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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5화 (35/405)

35화

스포트라이트

번듯하게 닦인 도로 위.

다그닥다그닥-

힘차게 달리는 말 위에서 느끼는 바람은 아주 상쾌했다.

하지만.

『본 왕이 그 말 했던가?』

메피스토는 엘릭과 다르게 인상을 와락 구기고 있었다.

“무슨 말이요?”

『언젠가 네놈을 지옥의 유황불에다가 푹 담가버리겠다고 말이다!』

“그럼 어쩝니까? 이놈이 메피를 귀신같이 알아보는데.”

『우라질…!』

엘릭이 ‘점박이’라고 이름 붙인 말은 메피스토가 옆에 붙은 순간부터 귀신같이 조용해졌다.

시장 주인은 이놈이 이렇게 얌전하게 구는 건 처음이라며 ‘역시 얼음 마법사님이십니다요!’하고 감탄하기도 했지만.

말은 메피스토가 있는 곳을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바빴다.

여하튼.

엘릭은 그 뒤로 말에 올라타 곧장 황도로 향하는 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근데 이놈, 볼수록 영물이네요.”

『왜?』

“메피를 감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뭐? 하!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한낱 미물 따위가 아무리 감각이 날카로워 본 왕을 감지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지진이 있기 전에 느끼는 수준…!』

메피스토는 콧방귀를 끼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반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귀안(鬼眼)을 타고났다는 뜻이니 ‘진짜’ 영물이란 내용이었다.

“정말이라니까요. 이놈 자꾸 메피스토를 힐끔거려요.”

『…음?』

메피스토는 그제야 말을 돌아보았다.

순간, 말은 메피스토와 눈이 마주치더니, 흠칫 놀라면서 재빨리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순히 감지한 게 아니라, 정말 메피스토를 보고 있었다!

『뭔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냥 마시장에서 아무렇게나 데려온 녀석이, 정말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다는 영물의 ‘기질’을 타고난 녀석이라고?

자고로 영물이란 천금을 주고도 못 구한다.

스스로 주인을 정하고, 한 번 정하면 한평생 주인을 위해서만 살기 때문이다.

그건 이 시대나 메피스토가 활약하던 시대나 똑같은바. 과거 마왕들조차도 영물이라 하면 껌뻑 죽을 정도였다.

쉽게 말해, 동물계의 재능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재능충 옆에 또 재능충이라니. 이것들은 세트로 다니는 건가?』

메피스토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엘릭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처음으로 들인 애완동물이, 영특하다는 걸 싫어할 주인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우리 학장님이 애타게 날 기다리신다. 어서 가자.”

히히힝!

말, 점박이는 엘릭의 말에 호응하듯이 길게 울음소리를 내뱉으면서 더 힘차게 달렸다.

* * *

와장창창!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발굴권이라도 가져오라는 것 아니냐!”

베럭스 교수는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에 얹혀있던 물건들을 죄다 쓸어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앞에 있던 리번은 자라목이 되어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대대적인 기대와 환호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던 탐사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한창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마구 위로 찔러대던 베럭스 교수의 인기는 금세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기대가 쏠렸으니, 낙폭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사전에 쌓아둔 ‘마도명문의 대발견을 묵묵히 도운 참된 스승’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완전한 추락만큼은 피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베럭스 교수는 더더욱 엘릭의 둥지에 대한 발굴권에 더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좀처럼 쉽지 않았다.

엘릭의 둥지에는 션의 지분도 어느 정도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굴권을 사이에 둔 아카데미와 네레스타 가 간의 신경전은 점차 네레스타 가로 기울어지고 있었고.

그럴수록 아카데미 내에서 베럭스 교수의 입지는 계속 좁아지는 중이었다.

‘망할 션 네레스타…! 감히 이런 식으로 스승의 등에다 칼을 꽂아? 두고 보자! 네놈만큼은 두 번 다시 학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할 테니!’

그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며 복수를 다짐해도, 이 위기를 타개하지 못한다면 당장 자신에겐 미래가 없었다.

“어떻게든 찾아올 방법을 만들어! 언론을 움직이든, 윗대가리들에게 돈을 먹이든 방법을 찾아오란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발굴권만 얻으면 된다.

그러면 어쨌거나 총장 선거는 이길 수 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여론도 잠잠해질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리번은 고개를 숙이고는 허겁지겁 집무실을 나서야 했다. 그 역시 베럭스 교수와 한 배에 올라탄 이상 공동 운명체였다.

총장 선거까지 남은 시한은 이제 사흘.

그 안에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만 했다.

털썩!

베럭스 교수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찌푸려진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밖에 없어! 제 잇속만 챙기려 들지…! 대승적인 안목은 쥐뿔도 없는 개돼지들밖에 없으니!”

그렇게 씩씩대면서 숨을 고르던 중 갑자기 집무실 문이 열렸다.

“뭐야? 내 허락 없이 아무도 들이지 분명히 말했…!”

“이제야 저희와 손을 잡으실 마음이 좀 생기셨습니까?”

베럭스 교수가 신경질을 내건 말건 간에 여유로운 태도로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창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희멀건 얼굴과 피처럼 붉은 입술.

만약 번듯한 슈트를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여자라고 생각했을 정도의 미남자였다.

그는 여유롭게 바닥에 부서진 집기며 천장이 닿을 정도로 쌓인 책 등을 둘러보면서 베럭스 교수에게 다가왔다.

“넌…!”

“전에 인사드린 적이 있던 ‘시에스타’의 라줄리입니다. 고민하실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결정은 하셨는지요?”

한 달 넘게 희망을 걸었던 발굴이 완전히 실패로 판명이 난 직후.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베럭스 교수에게 정체불명의 사내가 찾아왔었다.

자신들을 신생 시민단체라고 밝힌 사내는, 만약 필요하다면 베럭스 교수를 총장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명함을 남기고 갔었다.

하지만 그동안 정신없이 이리저리 치이느라 그들에 대해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베럭스 교수는 기억 한편에 묻혀 있던 기억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무슨 흡혈귀도 아니고, 안색이 너무 창백해서 섬뜩하다는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날 총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발굴권이라도 따다 주겠다는 건가?”

하지만 베럭스 교수는 콧방귀만 낄 뿐이었다.

그게 어디 쉬웠다면 자신이 이렇게 고생이나 했을까.

하지만.

“드린다면요?”

“뭐?”

“저희가 발굴권을 따다 드린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함께 하시겠습니까?”

“…!”

베럭스 교수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라줄리의 미소가 커졌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학장님께서는 저희가 못 미더우신 것 같으니, 먼저 저희가 발굴권을 따다 학장님께 드리겠습니다. 함께 하실지 말지는 그 뒤에 정하시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학장님과 저희 간에는 일절 계약을 맺은 흔적이 없습니다. 믿으시거나 마시거나, 어차피 학장님께는 손해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

베럭스 교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줄리의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 한참 동안 노려봤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결국.

침묵 끝에 입을 먼저 연 것은 베럭스 교수였다.

궁지에 몰린 건 자신이었으니까.

“…좋아. 뭘 어떻게 하면 되지?”

* * *

“후. 드디어 돌아왔네.”

엘릭은 일드와 함께 황도로 들어서자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황도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센느 강과 강변을 따라 격자 형태로 설치된 구획들.

찬란한 햇살에 반짝이는 노점상과 아름답게 조성된 주거단지 등이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에 떠날 때까지만 해도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바쁘게 오고 간다. 그 안에는 귀족이고 양민이고 신분의 구애 따윈 없었다. 모두가 저마다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생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 들었는가?”

“뭘?”

“그 라센트인지 뭔지 하는 도시 있잖나? 거기서 얼마 전에 청사자 가문이 한바탕 일을 일으켰다더군.”

“사자 놈들이 우리 같은 양민들 눈치 안 보고 행패를 부린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아니, 글쎄. 이번엔 그 정도가 아니었다니까?”

“그럼?”

“라센트에 친척이 사는데… 그놈 말에 따르면, 구획 몇 개가 통째로 날아갈 정도였다더군. 사람도 여럿 죽고, 집도 꽤 많이 타버렸고. 그게 바일 가의 내분 때문이었다나?”

“허! 그런 몹쓸!”

“한데, 그 때문에 난리가 났을 때, 웬 마법사가 나타나서는…!”

소문이란 빠르다.

교역이 끊어지지 않는 한, 바쁘게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게 새롭게 나타난 영웅과 관련된 소문임에야…!

“그래서 그 얼음 마법사가 바일 가의 빌어먹을 것들을 싹 쓸어내고, 무향화까지 구해내서는!”

“무향화라면… 옛날 황태자비가 될 뻔했던?”

“그래. 청사자의 독녀.”

“허!”

무향화 이사벨은 사교계에서는 조롱거리가 될지언정, 반대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여론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녀가 보통 귀족 영애와 다르게, 간간이 고아촌이나 빈민촌을 직접 찾아 자원봉사를 하는 등 좋은 일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사벨이 황태자와 파혼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가장 아쉬워했던 게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었더라면, 좋은 국모(國母)가 되었을 거라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런 무향화가 위기에 처했고, 이것을 어느 이름 모를 마법사가 멋지게 구해냈다?

당연히 일반 사람들이 흥미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환호하는 법.

이미 라센트 시 주변 일대에서는 ‘라센트의 영웅’을 기리는 음유시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것참. 소문 적당하게 내라니까, 정말 열심히도 내셨네.”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려 콧잔등을 긁어야 했다.

사실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진 데에는 이사벨의 솜씨가 섞여 있었다.

-저는 가장 먼저 이번 일을 사람들의 입에 계속 회자 되게 만들 거예요.

-여론을 형성하시려는 거군요.

-예. 원래는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될까 최대한 쉬쉬하려 했지만… 이제는 아예 드러내서 숙부님이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하려구요.

-좋은 계획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

-혹시 엘릭 님을 영웅으로 만들어 드려도 될까요?

-그게 무슨…?

-긍정적인 여론을 만드는데 영웅담만 한 것도 없어서요.

파울 바일을 악당으로 만들고, 엘릭과 이사벨을 이에 맞서는 영웅으로 만든다.

명성을 얻을 필요가 있던 엘릭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에 그러라고 허락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을 추앙하는 듯한 내용이 담기니 어쩐지 낯간지럽기도 했다.

뿌듯하기도 했고.

『여기 있는 어리석은 우민들이 그 영웅의 실체가 사실은 돈에 환장하고, 인성이 완전히 파탄 난 종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는지, 쯧!』

옆에서 혀를 끌끌 차면서 초치는 양반만 없다면 더 좋을 텐데.

다만, 조금 민망한 점이 있다면.

“한데, 그럼 그 영웅님과 무향화께서 사귀시는 거여? 어떻게 되는 거여?”

“음! 그렇게 되지 않을까?”

“흐흐. 항간에는 황태자가 아직도 무향화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거 혹시 삼각관계라도 벌어지는 거 아녀?”

단순한 영웅담이 될 줄 알았던 장르가 로맨스가 되었단 점이랄까?

이사벨이 아름답긴 했다지만, 그렇다고 이성적으로 이렇다 할 감정은 느끼지 못했던 엘릭으로서는 묘한 기분에 젖어 들던 그때.

“어, 어? 시, 시체다!”

센느 강의 물살을 따라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또…!”

“이번에도 탐사대에 투자했던 사람인가? 대체 하루에 몇 명이나 투신하는 건지. 에휴!”

사람들이 혀를 차며 내뱉는 소리에.

“….”

그 순간.

엘릭은 굳은 얼굴로 말없이 시체를 바라봐야만 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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