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하산
“날… 살려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한 명쯤은 남아서 돌아가야 제 말을 제대로 전달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이사벨은 무릎을 꿇은 채로 흔들리는 눈을 보이는 청랑을 노려보았다.
기습자들 중 유일하게 남은 청랑.
엘릭에게 특별히 한 명만 살려달라고 부탁해서 남은 녀석이었다.
이 순간.
이사벨은 기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 사람들. 이런 눈도 가질 줄 알았었구나.’
그동안 가문의 사람들은 재능이 없는 그녀를 멀리하곤 했다.
예의를 지켜도, 어디까지나 ‘주군의 딸’이기에 갖추는 예의. 항상 거리를 두고 있었다.
특히 숙부님 쪽 사람들은 그런 예의도 지키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가 많았고, 청랑은 이따금 소름끼치는 눈길을 보이기도 했으니.
그게 전부 무시에서 나오는 태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들이 처음으로 다른 감정을 내비친 것이다.
두 눈에 비치는 감정은 그녀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날… 두려워하고 있어.’
가솔들이며 외부의 사람들까지 아버지를 마주할 때면 보이는 모습과 상당히 유사했다.
물론, 그 두려움이 자신이 아닌 뒤에 서 있는 엘릭에게 향해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질타를 내뱉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것으로 하고 싶어.’
힘에 대한 욕망이, 심장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전… 달이라고 하시면?”
“가서 숙부님께 전하세요. 이제 더 이상 숙부님과의 거래는 없다고.”
하지만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파울 바일에게 왕관을 건네어 자신의 사람이라도 구해야겠다던 안일한 생각 따윈, 이제 갖다버리기로 했다.
자신이 황도로 되돌아가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은 손발마저 자르려 하는 순간, 이미 숙부님과의 거래 가능성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 말씀은…?”
“숙부님께서 아무리 발악하셔도 청사자의 자리는 절대 숙부님께 가지 않을 거다, 그런 말이에요.”
이사벨은 어떻게든 왕관을 자신이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걸어야 할 길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지금은 굳이 깊게 생각지 않았다.
“…알, 겠습니다.”
청랑은 굳이 거기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 이사벨이 주군에게 이빨을 들이 내밀었다는 보고는 어떻게든 올려야만 했다.
“잠깐.”
그래서 바삐 일어서서 도망치려는데, 갑자기 엘릭이 불러 세웠다.
청랑은 혹시 그가 변덕이라도 부리려는 건가 싶어 등골을 쭈뼛 세우며 돌아보는데.
화악!
눈이 마주친 순간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도 메스꺼웠다.
“아냐. 가봐.”
청랑은 다시 엘릭의 말이 바뀔까 싶어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났다.
이사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모습을 보다가 엘릭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신 건가요?”
엘릭이 씩 웃으면서 답했다.
“저주입니다.”
“무슨…?”
“저놈도 원래 다른 놈들처럼 심장 어림에 빙독이 박혀 있거든요. 지금은 잠들어있지만.”
“…?”
“여기서 보고 들은 것들을 전부 보고하고 나면, 그 빙독이 깨어나서. 쩌거걱, 펑!”
“…!”
엘릭은 ‘펑’이라고 말한 부분에 크게 박수를 치면서 차갑게 웃었다.
“이왕에 경고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하잖습니까?”
“아.”
옆에서 메피스토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 역시 뒤끝 하나는 마족보다 더했던 메르빙거다운 모습이로군.』
그러다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 너무 깊숙하게 관여는 하지 않을 거라면서? 그렇게까지 하면 저놈들이 입에 칼을 물고 너를 찾으려 들 텐데.』
엘릭은 이사벨로부터 그녀를 위협하는 이들이 숙부, 파울 바일이라는 언질을 들은 상태였다.
[어차피 놈들은 어떻게든 저를 찾으려 들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사벨을 도우면서 청랑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오십 가까이 처치했잖습니까? 한 놈에게 당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쪽팔리기도 쪽팔릴 거고….]
『비밀을 알고 있는 ‘마법사’도 있고?』
[치부를 절대 마탑에게만큼은 들키지 않고 싶은 게 사자들의 특성이니까요.]
치부는 곧 약점이 될 수 있으니까.
그만큼 사자공가와 마탑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잠재적인 적이라 여길 만큼.
[거기다 제 마법… 특이하기도 엄청 특이하잖아요? 어차피 황도 가서 아카데미 뒤집고 나면, 아무리 정체 숨겨도 금세 저인 거 들통날 겁니다.]
빙계 마법을 주특기로 하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이왕에 들킬 거, 아예 판세를 확 키우려는 거로군?』
[예.]
어차피 파울 바일과 돌아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상황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수밖에.
[부활한 메르빙거가 청사자와 손을 잡는다는 그림. 괜찮잖아요? 다행히 청사자는 원래 사자공가에서도 별종 취급받기도 했었고. 메르빙거도 마탑에서는 내놓은 자식이었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뿐만 아니라, 단단한 입지까지 한 번에 구축하겠다는 거로군.』
마법에만 재능이 넘쳐나는 줄 알았더니, 제법 서 있는 위치를 읽을 줄도 아는 놈이었군.
메피스토는 처음으로 엘릭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본 왕이 현 인간들의 정세는 잘 몰라도, 네가 그리는 그림의 가장 큰 부분은 저 여자가 체급을 그만큼 키운 다음에나 가능한 이야기지 않나?』
[간단합니다.]
엘릭은 메피스토의 의문을 일축하면서 이사벨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카노이로 갈까 해요.”
황도에서 제법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청사자께서 요양 중이시로군요.”
“예. 당분간 아버지를 간호해드리면서 기회를 엿볼까 해요.”
엘릭은 어쩐지 이사벨의 말투가 이전보다 훨씬 힘이 실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힘을 기르시려는 겁니까?”
“그동안 아버지께 은혜를 입었던 의숙들이 많으시거든요. 그분들께 도움을 구할까 해요.”
이사벨은 그동안 가문 내 갈등을 가문 안에서 정리하고자 했다.
그것이 가문을 위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살아남고, 이기려면 독해져야만 했다.
칼은 절대 가려 쓰는 게 아니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파울 바일이라고 해도 감히 청사자께서 계시는 성지까지 건드리진 못할 테죠.”
“하지만…!”
이사벨은 뭔가를 말하려다 뒷말을 삭혔다.
갈등의 주요 원인인 아버지의 치료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국 싸움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엘릭은 외부인이었다.
그리고 마법사였다.
사자와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마법사.
거기까지 도와달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헤어지기도 해야 하고.’
갑작스럽긴 했지만, 이건 작별 인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는 걸까?
“받으십시오.”
그런 이사벨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릭이 가볍게 실소를 흘리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이사벨에게 건넸다.
작은 글씨가 아주 빼곡하게 적힌 메모였다.
“이게 뭔가요?”
“청사자의 치료법입니다.”
“…!”
“…!”
“그, 그게 무슨!”
소스라치게 놀란 건, 이사벨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호위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첸은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기까지 했다.
“우선 제 정체부터 밝히겠습니다.”
엘릭은 여전히 얼굴에 맺혀 있던 마력을 회수했다. 그러자 변형되었던 얼굴이 제자리를 찾았다.
“어, 어…? 당신?”
이사벨 등은 그런 엘릭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특히 이사벨은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낯이 익은 얼굴에 입을 벙긋거렸다.
“제 이름은 엘릭 메르빙거. 메르빙거 가의 가주인 ‘찬성공작(燦星公爵)’입니다.”
“…!”
“…!”
“…!”
찬성은 찬란한 별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니.
‘별의 마도사’라는 칭호로 유명하던 조부, 우스던 메르빙거가 대마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난 뒤, 사후에 황실에서 내린 작위.
이렇다 할 실권은 없으나, 그 이름만으로도 찬란한 영광이 담겨 있는 귀중한 작위였다.
하지만 엘릭은 그동안 공작 위를 받고 나서도 ‘수치’라는 별칭 때문에 차마 그것을 내세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설… 마 황립마도병원에 혼수상태로 계신다던…?”
이사벨이 떨리는 눈동자로 물었고.
“예. 그게 접니다.”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사벨은 의문을 던지려다가 도로 삭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메르빙거의 유일한 후손은 분명히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엘릭은 마도사 급에 가까운 마법사였다.
전혀 매치가 되질 않았지만, 그걸 직접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엘릭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얼마 전까지 절맥증을 앓았던 건 사실입니다.”
“그, 그럼?”
“외람되지만, 청사자께서 앓고 계시는 입마증은 절맥증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
이사벨은 그제야 떨리는 손길로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보았다.
“치료 방법과 주의점도 서술해두었으니, 한번 따라 보시고 만약에 차도가 있으시다면 연락 주십시오.”
엘릭은 굳이 어디로 연락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쉽게 알아낼 수밖에 없을 거란 자신감의 발로였다.
“이… 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이사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물론, 레시피 값이 공짜는 아닙니다만.”
이사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를 환전시키기 위해 엘릭이 던진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작 말 꺼낸 본인은 진심이었지만.
“감사해요. 고맙게 잘 쓸게요.”
이사벨은 종이를 품 안에 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가 가짜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사람의 진심이란, 때때로 두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니까.
* * *
“그럼 카노이에 도착하고 나서 따로 연락드릴게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엘릭과 이사벨 일행은 곧장 헤어졌다.
황도와 카노이는 가는 방향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사벨은 아주 잠깐 미련이 남은 듯한 얼굴로 엘릭을 바라보았지만, 곧 서둘러 아버지께 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차를 몰아 여로에 올랐다.
그리고.
『얼굴이 꼴사나운 걸 봐서는 주머니가 제법 마음에 드나 보지?』
메피스토는 이사벨이 남기고 간 주머니를 이리저리 만지면서 헤벌쭉거리는 엘릭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메피. 이 안에 든 게 뭔지 압니까?”
『뭔데?』
“금화라구요. 금화! 그것도 200년 전에 에스토니아 대제가 직접 소량만 발행했다는…!”
『눈탱이가 완전히 맛이 갔군.』
메피스토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그 말을 들을 엘릭이 아니었지만.
“캬! 청사자가 원래 상인 출신이라서 여덟 사자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다더니… 캬! 그 말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거기다 화통하기까지 하네.”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했습니다.”
『뭘?』
“청사자에다가 꽂은 빨대, 아주 허물어지도록 쪽쪽 빨아먹기로요.”
저 말에 대꾸했다간 자신도 똑같은 수준이 될 것 같아 메피스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고개만 흔들어댈 뿐.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