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스포트라이트
“라센트의 영웅이 황도로 향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라센트의 영웅이 마도명문의 수치라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도명문의 수치는 저기 마도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데 어떻게 거기서 나타나?”
황도의 중심가에 위치한 어느 여관, ‘바람이 머무는 곳’.
『‘라센트의 영웅’이라? 푸하하! 네놈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영웅, 영웅…! 인간들은 참 그놈의 빌어먹을 영웅이란 것에 아주 환장한단 말이지.』
메피스토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떠드는 대화들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처음 황도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곳 여관에 들어올 때까지. 줄곧 ‘라센트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냥 자신이 보고 있는 어린 메르빙거가 선대들과 마찬가지로 유명세를 얻는 과정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도 끝나질 않으니 심통이 단단히 났던 것이다.
『실제로 옆에 있으면 질투밖에 하지 않을 것이면서.』
메피스토는 애당초 영웅이란 단어가 싫었다.
인간들은 연약하다. 단순히 공포를 주는 것만으로도 쉽게 무너지고, 이익 앞에서 동료의 등에다 칼을 꽂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면서도 영웅이 나타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좌절하다가도 영웅이 나타났다 하면 거짓말처럼 희망을 품고 일어선다.
그 때문에 그와 마왕군이 다 이긴 싸움에서 몇 번이나 무너지고 말았던가?
결국 그가 봉인을 당했던 것도 그런 ‘영웅’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사실 영웅은 마족에게는 절대 없는 개념이었다.
강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한다. 약자는 도태되거나, 살아남기 위해 그런 강자에게 고개를 숙인다.
너무나 단순한 강자존의 이치로 살아가는 그들로서는 영웅에게 희망을 걸고, 스스로를 투영하는 인간의 습성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영웅을 줄곧 잘 따르면 또 이해를 하겠는데, 제법 권위가 높은 인간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로워질까 싶어 그들을 찍어내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었다.
‘초대 메르빙거 놈도 그러했었지. 사계가 은거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하지만 대개 인간은 영웅을 추종하고, 또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이 어린 메르빙거는 영웅이 된 것에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의문이 들어 엘릭을 바라보는데.
“….”
엘릭은 침중한 얼굴을 한 채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 위에 둥둥 떠 있던 시체를 보고 난 뒤부터 줄곧 저런 얼굴이었다.
『왜? 그게 전부 너 때문인 것 같나?』
메피스토는 엘릭이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가득 담긴 웃음.
『갑자기 그렇게 죄책감을 느낄 것 같으면, 애당초 신문으로 그런 기사들을 접했을 때부터 비슷한 마음이 들었어야지. 그때는 안 그러다,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되니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한 건가?』
메피스토의 말투는 신랄했다.
『아니. 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불에 뛰어들었을 불나방 같은 것들이다.』
“….”
『인간이든 수인이든 마족이든, 누구나 욕심에 눈이 멀게 되면 앞뒤 분간을 못 하게 되는 법이지. 아까 죽은 놈도 그중 한 명일 뿐이다.』
엘릭은 아무 말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메피스토의 말이 맞았다.
정말 심각성을 느꼈다면 이전부터 죄책감을 느꼈어야겠지.
어쩌면 이건 심리적인 자기방어 기제일지도 몰랐다.
스스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그래도 어쨌거나 그는 베럭스 교수가 실패할 거란 사실을 미리 알면서도, 그것을 이용하려고만 했을 뿐 막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양민들이 피해를 입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대대적인 투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하기도 했지만….’
물론, 자살한 사람들에게 죄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투자가 아닌 ‘투기’를 한 것은, 가정이 폭삭 주저앉을 정도로 돈을 때려 넣은 건, 그들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들을 사지로 몰고, 자신은 영웅이 되어 희희낙락하는 것이 과연 옳은 건가 싶은 건,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계속 청승을 떨 거라면 계속 떨던가.』
메피스토가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꼈다.
엘릭은 여태껏 냉소적이기만 하던 평상시 메피스토와 다른 태도에 묘한 기분이 들어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러던 그때.
“이거 뭐야? 기껏 고생해서 왔더니 식은 음식만 주는 거냐?”
맞은편에 누군가가 털썩 앉으면서 투덜거렸다.
순간, 엘릭의 표정이 저절로 펴졌다.
검은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쓰고 있어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션이었다.
“맥주도 로나이프 산이네? 야! 이거 시기만 하고 맛없다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너무 한 거 아냐?”
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한탄을 늘어놓았다.
“하긴 친구는 뺑이를 치든 말든 간에 혼자서 밖으로 싸돌아다니면서 팔자 좋게 연애 놀음이나 하는 놈에게 뭘 바라는 게 내 잘못이지, 잘못이야.”
“시켜줘?”
“여태 내 말 뭐로 들었어? 당연하지!”
“좋아. 계산은 네가 하는 걸로.”
“이 새끼가 또….”
엘릭은 션이 욕지기를 내뱉거나 말거나 따로 점원을 불러 평소 그가 즐겨 먹는 것들을 주문했다.
“오랜만이다. 두 달 만인가?”
인사를 건네는 엘릭의 입가에는 어느덧 미소가 걸렸다.
자신을 따라 감도는 마력향이 분명 느껴졌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만큼 궁금한 게 아주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션은 거기에 대해서 일절 묻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필요할 때 말해줄 거라고 믿는 거겠지.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믿을 수 있을 친구.
그런 녀석을 보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조금 침울했던 마음이 모두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션은 전혀 그렇게 안 보였지만.
“석 달이거든, 새꺄?”
“벌써 그렇게 됐나?”
“당연하지! 이젠 겨울도 거의 끝났는데!”
엘릭은 참 시간이 빨리 간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니 그렇게 느껴질 법도 했다.
“그냥 병원으로 오면 되지, 왜 굳이 여기로 오라고 한 거야? 거기다 귀찮은 짓까지 더 시켜서는…!”
엘릭이 보낸 편지에는 몇 줄의 문구가 더 추가로 적혀 있었다.
언제쯤 황도에 도착할 것 같으니 황도에서 자주 술을 마시던 장소에서 보자는 것과.
베럭스 교수를 완전히 끄집어 내리기 위한 ‘쇼’와 관련된 필요 사항들이었다.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그가 이렇게 직접 온 걸 봐서는 아무래도 일이 순조롭게 풀린 모양이었다.
“네가 했어?”
“내가 했겠냐? 당연히.”
순간, 션이 찌푸린 인상을 활짝 피면서 히죽 웃었다.
“우리 카를 님이 하셨지.”
엘릭은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휴!”
션이 발끈했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인성하고는…. 자기가 하기 싫으니까 시종 시키는 거 보소. 네 뒤치다꺼리 하는 카를이 불쌍하지도 않냐?”
션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너 양심은 무사하냐?”
“하겠냐?”
“젠장.”
“왜?”
“너한테 그딴 소리 들으니까 좀 짜증나서.”
“내가 인품이 좀 훌륭하긴 하지?”
“인성이 훌륭한 거겠지.”
“어쨌거나.”
“…내가 말을 말아야지.”
션은 엘릭과 더 말을 섞어봤자 또 자신의 울화통만 터질 것 같아 그냥 화제를 넘기기로 했다.
마침 나온 맥주를 한껏 들이켜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달리 맥주 맛이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여하튼. 카를이 좀 고생했다. 가문도 모르게 발굴권도 저쪽으로 조금씩 넘기고 있고.”
베럭스 교수를 찾은 라줄리라는 인물의 정체는 바로 션의 시종, 카를 되니츠였다.
그동안 두 사람의 뒤치다꺼리뿐만 아니라, 네레스타 가의 ‘뒷일’을 비밀리에 도맡아 처리하던 것이 카를이었고.
그는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해 베럭스 교수를 완전히 속이는 데에 성공했다.
엘릭이 그리는 ‘쇼’를 위한 밑그림이었다.
처음 션은 총장 선거를 며칠 앞뒀을 때 ‘자연스럽게’ 발굴권을 베럭스 교수에게 넘기라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엘릭이 미쳤거나 편지가 도중에 바꿔치기를 당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럭스 교수는 거의 낭떠러지까지 밀려난 상태고, 엘릭이 그냥 모습을 비친 것만으로도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첨언을 본 순간, ‘이놈이 그럼 그렇지’하고 혀를 차고 말았다.
-우리 학장님이 그래도 살아온 인생이 있으신데, 잠깐이지만 달콤한 꿈은 꾸게 해드릴 수 있잖아? 물론, 꿈에서 깨고 나면 정신 나가겠지만. 흐흐.
“기적처럼 발굴권을 얻어서 다시 기세등등해진 학장이 총장 자리를 바로 눈앞에 뒀을 때, 나타나서 깽판을 친다… 참, 너다운 그림이다.”
물론, 엘릭이 단순히 베럭스 교수를 괴롭히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일을 꼰 건 절대 아니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깃거리를 좋아한다.
게다가 그것이 흥밋거리가 가득한 영웅담이면 열광한다.
엘릭이 이사벨로부터 배운 것을 써먹으려는 것뿐이었다.
‘라센트의 영웅이 절망적인 체질을 극복한 마도명문의 수치고, 용 둥지의 주인이라는 것만큼 열광적인 그림도 없겠지.’
베럭스 교수는 그런 영웅을 방해한 악당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참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그만큼 더 아프잖아?”
“하여간. 악랄한 새끼.”
라줄리로 변장한 카를이 발굴권을 가져다준다면, 베럭스 교수는 시에스타라는 가상 시민단체에 더더욱 목을 매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엘릭은 진짜로 베럭스 교수의 목을 직접 매달아줄 생각이었다.
“총장 선거까지 이제 며칠 남았지?”
“이틀.”
“요즘 바람도 선선하던데.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아, 정말… 넌 미친 게 분명해.”
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저놈과는 적이 안 되는 게 맞았다.
* * *
[네레스타 가의 예고 없던 중대 발표!]
[갑작스러운 발굴권 포기 선언. 숨겨진 그 내막은?]
[네레스타 가의 독주를 염려한 다른 육망성 가문들의 압력 때문이라 조심스레 점쳐져.]
[발굴권을 되찾은 베럭스 학장, 다시 날개를 달다!]
[더더욱 흥미를 더해가는 아카데미의 총장 선거.]
“이 신문들 보이는가? 하하하! 혹시나 했는데. 정말 이렇게 해낼 줄이야!”
베럭스 교수는 자신을 향해 다시 호의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한 신문들을 보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며칠 동안에는 그렇게나 미웠고 저주스러웠던 곳들이, 지금은 이렇게 예뻐 보일 줄이야!
“오늘 오후에 비서들이 설문 조사를 돌렸는데 그러더군. 지지율이 다시 올라가서 총장 자리는 걱정할 것이 없을 거라고.”
베럭스 교수의 찬사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라줄리… 아니, 카를은 담담하게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 속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좋아 죽으려는 그에 대한 조롱기가 다분히 묻어 있었지만.
이미 권력욕에 눈이 멀고 만 그는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겐가? 정말 이 신문에 나온 대로 다른 육망성을 부추기기라도 했나?”
“영업 비밀입니다. 어쨌거나 총장이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스프부터 떠주는군!”
“이미 확실해진 게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며칠 앞서 그렇게 불러드린다고 해도 나쁠 건 없지요.”
“아, 그런가? 으하하!”
베럭스 교수는 파안대소를 터뜨리다가 카를의 손을 덥썩 잡았다.
두툼한 손길. 순간 카를이 움찔거렸지만, 베럭스 교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광기마저 어린 눈으로 물었다.
“시에스타라고 했었지? 그래! 자네들이 원하는 게 뭔가? 원하는 이권 사업이라도 있나? 아니면 정계 쪽에 다리를 놓아주길 바라나? 로비가 필요한 것이라면, 내 얼마든지 자리를 주선해줌세.”
우스던 아카데미의 총장은 단순한 직위가 아니었다.
‘별의 마도사’의 후예라는 영광된 자리이며, 마법사들의 최고 스승 격이 된다.
직급만 따진다면 후작 급에 해당하며, 학계를 좌지우지하고 정계에도 큰 입김을 가진다.
육망성의 여섯 탑주와 마도명문의 가주, 황실마도기사장(皇室魔道騎士長) 및 마법성(魔法省)의 장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자리인 것이다.
“우선은 얼마 남지 않은 총장 선거에 집중하시고, 저희가 원하는 건 그 뒤에 차차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런가? 그게 마음 편하시다면 그러도록 하시게!”
베럭스 교수는 아주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카를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차피 아카데미 총장쯤 되면, 시에스타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해도 별반 어렵지 않게 짓밟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껄껄 웃어대는 베럭스 교수를 보면서.
카를도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아주 날카롭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