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하산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세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드러나는 동산.
오토 한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정말 설산왕을 삼킬 줄이야. 대단하구나.”
엘릭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역시. 제가 해내기 힘든 난이도였던 거, 맞죠?”
“당연하지.”
“….”
이렇게 대놓고 긍정하니 오히려 반박할 말이 없어질 정도였다.
“언감생심이지. 정신적으로는 제법 지식을 쌓은 것 같다만, 그래도 정식으로 입문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햇병아리가 어찌 설산왕을 삼킬 엄두를 낼 수 있을까? 아무리 영락했어도 명색이 군장이었던 자인데.”
엘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토 한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언제는 쉬울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최소한 반년. 재능에 따라서는 길게 2년에서 3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제법 쓸 만해질 정도는 되겠다 싶었었고.”
뭐, 정말 1년을 넘었으면 안배가 재능도 더럽게 없는 후손에게 넘어갔구나 하고 더 미친 듯이 굴렸겠지만.
아마 오토 한이 말한 ‘쓸 만해진’ 정도도 가문의 기준에서나 그렇지, 외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이 안배를 극복해냈단 말이지…. 후후! 그래도 지겹도록 이곳에 남아있던 게 헛된 짓은 아니어서 아주 다행이야.”
오토 한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얄밉던지.
엘릭은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한 달입니다.”
“음…?”
“마법 익힌 거 말입니다. 여기서 한 달을 다시 보냈으니 이제 딱 두 달이 되었겠네요.”
“…무슨?”
오토 한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엘릭은 더 말해주기 귀찮다는 듯 대답 없이 돌아서자, 뒤늦게 제대로 들었단 걸 깨닫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허? 허허허!”
그러다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흡족하게.
* * *
“그녀는. 마지막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냐?”
“마지막에 웃고 있었습니다.”
“그렇더냐? 다행이구나.”
오토 한은 엷은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엘릭은 그 모습에서 쓸쓸함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산왕의 업을 삼키면서 그녀의 인생을 일부 엿보긴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확실한 건 숙적으로 만났던 두 사람이 언제부턴가 상대방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
그리고 종족과 입장의 차이로 인해 그것이 이뤄질 수 없었단 것만 짐작하고 있을 뿐.
‘그러고 보니 가계도에도 오토 한 쪽에서는 내려오는 자손이 없었지.’
명분은 가문의 안배를 위해 마련해두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어서도 설산왕의 무덤을 지켜주고 싶었던 게 아닐는지.
“이제 안배는 모두 끝난 겁니까?”
하지만 엘릭은 거기에 대해서 굳이 묻지 않았다.
각자에게는 각각의 사연이 있는 법이고, 자신이 그걸 전부 알 필요는 없으니까.
“끝일 것 같으냐?”
오토 한도 엘릭의 그런 배려를 알고 있다는 듯, 엷게 웃었다.
“아뇨. 계속 있을 것 같습니다.”
“맞다.”
“대체 뭘 얼마나 더 굴리시려고….”
“시조만큼 될 때까지.”
“…그거 단순히 가전 전승, 뭐 그런 거 아녔습니까?”
사실 메르빙거는 오래된 역사만큼, 가문 초창기의 일에 대해서는 ‘설(說)’만 있을 뿐이었다.
구전되는 것들이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것들로 가득했으니까.
특히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시조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야 용을 직접 부렸다느니, 거인을 가디언으로 삼았다느니, 온통 그런 것들 투성이라….”
엘릭은 말끝을 흐리면서 슬쩍 오토 한의 눈치를 봤다.
말하다 보니 어쩐지 중시조 앞에서 시조를 격하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사실 상당히 완곡해서 꺼낸 표현이었다.
-시조께서 가지고 계신 기적을 행사하니,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 차고 지상이 화염지옥으로 뒤덮이며 감히 그분을 의심한 두 개의 도시가 잠기더라.
-시조께서 아끼시던 용의 우두머리가 명운이 다해 눈을 감으니. 비늘은 숲이 되고, 거죽은 대지가 되며, 피는 강이 되었노라. 뼈대는 산맥을 이루니 그것이 오늘날의 거룡 산맥이니라.
-시조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거인들은 평상시 조용하나, 일어서면 대지가 들썩이고, 내달리면 그 기세가 산불과도 같아서 어느 것도 당적(當敵) 할 수 없노라.
-시조의 곁에는 수많은 기적자들이 몰려드니. 그들은 모두 법칙이며 진리라, 오늘날의 신이 되었노라.
호풍환우를 제 뜻대로 부리고, 지형지물을 제 맘대로 바꾼다고?
엘릭이 알기로 그런 존재를 가리키는 단어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신(神).
‘역대 가주 중에서 가장 강했다고 평가받으시는 조부님도 그 정도는 아니셨을 텐데.’
엘릭이나 역대 가주들이 시조를 비롯한 가문의 초창기 역사를 단순한 전설로만 취급해 온 이유였다.
‘잠깐. 이거 근데 예전에 꿨던 꿈이랑 비슷한…?’
그러다 엘릭은 보석룡의 둥지에서 보았던 꿈이 언뜻 떠올랐지만.
곧 이어지는 오토 한의 말에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평가가 박하군.”
“예?”
“고작 그 정도밖에 구전되지 않았나 해서 말이다.”
“…!”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축복받은 재능을 타고나 앞으로가 더 기대되지만, 아직까지는 꽃을 피웠다기에 아직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후손아. 네가 보는 시야와 네가 가진 잣대로 감히 그분을 평가하지 말지어다.”
“….”
“그분은 이 땅에 계실 적에 많은 것을 이루셨고, 많은 것을 남기셨다. 우리는 그분을 좇기 위해 이 많은 것들을 준비한 것이니. 너는 착실하게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될 것이다.”
엘릭은 한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대체 시조가 어떤 존재이기에 이러는 거지?
“여하튼 지금은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면 될 일이다.”
엘릭은 오토 한이 새로운 안배에 대해서 말해주려는 것을 깨닫고, 도로 눈을 밝혔다.
한편으로는 가전 전승으로도 설명이 부족하다는 시조의 ‘길’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네가 걷기 시작한 길은 얼어붙을 듯이 춥고, 외로워서 모든 것이 쓸쓸하기만 할 것이다. 산과 들은 온통 눈으로 덮이고,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려 길조차 제대로 보이질 않을 테지.”
오토 한의 눈이 깊게 내려앉았다.
“그러니 그곳에서 너만의 겨우살이를 준비해야만 한다. 우선 하나를 장만했으니, 다른 하나도 마련해야겠지?”
“예.”
“동백의 신을 찾거라.”
“동백이라면… 동백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엘릭은 한순간 정신이 멍했다.
동백꽃의 신? 그런 신위를 둔 신이 있었었나?
“그가 너의 새로운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엘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동백의 신을 찾아야 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만큼, 기존에 있던 단서도 모두 사라졌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찾는 것까지도 선조들의 시험일 것이다.
‘우리 가문이라고. 후손이라고 해서 순순히 가르쳐 줄 리가 절대 없지.’
다행히 계획이 전혀 안 서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꽃의 신전부터 들린다면 어떤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거야. 그쪽부터 훑어보자.’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엘릭은 공손히 예를 갖추면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굴린 것과 별개로, 오토 한 덕분에 이만큼 배울 수 있었으니까.
사실 엘릭은 그동안 받지 못했던 ‘어른의 보살핌’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치 영영 헤어질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이곳 안가에도 종종 찾아올 게 아니더냐?”
“그건 그렇지만 자주 올 수 있는 건 아니어서요.”
엘릭이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오토 한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공사가 다망할 테니. 여하튼. 잘 굴렀고, 앞으로 더 많이 구르려무나.”
“…뭔 응원이 그따위 식입니까?”
하여간 이놈의 집구석. 왜 죄다 성격이 저 모양들인지.
엘릭은 툴툴거리다 심상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다.
한쪽 눈만 슬쩍 뜨면서 물었다.
“그런데 나가는 거, 어떻게 합니까?”
* * *
“하여간 이놈의 집구석!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엘릭은 화를 내면서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보이는 곳은 도서관. 현실이었다.
『으하하! 보아하니 오토 놈에게 무슨 인성질이라도 당한 모양이로군.』
메피스토가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이 왜 그렇게 얄미운지.
속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인성은 무슨! 그 정도면 혐성이지 무슨 인성입니까!”
메피스토는 ‘네놈이 할 말은 아니잖느냐’고 말할 뻔한 걸 가까스로 참으면서 물었다.
『뭐 어떻게 했기에?』
“제길…!”
엘릭은 다시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 것 같아 울화가 치밀었다.
-아. 그래. 나갈 방법. 음….
-…음이라고 했죠, 방금?
-하하. 그럴 리가.
-설마 생각도 안 해뒀던 겁니까?
-뭐, 없으면 만들면 되잖나.
오토 한이 미심쩍게 웃을 때 진즉에 알아챘어야 했는데.
엘릭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심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는 것으로.
‘다짜고짜 죽빵을 갈기는 게 어딨냐고! 젠장!’
아무리 많은 죽음을 경험해봤다고 해도,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게 죽음이니.
당연히 뿔이 단단히 날 수밖에 없었다.
‘내리사랑으로 인성질을 베푸는 가풍이라니. 아주 훌륭한 가문이로고. 낄낄낄.’
메피스토는 간만에 흡족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이걸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엘릭은 미간을 구기면서 가만히 손을 활짝 펼쳤다.
화아아!
그의 손 위로 시린 빛을 뿌리는 하얀 결정이 나타났다.
-아 참, 그리고 가기 전에 이걸 가져가려무나.
-이게 뭡니까?
-빙정(氷晶).
-빙… 정?
-동백의 신… 그 친구의 성격이 조금 별나서 말이지. 그걸 가져가야 겨우 말이나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음…?
-그러니 그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려무나.
-‘겨울’을 완성하러 왔다고.
* * *
동산에 홀로 남은 오토 한은 엘릭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면서 피식 실웃음을 흘렸다.
“아주 재미난 후손이었단 말이지.”
자질이면 자질. 의지면 의지. 인성이면 인성.
모든 부분에서 골고루 합격점을 받기는 힘들 텐데. 오토 한은 지난날의 기다림이 모두 보상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끌벅적하던 지난 한 달이 다시 그리워져 아쉽기도 했다.
“그나저나.”
오토 한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던 당신도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어야 할 텐데.”
설산왕이 서 있던 자리.
“당신이 남긴 한이… 그 업이, 저 아이의 손에서 제대로 잉태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설산왕은 한평생 오토 한을 사랑하면서도 그를 뛰어넘고자 노력했고, 끝내 그러지 못했기에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입마(入魔)에 빠진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힘을 갈구하려 인장을 섣불리 건드렸다가 진명이 폭주를 일으켰던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눈앞에 있었던 것은 완전히 몰락하고 만 그녀의 나라였고.
자신을 막으러 온 연인에게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던 것도 바로 그녀의 유언이었다.
그렇기에.
오토 한은 죽어서도 무덤지기를 자처했다.
그녀에 대한 속죄를 치르고.
그녀의 한과 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니 부디 내세에서는.”
오토 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제나 저 자리에 있었던 설산왕의 그림자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눈에는 계속 보이는 것만 같았다.
“우리 둘 모두 이전보다 아름답게 만날 수 있기를.”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