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하산
이사벨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도사는 기사로 치면 3체인 이상의 엑스퍼트 급은 되어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존재들.
하지만 당장 겉보기에 엘릭은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많이 잡아봐야 20대 중반?
마나의 축복을 받고 난 뒤부터는 극도로 노화가 중단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절대 도로 젊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사벨은 엘릭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런 추측이 사실이라면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20대에 그만한 경지를 일궜다는 것은 대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
‘별의 마도사’ 우스던 메르빙거나 그런 기적을 이뤘을까!
그리고.
이 시대에도 그만한 천재는 단 세 사람밖에 없었다.
마탑의 타샤 네레스타.
사자공가의 가장 젊은 사자인 흑사자.
그리고 황실의 기대주 4황자.
하나 같이 차세대의 대륙을 이끌어 갈 최고 인재라 꼽히며 ‘세 신성(新星)’이라고까지 불리는 이들.
그런데 이런 궁벽한 산자락에서 우연히 만난 자가 그만한 천재라고?
하지만.
이건 사실 이사벨이 가진 ‘착각’에 불과했다.
엘릭은 아직 ‘진짜’ 마도사가 된 게 아니었다.
설산왕을 삼켰다지만, 완전히 ‘소화’한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에게는 마도사 급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방대한 양의 마력이 있었고.
냉혹의 인장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설원’이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안배에서 겪은 죽음들은 그에게 전투 경험까지 선물해줬으니.
청랑 6조를 압도적으로 몰아붙인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정말 당신이 그때 사라졌던 그 청년이란 말이오?”
그렇기에 엘릭을 바라보는 첸의 눈에는 의구심과 의심이 잔뜩 묻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엘릭의 도움으로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지만.
자신들을 도와줬다고 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엘릭에게 당장 호감을 느끼기엔 그들이 여태 겪은 일들이 너무 험난했다.
“그런데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지만 엘릭도 그런 눈초리를 받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목소리가 저절로 뾰족해지자, 이사벨이 다급하게 나섰다.
“죄송해요. 저희가 모두 날이 서 있어서…!”
“아뇨. 됐습니다. 저도 당신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요. 각자 가던 길 가시죠.”
엘릭은 손을 가볍게 털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측은지심이 생겨서 산에서 내려갈 때까지만이라도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아주 잠깐 가졌지만, 싹 날아가고 말았으니.
『속도 좋구나. 본 왕이었다면 저런 시건방진 놈들을 친히 죽은 놈들의 옆에다 나란히 눕혀줄 텐데 말이다.』
[죄송하지만 전 살인마가 아니라서요.]
상황이 그렇게 되니, 첸도 아차 싶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버려져서야 자신들만 손해였다. 조금 전의 충돌로 겨우 남아있던 식량도 모두 쓸모가 없어진 상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건 자신들이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뭐라고 말하려는데.
“이것으로 마음이 전부 풀리시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부디 은인의 선처를 바랍니다.”
그때, 이사벨이 엘릭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가씨!”
“아, 아가씨… 그런!”
여기선 엘릭도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체 높고 자존심 강한 귀족가의 영애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절대 허투루 여길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첸과 에드도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그러다 이사벨이 자세를 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자, 그들도 똑같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죄… 송하오.”
“저희의 실수입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음.”
엘릭은 침음을 흘리면서 난감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고 말았다.
* * *
“의… 뢰 말입니까?”
그들의 사과를 받아주기로 한 뒤.
엘릭은 이사벨이 꺼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저희도 염치없이 그냥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저희가 얼마를 드린다고 해도 ‘릭’ 님께는 턱도 없는 액수라는 것을 잘 압니다만… 그래도 용병 일을 하실 생각은 없으실까요?”
릭은 본명을 밝힐 수 없는 엘릭이 그들에게 밝힌 가명이었다.
‘음.’
『왜 그러지? 일정대로라면 아카데미인지 뭔지 하는 곳에 빨리 가야 하는 게 아니냐?』
[네. 일단은요.]
『그럼 그냥 안 된다고 하고 무시해버리면 될 거 아니냐.』
메피스토는 뭉그적대는 엘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렇게 악랄하게 구는 인간이, 고작 같은 인간이 도와달란 부탁에 고민한다고?
콧방귀나 나올 소리였다.
[그건 그런데요. 음.]
『…?』
[문제가 있어요.]
『뭔데?』
순간, 엘릭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너무 많아요.]
『뭘?』
[돈이요.]
『…!』
[이거 그냥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액수인데.]
『….』
[마침 수중에 있던 돈도 다 떨어진 상태기도 하고.]
그럼 그렇지.
결국 돈이 발목을 묶고 있던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메르빙거는 인성 파탄뿐만 아니라, 돈에 환장한 걸로도 유명했었지.’
메피스토는 알만 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시 힘드실까요?”
이사벨은 엘릭의 생각이 길어지자 조심스러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엘릭의 머릿속이 빨라졌다.
이들 일행은 분명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상태. 만약 여기에 연루될 경우 앞으로 귀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걸 다 감안해도 역시 너무 돈이 많단 말이지.’
금덩이를 한가득 얹은 저울추가 어디로 기울어질지는 안 봐도 뻔하다.
“혹시 의뢰 내용이 무엇인지 먼저 알 수 있겠습니까?”
“황도까지 호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가씨?”
“아가씨!”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건, 첸과 에드였다.
이사벨이 설마 갑자기 설산왕의 무덤을 찾는 걸 포기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이사벨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더 이상… 내 욕심만 앞세울 수는 없어.’
이번 일정을 강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기사를 잃어야만 했던가.
더구나 설산왕의 무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분명히 이 근방인 것 같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탐색에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남은 식량 등도 이미 다 떨어진 상태. 노숙도 힘든 상태였다.
아마 그사이에 숙부님은 청랑 6조보다 더한 자객들을 보내시겠지.
그랬다간 정말 끝장이었다.
이번과 같은 천운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 이상의 희생은 어떻게든 막아야 해.’
이사벨은 황도에 있을 숙부, 파울 바일을 찾아가 담판을 지을 참이었다.
그동안 심화될 아버지의 병증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심 봤다!’
한편, 그들처럼 황도로 갈 예정이었던 엘릭으로서는 쾌재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황도까지라….”
그는 난감하다는 듯이 일부러 말꼬리를 흘리면서 슬쩍 눈치를 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물론, 방금 말씀드린 비용은 어디까지나 의뢰비. 완수 뒤에는 별도로 셈을 치러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은인의 실력을 빌리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최소 두 배 이상은 치러드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덥썩!
엘릭의 양손이 반사적으로 이사벨의 손을 낚아챘다.
“황도 어디까지 모시면 되겠습니까, 고객님?”
손에 힘이 바짝 실렸다.
이사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보고를 받은 파울 바일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6조에게서, 연락이 끊어졌다고?”
“송구합니… 컥!”
촤악!
철퍼덕-
“송구하면 송구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파울은 차가운 눈빛으로 제 목을 부여잡으며 쓰러진 수하를 내려다보았다.
곧 문이 열리면서 밖에 대기하고 있던 청랑들이 익숙한 듯 조용히 시체를 치우고, 핏자국을 지웠다.
“곧 큰일을 앞에 두고 계신 분께서 너무 인상이 좋지 않으십니다. 미간부터 피십시오. 곧 뵙게 될 황금 사자께 좋은 인상을 심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마지막으로 들어오던 사내가 던진 말에 파울이 피식 웃었다.
청랑 1조장, 힐튼.
파울에게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도 그렇군. 첫인상만큼 중요한 건 없을 테니 말이야. 하물며 그런 괴물에겐.”
괴물.
황금 사자에 대한 그들의 평가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제 저들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나?”
“이번 일은 저희로서도 상정치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란 거 잘 않잖아? 힐튼.”
그나마 쓸모있는 재주를 가진 이는 첸 밖에 없는 저들 무리가 청랑 6조를 꺾었다는 건, 다른 어떤 변수가 개입되었단 뜻.
그 변수가 어떤 전력을 갖추고 있고, 언제까지 이사벨의 곁에 머무르는지를 알 수 없는 이상.
이쪽에서도 대응책이 여러 갈래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울의 지낭이기도 한 힐튼은 아주 간단하게 예측을 일축했다.
“아가씨라면 황도로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곳에 더 남지 않고?”
만약 저들이 청랑 6조를 제거한 게 사실이라면 더 마음 놓고 설산왕의 무덤인지 뭔지를 찾지 않을까 하는 게 파울의 생각이었지만.
힐튼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어째서?”
“아가씨니까요.”
“이사벨이기 때문… 이라. 그렇군.”
별것 없는 설득이었지만, 파울은 금세 납득할 수 있었다.
이사벨은 사자의 피를 타고났다기엔 너무 유약한 아이였으니까.
때로는 모진 면도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하긴 그러니 이쪽이 왕좌에 앉을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황도로 온다는 건 나와 거래를 하려 한다고 보는 거로군.”
“예.”
“좋군.”
파울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편하게 의자에 몸을 누였다.
“그럼 이만 가봐.”
힐튼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러자 방금 시체를 치웠던 1조 조원들이 조용히 다가왔다.
“시체는?”
“곧장 소각하였습니다.”
“이번 아가씨 건에 주군과 우리가 관여되어 있단 사실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꼬리는 계속 치우도록.”
“존명.”
“그리고.”
“…?”
“2조를 소집해라.”
“…!”
“…!”
조원들의 눈이 커졌다.
1조가 파울을 지키는 호위 병력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2조는 사실상 활동 가능한 청랑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이들을 움직이라니?
“아가씨께서 곧 황도로 복귀하시리라 예측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한 그녀를 굳이 계속 건드릴 필요가 있냐는 뜻이었지만.
그런 질문을 조심스레 건넨 수하를 보는 힐튼의 입가엔 비웃음이 걸렸다.
“사냥개로서 주의를 기울이는 그런 태도는 좋지만, 주인의 뜻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마지막엔 솥에 끓여질 수밖에 없음이야.”
“…가르침을 주십시오.”
“주군께서는 아가씨의 마지막 남은 손발도 잘라내려고 하신다네.”
“…!”
“그래야 이 세상에 더 이상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전부 끊어놔야만 왕관까지 알아서 가져다 바치지 않겠는가.
“물론, 주군께서는 이런 우리의 ‘독단적인’ 결정을 전혀 모르고 계셔야 하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런 눈빛에 수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성격이라면, 지체하지 않고 곧장 황도로 오시려 할 거다. 설인의 고원에서부터 황도까지 이어지는 경로, 틈틈이 물색하고 찾아. 어떻게든!”
“존명!”
“존명!”
바쁘게 움직이는 수하들을 보는 힐튼의 눈가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