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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0화 (20/405)

20화

첫 번째 안배

엘릭은 한순간 자신의 몸에서 마력이 쑥 하고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아주 잠깐의 현기증과 탈진감.

그러면서도 피가 빠르게 돌고, 심장이 거칠게 쿵쿵 뛰었다. 특히 ‘냉혹의 인장’이 새겨진 손등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무언가가.’

두근, 두근!

‘무언가가 있어.’

이 몸에 자신 외에 또 다른 존재가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동료가 생긴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엘릭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아주 충격적이었으니까.

“…이게 정말 내가 해낸 거란 말이지?”

거친 눈보라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로.

분명히 조금 전까지 그를 잡기 위해 움직이던 설인 전사들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얼음을 세밀하게 세공한 것처럼 생생한 모습.

녀석들의 동작이며 분노한 표정이 그대로 얼굴에 남아있었고, 대지는 빙판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거센 추위가 휩쓸고 지나간 건지.

보이는 것은 온통 새하얬다. 마치 거울처럼 엘릭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푸스스-

불어오는 바람에 얼음 가루가 조금씩 날리는가 싶더니, 설인 전사들이 그대로 폭삭 무너졌다.

그 순간.

키에에엑!

동료들의 몰살에 잔뜩 화가 난 설인 전사들이 괴성을 질러대면서 와락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마력장의 범위에서 벗어나 눈보라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되었던 자들.

엘릭은 해낼 수 있단 생각에 자신만만하게 추가로 인장 마법을 전개하려 했지만.

비틀-

“…어?”

순간, 세상이 빙글 돌아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퍼퍼퍽!

엘릭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통증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이.

첫 번째 죽음이었다.

* * *

“…헉!”

엘릭이 헛바람을 들이키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온통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아….

입에서 단내도 저절로 퍼지고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깨나 고생을 했나 보군.』

그러다 엘릭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뒤로 돌렸다.

“메피?”

『그 이상한 목걸이가 미친 듯이 요동치면서 잠들기에 안배라도 발동되는 건가 싶더니. 쉽지 않았나 보지?』

엘릭은 그제야 자신이 심상 세계에서 튕겨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 선조들의 심술로 그곳에서 현실에서도 진짜 죽는 게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

엘릭은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체험하던 것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맹렬한 추위와 끔찍한 눈보라 등, 정말이지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극악한 환경이었다.

그래도 인장을 얻고, 진명을 개방했을 때의 감촉이 손끝에 여운으로 남아있었으니.

새로운 마법을 터득하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구사했다는 사실이 주는 희열이 너무 컸다.

하물며 그것이 어느 인간도 제대로 탐구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과 체계로 이뤄진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대체 왜 죽은 거지?’

하지만 엘릭은 심상 세계에서 겪었던 일들을 복기하면서 천천히 인상을 찌푸렸다.

설인 대장을 상대하고 나서는 분명히 죽음의 위기를 느끼긴 했다.

하지만.

인장을 흡수하고 나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그래서 자신 있게 다시 인장 마법을 발현하려 했던 건데.

‘아! 그 때문이구나.’

그러다 엘릭은 뒤늦게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력 소모가 너무 컸던 거야.’

인장 마법은 엘릭이 가진 어느 마법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 준비 없이 그만한 마법이 발동되었으니,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돌 수밖에…. 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당한 거였어.’

당시에는 인장 발동에 성공했단 희열에 도취된 나머지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하지만 지쳤던 건 대장 급을 잡고 났을 때도 똑같았어. 그래도 추가로 그만한 마법이 발현 가능했던 건… 인장을 흡수하면서 마력도 어느 정도 복구되었기 때문일까?’

만약에 마지막에 무너진 설인들에게서도 인장을 갈취했었더라면 어땠을까?

계속 이어서 싸울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른쪽 소맷자락을 끌어올렸다.

원죄의 인장 뒤쪽으로, 냉혹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주 또렷하고 선명한 형태를 취한 원죄의 인장과 다르게, 냉혹의 인장은 확실히 낙서를 휘갈긴 것처럼 제대로 된 형태를 띠지 못하고 있었다.

‘미완성인 냉혹의 인장도 그만한 위력인데, 대체 원죄의 인장은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거야?’

바로 그때.

『그거… 혹시 냉혹의 인장이 아니냐?』

메피스토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놀라움이 섞여 흔들리는 목소리.

엘릭은 고개를 홱 들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 가지고 있… 아, 그렇군. 그런 거였나. 아무래도 그 안배가 인장 습득과 관련된 거였나. 겨울 현자. 그놈이 잘도 이런 해괴한 짓을 꾸며냈구나.』

메피스토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엘릭은 메피스토가 모든 사실을 눈치챈 것처럼 보이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원죄의 인장. 트리거가 뭡니까?”

『…흠! 그 안배가 진명에 대해서도 알려줬나 보지?』

“예.”

『넌 본 왕이 그걸 순순히 말해주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뇨.”

『본 왕에게 이런저런 굴욕을 주며 심문을 하여도, 절대 본 왕의 입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메피스토는 팔짱을 끼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엘릭도 아마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인장은 마족의 모든 것이니까.’

그 역시 이제야 인장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게 원죄의 인장을 허락하는 순간이 메피스토에게는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수단까지 빼앗기는 셈이 되겠지.’

메피스토의 진명이 ‘원죄’인 것은 확실하다.

오토 한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런데도 발동이 되지 않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숨겨진 다른 진명이 있거나, 필요조건이 더 있을 수도 있지. 그도 아니면 내 역량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오토 한은 덧붙여 말했다. 원죄의 인장은 마족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것이라고.

어쩌면 지금의 몸으로 함부로 원죄의 인장을 발휘했다간, 그냥 망가져 버릴지도 몰랐다.

『안배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거였느냐? 본 왕에게 말해보아라. 심심하기도 하니, 묻는 건 웬만하면 다 대답해주마.』

겉보기에는 그냥 단순한 변덕으로 배려를 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엘릭은 메피스토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미묘한 열기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이 안가와 메피, 뭔가 있어.’

하지만 엘릭은 전혀 모른 척하고 물었다.

“설산왕 알죠?”

『…그건 갑자기 왜?』

“여기가 그 사람 무덤이에요.”

『뭐?』

엘릭은 자신이 안배에서 보고 겪었던 것들을 털어놓았다.

물론, 중요하다 싶은 부분은 철저하게 배제하고서.

『하! 오토 한 메르빙거, 이 미친놈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구나!』

메피스토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 되었다.

『네가 그걸 꺾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설인들의 추억 보정으로 북부를 지배했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는 있지만, 그래도 한 지역을 지배했던 패자를 네까짓 놈이 어떻게 잡아? 설산왕은 본 왕이 인정한 존재 중 하나이니라!』

“그래서 묻잖아요. 뭐, 좋은 방법 없을까요?”

『없다.』

“언제는 뭐든 물어보라면서요?”

『웬만하면 대답해준다고 하였지, 전부 다 대답해주겠다고 한 적은 없느니라. 더구나 종족의 비밀이자 약점일지도 모를 인장에 대한 비밀을, 그들의 지도자였던 본 왕에게 떠들라고 하는 것부터가 본 왕의 긍지를 짓밟는…!』

“애교 지옥 3일 면제권.”

메피스토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딴 것으로 본 왕의 긍지를 꺾을 수 있으리란…!』

“5일 면제.”

『네놈이 기어코 본 왕을 능멸할…!』

“싫음 말고.”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본 왕의 아량이 하해와 같으니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도록 하마.』

험험.

메피스토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지금 가진 인장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안배를 깨기는커녕 설산왕의 지척에도 접근하지 못할 터.』

“그 말은…?”

『성취를 올려라.』

“성취라면 뭘 말하는 거죠?”

『인장이라고 해서 다 같은 인장인 줄로만 아느냐?』

“…!”

『본 종족은 철저한 계급 사회지. 강자존(强者尊). 강자만이 모든 것을 취할 수 있고 독존할 수도 있느니라. 당연히 근본인 인장도 마찬가지다.』

“….”

『인장은 희귀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 있고, 그 등급 안에서도 성취도가 있어 위력이 천차만별이다.』

엘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지금 취한 인장은 분명 ‘진귀’한 등급 정도는 된다. 하지만 끽해야 1성에 불과하지. 반면에 설산왕이 생전에 구축한 인장은 10성, 즉, ‘진화’를 앞두고 있었으니…. 비록 본 왕이 직접 본 건 아니나, 영락했어도 4성은 될 게 분명하다.』

엘릭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메피스토가 던진 한마디로, 그는 머릿속이 환하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것을 잡겠다고 했느냐? 그런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메피스토는 손가락을 두 개 꼽았다.

『성취도를 그만큼 올리던가. 아니면 ‘진화’나 ‘합성’할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서 등급을 격상시키던가.』

성취도.

희귀도.

엘릭은 인간의 마법이 오랜 역사 동안 체계가 정립된 것처럼.

마족의 인장 마법도 그만큼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엘릭은 어떤 자세를 갖추고, 어떤 방식을 취해야만 안배를 공략할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다 궁금했다.

냉혹의 인장이 그만한 수준이라면.

메피스토는 대체…?

“그럼 원죄의 인장은요?”

『흥! 그깟 계급 체계 따위로 본 왕의 인장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

* * *

화아악!

엘릭은 다시 마도경식을 움켜쥐고, 심상 세계에 접속했다.

“왔느냐?”

오토 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예.”

“생각이 아주 많았던 얼굴이로군.”

“난이도가 너무 거칠어서 말이죠.”

“하지만 그만큼 얻어갈 것도 많을 테지.”

엘릭은 속으로 혀를 찼다.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되게 신사적인 분위기였는데. 원래 이렇게 능글 맞는 성격이었나?

어쩐지 자신이 이리저리 구르는 것에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하여간 이놈의 집구석… 이런 건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엘릭은 툴툴거리면서 다시 마법 무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메피스토가 힌트를 준 만큼.

어떻게든 그것을 써먹어야 했으니까.

* * *

‘일단 흡수부터.’

엘릭이 다시 전투에 몰입하면서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이전에 쓰러진 설인들에 대한 인장 흡수였다.

다행히 이쪽 세계의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건지, 아니면 너무 추운 나머지 사체가 남아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흡수는 별반 어려움 없이 즉각 이뤄졌다.

츠츠츠-

무너진 녀석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흑광이 고스란히 엘릭에게로 스며들었다.

냉혹의 인장이 좀 더 선명한 형체를 갖춰갔다. 동시에 육체가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들이 하나둘씩 쌓이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던가.

이게 앞으로 얼마나 크게 육체를 다르게 만들어줄는지. 스스로도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키아아아!

카아아!

그러던 그때, 엘릭의 재등장에 분노한 설인 전사들이 더 한껏 분노를 토해내면서 달려들었다.

엘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안을 따라 그려지는 풍경 속에 결이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고 있었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6% 가까이 해제된 마정석이 다른 어느 때보다 막강한 출력을 뿌려대고 있었다.

그렇게 냉혹의 인장이 주는 감각을 한껏 느끼면서.

추위를 연상하고.

눈보라를 구상했으며.

떨어지는 우박을 상상했다.

“【불어라】!”

쏴아아!

2차전이 시작되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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