 어떡합니까? 애당초 마음에 차는 인간이 없었는데.]
애당초 아카데미에서도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했던 그로서는 딱히 좋은 인상을 가진 후보가 없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현역 시절에 엘릭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붙여주었다면 이렇게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반쯤 장난삼아 거래 운운한 거였는데….]
『장난? 듣는 놈들 입장에서는 협박으로 들렸을 텐데?』
[뭐, 마음 급한 놈이 우물 파는 거죠. 덕분에 저는 더 이상 졸업 걱정도, 생계 걱정도 없어졌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어요?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오크 뒤통수 치고, 트롤 피 뽑고겠지.』
[뭐가 됐던 간에요.]
『하여간 저놈도 불쌍하지. 본인은 이걸로 거래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으잉, 쯧쯧!』
메피스토는 선거 대표들의 손을 일일이 맞잡으면서 감사 인사를 하는 새로운 총장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엘릭에게 한 번 코 꿰인 인간의 미래가 어떨지 불에 보듯 뻔했으니까.
[누가 들으면 제가 장기라도 파는 줄 알겠습니다.]
『그보다 더하지. 장기를 따이면 마음 편하게 죽기라도 하지, 너한테 걸리면 두고두고 고통에만 허덕이지 않느냐.』
[에이, 그 정도는 아닙니다.]
『네놈의 친구를 보니 그렇던데.』
[흐흐!]
『그나저나 저 인간은 대체 뭘 하는 거지? 배알도 없나?』
메피스토는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베럭스 교수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봐서는 화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분명한데, 여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고 있던 것이다.
오히려 억지로 화를 삭이더니, 자리를 뜰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8써클 마법사입니다. 하는 짓이 유치하고 방정맞아서 그렇게 안 보일 뿐이지, 원래는 ‘현자’ 급의 고수이니 수양도 그만큼 깊은 거죠. 사회적 체면도 있고.]
『그럼 그냥 내버려 두려고?』
베럭스 교수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중앙대관을 빠져나가려 했다. 리번이 다급하게 뒤에 따라붙었다.
[그럴 리가요. 부채질 좀 해야죠.]
이대로 그를 순순히 보내서야, 나중에 이성을 되찾고 어떻게든 반격할 기회를 찾을 게 뻔했다.
그가 학계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도 상당하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완전히 사회적으로 매장시켜야 해.’
엘릭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가볍게 달싹였다.
[풉!]
전음을 보냈다.
베럭스 교수만 들을 수 있도록.
뚝!
잘 걷던 걸음걸이가 멈췄다.
[0표.]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나를 우롱해!”
가뜩이나 그동안 병신 취급해왔던 마도명문 수치의 손 위에서 놀아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끓을 지경이었건만.
거기다 장작을 집어넣고 말았으니.
베럭스 교수는 그나마 간당간당하게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이 완전히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콰르르릉!
마침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스태프가 빛을 번뜩였다. 그러자 내장되어 있던 6써클 ‘불벼락’이 굉음을 일으키면서 엘릭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베, 베럭스 학장! 이게 무슨 짓이오!”
“피하게, 엘릭 생도!”
단상 위에 있던 사람들이 난데없는 날벼락에 기겁하고 말았다. 객석의 관객들도 혼비백산하고, 관리 위원들은 재빨리 엘릭을 보호하기 위해 그쪽으로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알려져 있기로 메르빙거의 대표는 마법을 전혀 익히지 못한 상태. 이런 테러에 노출된다면 즉사였다.
하지만 그들이 손을 쓰기엔 베럭스 교수가 일으킨 마법은 너무 강렬했고.
불벼락은 어느새 중앙대관의 천장에서부터 엘릭의 정수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불어라】.”
엘릭 주변으로 마력장이 넓게 퍼지더니, 아주 잠깐 거친 눈보라가 일어나 불벼락을 밖으로 튕겨냈다.
충격으로 단상이 갈기갈기 찢기고, 증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마치 안개라도 깔린 것 같았다.
“저건 설마 ‘새하얀 눈보라’?”
“마도명문의 수치가 어떻게 5써클 이상의 마법을…? 분명히 마법을 익힐 수 없다고…!”
“아니, 그보다 저건 라센트 영웅의…!”
“지금 그게 중요한가! 불벼락이 또 떨어지고 있지 않나!”
콰르릉, 콰르르-
베럭스 교수에게 엘릭이 자신의 마법을 막았다는 자각 따윈 없었다. 오히려 건방지게 살아남았으니 어떻게든 죽이겠다는 생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불벼락이 잇달아 쏟아지던 바로 그때.
콰콰콰!
별안간 수증기가 짙게 깔린 단상 위로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으면서 불벼락을 집어삼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도중에 형태를 꺾으면서 새의 형상을 갖췄다.
그것이 마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다는 전설의 새, 불사조를 연상케 했으니!
“나이도 지긋하게 드신 분이 자꾸 이렇게 지랄병을 떠시면 후학들이 병신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답니다.”
또각!
불사조 아래, 타샤가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나타나 싱긋 웃었다.
불새의 마녀.
손수 불사조를 길들이며 최연소로 7써클의 경지를 개척한 그녀에게 붙은 호칭이었다.
그리고.
파지지직!
쩌걱, 쩌거걱!
“이 이상의 난동은 테러라 규정하고 처벌을 가할 것이오, 베럭스 학장.”
“체통을 지키시오!”
뒤로 물러선 엘릭의 앞으로 54인의 선거 대표들이 하나둘씩 나서서 마력을 개방하자, 뇌전이 튀고 강풍이 부는 등 여러 기현상이 나타났다.
그들 역시 베럭스 교수에 못지않거나, 오히려 우위에 있는 마도사와 현자들.
그런데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었다.
베럭스 교수도 움찔거렸지만.
[대머리라서 0표인 건가? 모발도 0개, 표도 0개!]
그걸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을 엘릭이 아니었다.
“죽여버린다아아아!”
베럭스 교수는 정말 엘릭을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선거 대표들의 뒤에 숨은 엘릭에게 달려들었다.
콰콰쾅!
콰르르-
마력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면서 중앙대관이 무너질 것처럼 요동치는 동안.
『…정말이지 너는 마족으로 태어났어도 아주 훌륭한 마왕이 되었을 거다.』
[칭찬 감사합니다.]
메피스토는 끝까지 뻔뻔하게 나서는 엘릭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 * *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이번 우스던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난동 말일세! 혼수상태라던 엘릭 메르빙거가 떡 하니 나타나서는 완전히 판을 뒤집어버렸지 뭔가!”
“음? 그동안 발표가 잘못되었나? 근데 마도명문의 수치가 뭘 해봤자 그게 그거지, 뭘 그리도 오두방정인가?”
“그게 아니라고, 이 사람아! 일단 엘릭 메르빙거의 정체가 뭔지 아나?”
“뭔데?”
“라센트의 영웅이라더군!”
“무, 뭐…?!”
엘릭에 대한 소문으로 황도가 들썩거렸다.
가뜩이나 요 몇 달간 제국을 시끄럽게 했던 대발견의 주인공이 멀쩡하게 돌아온 것만 해도 아주 큰 이슈 거리였지만.
그보다 그런 그가 사실은 라센트의 영웅, 얼음 마도사라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소문이 폭발적으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론을 반영하듯이, 이튿날 쏟아지는 신문들의 헤드라인도 전부 엘릭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마도명문 수치의 화려한 귀환!]
[라센트의 영웅, 새로운 악당을 무찌르다.]
[그는 불치병이던 절맥증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었는가? 과연 용의 둥지에 숨은 비밀이란?]
[여전히 봉인이 풀리지 않은 둥지에 다시 쏠리는 관심.]
[다시 떠오르는 샛별, 메르빙거!]
[어느 황야에 스러졌던 샛별은 다시 떠오른다 – 앙헬 바르뎀 주필]
어젯밤 오랜만에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내던 중에 갑자기 연락 온 데스크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명망 있는 마도황립 아카데미, 우스던에서 총장 선거를 두고 절대 필설로 담을 수 없을 해괴망측한 음모와 난동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샛별이 떠올랐노라고.
바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웅, 엘릭 메르빙거의 이야기다.
……(생략)……
그의 조부 우스던 메르빙거가 누구였나? 스스로를 희생하여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절망하던 대마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고, 별이 되어 사라져야만 했던 비운의 영웅이었다. 이 제국과 대륙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빚을 갚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후손을 수치니 꼴통이니 하면서 괄시하고 무시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그런 조롱과 야유를 전부 극복해내고, 당당히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오랜 연구 끝에 아무도 해내지 못한 대발견을 이뤄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동안 그에게 굴레와도 같았던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해낸 것이다.
가히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선 영웅의 기상인 셈이다.
……(하략)……
“세상이 말세야, 그렇지? 이딴 걸 중요 사설이라고 내놓는 걸 보면 말이지.”
션은 침상에 앉아 맛나게 과일을 집어 먹고 있던 엘릭에게 신문을 집어던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또 뭐야? 영웅? 기상? 오. 아주 금칠을 해줬는데?”
엘릭은 좋다며 희희낙락하기 바빴지만.
이곳은 황립마도병원.
원래 엘릭이 묵는다고 알려진 바로 그 병실이었다.
세간에 발표되기로, 총장 선거에서 베럭스 교수의 암습으로 전치 12주를 판정받았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놈이 꾀병이나 일삼는 사기꾼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할 텐데.”
물론, 이번에도 동정 여론을 얻기 위한 사기극… 아니, 연기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