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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1화 (21/405)

21화

첫 번째 안배

이미 냉혹의 인장은 완전 개방된 상태.

그 덕분에 엘릭은 이전보다 훨씬 자신만만하게 언령을 발동할 수 있었다.

화아아!

가장 먼저 엘릭의 마력장이 닿는 범위 속 기온이 확 가라앉았다.

가뜩이나 추운 판국에 더 기온이 떨어지니 설인들의 움직임은 그만큼 굼떠질 수밖에 없었고.

그다음에는 냉풍이 휘몰아쳤다.

엘릭이 처음 설산왕이 만든 눈보라 속에서 겨우겨우 한 발 한 발을 뗐던 것처럼.

녀석들도 시야가 한순간 확 가려지게 되자 방향을 잃고 주춤거렸다.

마치 발에다 무거운 족쇄라도 채운 것처럼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 녀석들의 관절에 천천히 성에가 맺히고, 얼음이 달라붙었다.

그 와중에 하늘에서부터 어느새 잔뜩 응결된 뾰족한 고드름이 쏟아졌으니.

키에에엑!

설인 전사들이 빠르게 허물어지는 가운데.

엘릭은 그런 녀석들을 가로지르면서 설산왕에게로 다가갔다.

* * *

‘냉 속성에 대한 감각이 계속 또렷해지고 있어.’

설인들로부터 인장을 갈취하면 할수록.

엘릭은 인장이 주는 여러 효과를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인장은 단순히 육체를 변화시키고, 뛰어난 마법만 쥐여 주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그 속성에 대한 속성력과 내성, 그리고 이해도를 천천히 올려주었다.

냉혹의 인장이 가진 속성의 기본적인 특징은 ‘차가움’이었다.

이런 추위로부터 육체가 더욱더 잘 견딜 수 있도록 해주면서, 추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 요소를 훨씬 쉽게 감지하고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 보니.

엘릭은 어느새 얼음과 관련된 마법만 계속 발현하는 중이었다.

‘눈보라’, ‘얼음 화살’, ‘얼음꽃’, ‘에는 냉풍’….

그런 만큼 설인을 사냥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설산왕의 눈보라를 헤치는 속도도 빨라졌다.

처음 마주쳤던 설인 대장과 비슷한 급의 가디언들도 서너 명씩 한꺼번에 상대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몇 번씩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엘릭은 어떻게든 수단을 취해서 놈들을 꺾고,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능선을 한창 올랐을 때.

엘릭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이전보다 한 단계 성장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파아아!

어느 정도 획이 더해져 얼추 형태를 조금씩 갖춰가던 냉혹의 인장이 환한 빛무리를 터뜨렸다.

처음에는 뾰족한 산 하나만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 뒤로 하나가 더 새겨진 형태.

‘2성.’

엘릭은 한껏 웃었다.

조금씩 진전되던 냉 속성에 대한 내성과 감각이 갑자기 확 뛰어 자신도 놀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심안은 냉 속성과 관련된 결을 더 많이 노출 시켰다.

이로써 더 쉽게 인장 마법을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력장의 크기도 조금 더 넓어졌으니.

여전히 많은 마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건 똑같았지만, 엘릭은 슬기롭게 그만큼 죽은 설인의 인장을 재빨리 흡수하는 것으로 부족분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죽이고, 빼앗고.

냉혹의 인장을 계속 성장시키면서 쭉쭉 앞으로 나가다가.

“…왔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는 설산왕과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다.

다만, 기대와 다르게 설산왕의 생김새는 여전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멀리서 봤던 것처럼 형체가 그림자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유인원처럼 털로 뒤덮여 있는 다른 설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것 같건만.

그 모습이 정확하게 어떤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인간의 형체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보다 저 그림자, 설마 마기였어? 미친!’

대체 얼마나 많은 마기를 흘려야 저렇게 보이는 걸까.

색도, 선명도도, 점성도 상급이었다.

‘메피스토가 그렇게 침이 튀도록 칭찬하더라니. 대체 생전에 어떤 존재였던 거지?’

얼추 짐작하기로, 마왕 급은 되지 못해도, 군장(軍長) 급은 되었을 것 같았다.

비록 지금은 저만한 마기를 지니고도, 풍기는 격이나 위압감이 너무 작았지만.

‘광증이라더만. 그 때문인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방심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영락했어도, 설산왕은 당장 그가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강적이었으니까.

냉혹의 인장을 아무리 많이 수집했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이기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콰콰콰!

‘그래도 해본다.’

수준 차는 크지만, 그래도 이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으니.

어쩌면 공략 방법에 따라 무슨 수가 생길지도 모른다.

엘릭은 자신의 지략을 믿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으며 냉혹의 인장을 있는 힘껏 쥐어짜 덤볐고.

두 번째 죽음을 맞았다.

* * *

‘내가 어떻게 당했더라?’

엘릭은 눈을 뜨자마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설산왕이 이성이 없는 점을 이용하고자 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기억은 덤비려던 바로 그 순간에서 그냥 끝나고 말았으니까.

이유?

간단했다.

‘그냥 강했어. 너무 압도적으로.’

녀석이 방어를 위해 본능적으로 내뿜은 눈보라가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냥 순식간에 얼어 붙어버린 것일 테지.

스스로가 어떻게 당했는지 자각할 새도 없었다.

‘인장을 그렇게 모았는데도 접근조차 어려우면, 대체 어떻게 이기란 거야?’

역시 말도 안 되는 난이도.

엘릭은 기가 찼다.

그러면서도.

“쩝.”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고작 설인에게서 빼앗은 인장으로도 이만큼 빠르게 강해지고 있는데, 그만한 존재의 인장을 갈취할 수 있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릿했다.

“메피.”

『왜?』

“설산왕. 여자인 것 같던데.”

실루엣만 봐서는 그랬다.

그런데.

움찔!

메피스토의 반응이 생각보다 눈에 띌 정도로 컸다.

제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려는 게 보였지만, 엘릭의 눈치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뭐?』

‘이것 봐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냥 아무렇게나 찔러본 건데.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엘릭이 씩 웃었다.

“사귀었어요?”

『무슨…!』

“아니네. 까였구나?”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

“뭐, 그런 거라면 말하기 쪽팔릴 수밖에 없죠.”

『본 왕이! 마신의 은총을 받아 수많은 마족을 다스려왔던 본 왕이 일개 하위 군장에게 차이는 게 말이 될…!』

메피스토는 그게 아니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엘릭은 뒷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다시 심상 세계로 접속했다.

‘이렇게 해야 두고두고 놀려 먹을 수도 있을 테고.’

그 뒤부터.

엘릭은 틈만 나면 설산왕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죽었다.

몇 번씩이나.

‘한 번 도전으로 안 된다면, 두 번. 두 번으로 안 된다면 서너 번씩 계속 도전한다.’

몇 번씩 재도전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계획을 여러 개 세워보고, 차례로 써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실패한다면 그 과정에서 즉각 피드백을 반영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계획을 계속 세워도, 메피스토의 말대로 가장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하는 건 인장의 성취야. 그만큼 계속 인장을 모아야만 한다.’

다행히 설인 전사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계속 끊임없이 나타났다.

엘릭은 그들을 학살하다시피 하면서 인장을 계속 모으고 또 모았다.

그렇게.

한 발을 다가갈 수 있었다.

‘인장만으로는 부족해. 뚫고 나가야 할 마법도 있어야 해.’

냉혹의 인장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그에겐 훌륭한 교보재가 있었다.

‘설산왕.’

항상 그 자리 그대로, 커다란 벽처럼 서 있는 존재.

‘저 녀석의 마법을 모방할 수 있다면?’

설산왕의 마법은 몇 번씩이나 보아도, 그의 영감에 훌륭한 자극제가 되었다.

오히려 매번 도전할수록.

지식이 깊어질수록 그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새로운 특징과 면모들이 틈틈이 보였다.

냉혹의 인장을 가장 크게 깨우친 존재이니만큼, 저것이 바로 가장 ‘정답’에 가깝기 때문일 테지.

문제가 있다면, 엘릭이 그동안 구축한 세계관과 설산왕의 세계관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단 점이었다.

애당초 태생과 종족이 달랐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엘릭은 거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안 된다면 훔치면 그만.’

그래서 그녀의 모든 것을 따라 하고자 했다.

습관.

행동.

방식.

이론.

엘릭은 점차 ‘설산왕’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가까워져 갔다.

그렇게 이번에는.

두 발을 다가갈 수 있었다.

“설산왕을 ‘이해’하려고 하는구나. 인장은 단순히 갈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깊게 파악할 필요도 있지. 아주 좋은 자세다.”

오토 한은 엘릭의 그런 면모들을 보면서, 언젠가 지나가듯이 그렇게 웃으면서 말했다.

거기서 엘릭은 또다시 새로운 힌트를 얻었다.

‘따라하고, 훔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그 한계도 마저 뛰어넘으려면… 설산왕, 그 자체가 가진 의미를… 업(業)을 깨달아야만 해.’

물론, 쉽지는 않았다.

‘내가 당장 구사하기 힘든 것도 있어. 이론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거나, 이미지로 채워지지 않는 것도 많고. 그런 건… 서고에서 채우자.’

깨달은 바가 있으면 책자로 이론을 정리하고, 설산왕을 상대로 실험을 시도해 본다.

이만큼 확실한 습득 방식도 없으리라.

그렇게.

세 번째 발자국을 내디뎠다.

끊임없는 도전과.

끊임없은 죽음.

그리고 그만한 경험과 공부.

그것들이 한데 맞물리면서.

네 번째, 다섯 번째 발자국이 이어졌으며.

쿠쿠쿠쿠!

“…닿았다.”

엘릭은 드디어 설산왕의 지척에 다다를 수 있었다.

결코 뚫리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영역’에 처음으로 발길을 들인 것이다.

파앗!

얼음 화살이 설산왕에게 쏘아졌다.

그림자가 일부 찢어지면서, 그 아래로 눈가에 초점이 사라진 한 여인이 나타났다.

캬아악!

설산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처음으로 괴성을 질렀다. 마치 분노한 맹수처럼 가래가 끓는 소리.

하지만 엘릭은 그것이 못내 반갑기만 했다.

여태껏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녀석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니까.

그건 분명히 여태껏 그녀의 눈에 차지도 않았던 그가, 어느 정도 수준이 올라갔단 뜻이 분명했다.

‘언제부턴가 눈을 마주쳐도 공포도 느껴지지 않고 있고.’

이제야 겨우 눈높이를 맞춘 것이다.

화아악!

3성이 된 냉혹의 인장이 화려하게 반짝였다.

* * *

“확실히 안배가 있었다고 해도, 선택된 후손은 참 특이한 캐릭터인 게 확실하군.”

오토 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원래대로라면 저만큼 도전한다면 진즉에 자아가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엘릭이 죽음을 경험할 때마다 그냥 죽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동사(凍死)는 기본이고, 모가지가 돌아가거나, 사지가 잘리면서 과다 출혈로 죽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심지어 싸움이 너무 길어진 나머지 아사를 할 때도 있었으니.

평범한 인간은 절대 견딜 수 없을 지옥이나 다름없건만.

엘릭은 절대 굴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의지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재도전을 거듭할 때마다 크게 웃었다.

너무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토 한은 그런 엘릭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저렇게 굴복하지 않는 단단한 의지와 끝없는 향상심을 가진 것만으로도, 너무나 대단한 것이니까.

물론, 천부적인 자질은 덤이었다.

그렇기에.

오토 한은 엘릭을 아주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또라이로군. 우리 가문에서도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또라이.”

그리고 그의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화악!

처음으로 설산왕의 왼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린 채로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해냈군. 드디어.”

오토 한이 크게 웃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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