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첫 번째 안배
“말했지만, 난 분명히 쓰러뜨리라고 한 적은 없다. 삼키라고만 했지.”
도저히 뜻을 짐작할 수 없을 오토 한의 말.
말장난 같아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해볼까.’
엘릭은 첫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일단은 설산왕이 있는 곳까지 접근하는 게 관건인 것 같았다.
* * *
“【무장 개방】.”
파아아!
엘릭은 메모라이즈 해두었던 마법 무장을 전개했다.
이곳이 심상 세계라고 해도, 모든 물리적 법칙은 현실과 똑같은지 발현되는 현상과 효과가 모두 똑같았다.
“【떠올라라】.”
엘릭은 설원 위로 1센티미터 가량을 떠오르면서, 체공 상태를 유지한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적설에 발이 계속 빠져서는 체력만 빼앗기기가 쉬웠으니까.
그리고 절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정신 보호 마법으로도 공포심을 막기 어려운 것이, 상당한 수준의 저주인 것 같았다.
‘이대로 부딪치면 내가 필패야. 다른 좋은 수가 없을까?’
엘릭은 아주 냉정하게 자신과 설산왕의 수준 차이를 가늠했다.
일단 마나 스캔으로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설산왕의 저력은 아주 대단했으니.
사실 엄두를 내기가 힘들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였다.
‘마력이라도 무한하다면 화 속성 마법으로 가둬버리고 녹여버리겠는데… 그것도 안 되니. 당장 내가 가진 무기들로는 안 돼. 초보적인 강체술로도 어림없는 건 마찬가지고.’
환경적인 제약이 너무 컸다.
‘원죄의 인장. 이걸 쓸 수는 없을까?’
엘릭은 늑대의 문장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애당초 메피스토에게 흑마술을 배우지 않으려 했던 것이, 메르빙거의 가주로서 최소한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지만.
오히려 선조들도 그런 마족들의 힘을 갈취해서 사용했다고 하니, 그도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다만, 인장을 보유하면 그 마족의 능력과 재능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던 오토 한의 설명과 다르게, 엘릭으로서는 인장의 사용법을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분명히 원죄의 인장에는 한 획 한 획마다 막대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마정석과는 전혀 다른 성질.
아마도 이것이 오토 한이 말한 마족의 근간인 사념(邪念)일 것이다.
하지만 사념은 절대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트리거(Trigger)가 따로 있을 텐데. 대체 뭐지?’
메피스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설산왕을 잡기도 용이해 질 텐데.
그런 생각이 든 그때.
츠츠츠-
갑자기 적설 위로 곳곳에서 새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뭐야, 이거?”
엘릭은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걸음을 멈췄다.
당장 마법을 전개할 수 있도록 손끝으로 빠르게 마력을 담은 순간, 아지랑이들이 흔들리더니 천천히 형체를 갖추었다.
그것들은 전부 설인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다만, 밖에서 상대했던 일반적인 설인과는 전혀 기질이 달랐다.
마치 그림자를 뒤집어쓴 듯 어둡고 칙칙한 거죽.
마족을 상징하는 뾰족한 송곳니.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
두꺼운 갑옷과 뾰족 창 따위로 이뤄진 탄탄한 무장.
무엇보다.
녀석들에게서는 포악한 성질을 띤 마기가 잔뜩 풍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디언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설산왕의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인 것 같았다.
살아생전 설산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죽어서도 그 곁을 맴도는 전사의 영혼들.
마족의 기질도 제대로 깨친 게 분명했다.
카아아!
전사들은 허락되지 않은 배알은 용납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일제히 달려들었다.
“【터져라】!”
엘릭은 재빨리 손을 앞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이쪽으로 달려오던 전사들의 발밑으로 화염 지뢰가 잇달아 폭발했다.
마력을 듬뿍 쏟아 넣었기에 그들의 머리까지 닿을 정도로 화력이 거셌지만.
키아악!
선두에 있던 한두 놈만 고꾸라졌을 뿐, 다른 놈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것 없이 불길을 뚫고 나왔다.
넘어진 놈들도 다시 일어서서 이쪽으로 달려올 정도였으니.
“제기랄! 【뚫어라】, 그리고 【세워라】!”
엘릭은 녀석들에게 근접 거리를 내어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몸을 뒤로 내빼면서 오른손으로 ‘매직 미사일’과 ‘얼음의 벽’을 차례로 전개했다.
동시에 놈들의 털끝에 붙은 불씨를 더 크게 태우고자, 왼손으로는 마력장을 넓게 퍼뜨렸다.
양손이 서로 다른 마법들을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더블 스펠(Double Spell).
마도사 급도 제대로 구사하기 힘들다는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지만.
엘릭은 자신의 그런 천재성에 놀라거나 뿌듯해할 시간 따윈 없었다.
퓨퓨퓨퓨-
허공에 수증기가 응결되면서 얼음 화살이 잔뜩 만들어져 전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퍼퍼퍽-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연거푸 설원을 따라 퍼지고.
쿠쿠쿠!
대지가 흔들리면서 그들과 엘릭 사이로 높다란 토벽이 우뚝 솟아올랐다.
졸지에 길이 가로막히게 된 전사들은 토벽을 우회해서 엘릭에게 접근하려 해도, 그 전에 더 많이 이쪽으로 쏟아지는 얼음 화살을 감당해야만 했다.
거기다 그들의 털에 붙은 불길은 좀처럼 꺼지질 않고 도리어 크게 번졌으니!
화르르륵!
키아악, 키아악!
캬아아악!
전사들은 온통 불길에 휩싸이거나, 얼음 화살에 사지가 어디 하나쯤은 박살 난 채로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런데도 녀석들은 도망치지 않고 어떻게든 이쪽을 돌아서 오려고 하거나, 벽을 부수고자 제 몸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댔다.
‘…쉽지가 않은데.’
엘릭은 마법을 전개하는 내내 이를 악물었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진다면 더블 스펠이 망가질 것 같았으니까.
얼음의 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균열이 잔뜩 퍼진 상태. 마력장으로 겨우겨우 기워서 형체라도 유지하고 있는 게 전부였고, 매직 미사일도 생성되는 숫자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더블 스펠이 깨지기 전에 어떻게든 벽 안에 있는 놈들이라도 끝내야만 했지만, 좀처럼 처치가 쉽지 않았다.
머리통이 부서지지 않는 한, 손발이 날아가도 어떻게든 일어나려 아등바등했으니까.
차라리 무리해서 마정석의 용해율을 4%대로 올릴까, 고민하던 그때.
“흡!”
엘릭은 순간 짙은 결이 심안의 시야를 가로지르자, 헛바람을 들이키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더블 스펠이 캔슬 되거나 하는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로 아슬아슬하게 시미터(날이 크게 굽은 초승달 형태의 칼)가 스치고 지나갔다.
키륵!
엘릭의 심안과 감각을 속이고 기습을 노렸던 시미터의 주인은 아쉽다는 듯이 가볍게 조소를 흘리고는, 재차 엘릭에게로 달려왔다.
‘이들 대장쯤 되는 것 같은… 데!’
엘릭은 여태 상대했던 전사들보다 수준이 높은 녀석을 상대로, 다시 한번 더 더블 스펠을 발동했다.
“【피어라】, 【흩어라】!”
‘얼음꽃’과 ‘흩날리는 칼날’. 녀석의 몸뚱이 곳곳으로 수증기가 응결된 얼음이 꽃처럼 마구 피어났다.
동상으로 괴사한 살점들이 줄줄이 떨어지고, 그렇게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다시 날카로운 날을 드러내면서 상처 부위를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촤촤촤!
녀석은 순식간에 상처로 뒤덮였다. 핏물이 위로 튀었다가 얼어붙어 우박처럼 바닥에 쏟아졌다.
그 위를 녀석의 발이 거칠게 밟고 지나갔다. 역시나 다른 놈들처럼 상처가 주는 고통 따윈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쐐애액-
녀석은 타고난 검사였다. 웬만한 인간 기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검술 실력과 움직임을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엘릭이 아무리 마법 무장을 갖췄다고 해도, 초보적인 실력으로는 절대 맞대응이 불가능했을 테지만.
“【피고】, 또 【피어라】!”
얼음꽃은 녀석의 움직임을 계속 봉쇄하고, 상처의 범위를 넓혀 나갔으며.
“【터지고】, 또 【터져라】!”
상처는 전혀 아물 기색 없이 오히려 더 넓어졌다.
덕분에 엘릭은 심안으로 녀석의 투로를 빠르게 읽어 들이면서 피하고, 굴렀다. 그때마다 시미터는 아슬아슬하게 그가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키에에엑!
쥐새끼처럼 계속 도망만 쳐대니, 녀석도 결국엔 화가 잔뜩 났던지 괴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정작 그런 엘릭도 죽을 맛이었다.
‘이거 이러다 정말 위험하겠는데.’
마정석의 용해율은 이미 4%를 넘긴 상태.
마나 로드가 과열되고 있었다.
육체가 버틸 수 있는 임계점에 거의 부딪혔단 뜻이었다.
‘하지만 위험한 건 저놈도 마찬가지야. 움직임이 계속 굼떠지고 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강하게 나서보자.’
엘릭은 이를 악물면서 마정석을 더 세게 쥐어짰다.
용해율이 그렇게 5%에 다다른 순간.
파직, 파지직!
마나 로드가 한계 이상으로 과열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마나 스파크가 살갗 위로 수도 없이 튀었고.
콰아앙!
엘릭은 지면을 거세게 박차면서 더블 스펠을 잇달아 박았다.
결이 좀 더 많아지고, 또렷해졌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결이 잔뜩 뭉친 ‘점’이 복부에 생성되는 순간.
“【박혀라】!”
이전에 만든 매직 미사일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매직 미사일을 점에다 세게 박아 넣었다.
퍼어억-
끼릭, 끼리릭!
세상이 정지한 것처럼 녀석의 움직임이 한순간 정지했다.
전신을 뒤덮은 상처를 따라 응결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면서 관절이 일제히 굳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콰앙!
마치 망치로 못을 내려치는 것처럼, 주먹으로 매직 미사일의 끝부분을 거세게 후려쳤다.
와장창창!
마치 얼음 조각 부서지듯이, 녀석도 수십 조각으로 쪼개져 와르르 아래로 무너졌다.
“헉, 헉, 헉!”
엘릭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이지 매 순간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위험했던 싸움이었다.
그도 매번 시미터를 완전히 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옆구리를 깊게 베인 것도 이제야 알아챌 정도였으니.
여태껏 느낄 새도 없었던 고통도 그제야 한꺼번에 몰려왔다.
마력 무장으로 체력 회복과 상처 치유가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다지만.
5%를 넘는 용해율로 인해 육체는 이미 과부하 상태에 잠겨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제기랄…! 이러다 정말 죽겠네.”
하지만 긴장을 풀 새는 없었다.
키엑, 키에에엑!
키르륵!
어느새 더 많은 설인 전사들이 몰려와 그의 주변을 삥 에워싸고 있었으니까.
대충 눈대중으로 훑어만 봐도 얼핏 수십 마리는 되었다.
엘릭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억지로 마정석을 쥐어짜야만 했다.
마나 로드가 이대로는 안 된다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자칫 마력 역류가 발생할 위험도 컸지만,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오토 한 같으니. 대체 이딴 말도 안 되는 난이도를 만들어놓고, 뭘 어떻게 하란 거야?”
엘릭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여기서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단순히 심상 세계에서 튕겨 나는 정도라면 다행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신이 붕괴할 터였다.
보통은 전자일 것이다.
선조들이 설마 후손을 위한 안배에 그런 무리수를 둘까 싶기도 했지만, 엘릭은 어쩌면 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선조들이야. 어떻게 나설지 전혀 계산이 안 서는 또라이들이라고!’
엘릭은 육체가 붕괴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용해율을 6%까지 끌어올렸다.
일단 눈앞에 있는 놈들부터 한꺼번에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파지지직!
마나 스파크도 그만큼 더 거칠게 튀어오르던 그때.
파아아-
조금 전, 잘게 부서졌던 설인 대장의 사체에서부터 시커먼 묵광(墨光)이 화려하게 번쩍였다.
설인 대장의 사체가 바스러졌다. 조각과 가루들은 묵광에 점차 스며들면서 광도를 높이더니, 곧 연기가 되어 엘릭에게로 달려들었다.
엘릭은 한순간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그보다 연기가 빨랐다. 오른쪽 손등에 달라붙더니, 모공을 따라 빠르게 스며들었다.
츠츠츠-
메피스토의 원죄 인장 뒤쪽으로 새로운 각인이 새겨졌다.
비록 원죄의 인장처럼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이 굵지는 않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이전에 쓰러뜨렸던 설인 전사들에게서도 똑같이 묵광이 이쪽으로 쏘아졌다.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자그마한 획이 추가되고, 선이 좀 더 또렷해졌다.
동시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굴던 마나 스파크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인장이 흡수되면서 마나 로드의 내구도가 좀 더 탄탄해지는 것이다. 그만큼 용해율도 늘 수밖에 없으니!
그 순간.
엘릭은 누가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방금 흡수한 인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인장에는 마족의 재능이 담겨 있다. 재능은 사념에 뿌리를 두고, 사념은 감정에 뿌리를 두며, 감정은 원초적인 무언가에 뿌리를 둔다.
그것은 평상시 어떤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아 뭐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뭉치고 뭉쳐서 자아를 갖춘 순간 명확한 성질을 띠게 된다.
그것은 고유 성질이라 할 수도 있고, 격(格) 혹은 위(位)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족들은 따로 그것을 두고 이렇게 부른다.
진명(眞名).
자신들의 ‘진짜 이름’이라고.
그리고.
설인들이 지닌 진명은 ‘냉혹(冷酷)’.
그들의 시조가 터득했으나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설산왕에 이르러서야 겨우 깨우쳤다가 다시 세월 속에 묻혔던 진짜 이름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엘릭이 찾던 인장의 트리거였다.
“【춥고 독하여라】.”
엘릭이 그들의 진명을 언령의 형태를 빌어 개방한 순간.
콰콰콰콰!
엘릭을 중심으로, 강렬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설인들을 일제히 휩쓸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