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하산
엘릭을 비롯한 이사벨 등은 그 길로 거룡 산맥에서 내려왔다.
그들 전부 한 달이 넘도록 노숙을 하면서 하나같이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라, 근방에 있던 여인숙을 잡아야만 했다.
“으! 시원하다.”
엘릭은 오래간만에 따뜻한 물로 목욕한 나머지 기분이 좋아 저도 모르게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 귀찮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란 말이지.』
“왜요?”
『매일 몇 번씩 그렇게 일일이 씻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효율적이지 못한지 모르는 건 아마 너희들밖에 없을 거다.』
순간, 엘릭은 메피스토에게서 주춤 떨어졌다.
메피스토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뭐 하는 거지?』
“설마 마족은 씻지도 않는 겁니까?”
『마법을 두고, 귀찮게 뭐하러?』
“으아! 오지마요, 저리 가!”
『이놈이?』
“오지 말라니까요. 냄새나요!”
『본 왕은 현재 사념체이거늘, 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것이냐!』
“아, 오지 말래도!”
오늘도 두 사람은 아웅다웅하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 * *
엘릭이 이튿날, 몸을 깨끗이 하고 나온 이사벨의 모습을 봤을 때 느낀 감상은 ‘예쁘다’였다.
주근깨 하나 없이 하얀 피부와 흑요석을 박은 것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 유독 인상적인 미인.
‘근데 어딘지 모르게 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지?’
하지만 그런 말을 꺼냈다간 되지도 않게 작업(?)을 거는 것처럼 비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교장에서라도 봤겠지.’
그래도 명색이 제국의 공작이라고, 황실에서 주관하는 사교 파티에는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 얼핏 스치듯이 본 영애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컸다.
『아주 입이 귀에 걸려서는. 쯧! 외형이란 어디까지나 거죽에 불과한 것을, 어찌 인간이란 족속들은 그것에 속아 일을 그르칠 때가 많은 건지.』
메피스토가 그런 엘릭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엘릭은 물끄러미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왜? 본 왕이 한 말에 대꾸라도 할 참이더냐? 아니면 이전처럼 묵언 마법을 걸거나, 애교라도 시키려고? 미안하지만, 너는 마나의 맹세로 인해 앞으로 넉 달 동안 본 왕에게 그 어떤 해코지도 할 수 없느니라. 으하하!』
메피스토는 평상시보다 훨씬 말이 많고 빨랐다.
누가 보더라도 토라졌지만, 억지로 아무렇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
[아직도 삐졌습니까?]
『흥! 본 왕은 만마의 종주이니라! 그런 소인배나 느낄 감정 따위를 겪을 도량이 아니란…!』
[잠깐만요, 메피.]
『뭐냐?』
[말 길게 하지 마요. 입 냄새 여기까지 나잖아요.]
『이 새끼가, 진짜!』
엘릭은 방방 날뛰는 메피스토를 뒤로 하고, 이사벨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미 첸과 에드 등은 먼저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상태. 다만, 첸은 청랑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다 낫질 않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네요, 릭.”
“예. 날이 맑아서 떠나기 좋은 것 같습니다. 컨디션은 어떠세요?”
“신경 써주신 덕분에 괜찮아요.”
이사벨이 엷게 웃으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가실까요?”
엘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 * *
여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한적했다.
‘추격대가 바로 따로 붙을 줄 알았는데. 보이지도 않잖아?’
마나 스캔을 연달아 발동해봐도 이렇다 할 인기척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대개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나 고라니 따위가 전부.
거기다 첸의 몸 상태가 좋지를 않아 따로 마차를 구매한 덕분에 크게 걸을 일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엘릭은 여유롭게 여로에 집중하면서, 한편으로 이사벨 등과도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바일 가의 영애셨습니까?”
“예. 부끄럽게도.”
이사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엘릭은 속으로 적잖게 놀라야만 했다.
‘왠지. 낯이 익다 했더니.’
청사자의 무남독녀. 소위 ‘향기 없는 꽃’은 중앙 사교계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
물론, 좋지 않은 의미였다.
별칭에 ‘꽃’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만큼 미모는 아주 아름답다. 한때 황태자도 그녀의 미모에 반해 청혼을 했을 만큼.
또한, 배경도 청사자의 가문이니, 한때 그녀에게 눈독 들이는 이들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기에 모두 떠났다.
재능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사자의 혈육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질 수 없다면, 가치는 그만큼 떨어지고 마니까.’
‘사자’란 칭호는 대개 가문과 명맥에 따라 계승되는 편이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칭호의 수여 여부를, 황금 사자가 관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이사벨은 결코 청사자가 될 수 없었고, 청사자를 따르는 기사들 또한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황태자가 끝내 파혼을 선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냉혹한 정치 세계에서 청사자가 배경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가치도 덩달아 없어지고 마니까.
듣자 하니 가문에서도 그녀는 외톨이라던가.
엘릭이 그녀의 사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저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사교계의 이야기 따윈 별 관심도 없고, 듣게 되더라도 금세 잊어버리는 편이었지만.
어쩐지 향기 없는 꽃의 사연은 자신도 많이 동질감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깐만. 듣기로 청사자는 입마증에 걸렸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션이 얼핏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자 놈들 그렇게 잘난 척을 해대더니 꼴좋다던가?
그리고 덧붙였던 말이 있었다.
-진맥했던 마도의에게 듣기로는 증상이 너의 절맥증과 상당히 유사하다더라고. 때에 따라서는 너한테 좋은 표본이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주시해두고 있으려고.
그때는 청사자나 되는 거물과 자신이 비슷하면 얼마나 비슷할까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청사자 쪽에다 내가 빚을 씌울 수도 있지 않을까?’
엘릭은 절맥증을 완치해본 만큼, 어떻게 하면 치료가 이뤄질 수 있을지 병에 대한 이해도가 깊은 상태.
그러니 때에 따라서는 청사자의 치료를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앞으로 가문도 일으켜야 하는 엘릭으로서는 호의적인 가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호기라도 할 수 있는 셈.
물론, 마탑과 사자공가의 관계가 걸리긴 했지만.
‘그놈들이 알아도 뭐라고 하려고.’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메르빙거와 마탑의 육망성 간에도 사이가 좋지 않은 판국이지 않은가.
‘근데 이걸 비밀로 하는 걸 봐서는 대놓고 아는 척했다간 의심만 살 것 같고. 어쩐다?’
무엇보다 이들이 쫓기고 있는 건, 바일 가의 내홍일지도 몰랐다.
괜히 연루되어서는 골치가 아플 수도 있는바.
아무래도 천천히 상황을 지켜보면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타야만 할 것 같았다.
‘뭐,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뒤로 내빼면 되겠지.’
한편.
이사벨과 첸 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엘릭에게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정말 내 또래란 말이야?’
‘이 자…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천재야!’
‘거기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것까지. 대체 어느 학파의 사람이지?’
이사벨은 처음 엘릭과 통성명을 나누고, 진짜 나이를 들은 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엘릭이 20대란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던 것이다.
질투심은 나지 않았다.
그러기엔 격차가 너무 컸으니까.
저쪽은 태양처럼 빛나는 재능을 타고난 데 반해, 자신은 밤중의 반딧불이도 되지 못하니.
다만, 마음 한편에서 그런 상상은 들었다.
저토록 빛나는 재능이 자신에게도 주어졌더라면…!
물론, 다 부질없는 가정이기에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지만.
그러면서도 이사벨은 엘릭이란 존재가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저만한 실력자를 낳은 가문이나 학파 출신이라면 그만큼 부유할 것이 분명한데도, 마치 ‘돈’ 때문에 의뢰를 승낙한 듯한 태도가 기이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돈은 우릴 돕기 위한 핑계였을지도….’
이사벨이 작은 오해(?)를 시작한 동안.
첸과 에드는 엘릭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세 신성과 비견할 만한 존재라면 절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일인전승의 은거 학파 출신인가 싶기도 했지만.
엘릭이 구사하는 어휘나 태도 등을 보면 귀족가 출신인 게 틀림없는 데다가, 거침없는 행동 방식으로 봐서는 절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은 아니었다.
그러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후보군을 아무리 대조해 봐도 좀처럼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엘릭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뒤로 한 채.
엘릭 등은 며칠 뒤, 황도에서 제법 가까운 ‘라센트’라는 소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도시라고 하기엔 조금 작은 규모의 마을이었지만.
이 근방에서는 가장 치안과 시설이 좋은 중심지였다.
“영주가 직접 다스리는 곳이니만큼 대놓고 해코지를 저지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군요.”
일반 마부로 변장을 하고 말을 몰던 에드가 성문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마차 안에서 똑같은 곳을 보고 있던 이사벨과 첸의 표정도 덩달아 굳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로 들어서는 검문소 앞.
청랑으로 보이는 이들이 대거 서 있었다.
대놓고 바일 가문의 인장이 박힌 갑주를 착용한 채로, 검문 병사들의 옆을 말없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로 들어서는 이들의 행색을 자세히 살펴 이사벨 일행을 솎아내려는 것이겠지.
“말머리를 돌릴까요, 아가씨?”
“아뇨. 그랬다간 도리어 의심만 살 거예요. 일단 줄을 서고, 방책을 강구해 보죠.”
이사벨은 에드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저들의 시야에 포착된 이상,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여야만 했다.
바로 그때.
“【보여라】.”
엘릭이 읊조린 말과 함께 마차 내부로 시린 빛이 튀었다가 싹 가라앉았다.
이사벨의 시선이 저절로 그에게 향했다.
뭘 한 거냐는 물음이었지만.
“이제 그냥 통과하면 될 겁니다.”
엘릭은 씩 웃는 거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리고.
“음. 상행인가 보군. 다음!”
검문을 하던 병사는 마차에 난 창으로 내부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통과시켰다.
일행은 전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다가 도시 내부로 한참 들어가고 나서야 엘릭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리신 거죠?”
“가벼운 현혹 마법입니다.”
“혀, 현혹이라니….”
“혹여 그 마법을 이용하면 저들의 추격도 무사히 피할 수 있는 거요?”
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었지만, 엘릭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문을 봤던 사람의 무의식에다 ‘그냥 평범하다’는 인상만 심어준 겁니다. 다른 충격으로 쉽게 깨질 수 있는 거니, 말씀하신 집단 최면은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허…!”
첸은 더 이상 파울에게 쫓기지 않아도 되나 하는 희망이 사라지자 탄식을 흘려야만 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메피스토로서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지만.
『흥! 지각(知覺)을 속이는 정도라면, 집단으로 했을 때 환영술을 부려도 되잖느냐?』
[그쪽으로는 조예가 옅어서요.]
『언령이 괜히 있는 건 아닐 텐데?』
[환영술은 컨트롤이 어렵잖습니까? 그렇게까지 하기엔 너무 피곤해요.]
『그냥 귀찮은 거겠지.』
엘릭은 굳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황도까지 닷새 정도만 더 가면 됩니다. 좀이 쑤시더라도, 그때까지만 기다리세요.]
『뭐? 언제는 사나흘이라며?』
[여기서 하루 정도 머물 생각입니다.]
『뭘 하려고?』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음?』
엘릭의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우리 학장님이 그동안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하셨는지 좀 미리 알아놔야, 어떻게 더 큰 한 방 먹일지를 강구하죠.]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