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하산
메피스토는 이미 엘릭으로부터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학장인지 뭔지 하는 놈이 뭘 하는 놈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저런 놈에게 찍힌 걸 봐서는 참 지지리 복도 없을 게 분명하다고.
* * *
‘그림자 여관’이란 곳에 여장을 풀고 난 뒤.
엘릭은 잠시 볼일을 보고 오겠다면서 여관을 빠져나왔다.
『네 녀석의 뒤를 밟고 있는 놈이 있다만.』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메피스토가 옆에서 히죽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인지 영역이 닿는 끄트머리. 인파가 바쁘게 오가는 길목 한 모퉁이에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렇게 철두철미한 척하더니. 어디서 실수라도 했나 보군.』
메피스토가 놀리듯이 던진 말에 엘릭이 콧방귀를 쳤다.
[나이 드시고 판단력이라도 흐려지셨습니까? 이걸 두고 뭐라더라, 판단력 저하? 노망? 뭐 그런 초기 증상이라던데?]
『뭐, 인마?』
[딱 봐도 저거 그냥 외부인들에게는 다 붙은 꼬리들 아닙니까? 저기도 있고, 저기도 있구만.]
엘릭은 눈치로 지붕에 있는 놈, 분수대에 숨어있는 놈, 신문지를 덮고 노숙자로 위장하고 있는 놈들을 짚어냈다.
하나 같이 곳곳에 숨어서 여객들을 감시하는 자들.
『….』
[수상쩍은 놈들 있으면 바로 솎아내려고 하는 거잖습니까. 이상한 거로 시험하지 마십쇼.]
쳇!
메피스토는 엘릭을 동요시키려다가 도리어 본전도 못 찾게 되자 인상을 구겨야만 했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긴 한데.’
엘릭은 그런 메피스토를 무시하면서 조용히 따라붙는 녀석을 곁눈질했다.
그의 심안을 속이기엔 어설프긴 해도, 도둑 길드에서 교육을 받은 티가 제법 나는 실력.
‘아무리 청사자 가문이라고 해도 이만한 인력을 이런 작은 도시에 한꺼번에 투입한다고?’
아마 거룡 산맥 인근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똑같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도둑 길드를 여러 개 돌린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
‘추격자들의 배후에 있는 자가 바일 가 내에서도 제법 권세가 있고, 옆에 모사꾼을 두고 있어서 우리들의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거나.’
엘릭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니면 우리 안에서 정보가 조금씩 새고 있거나.’
뭐가 되었든 간에 쉽지 않은 일인 건 분명했지만.
엘릭은 별반 걱정하지 않았다.
사실 저들의 이목을 살만한 행동은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가 찾은 곳은 신문을 중점으로 파는 가판대였다.
“신문 좀 구할 수 있겠습니까?”
“신문이라면 보다시피 여기 많소만?”
가판대 옆에서 도시의 기념품을 팔고 있던 중년인의 말에 엘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자뿐만 아니라, 지난 한 달 치 신문을 같이 구매하고 싶습니다만.”
“지방에서 올라오셨수?”
이 시대에 신문이란 교통의 한계 때문에 지역 곳곳으로 퍼지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골의 귀족이나 신사들 경우에는 이따금 도시 나들이를 할 때 한 번에 묶음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엘릭도 그중 한 명이라 본 것이다.
“그렇습니다만.”
“여기 있수.”
엘릭은 이사벨에게서 의뢰비로 받았던 돈 중 일부를 꺼내 중년인에게 건네고, 신문 다발을 받아 인근 카페로 들어갔다.
이렇게 한다면 감시자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
그가 보고자 한 기사는 전부 베럭스 교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만인의 기대와 축복을 받은 탐사대, 드디어 출전!]
[베럭스 학장이 말한다. “이번에 발견될 용의 둥지는 전대미문의 규모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석룡의 둥지에 이어 새롭게 발견될 둥지는 과연 어떤 특징을 지녔나?]
[탐사 1일 차, 대망의 시작.]
[2일 차, 다량의 마나가 억류된 스폿 발견. 현장 기대감 높아져.]
[5일 차,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아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해.]
[10일 차, 기대와 전혀 다른 무발견. 둥지의 규모는 정말 학장의 예언처럼 큰가?]
[16일 차, 실패하는 탐사.]
[25일 차, 고뇌에 빠진 탐사대. 황궁, 실망감을 드러내다!]
[35일 차, 전대미문의 실패극! 탐사에 투자를 단행한 기업과 은행가들의 성토!]
[‘통곡의 다리’라 불리게 된 장미대교, 벌써 투신자의 수만 기십 명이 넘어가.]
[50일 차, 탐사를 주도한 베럭스 학장, 우세했던 총장 선거에서도 하향세를 보여. 책임론 대두.]
[황실, 이번 탐사 사기극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드러내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엘릭은 신문들을 보면서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들이 보이는 내용은 하나같이 대동소이했다.
처음에는 모든 기대가 탐사대와 베럭스 교수에게 집중되었다. 얼마나 언론 플레이를 해댔는지, 영세 신문사들까지 전부 그를 호의적으로 조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탐사가 시작되고 길어질수록 호의적인 여론은 점차 악의적으로 변했다.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마나 스폿에 의한 이상 현상으로 피해만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더 이상 땅굴을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사기’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탐사대에 투자했던 수많은 은행가와 귀족들이 큰 손해를 보았다. 한탕 당겨보려 했던 일반 시민들은 아예 길거리로 나앉게 되거나 투신자살까지 줄을 이을 정도였으니.
언론에서는 하나 같이 이번 사안에 대해 앞다퉈 악의적인 기사를 배출하고, 심지어 황실에서까지 나설 정도였다.
[다가오는 총장 선거, 실추된 위세를 반전시킬 베럭스 학장의 최후 반전 패는?]
“반전 패는 무슨.”
엘릭은 가장 최근에 나온 기사를 보고 콧방귀를 꼈다.
이제 어느덧 우스던 아카데미의 총장 선거는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베럭스 교수의 위세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점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
[보석룡 둥지 탐사에 대한 업적이 있어 여전히 우세를 보여.]
[소유권을 지닌 엘릭 메르빙거의 혼수상태가 길어짐에 따라 마탑의 발굴권 부여 필요성이 점차 대두되어.]
“생각보다 끈질긴데.”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엘릭은 가볍게 혀를 찼다.
어느 정도 버틸 거란 예상은 했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뭐, 그것도 얼마 안 남았겠지만.”
엘릭은 총장 선거가 있기 전에 황도에 도착하고, 곧장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그런다면 베럭스 교수도 저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겠지. 현재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보석룡 둥지에 대한 업적이니,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만 밝히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왕에 날려버릴 거, 좀 더 크게 키우고 싶은데. 음, 뭐 없으려나.”
엘릭은 단순히 베럭스 교수를 아카데미에서 내쫓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었다.
이번 이슈를 한껏 등지고서, 정계와 학계에 화려하게 데뷔를 치르고자 했다.
유명세가 따라붙는다면 가문을 일으키는 데 그만큼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역시 마도명문!’이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조금 모자랐다.
조금 더.
양념이 될 만한 게 더 필요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
[아카데미와 네레스타 가의 충돌! 발굴권의 향방은?]
[션 네레스타의 항거! 한때 사제지간이었으나, 지금은 정치적 숙적이 되고 만 두 사제의 운명.]
‘…너무 미안한데.’
엘릭은 지면의 한 모퉁이에 수록된 션의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 지도교수의 목을 치는 것만큼, 학계의 지탄을 받을 만한 위험한 일을 저지르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발 벗고 나서준 그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나중에 빵이나 하나 사다 줘야 하나.’
‘션이 무슨 빵을 좋아하더라?’
아무래도 네레스타 가로 빵 배달을 보내면서 이쪽의 소식을 담은 편지도 같이 동봉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불이야! 불!”
“불이 났다! 물 가져와, 어서!”
엘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로를 사이에 둔 맞은편의 꽃 가게 위로 화마가 거칠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침 바람도 거칠어서 금방이라도 옆 가게로 불길이 번질 기세였다.
가게 주인이 어쩔 줄 몰라 밖으로 나와서 발을 동동 구르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가면서 양동이를 들고 근처 분수대로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심안이 열린 엘릭에게는 그 화마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방화잖아, 저거?’
검은 매연 사이로 결이 복잡하게 비비 꼬인 게 보였다.
마법이 발동되었단 증거였다.
* * *
“음! 추가된 출입자 명단은 이게 전부인가?”
청랑 2조의 조장, 베스코프는 수하가 가져온 명부를 보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예. 그렇습니다.”
“이걸로는 부족해. 아주. 분명히 시기상으로 이 근방까지 온 게 확실한 데 말이지.”
베스코프는 같은 조장이면서도 상관이나 다름없는 힐튼에게서 이미 신신당부를 들어둔 상태였다.
황도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여 이사벨 일행을 찾아내고, 그녀를 제외한 모두를 제거할 것.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모두’에는 첸 등을 포함해 목격자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은 해당 마을 사람들도 전부 포함되었다.
그리고.
-감히 6조를 막아섰을 ‘변수’도 찾아내어 목을 가져오시오. 우리 청랑을 건드린 죗값은 어떻게든 치르게 해야 하니.
어드밴스, 그것도 익스퍼트를 눈앞에 둔 존재가 아니고서야, 혼자서 6조를 상대할 수 없다.
그렇기에 힐튼은 ‘변수’가 최소 2-3인 이상으로 구성된 팀일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보고 받기로 이사벨과 끝까지 남은 기사는 둘. 여기에 정체불명의 팀이 더해졌다면 최소 여섯 명은 될 테니, 그런 놈들을 중점으로 물색하면 되었다.
문제는 며칠째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점이었다.
용의자들은 확인 결과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적은 숫자를 뒤졌지만,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이쪽의 움직임을 읽고 옆으로 새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일은 없다.’
힐튼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성격인지를 잘 아는 베스코프로서는 그의 예측이 틀렸을 거란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녀석의 ‘감각’은 때론 정말 같은 인간이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초능에 가까웠으니까.
베스코프의 고심만 깊어지던 그때.
“저쪽에 심어둔 ‘그림자’도 이쪽으로 지나칠 거라고 암어를 남겼다며? 그럼 뭘 더 고민해? 그냥 확 들쑤시면 되는 거 아냐?”
바로 옆에 있던 다른 사내, 시모난이 히죽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청랑의 3조장. ‘변수’가 만약 생각보다 머릿수가 많으면 증거 인멸을 하는데 귀찮아질 걸 염려해 힐튼이 2조에 딸려 보낸 자였다.
그만큼 힐튼이 이번 일에 주의하고 있다는 증거였지만.
베스코프는 내심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시모난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뭘 어떻게 들쑤신다는 거냐?”
“불을 지르는 건 어때?”
“뭐?”
베스코프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모난은 시시덕대기 바빴다.
“이 도시를 전부 불태워버리자고. 그러면 그놈들도 같이 튀어나올 거 아냐?”
“….”
베스코프는 한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가 시모난이 싫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진중한 성격인 자신과 다르게, 녀석은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의견을 떠벌릴 때가 많았으니까.
문제는.
“어때? 괜찮지?”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때때로 그런 의견들이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풀숲을 두들겨서 뱀을 튀어나오게 한다는 건가?”
“나 무식하다고 놀리냐.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좋다는 뜻이다.”
“거봐. 괜찮다니까. 어차피 목격자도 최대한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판에 이런 작은 도시 하나 사라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다들 아카데미 쪽에나 시선이 팔려있을 텐데.”
시모난은 낄낄 대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숨어다닌다고 해도, 도시가 잿더미가 되는데 안 나오고 배기겠어? 거기다 정의로운 우리 아가씨 성격대로라면 참지도 못할 테고. 이보다 확실할 순 없지. 우린 우리대로 나중에 귀찮은 뒤처리를 할 필요도 없어지는 거고. 꿩 먹고, 알 먹고지.”
베스코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있지. 안 그럼 내가 이야기나 꺼냈겠냐.”
시모난은 품에서 무언가를 조용히 꺼냈다.
순간, 베스코프의 눈이 커졌다.
“그건…?”
“4써클 ‘폭염의 재래’를 담은 스크롤. 그것도 무려 5개나 있지.”
“어디서 났지?”
“어허. 선수끼리 왜 그러시나. 어디 내 본전을 털려고. 이거 구한다고 꽤 돈 깨졌다고. 하여간. 어때, 콜?”
“콜.”
그렇게 청랑 2조와 3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