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하산
그 시각.
“아가씨, 저 자를 저렇게 순순히 보내어도 되겠습니까?”
첸은 우려에 찬 얼굴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엘릭과 함께 하면서 그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를 속으로 적잖게 경계하는 중이었다.
“산속에 칩거한 게 너무 오래돼서 바깥소식을 알아보러 간다고 하시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우려되셨으면 첸도 따라가지 그랬어요?”
날이 상당히 서 있는 말투.
한순간 첸은 말문이 막힌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사벨은 그런 그를 보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실 첸이 엘릭을 따라가지 않은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부재중인 동안 청랑이 나타날 것이 우려돼서였겠지.
하지만 설인의 고원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첸의 과보호가 너무 심해지고 있었다.
그녀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첸, 뭘 걱정하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과도한 염려와 의심은 오히려 행동에 제약만 끼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하셔야 해요.”
“…면목 없습니다, 아가씨.”
첸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이사벨은 첸의 눈빛이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첸은… 여전히 우리 중에 간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순간, 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그 생각은 여전하시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사실 여태까지 벌어진 일들을 고려해본다면,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하니까요.”
여태껏 청랑 6조는 귀신같이 이사벨 일행을 쫓아오곤 했다. 개중 몇 번은 그들이 지나갈 예정이던 길목을 미리 점거해두기도 했었으니.
단순히 추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여기기에는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많았다.
“하지만 말했듯이 전 첸의 생각과 달라요.”
“그러기엔 6조가 설인의 고원에서 헤매던 게 말이 안 된다는 말씀이시겠지요?”
“맞아요. 정말 우리 중에 간자가 있다면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하지만 설인의 고원은 지형 특성상 간자가 몰래 암어를 남기기엔 어려운 곳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전에 저들이 실수로 간자를 죽였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릭이 간자라는 건 너무 나간 게 아닌가요?”
저들로서는 6조를 희생하면서까지 새롭게 간자를 심을 필요는 없는 셈이었으니까.
“…단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전 ‘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경계해서 손해 볼 건 없잖습니까? 더구나 본가를 노리는 건 파울 바일만이 아닙니다. 흑, 백, 적, 감, 자, 녹, 회… 그 7개의 사자 전부가 따지자면 적이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그들로서는 이런 호기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전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모습.
너무 독불장군이었다.
이사벨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숙부님과 ‘어떻게’ 거래를 해야 할지, 그걸 구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대화를 끝내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인 것 같았다.
“첸의 말이 맞을지 몰라요.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명심해두세요. 릭을 의심한다면, 그건 제 결정도 함께 의심하신다는 뜻이라는 것을요.”
엘릭이 만약 다른 쪽에서 심은 간자라면 추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당장 급한 불부터 끌 필요가 있으니, 엘릭을 믿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그분을 믿어.’
이사벨은 자신이 봤던 엘릭의 눈을 믿기로 했다.
단호하고, 결연한 눈빛.
그건 분명히 정도만을 걸었던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이었다.
이사벨은 스스로 사람 보는 눈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함께 했던 이들 중에 간자가 있을 거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외람된 질문일지 모르지만, 아가씨께서는 릭이란 자를 어떻게 판단하고 계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사실 간자가 아니라면, 그자는 돈이나 밝히는 용병이라 볼 수 있잖습니까?”
순간, 이사벨의 머릿속으로 자신을 ‘고객님’이라던 말하던 엘릭의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피식!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오다, 곧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건 아마 일부러 그러신 걸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
“처음부터 그분은 아무 대가 없이 우리를 도우셨어요. 애당초 정의감이 투철하신 의로운 분이란 뜻이죠. 그런 분이 과연 호위라고 안 들어주셨을까요?”
“그럼?”
“저희가 누군지 진즉에 눈치채고, 일부러 ‘의뢰’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하신 겁니다. 스스로를 돈 밝히는 용병처럼 행사해서요.”
“…!”
무가(武家)의 사람이 누군가에게 구명을 받았다는 건, 외부에서 봤을 때 그만큼 힘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비칠 수도 있다.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의뢰’를 해서 구명을 받았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실력자의 실력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진즉에 전력으로 삼았다는 뜻이니까.
그 역시 무가가 보유한 힘이 되는 것이다.
“본가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으니, 일부러 스스로를 깎아내리신 거죠.”
“아! 그런 깊은 뜻이!”
“…흠!”
여태껏 말없이 듣던 에드는 감복한 얼굴이 되었고.
첸도 의구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어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정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호응이 그렇게 돌아오니, 이사벨도 말을 하는 내내 잔뜩 들뜬 표정이 되었다.
“아마 지금 밖으로 나가신 것도, 사실 주변 지형을 확인하시려는 이유일 테고요. 마법사, 아니, 마도사가 거주 장소를 정하는 데 있어 주변 환경을 많이 따진다는 건 널리 알려진 상식이잖아요?”
에드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첸도 이 이상은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사벨이 엘릭에 대해서 뒷말을 덧붙이려는데.
쿠쿠쿵!
그 순간, 여인숙이 크게 요동쳤다.
식탁 위에 있던 음식이며 식기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로 큰 지진과 함께 밖에서 엄청난 폭발 소리가 들렸다.
이사벨 등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에서 엄청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불이다! 불이야!”
“으아! 내 집이…! 내 가게가!”
“앤드류! 앤드류, 어디 갔니?”
가게 여러 채가 화마에 잠식되고,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몇몇은 자리에 주저앉기도, 집에 있는 아기를 구출하기 위해 뛰어들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버둥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광경.
누가 보더라도 절대 자연적인 발화로 인한 혼란상이 아니었다.
“이건…!”
커다랗게 떠진 이사벨의 눈이 요동쳤다.
“아가씨, 당장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어서요!”
첸은 가장 먼저 상황을 판단하고서 이사벨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게 만약 정말 청랑의 짓이라면, 이대로 있는 게 저들이 원하는 일일 겁니다! 시민들의 피해가 가슴 아픕니다만, 이럴 때일수록 지금은 냉정해 지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사벨은 섣불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다리가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룡 산맥에서부터 이 도시에 이르기까지, 자신 때문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는 건지.
자신만 없었더라면, 평소와 다르지 않게 평범한 삶을 영위했을 저들의 터전을 자신이 망가뜨린 것이다….
청랑이 미웠고, 숙부님이 싫었다.
그분의 눈에는 이런 일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까?
대체 얼마나 높은 곳에 앉아있기에 아래는 볼 필요도 느끼지 않는 걸까.
콰콰쾅!
쿠쿠쿠-
“아가씨!”
더 큰 폭발이 있었다.
화마가 그들이 있던 여관까지 번지고 있었다.
첸과 에드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지만.
이사벨은 여전히 우두커니 서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가 악물렸다.
무기력과 함께 가슴 한편에서부터 짜증과 분노가 확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나가서 내가 여기 있으니 저들에게 더 이상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쓰레기들에게 더 이상 굴복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면.
재능만 있다면.
저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일어설 수 있을 텐데…!
엘릭처럼.
‘왜 나에겐!’
이사벨의 주먹이 꽉 쥐어지던 그때.
“아가씨, 위험합…!”
갑자기 한순간 창이 확 밝아졌다. 타들어 갈듯 실내의 온도가 들끓었다.
창 너머에서 화마가 이사벨이 있는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얼마나 빠른지, 첸의 고함이며 다른 사람들의 비명이 전부 도중에 묻힐 정도였다.
그러던 그때.
시리도록 새하얀 장막이 내려와 화마를 뒤덮었다.
그 모습이.
이사벨의 눈에는 마치 하늘에서부터 이쪽으로 서광이 비치는 것으로 보였다.
콰아아앙!
화마는 여관을 덮치지 못했다.
새하얀 장막이 수십 갈래로 이뤄진 폭풍이 되어 화마를 갈가리 찢어내고, 남은 불씨마저 잠재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불어닥친 눈발은 그 뒤에 남아있던 불길마저 송두리째 잠재우고 말았으니!
“릭!”
이사벨은 그 눈발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에 창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그의 이름을 크게 소리쳤다.
저 멀리, 반쯤 타다 만 지붕 위.
엘릭이 고고하게 서서 어느새 주변을 둘러친 청랑을 굽어보고 있었다.
검은 재가 휘날리고, 하얀 눈발과 투명한 얼음 조각, 붉은 불씨가 뒤섞여 흩날리는 무대 정중앙에 서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어느 전설을 그려낸 성화를 보는 것처럼 웅장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릴 정도였다.
그렇기에.
이사벨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한평생 불가능할지 몰라도.
어떻게든 저 옆에 자신도 서 있고 싶다고.
* * *
“엿 같은 새끼들이 한 번 엿같이 구는 것으로도 모자라 계속 엿같이 구네?”
바드득!
엘릭은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에 서서 이를 갈았다.
시야에 내려다보이는 도시 한복판이 온통 폐허가 되어 있었으니까.
무너진 담벼락이며 시커멓게 타버린 건물의 골조들까지….
분명 화마가 휩쓴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거친 폭발 때문인지 성한 곳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가 서 있는 곳도 반쯤 허물어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한순간 집과 가족을 잃게 된 이재민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으니.
엘릭은 어느새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자신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청랑들을 보면서 화가 더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제 놈들이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잘도 찾아오는군.』
메피스토는 그런 놈들을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심령으로 연결된 그로서는 엘릭이 얼마나 분노에 휩싸여있는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메르빙거의 분노는… 평소에는 잠잠하더라도 한 번 폭발하면 좀처럼 가라앉는 법이 없지.』
한때, 메르빙거와 대적했던 그였기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성을 잃으면 보통 실수가 따르는 평범한 인간들과 다르게, 메르빙거는 오히려 그럴 때 더 냉정하고 혹독해지며, 또한 강해진다는 것을!
“【무장 개방】.”
한순간, 메모라이즈 되어 있던 마법들이 일시 개방되면서 마력이 증폭되고 활력이 돌았다.
사방으로 뻗쳐나간 마력장이 일대를 장악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결들이 한 올 한 올 모두 심안에 감지되었다.
청랑의 두 조장, 베스코프와 시모난은 재빨리 엘릭을 제압하고 이사벨이 어디 있는지 추궁하려다 말고, 한순간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한에 흠칫하고 말았다.
자신들이 여태껏 뭔가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든 것이다.
하지만.
“【불어라】.”
엘릭은 지붕 아래로 떨어지면서 냉혹의 인장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눈발이 불어 닥치고.
얼음 소낙비가 쏟아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