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첫 번째 안배
‘해냈…!’
엘릭은 혹시나 했던 도박이 성공하자 크게 쾌재를 외쳤다.
방어는 도외시한 채, 오로지 파괴력에만 집중해 달려들면서 설산왕의 눈보라를 아주 잠깐이나마 무력화시키고, 육탄 돌격을 감행해서 승부를 보겠다던 작전.
사실 이게 성공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최근 들어 계속 작전이 번번이 실패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보고자 시도해본 방법이었는데, 이렇게 성공할 줄이야!
그동안 설산왕의 그림자를 찢는 것이 최고 성과였기에. 그녀의 왼팔을 잘라낸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엘릭의 그런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설산왕은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일절 고통스러워하거나 흔들리는 기색 없이 오른손을 활짝 펼쳐 이쪽으로 덮어왔으니까.
손바닥에 잔뜩 응축된 마기가 폭발했다.
엘릭이 일찌감치 ‘빙열(氷裂)’이라 이름 붙인 기술.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녀 그도 몇 번이나 ‘아웃’되고 말았던, 설산왕의 시그니처 스킬이었다.
콰르르릉-
엘릭은 본능적으로 넙죽 엎드리면서 땅바닥을 굴렀다.
“제기랄! 도저히 좋아할 틈을 안 주네. 퉤!”
엘릭은 가래 섞인 피를 땅바닥에다 뱉으면서 다시 달려들었다.
욕지기를 내뱉는 것과 다르게, 입가에는 미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드디어.
설산왕의 인장 중 ‘일부’를 흡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파스스-
엘릭은 때마침 아래로 떨어지던 설산왕의 왼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왼팔이 모래성처럼 잘게 부서지면서 고스란히 인장 쪽으로 흡수되었다.
화아악!
3성이었던 냉혹의 인장이 좀 더 선명한 형태를 갖췄다. 3개의 산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4성에 돌입하기 시작했다는 의미.
두근, 두근!
여느 인장을 흡수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엘릭은 확신했다.
지금 흡수한 인장 하나가, 웬만한 설인 대장 서너 개를 해치운 것보다 더 큰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아니나 다를까.
머릿속으로 여러 단편적인 상념들이 두서없이 빠르게 스치고 있었다.
인장 속에 들어있던 설산왕의 지식들.
콰쾅, 콰콰쾅!
쿠르르르-
엘릭은 재차 인장 마법을 발동하면서 회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조금씩.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 * *
온통 어둠으로만 가득한 세상.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기나긴 잠을 잔 것만 같았다. 정신이 멍했다.
‘난… 누구지?’
그녀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인상을 찡그릴 무렵.
머릿속으로 어느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위엄에 가득 찬 나머지 절대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
-‘인정’이라…. 진명도 잊은 지 오래되어도 한참 오래된 너희 종족이 그렇게 말을 하니 참 우습구나. 그것이 얼마나 과한 요구인지 알기나 아는 것이냐?
-그래도 끝까지 욕심을 부리겠다면….
-그래. ‘증명’을 해보아라. 너희들이 우리 일족이 될 수 있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그런 증명 말이다.
* * *
엘릭이 설산왕의 이상 변화를 깨닫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마기가 흔들린다?’
여태껏 단단한 갑옷처럼 설산왕을 둘러싸고 있던 그림자에 파문이 그려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아래로 쏟아질 것처럼.
쿠아아!
설산왕도 그런 자신의 변화가 당혹스러웠던지, 안색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엘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더 공세를 크게 퍼부었다.
콰콰쾅!
그림자가 더 크게 흔들렸다. 찢긴 마기가 허공으로 튀었다. 설산왕은 폭격을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만큼 엘릭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엘릭은 부서진 마기 파편을 잇달아 흡수했다. 설산왕을 구성한 인장을 조금씩 먹어치우는 만큼 성장 속도도 가팔라졌다.
근섬유가 더 세밀해졌다. 마력 순환이 활발해졌다. 마나 로드가 보다 더 촘촘해졌다.
무엇보다.
그동안 억지 된 모방에 가까웠던 설산왕의 동작과 마법이 자연스러워졌다.
엘릭, 그 자체가 마치 설산왕이라도 된 것 같았다.
동화(同化).
그렇게 볼 수 있으리라.
반면에 설산왕은 달랐다.
그녀는 그 자신을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눈보라가 약해졌다. 동작이 굼떠지고, 손과 발이 조금씩 방황하기 시작했다. 얼음이 제대로 생성되질 않고, 마법 구성이 계속 어긋나 캔슬되기 일쑤였다.
그런 광경이.
마치 엘릭에게 ‘설산왕’이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빼앗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과정에서. 엘릭은 오토 한이 했던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말했지만, 난 분명히 쓰러뜨리라고 한 적은 없다. 삼키라고만 했지.
-설산왕을 ‘이해’하려고 하는구나. 인장은 단순히 갈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깊게 파악할 필요도 있지. 아주 좋은 자세다.
인장을 흡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마족의 재능과 능력을 갈취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마족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전부 삼키라는 뜻이었다!
콰르르릉-
‘순전히 사기꾼이잖아.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걸 요구하다니.’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쉽다면, 대체 어느 누가 고생이나 하겠냔 말이다.
그냥 남이 이룬 걸 가로채버리면 되는 것을.
업(業)이란 위대하기에 업이다.
또한, 고단하기에 업이다.
일반인들은 좀처럼 밟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역경과 시련 따위로 점철되어 있기에, 업은 숭배 되고, 또한 존경받는다.
설산왕이 쌓은 업도 그러했다.
모두가 잊었던 설인의 진명을 발견하여 갈고 닦았고.
종족을 다시 반석 위에 당당히 올려두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방해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그것들을 물리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떨쳐 울렸으니.
다시 쇠락하고만 설인이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기리고, 전설로 남기고자 한 것은 그 위대한 업적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토 한은 엘릭에게 그런 설산왕의 업을 가로채라고 한 것이다.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나 다름없는 안배였지만.
‘뭐, 진짜로 내 것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엘릭은 메르빙거의 가주답게, 아무렇지 않게 선조의 그런 비겁한 주문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렇기에.
파스스-
화아아!
볼 수 있었다.
부서진 여러 인장의 파편들 속에 담겨 있는 설산왕의 일생을.
-키엑! 마신께서 신탁을 내리셨다! 이 여자, 우리의 여왕 된다! 고원 이끈다! 산맥 우리 것 된다! 북부, 우리 발아래 밟힌다!
원래 설산왕은 태어났을 때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자란, 어느 부족장의 후계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멍청한 설인답지 않게 머리도 명석해서 이미 성인이 되었을 때는 고원을 통일하고, 거룡 산맥 전체로 세를 뻗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하지만 설산왕의 야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들 설인은 위대한 마족의 일원이었으니! 이제 그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기 위한 장정을 시작하자!
설산왕은 자신만만했다.
그녀는 젊었고, 힘이 있었으며, 넓은 세를 보유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짓밟히고, 여러 이종족들이 무릎을 꿇었다.
마족이 되고, 스스로 마왕이 되겠다던 선언은 금세 이뤄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증명을 해보아라. 너희들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났을 때. 설산왕은 처음으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벽은 너무나 높아서 어떻게 넘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설산왕은 절치부심 노력했다. 진명을 갈고 닦았고, 인장을 진화시키고자 했다. 군장이 아닌 마왕이 된다면, 충분히 메피스토펠레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러던 차에 설산왕은 조우하고 말았다.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보다도 더 험준한 벽을.
‘오토 한 메르빙거.’
오토 한은 가솔들을 이끌고, 당시 거룡 산맥을 벗어나 수많은 왕국을 짓밟고 있던 설인들을 막아섰다.
그리고 압도적인 실력 차로 그들을 패퇴시키고, 도로 거룡 산맥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고원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모든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만 것이다.
-너희 인간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 어째서 우리가 이제야 뭔가를 좀 가지려는 것조차 내버려 두지 않는단 말이냐!
설산왕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부짖었지만, 오토 한은 전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룡 산맥에 웅거하고서, 스스로 감시의 눈이 되어 설산왕을 살피기까지 했다.
설산왕과 오토 한의 기묘한 동거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설인들 사이에 오토 한이 원수가 아닌, 설산왕의 ‘친구’로 남게 된 건 그 후의 이야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여러 복잡한 사연과 패배를 숨기고 싶었던 설인들의 전승 조작이 빚어낸 결과였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오토 한은 한평생 설산왕에게 있어 절대 뛰어넘을 수 없을 장애물로 남았으면서도.
손수 무덤을 지어줄 정도로 그녀를 인정했던 각별한 사이란 점이었다.
“…그이가 말한 대로 나는 인형으로 부려지고 있던 모양이로군.”
그러다 마기가 거의 사라졌을 무렵, 설산왕을 따라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설산왕은 어느 정도 초점이 잡힌 눈동자로 엘릭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에게로 쏘아지던 얼음 화살도 도중에 정지되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조금.”
설산왕은 마기와 인장을 상당수 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눈빛만큼은 아주 강렬했다.
한때 거룡 산맥을 휘어잡고, 마왕의 위까지 넘봤던 존재다운 위엄.
“그대가 아무래도 그이가 말한 먼 훗날의 후손인 것 같은데… 후후! 그래도 내 광증을 어느 정도 걷히게 했을 정도이니, 호언장담이 아주 실언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이.
설산왕은 오토 한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마치 옛 연인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엘릭은 그런 그녀를 보다가, 예의를 갖추고자 했다.
그녀와 다툰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쌓은 업을 일부 훔쳐봤기에 존경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멈춰. 뭘 하는 거지?”
슬퍼하는 기색도 잠시.
설산왕은 다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와 엘릭을 노려보았다.
“그거야…!”
“너는 나의 적이 아니었던가?”
단호한 어투.
엘릭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통해 이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에게 동정을 살 정도는 아니니. 예의를 갖추겠다면 전력을 다해 나를 쓰러뜨려라. 그것이면 충분할지니.”
설산왕의 눈에는 이것이 알량한 동정심으로 비쳤던 걸까.
엘릭은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아주 잠깐 엿보았던 설산왕의 생애는 안타까운 부분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설산왕은 그런 시선을 거부했다.
마지막까지 일족을 이끈 왕이자, 전사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엘릭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설산왕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로 마음먹었다.
콰아아앙!
콰콰콰-
눈보라와 눈보라가 격돌했다.
하나는 시계 방향, 다른 하나는 반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충격파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빙판이 갈라지고, 얼음 조각이 허공으로 높게 솟구쳤다.
그리고.
쩌저저정-
엘릭은 단숨에 설산왕의 품까지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 가슴팍을 후려치고 있었다.
쾅!
손바닥이 가격한 자리.
사람 머리통만 한 바람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빙열(氷裂).
설산왕이 자랑하던 시그니처 스킬을, 고스란히 되돌려준 것이다.
설산왕은 자신의 그런 가슴팍을 내려다보더니 흡족하게 웃었다.
“제법, 괜찮았…!”
푸화악!
설산왕은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토혈과 함께 몸이 그대로 부서지고 말았으니까.
츠츠츠-
설산왕을 구성하고 있던 마기가 고스란히 엘릭의 오른쪽 손등으로 빨려 들어가고.
냉혹의 인장이 새로운 모습 갖췄다.
세 개의 빙산에 빙하가 흐르는 형태.
완전한 4성을 이룬 것이다.
“…후우!”
엘릭은 크게 숨을 고르면서 고개를 들었다.
첫 번째 안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