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스포트라이트
왜 이렇게 요즘 들어 골치를 썩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 건지.
션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누님, 지금 환자 상태가 그리 좋지를 못해서 방문을 전부 거절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니까 마도의 자격도 있는 이 누님이 그 중환자를 친히 살펴주겠다고 몇 번이나 설명하고 있는 거잖니?”
타샤 네레스타는 타오를 듯한 적발을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일부러 션의 말투를 따라한다.
그를 약 올리려는 개수작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넘어갔다간 옳다구나 하고 병원 안으로 침입을 시도할 거란 점이었다.
때문에 션은 어떻게든 꾹꾹 눌러야만 했다.
‘하여간 엘릭, 이 새끼 때문에 내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지. 하필 누님이 관심을 가질 게 뭐야?’
타샤 네레스타.
육망성 중 하나인 네레스타 가가 낳은 역대 최고의 인재.
션 역시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에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이미 조교수라는 타이틀을 딸 정도로 화려한 내력을 자랑한다지만.
자신의 위로 하나 있는 누이가 가진 명성 앞에서는 빛바랜 개살구에 불과할 뿐이었다.
세 살에 마나를 감지하고.
여섯 살에 수식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며.
열두 살에 아카데미의 전 과정을 모두 수료한 괴물.
열세 살부터는 우스던 메르빙거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다던 대원로 ‘적월의 무희’의 직전 제자가 되어 모든 이들의 기대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열다섯이란 나이에 마도사가 되어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땄었으니.
그래서 션에게 있어 타샤는 같은 피를 나눈 남매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별처럼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같았다.
물론, 6년이라는 나이 차는 그런 거리감을 더 또렷하게 만들기도 했다.
여하튼.
그녀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천재였다.
미모, 지성, 배경까지.
시대를 잘못 타고났기에 그녀와 견줄만한 천재가 두 명이나 더 있어 같이 ‘신성(新星)’이라고 묶이긴 한다지만.
그래도 미래에 다가올 이 시대는 그녀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타샤 네레스타에게는 흠이라면 딱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지랄 맞지, 성격이. 그것도 아주.’
그녀는 자신의 천재성을 너무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도도하고.
또한, 자신만만하다.
실패 따윈 겪어본 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한번 마음먹은 걸 놓친 적도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엘릭에게 흥미를 보였다.
그전까지는 엘릭이란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용의 둥지’라는 이슈에 확 꽂히고 만 것이다.
그랬다.
그녀는 용 성애자였다.
“이 모양이니 서른 가까이 되도록 연애를 못 하지….”
순간, 타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씩 웃으면서 고개를 외로 비딱하게 꼬면서 말했다.
“흐응! 우리 동생님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션은 속으로만 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튀어나오자 흠칫거렸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나이와 연애. 이 두 가지는 최근 집에서도 그녀 앞에서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금기어였다.
“내가 미모가 달리니, 아니면 능력이 달리니? 남자들이 하나같이 어린애 같아서 내 발목만 붙잡기 바쁘니까 안 하는 거지. 신식 여성. 커리어우먼, 몰라? 이렇게 시대에 뒤처져서야….”
“누가 뭐랍니까? 혼자 찔려서는.”
“이 새…!”
타샤는 션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욕지기가 목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삭혀야만 했다.
“아, 하여간 됐고. 엘릭과 누님이 무슨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의식도 없는 사람 찾았다가 의료진들까지 힘들게 하지 말고 가세요. 야, 너희들 뭐해? 누님 안 모시고?”
션은 타샤의 뒤편에 있던 시종들을 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종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타샤의 눈치를 살폈다.
타샤는 아주 잠깐 지그시 션을 노려보다가, 무슨 생각인지 피식 웃더니 돌아섰다.
“그렇게 몸이 안 좋다니 어쩔 수 없네. 내일은 부디 차도가 있길 바랄게. 가자.”
션은 도도한 발걸음으로 되돌아가는 타샤 일행들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매일 여기는 왜 오는 거야? 무슨 냄새를 맡은 것 같기는 한데, 대체 뭘 맡았는지 알 수도 없고.”
가뜩이나 베럭스 교수 쪽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건만.
타샤까지 이렇게 골머리를 썩이니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아가씨는 가셨습니까?”
그때, 시종 카를이 조심스레 얼굴을 비췄다.
“넌 대체 어디 있다가 튀어나온 거야?”
“어디긴요. 아가씨 눈길 안 닿을 곳이었죠.”
“허!”
자기만 혼자서 살겠다고 피신해있었다는 시종의 뻔뻔한 대답에 션은 한순간 말문이 막혀야 했다.
“그나저나 저 마녀는 왜 저런데? 뭐 알아낸 건 있어?”
“마도서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마도서?”
“예. 혹시 「용의 회명서(晦冥書)」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음? 그거 전래동화 같은 거 아녔나?”
용의 회명서.
마법 학계에서도 아주 장난처럼 내려오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용이 완전한 사멸의 길을 걷기 직전. 마지막 남은 용왕이 엄습해오는 마왕의 군단을 홀로 막아서면서 남겼다는 일지.
그 속에는 베일에 가려지다시피 한 용마대전(龍魔大戰)의 진상과 함께 당시 시대적 상황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으며.
용의 관습과 마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만약 발견된다면 막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를 받고 있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진짜 발견되었을 때나 가질 수 있는 경우.
실존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발견되었답니다.”
“뭐? 그럼…?”
“예.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엘릭 님의 둥지에서 발굴된 여러 매장품 중에서 섞여 있다는 말이 나도는 모양입니다. 아시다시피 아가씨는 용이라고 하면 환장하는 분이시니…. ”
“젠장!”
션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럼 품목이 유출됐단 거잖아?”
“다행히 사전에 차단되어 외부로는 새어나가지 않고, 가문 내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게 그거지!”
션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누이가 안다는 건 가주이신 아버지도 알게 되었다는 뜻.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자식도 팔 수 있을 아버지가 과연 이런 좋은 기회를 내버려 두실까?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여태 조용히 계시는 게 무서울 지경이었다.
“병실, 둥지… 경비들 배로 늘리고, 내 허락 없인 아무도 접근 허락하지 마. 설사 누님이나 아버지의 엄명이라고 해도 절대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저, 그리고….”
“또 뭐야? 더 있어?”
션의 인상이 무참하게 일그러지던 그때.
“이게 오늘 아침 자에 도련님 앞으로 왔습니다.”
카를이 불쑥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수신인만 적혀 있을 뿐,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은 편지.
이건 뭔가 싶어 션은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펼쳤다가, 순간 인상이 더 구겨지고 말았다.
-형, 이제 간다.
“이 개새끼가, 몇 달 만에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런 무심한 놈을 친구라고 여태 보호해주고 있었다니.
션은 뻐근해지는 뒷목을 꽉 붙잡아야만 했다.
옆에서 카를이 이죽거렸다.
“어, 어? 조심하세요. 도련님 벌써 쓰러지시면, 저 다른 직장 알아봐야 하잖습니까? 귀찮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째서 주변엔 이토록 혈압 올리는 원수들밖에 없는 건지.
션은 이십여 년 동안 쌓은 자신의 인간관계가 벌써 회의적으로 느껴졌다.
* * *
“아이고, 벌써 가십니까? 조금 더 머물다 가시지….”
“아닙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어서 복구가 끝나서 하루라도 빨리 일상으로 되돌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릭은 이사벨 일행이 떠나고 이틀 뒤에 라센트를 떠났다.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떠나면서 이사벨이 뒷마무리를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이 역시 의뢰라고 받아들인 엘릭은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을 돌보는 한편, 그들에게 이사벨이 남긴 배상액을 나눠주기도 했다.
“고생 많으셨소.”
그렇게 떠날 때가 되자, 자청해서 여태 같이 남아있던 첸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함과 미안함이 섞인 인사.
엘릭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도리를 다했을 뿐인 것을요.”
『암. 다 했지. 돈에 대한 도리.』
물론, 메피스토의 말은 안 들리는 척 무시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주시긴 어렵지 않소? 우리 바일 가는 평생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요. 또한 이 기사 첸도 마찬가지일 거라 맹세하오.”
“그러실 필요 없다고 해도.”
『그깟 은혜는 돈으로 주면 더 좋을 텐데. 그렇지 않나?』
엘릭은 가만히 웃으면서 화제를 도왔다.
“첸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루아침에 터를 잃은 이들이요. 돈만 던져준다고 해서 다 끝날 일이 아니지. 파울 바일의 짓이긴 해도 이 역시 바일 가가 저지른 죄. 바일 가의 이름으로, 책임감 있게 마지막까지 남아서 이들을 도와주고 카노이로 떠날 생각이오.”
『민심을 달래려는 거겠지. 그렇게 진정성 있는 자세를 보이면 사람들의 마음도 돌아설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면서 일을 저지른 파울 바일에 대한 악명을 퍼뜨릴 거고…. 그 여자, 생긴 건 되게 순하게 보였는데, 생각보다 약삭빠른 구석이 있군?』
[그게 귀족이 가진 책임이라는 겁니다.]
『명분 다지기겠지.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면 끝날 것을. 인간들은 뭘 그리도 따지는 게 많은 건지. 쯧!』
엘릭은 첸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군.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웃으면서 만나도록 하시지요.”
첸은 처음으로 웃고 있었다.
* * *
히힝, 히히힝!
히히히힝!
엘릭은 황도로 떠나기 전에 말을 구매하기 위해 마시장을 방문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것들 왜 이래?”
여태 얌전하게 풀을 뜯거나, 무리를 이뤄서 놀고 있던 말들이 엘릭이 다가오자마자 갑자기 투레질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연재해라도 만난 듯이 잔뜩 흥분해서는 날뛰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마시장을 탈출할 기세였다.
말 관리자들은 그것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본 왕의 기척이라도 읽었나 보군.』
메피스토는 그것을 보면서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메피를 읽었다구요?”
『모름지기 짐승이란 감각이 예민할수록 살아남기 쉬운 법이니까. 아마 야생에 더 오랫동안 노출된 놈들일수록 본 왕을 더 잘 읽어낼 것이다.』
“그럼 큰일이잖아요?”
『어째서?』
“그랬다간 앞으로 동물이 있는 곳은 가지도 못하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후후! 그건 네 녀석이 걱정할 일이지, 본 왕이 신경 쓸 일은 아니잖느냐?』
너무 무책임한 태도.
엘릭은 미간을 가만히 좁혔다.
‘이 양반을 어디 확 부려 먹을 데 없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시장의 주인이 쪼르르 달려와 엘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얼음 마법사 아니십니까?”
『푸흡! 저 별명은 언제 들어도 참 웃기는군!』
얼음 마법사. 방화를 저지르던 청랑들을 눈보라를 일으켜 제압한 엘릭에게 라센트의 시민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걸까, 왜 저렇게 쪽팔리게 지은 건지. 메피스토는 두고두고 놀려먹고 있었다.
“말을 구매하고자 하는데 혹시 괜찮은 놈이 있겠습니까?”
“그런 일로 저희 시장을 찾아주신 거라면 감사할 따름입죠. 다만, 얼음 마법사님께 어울릴 놈이라면 웬만한 놈으로는 안 될 텐데….”
“그냥 황도까지 지치지 않고 충분히 달릴 수 있는 놈이면 됩니다.”
“어이쿠! 아무 놈이나 드렸다간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뭇매를 맞을 겁니다요. 어디 보자.”
시장 주인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슬쩍 뜸을 들였다.
“사실 가격도 적당하고, 혈통도 좋고… 그래서 체력도 좋은 영특한 놈이 한 마리 있긴 합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놈이 원체 사나워서… 말만 들으실 게 아니라 직접 보시는 게 나을 듯하니 절 따라오십쇼.”
엘릭은 시장 주인을 따라, 넓게 펼쳐진 초원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저놈입니다요.”
시장 주인이 가리킨 곳. 말들이 한창 모인 곳에서도 홀로 떨어진 녀석이 있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다른 말들이 녀석의 근처를 전혀 얼씬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
보통 말보다 1.5배는 더 큰 우람한 덩치와 사자처럼 길게 늘어뜨린 갈색 갈기.
눈빛도 제법 사나운 녀석이었다.
“원래 품종을 개량하기 위해 종마로 야생에서 데려온 놈인데… 성질이 사납고, 똑똑하긴 또 얼마나 더럽게 똑똑한지. 어휴! 여태 길들이질 못해 내버려 두고만 있는 실정입니다요. 교배를 시키려 해도 좀처럼 말을 듣질 않으니….”
한 마디로 마시장의 골칫거리란 이야기였다.
엘릭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놈을 가만히 보다가, 곧 좋은 생각이 떠올라 씩 웃고 말았다.
[메피.]
움찔!
순간, 메피스토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촉이 들어 슬쩍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왜?』
[아까 덜 길든 놈일수록 메피를 잘 감지한다고 했죠?]
『…그런데?』
[저놈 옆에 가봐요.]
엘릭이 턱짓으로 수말을 가리켰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