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하산
“아가씨께서… 이런 실력자를 대체 어디서 구하신 거… 지?”
얼음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그 자리에 살아남은 2조원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베스코프만이 겨우 형체만 남은 검에 의지한 채 서 있는 것뿐.
하지만 그마저도 몸의 절반 이상이 성에로 뒤덮여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베스코프는 꺼져가는 시야로 엘릭을 억지로 시야에 담았다.
찰박.
찰박.
엘릭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빙판이 더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점차 커질수록.
베스코프는 자신이 점차 죽음의 늪으로 잠겨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해. 팀이 아니었던 것이야.’
6조는 청랑 내에서도 추격에 능하고, 가장 성정이 잔혹한 이들로 구성된 곳.
그런 이들을 해치운 만큼 팀이라고 처음부터 단정 지었던 게 문제였다.
‘솔로 플레이어였다니.’
분명히 바일 가 내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사벨의 측근이거나, 청사자의 가복일 거라고만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저 마법사가 이사벨 일행에 합류하게 된 것도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 테지.
마탑에서 바일 가에 빚을 씌울 목적으로 실력자를 파견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근래 사자공가와 마탑의 관계를 봐서는 자존심 강한 마탑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저 마법사는 마탑과 그리 원만한 사이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안 그랬으면 이사벨을 도울 생각을 애당초 하지도 않았을 테니.
문제는.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란 것이지.’
판세를 읽는 눈을 가졌고, 적재적소에 맞는 전략을 갖출 줄 안다.
또 때에 따라서는 임기응변도 적절하게 구사할 줄도 아는 ‘싸움꾼’이었다.
비록 겉보기엔 어려 보이지만,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전투 경험이 풍부한 게 틀림없었다.
어디 말로만 듣던 마투사(魔鬪士)라도 되는 건지.
만약.
녀석이 천생 싸움꾼이 아니라, 오로지 철저한 ‘계산’만으로 전장을 휘어잡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녀석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리라.
‘천… 재.’
베스코프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으로… 1조장이 오판… 을… 한 거로군….”
어쩌면 주군께서 뜻하지 않게 귀찮은 걸림돌을 만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척!
처음으로 엘릭의 걸음이 멈췄다.
고개가 비딱하게 꼬였다.
“1조장?”
베스코프는 엘릭의 동공에 담긴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보면서 억지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있… 다. 사람 심리를 읽… 고, 그걸 이용한 예측이 점쟁이 같은… 그런 우리의 보… 물이지.”
“그놈이구나? 이 일들을 저지르도록 만든 새끼가.”
베스코프는 말없이 웃었다.
엘릭은 그걸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가는 길 외롭지는 않을 거야. 그놈도 곧 같이 보내줄 테니까.”
“쉽진… 않… 을…!”
퍽!
베스코프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더 듣기 귀찮아진 엘릭이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털썩!
엘릭은 쓰러진 베스코프의 시체를 지나치며 3조와 시모난이 있는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
“…!”
“마, 말도 안 되는…!”
2조가 전멸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던 3조는 소스라치게 기겁하고 말았다.
특히 시모난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베스코프가 그를 꺼리기야 했다지만, 사실 그는 베스코프를 싫어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무뚝뚝한 그를 놀리는 재미가 꽤 쏠쏠해서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내심 실력도 인정하고 있었고.
그런데 그런 녀석이 저렇게 쉽게 가버렸다고?
마법사 중에서도 그만한 실력자라면 제법 경지가 뛰어난 이들밖에 없었다.
‘마, 마도사…?’
그래서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 마도사까지는 아니다.”
시모난은 곧 고개를 강하게 털었다.
분명히 발동하는 마법의 위력이며 마력장의 범위를 봐서는 마도사 급에 근접했을지야 모르지만.
한 가지.
딱 한 가지가 부족했다.
“그랬다면 진즉에 여기 있던 우리 모두를 다 죽였겠지.”
마도사는 일반 마법사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자신만의 길, ‘마도’를 걷는다는 표현이 괜히 나왔을까?
원래대로라면 저렇게 번거롭게 꼼수를 부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근접한 실력자인 건 확실해.’
더군다나 녀석은 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건지, 잘만 숨어있던 3조원들을 속속들이 찾아내어 찾는 족족 사냥하고 있었다.
반항하려 해도, 엘릭을 따라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을 수가 없으니.
이대로는 죄다 개죽음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어떻게든 새로운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시모난은 냉정을 되찾으면서 옆에 있던 수하를 돌아봤다.
“야.”
“예. 조장.”
“이미 계획은 다 어그러졌다. 저놈이 우리를 살려둘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죽더라도 임무는 완수해야 하지 않겠냐?”
시모난은 잔혹하게 웃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자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모습.
“예. 맞는 말씀입니다.”
조원도 그처럼 똑같이 웃었다.
3조는 모두가 조장처럼 비정상적인 사고만을 가진 곳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어차피 아가씨를 제외한 다른 놈들은 전부 지우는 것. 그렇다면.”
미소가 짙어졌다.
“최대한 많은 놈을 죽이고 가는 수밖에.”
시모난은 품에 남은 3개의 스크롤을 가장 발이 날랜 수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뛰어라. 발에 땀띠가 나도록. 불을 지르고, 부족하다 싶으면 너희들이 직접 몸에 불을 붙여서 옮겨라. 도시를 잿더미로 만드는 거다.”
그런다면 이 도시 어딘가에 숨어있을 아가씨와 일행들, 그리고 이번 싸움의 목격자들까지 최대한 많이 죽일 수 있지 않겠나.
그 과정에서 아가씨가 죽을 수도 있지만.
뭐, 그건 임무 중에 벌어진 작은 실수라고 해두고.
어차피 죽어버리면 징계를 받을 일도 없었다.
“자, 가라!”
팟! 파바밧!
세 조원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햇다.
“우리도 가자. 불이 더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엘릭이 숨은 청랑들을 귀신같이 잡으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모난은 품에서 베스코프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마지막 남은 스크롤을 꺼냈다.
6써클 마법, ‘열화의 굴레’를 담은 스크롤.
이것이라면 저놈도 충분히 죽일 수 있겠지.
* * *
‘운이 좋았어.’
엘릭은 심안으로 숨어잇는 3조를 일일이 때려잡으면서 생각했다.
간간이 빈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지만, 심안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느끼는 점은 확실히 설인의 고원에서와는 전투 양상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냉혹의 인장이 아주 잘 먹혔었지만.
도시로 나와 보니 인장을 사용하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소모되는 마력량도 적잖았고, 마력장의 범위 역시도 한계가 따랐다.
벽에 막힌 기분.
마정석의 용해율을 올리던지, 냉혹의 인장의 성취도를 올릴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다른 속성이나 계통이 잘 발현되질 않아. 되더라도 효과도 너무 저조해.’
저들에게는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지만.
처음 엘릭은 베스코프와 격돌했을 때, 적잖게 당황해야만 했다.
‘녹의 저주’라는 철 속성 마법을 사용해 녀석이 사용하는 쌍검의 날을 무디게 하려 했는데, 그게 잘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뒤이어 ‘메아리치는 강풍’이라는 풍 속성의 마법을 사용해 몸놀림을 가볍게 하려 해도, 역시 효과는 평소의 절반 이하밖에 나오질 않았으니.
덕분에 엘릭은 괜히 마력만 잡아먹는 두 마법을 정지하고, 오로지 빙 속성 마법만을 활용해서 베스코프와 싸워야만 했다.
다행히 작전이 먹혀 승기를 잡았다지만.
엘릭으로서는 전혀 예기치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인장의 위력이 그대로야. 빙 속성이 높아지면서 다른 속성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건가?’
엘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분명 절대적인 수치가 줄었어. 왜지?’
아주 잠깐의 고민.
‘인장… 때문인가?’
그런다면 말이 되었다.
엘릭은 이미 냉혹의 인장을 얻고, 그 성취도에 따라 체질이 조금씩 변화하던 것을 느꼈었으니까.
그렇다면 거기에 맞춰서 마력 속성이 변화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고 싶으면, 거기에 맞는 인장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는데.’
엘릭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나중에 더 정확하게 알아봐야겠어.’
하지만 일단 싸움에 집중해야 하니, 냉혹의 인장에 더 많은 마력을 쏟아 넣으려는데.
『파핫!』
“…?”
갑자기 여태껏 싸움을 관찰하고만 있던 메피스토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짓이라도 저지르려는 모양이로군.』
엘릭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다, 곧 인상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어그러진 결 뭉치 3개가 사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도시에 불을 지르려는 것이다!
“이 새끼들이, 끝까지!”
『때로는 마족보다도 더 미친 것이 인간이지! 암!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이것이야말로 너희 종족이 가진 민낯이고말고!』
메피스토가 웃음을 터뜨리든지 말든지, 엘릭으로서는 놈들이 이상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막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엘릭은 그들을 미처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푸하하핫!”
여태 쥐새끼처럼 잘만 숨어잇던 시모난이 튀어나와서는 의기양양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었다.
다른 어느 것보다 결이 잔뜩 응집된 스크롤.
‘최소 6써클!’
그것도 화기가 가득해 보였다.
저것이 발동된다면, 이쪽 구역이, 아니, 도시 전체가 전화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이것까지 네놈이 막을 수 있다면, 인정해줄게. 어때? 키키킥!”
시모난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스크롤을 찢었다.
아니, 찢고자 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칼바람이 아니었다면.
스걱-
“내 팔이…? 내 팔! 아아악!”
시모난의 오른손이 스크롤을 쥔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스크롤은 당신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서요.”
츠츠츠-
고통을 호소하는 시모난 옆으로 이사벨이 나타나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이, 왼손에는 반으로 찢어진 스크롤이 들려 있었다.
‘은신’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
엘릭이 잠시 자리를 비우기 전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임시로 만들어준 것이다.
마법만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지, 다른 분야에서는 항상 우월한 성적을 기록했던 엘릭이었기에 당연히 스크롤 제작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 새…!”
시모난은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이사벨에게 왼손에 쥔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어딜.”
어느새 엘릭이 신속 마법을 활용해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타 속성의 효과가 저하되었을 뿐이지, 완전히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얼어붙어라】.”
엘릭은 ‘얼어붙은 손길’을 발동해 시모난의 가슴팍을 거세게 후려쳤고.
쩌저저적-
빙독은 단숨에 심장으로 파고들어 그의 전신을 꽁꽁 얼려버렸다.
그리고.
“【불어서】,【닥쳐라】.”
엘릭은 미리 감지하고 있던 결 뭉치들에다 마력장을 새겨 넣어 더블 스펠을 발동했다.
‘폭염의 재래’가 새겨진 스크롤을 들고 달리던 녀석들은 단숨에 쏟아진 얼음 화살에 단단히 벌집이 된 채로 쓰러져야만 했다.
그중 한 명은 죽기 전에 스크롤을 찢는 데에 성공했지만, 불씨는 얼마 틔워지지도 못하고 금세 눈보라에 사그라졌다.
“…와아.”
처음으로 바로 옆에서 엘릭의 싸움을 지켜본 이사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만큼 그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으니까.
이게 ‘진짜’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엘릭은 그런 이사벨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처음으로 검을 쥐어본 건지 시모난의 팔을 자르는 대단한 실력을 보이고도 손을 덜덜 떨면서 제자리에 곧장 주저앉아버리더니.
금세 그걸 잊고 멍하니 마법을 지켜보는 모습이 의외로 귀여웠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거지?’
그러다 엘릭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시모난이 자신에게 정신이 팔려있었고, 은신 마법이 발동되고 있어 그녀를 보지는 못했다지만.
검술에 재능이 전혀 없다고 알려진 이사벨이 어떻게 그의 감각을 속이고 그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걸까?
여태껏 만난 무도가들의 감각은 마법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리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지만.
‘일단 남은 놈들부터 정리하고 나서 이야기해야겠어.’
엘릭은 냉혹의 인장을 더 크게 발동시켰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