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하산
『뭘 그리 찾는 것이냐?』
메피스토는 안배가 끝나고도 엘릭이 안가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미간을 가만히 찌푸렸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픈 마음뿐이건만.
엘릭은 밤새 서고를 계속 뒤지는 중이었다.
“찾을 게 있어서요.”
『찾을 거라니?』
엘릭은 메피스토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뒤쪽으로 손을 활짝 펼쳤다.
손바닥 위로 새하얀 빛무리에 휩싸인 빙정이 나타났다.
『이건…?』
“빙정이죠.”
『…겨울 현자, 그놈이 주었나 보군?』
“이걸 가져다주랍니다.”
『누구한테?』
“동백의 신한테요.”
『하, 하하하! ‘겨울’이라도 만드려는 모양이지?』
책에 고정되어 있던 엘릭의 시선이 처음으로 메피스토에게로 향했다.
겨울.
그가 여태껏 찾았지만, 도통 의미를 알아낼 수 없었던 단어.
단순히 계절적인 의미는 아닐 게 분명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모를 리가 있나. 본 왕을 비롯한 마왕들의 발목을 두고두고 묶었던 가증스러운 너희 ‘사계(四季)’를.』
“자세히 좀 말씀해주세요.”
엘릭은 책을 도로 덮었다.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메피스토는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본 왕이 왜? 늘 말하지만, 본 왕은 어디까지나 너를 도와줄 이유 따윈 전혀 없다만.』
“애교 면제권.”
『4달.』
“…?”
『4달로.』
“보름.”
『4달.』
“알았어요. 한 달. 더 이상 양보 못 해요.”
『4달.』
메피스토는 절대 양보 따윈 보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엘릭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알았어요, 알았어! 넉 달로 하면 되잖아요.”
『묻고, 더블로 묵언 면제권까지 가!』
“…아예 뽕을 뽑으려고 하시네.”
『그래서? 안 하려고?』
“합니다. 한다구요!”
『그럼 이참에 딴 말 못 하게 마나의 맹약까지 맺도록 하지.』
마나의 맹약은 마나 스트림의 접속 권한을 거는 계약.
만약 어길 시에 마력을 영구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이만한 안전장치도 없었다.
엘릭은 툴툴거리면서도 메피스토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
이 거래가 간절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파아아-
찰칵, 찰칵!
마나의 맹약이 이뤄지면서 심장에 박힌 마나 써클이 보이지 않는 자물쇠로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근데 왜 하필 넉 달인 건데요?”
『그냥. 사계에 관해서 묻기에 라임을 맞췄지.』
메피스토는 잔뜩 구겨진 엘릭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여기에 있는 동안 꿀꿀했던 기억이 전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철컥-
“다 됐죠? 그럼 이제 말해줘요.”
엘릭은 맹약의 마지막 순서까지 채워지자, 메피스토를 닦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묻고 싶은 건 전부 물어볼 생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지만… 뭐, 아무래도 좋겠지. 어차피 네놈도 곧 알게 될 것들이고.』
메피스토는 잔뜩 잰 체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계란, 너희 메르빙거를 반석에 올린 4명의 가신을 이야기한다.』
“가신?”
엘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토 한은 가신이 아니라 중시조일 텐데…?
뭔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 같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사계다. 우리네 종족들은 그들을 구분해 그렇게 불렀지. 각자가 가진 성격이며 특징이 각 계절에 어울렸으니까.』
“…4대 봉신!”
엘릭은 뒤늦게 메피스토가 말한 사계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시조를 보좌하여 가문을 일으켰다고 전해지는 네 명의 봉신.
시조 전승만큼이나 믿기 힘든 전설로 전해지는 존재들이었다.
다만, 의아한 점은 있었다.
‘잠깐만. 오토 한은 중시조잖아? 그런데 봉신이라고?’
다행히 엘릭의 의문은 금세 해결될 수 있었다.
『파핫! 너희들은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지? 여하튼. 그중 오토 한은 ‘겨울’에 해당하는 놈이었다. 당… 대 메르빙거의 양자로 입적해 몇 대 후에 가주로 선출되기도 했던 충견 중의 충견이었지.』
엘릭은 어쩐지 메피스토가 시조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놈이 안배의 길잡이로 남아있다는 건… 우선 자신이 지녔던 힘을 너에게 전해주려는 게 아니겠나.』
엘릭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오토 한이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대강 알게 되었으니까.
‘그럼 이번 안배가 전부 끝나고 나면, 순차적으로 다른 사계의 안배도 받을 수 있는 걸까?’
오토 한은 말했다.
가전 전승으로도 시조에 대한 설명은 한없이 부족하다고.
그렇다는 건 그를 호종한 사계도 마찬가지일 테니…!
그런 힘을 전부 이을 수 있다면?
‘시조만큼 강해질 때까지 나를 굴릴 거라더니… 그게 이 뜻이었구나.’
확실히 사계의 힘은 시조에게서 비롯된 게 분명할 테니.
‘그런다면 가문을 재건하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닐 테지.’
엘릭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러다 물었다.
“그럼 이 빙정은 뭡니까?”
『그건 ‘알’이다.』
“알?”
『만년설로 뒤덮인 빙산, 그 가장 깊숙한 심처(深處)에서만 맺히는 겨울의 핵…. 그렇기에 정(精)이고, 가장 순수한 기운만을 집약시켜뒀기에 영성을 띄어 령(靈)이기도 하다.』
“요약 좀.”
『…말하지 않았더냐. 정이고, 령이라고.』
“정령?”
『그렇다.』
“오.”
엘릭은 감탄사를 흘리면서 여전히 잘게 떨리는 빙정을 내려다보았다.
말로만 듣던 정령의 알이라?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기에 앞으로 네가 거기에 무엇을 담는지에 따라서, 거기서 잉태될 것도 무궁무진할 것이니라.』
“그럼 동백의 신은 이걸 왜 필요로 하는 건데요?”
『본 왕이 그것까지 어찌 알까? 다만, 꽃을 신위로 두고 있는 놈이니 새끼를 치려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고.』
엘릭은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백꽃은 겨울에 핀다. 그렇다면 빙정만큼 좋은 화분(花盆)도 없겠지.
『확실한 건, 겨울 현자가 남긴 그림이 제법 그럴듯할 거란 것이다.』
메피스토는 오토 한의 계획이 무엇일지 정확하게 읽어 짚어내고 있었다.
한때 너무나 첨예하게 부딪치던 적이 있었기에.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일 테지.
‘덕분에 나도 이해가 쉬워졌지만… 쓸데없이 너무 친절해진 것 같은데? 뭐지? 또 무슨 꿍꿍이라도 있나?’
엘릭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영체가… 좀 더 또렷해졌다?’
두 눈이 활짝 커졌다.
* * *
‘확실해. 아주 조금이지만, 격이 상승했다. 저놈의 안배가 끝나고 난 뒤에 본 왕의 힘도 어느 정도 돌아온 것이 분명한 것이야!’
메피스토는 저도 모르게 번져 나오려는 웃음기를 겨우 삭혀야만 했다.
그동안 냉혹의 인장이 성장할 때마다 마기가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다지만.
그래도 너무 소량이었기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전성기 시절에 보유한 마기에 비하면 이슬만도 못한 양이었으니까.
설사 마기가 돌아왔다고 해도, 그게 엘릭의 성장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에 따른 자연스레 회복이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배가 끝난 순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엘릭과 자신의 영혼은 밀접하게 연결된 게 분명하다고!
‘최대한 빨리 이놈을 강하게 만들어서 격을 회복한다.’
원래대로라면 엘릭에게 암시를 걸어서 육체를 강탈하려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이 그냥 성장시키는 것만으로도 반사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메르빙거를 자신의 손으로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 내심 찝찝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랴. 당장은 회복하는 게 우선인 것을.
강탈을 시도하든, 독립을 시도하든, 그건 그 뒤에 가서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메피스토의 그런 꿍꿍이는 엘릭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영체가 강해졌다는 건, 그만큼 격이 회복되었단 뜻일 테니까. 지금이야 아직까지 내가 맘대로 다룰 수 있지만, 나중에 가서는 어려워질 수도 있겠는걸.’
어찌 보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자신을 노리는 비수가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만큼 위험했지만.
‘좋은데?’
엘릭은 메르빙거의 가주답게 이번 기회가 호기로 보였다.
‘그만큼 앞으로 더 많은 걸 메피스토한테서 뜯어낼 수 있는 거잖아.’
여태껏 협박과 거래를 번갈아 하면서 메피스토의 도움을 끌어냈지만, 이제부터는 좀 더 수월하게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몰라도, 언젠가… 메피스토를 내 손으로 직접 꺾어야 할 테니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설산왕에게 오토 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엘릭은 언젠가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벽이 메피스토라고 생각했다.
* * *
사박.
사박.
움직이기는 버거워도 쾌청했던 날씨는 언제부턴가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로브 기사들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기사 첸의 물음에 무리의 수장, 이사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들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지금은 ‘무덤’을 찾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하죠.”
“예… 알겠습니다.”
“저 역시 ‘청사자’의 자식입니다. 여러분께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짐이라니요!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을…!”
첸은 ‘짐’이라는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이사벨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을 쫓던 자객에 의해 길잡이를 비롯한 여객들이 모두 죽은 지 벌써 한 달째.
그동안 그들은 모진 고생을 해야만 했다.
거룡 산맥을 이리저리 헤매야만 했고, 그 와중에 소중한 기사 두 명이 동사했다. 한 명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오른팔을 잃었으니, 이제는 겨우 한 명만이 이사벨을 지켜야 했다.
그러니 이사벨이 저토록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거겠지.
하지만.
정말 이런 상태로 제대로 목표를 찾을 수 있을까?
첸은 성을 박차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 있었던 다짐이, 언제부턴가 무너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대체 이 넓은 산자락에서 그 ‘무덤’이란 것을, 과연 찾기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첸은 그런 속내를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기사였다.
주군에 대한 맹약을 이행하고 완수해야만 하는 기사.
그녀가 설사 실패하더라도,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것이 그가 할 의무였다.
그리고.
‘첸.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전 해낼 거예요.’
이사벨은 그런 첸의 생각을 진즉에 눈치챘으면서도, 모른 척 넘겼다.
여기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다간 정말 모든 게 끝장이었으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숙부님이 보낸 자객은 그들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 근방인 건 확실한데… 대체 어디지?’
이사벨은 지도에서 봤던 그림을 계속 더듬어보았지만, 시야가 극단적으로 짧아진 이런 환경에서 위치를 가늠하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정말 어디에 있는 거냐고…!’
당대 ‘청사자’의 칭호를 받은 그녀의 아버지, 헤르만 바일은 ‘인류의 벽’이라 불리는 5개의 오러 체인(Penta-Aura Chain)에 하나를 더 추가하기 위해 무리를 하다가 그만 입마증에 빠진 상태.
가문의 주치의는 아버지를 진맥한 뒤에 암울한 전망을 결과로 내놓았다.
-이건 말로만 듣던 절맥증과 똑같은 증상입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