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하산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고?』
메피스토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족은 강자존의 세상.
‘강하다’는 표현이 그의 호승심을 건드린 것이겠지.
『흥! 그래봤자 인간들의 기준에 불과할….』
“아뇨. 한때, 가문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던 조부님과도 자웅을 겨뤘었던 자입니다.”
『그건 좀 흥미가 돋는군.』
메피스토는 붉은 혀로 바싹 마른 입술을 가볍게 축였다.
마치 맛있는 진미를 눈앞에 두기로 한 듯한 모습.
『그놈을 볼 기회는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마탑과는 관계가 껄끄러워서요.”
『그럼 만들어야겠군.』
엘릭은 메피스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메피스토가 봉인에서 풀려난 뒤로 처음으로 목표를 갖게 되었다는 것.
엘릭은 황금 사자가 백 년도 넘게 살아온 노고수이며, 그 아래에는 그를 수호하는 8명의 사자가 더 있어서 ‘사자공가’를 이룬다는 사실을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말해준 것으로도 이 마왕은 충분히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여하튼 범인들은 누군가를 쫓으러 왔고, 그 과정에서 여객들이며 설인들까지 전부 제거된 것 같습니다. 목격자를 남기지 않으려구요.”
『누굴 쫓아왔는데?』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객 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리가 있습니다.”
엘릭은 여객 중에 로브를 뒤집어썼던 이들을 떠올렸다.
여인과 네 명의 기사로 이뤄져 있던 이들. 그들은 되도록 얼굴을 노출하지 않으려 했었다.
“아마 얼마 가지 못했을 테니, 그들부터 찾아야겠습니다.”
『구해주려고? 굳이 왜?』
메피스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마족에게는 ‘돕는다’는 개념이 그리 강하지 않다. 개인주의 성향보다는 약자는 도태되는 게 당연하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구해주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그냥요.”
『그냥?』
“예. 그냥 기분 나빠서요.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엘릭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렇게 물었고.
『아니. 그럴 리가.』
그만하면 아주 좋은 대답이지.
메피스토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 * *
촤촤촤-
이미 수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부족한 첸이 청랑 6조를 한꺼번에 당해낼 방법은 없었다.
갑주가 부서지고, 몸 곳곳에 깊은 상처가 났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녀석들은 절대 치명상만큼은 입히지 않았다.
하눌이 주변을 쓱 훑어보며 크게 소리쳤다.
“아가씨, 근방에 계신 것 잘 압니다. 이러다 충복이 죽고 말 텐데, 어서 나오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가씨, 안 됩니… 크윽!”
첸은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무릎 뒤쪽을 훑고 지나는 상처에 결국 몸이 무너져야만 했다.
“아가씨! 정말 이 자가 죽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이사벨이 이를 보다 못하고 밖으로 나서려 했지만.
“안 됩니다.”
에드가 단호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러다간 첸이…!”
“첸 뿐만 아닙니다. 이삭, 자드, 쿤… 그들의 죽음을 모두 헛된 것으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아가씨!”
하눌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섬뜩한 느낌.
이사벨과 에드의 시선이 똑같이 그쪽으로 향했다.
청랑의 칼이 무릎 꿇은 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만!”
결국 이사벨은 에드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야만 했다.
청랑의 칼이 거짓말처럼 멈추고, 하눌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반면에 첸과 에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가씨… 안 됩니… 컥!”
첸이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머리를 짓누르는 발길질에 강제로 설원에 얼굴을 파묻어야만 했다.
하눌은 아등바등하는 첸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이사벨을 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그러게 순순히 나서셨으면 이렇게 다들 한 달 넘게 고생할 필요도 없잖습니까?”
이사벨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차피 너희들의 목적은 나잖아? 나 하나로 끝내. 저들을 모두 풀어줘.”
하지만.
피식!
하눌의 냉소가 더 짙어졌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뭐?”
“이번 일과 관련된 사람, 목격한 사람 전부 죽여서 저희가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를 없애라는 게 상부의 명인지라.”
“그럼 너희들, 설마…?”
“도망치시는 내내 설인들이며 사람들도 거의 못 마주치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
“이 주변에 있는 화전민 마을도 전부 처리했으니 저희가 여기 왔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무해진 셈입니다. 그러게 아가씨께서 도망만 치지 않으셨어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
이사벨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자신 때문에 죄 없는 양민들이 학살되었단 사실이 머릿속을 하얗게 질리게 했다.
“그런데… 이런! 아무래도 아가씨 때문에 피해자가 한 명 더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려? 가여워라.”
이사벨이 황급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쪽으로 다른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피해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림자의 주인은 눈보라를 헤치면서 이쪽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 있었네.”
이사벨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보통 일반인이라면 칼부림이 일어난 현장을 마주쳤을 때 기겁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저건 마치 이곳을 찾기라도 했다는 듯한…!
파앗!
이사벨의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이미 3명의 청랑이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피해요!”
이사벨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소스라치게 놀란 목소리로 외쳤고.
“이 새끼들, 어떻게 말할 기회도 안 주네. 【불어라】!”
그림자, 엘릭은 실웃음을 흘리면서 손을 가볍게 허공에다 털었다.
눈보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엘릭의 손등에 박혀 있던 냉혹의 인장은 어느 때보다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휘이잉!
청랑들 앞으로 부는 눈보라가 갑자기 거세지나 싶더니.
쩌저저적-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모르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
“…!”
“이게 무슨…!”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하눌의 눈이 부릅떠지고, 남은 청랑이 일제히 이쪽으로 움직일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쏟아져라】.”
엘릭은 그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들의 머리 위로, 마력장을 아주 넓게 퍼뜨리면서 새로운 마법을 발동했다.
얼음 화살 수백 개가 상공에 잔뜩 맺히는 광경은 청랑을 질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
“마, 막아!”
하눌이 가까스로 소리를 질렀지만, 청랑이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얼음 화살이 그대로 아래로 쏟아졌다.
콰콰쾅!
“크악!”
“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알!”
“말도 안…!”
부서진 얼음 조각과 함께 잔뜩 언 사지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동작이 빠른 이들은 재빨리 바닥을 구르는 등 피하거나 했지만, 얼음 화살은 마치 눈이 달린 것처럼 방향을 꺾어 그런 놈들에게도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 차.
이사벨과 첸 등은 혹시 자신들이 꿈이라도 꾸고 있나 싶어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자유자재로 갖고 놀면서 눈보라를 다루는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으니까.
“너희들이 누군지 이 형은 관심이 없거든?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파묻히자?”
“…!”
이사벨은 엘릭의 저 말이 조금 전에 하눌이 그녀에게 던졌던 희롱을 비꼬는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잠깐. 저 얼굴…?’
그러다 이사벨은 엘릭의 얼굴이 어딘지 낯익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처음 설인들과 부딪쳤을 때 실종되고 말았던 사람이 왜 여기에?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그때, 에드가 지금이 기회라 여겼는지, 이사벨의 팔을 잡고 빠르게 장소를 벗어나려 했다.
“자, 잠깐만…!”
이사벨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얼음 화실이 무수히 떨어진 자리, 하눌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엘릭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죽여버리겠다!”
청랑의 조장답게 날렵한 움직임.
목표물을 다 잡은 상황에서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변수와 맞닥뜨리고 말았으니 화가 단단히 난 것이다.
지이잉-
오러 홀에 생성된 두 개의 오러 체인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쩌어엉!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오러 체인에서 샘솟은 마력을 잔뜩 머금으며 맑은 소리를 냈다.
소드 하울링.
2체인의 ‘어드밴스(Advanced)’를 상징하는 현상과 함께 검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무장 개방】, 【치솟아라】!”
엘릭은 몸을 뒤로 내빼면서 더블 스펠을 활용, ‘얼음의 벽’을 마구 세웠다.
땅이 흔들리면서 하눌 앞으로 얼음의 벽이 몇 겹이나 치솟았다.
그때마다 하눌의 움직임이 더뎌졌고, 하늘에서는 얼음 화살이 사각을 노리면서 상처는 계속 늘었다.
용해율 10%의 눈보라는 그가 어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다 마력장의 범위는 한껏 좁혀져 하눌에게 집중되었으니.
결국 녀석이 엘릭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빌어… 먹… 을…!”
하눌은 피투성이가 되어 거칠게 숨만 몰아쉬다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지면에다 찍고 말았다.
퍼억!
남아있던 얼음 화살이 그대로 뒤통수를 부숴버리자, 머리를 잃은 시체가 힘없이 눈밭에 처박혔다.
“…!”
“…!”
“…!”
이사벨과 에드, 첸은 직접 육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자신들은 그토록 고전을 면치 못했던 놈들이, 단 한 명의 마법사에게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고 너무 쉽게 전멸하고 말았으니까.
더군다나 에드와 첸도 그사이 이사벨처럼 엘릭이 누군지 눈치를 챈 상태였다.
그전에는 엘릭이 설인을 피해 도망쳤다고만 생각했기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인사라도…?
한편으로는 엘릭의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바짝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들을 속이기 위한 파울 바일의 수작일 수도 있었으니.
그때.
엘릭은 흉흉한 눈길로 청랑의 시체들을 보다가, 이사벨 등이 있는 곳을 보자 난감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음, 어….”
그 역시 하눌 등을 쫓을 생각만 했었지, 이들을 돕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둔 게 전혀 없었으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오랜만입… 니다?”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 * *
엘릭을 본 순간부터.
이사벨은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 사람… 우리와는 차원이 달라.’
보통 저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있었다.
상리와 법칙을 조금씩 깨닫고, 자연 세계로 흐르는 마나 스트림에 접속할 권한을 획득한 마법사들.
그들은 기존의 마법 체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하니.
그렇기에 그들이 부리는 마법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붙는다.
마도(魔道).
‘마법의 길’이라고.
수많은 마법사가 문턱까지 갔다가, 결국 고꾸라지고 만다는 경지를 디딘 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마도사…!’
이사벨의 경악이 소리 없는 메아리가 되어 마음속에서 울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