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첫 번째 안배
그는 중후한 인상에 눈처럼 새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깎아 뒤로 넘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예복에 가까워 마법사라기보다는 고위 관료, 혹은 교수처럼 차분하고 고상한 신사를 연상케 했으니.
하지만.
엘릭은 그에게서 은연중에 풍기는 기도를 놓치지 않았다.
‘크다.’
마치 자연 만물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연에 동화되어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희롱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바람이 그를 부드럽게 감싸고, 풀잎이 그에게 반갑다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햇살, 구름, 습도, 모든 것이 그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분명히 이곳은 어떤 마법적 장치로 구성된 심상 세계(心想世界)일 텐 데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감각이나 인지 따위가 전부 현실처럼 생생했다.
아마 이 모든 것들이 눈앞의 노년 신사가 빚어내는 조화일 테지.
“당신은….”
“오토 한 메르빙거. 오토. 그렇게 부르려무나.”
“…!”
엘릭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후후. 눈치를 보아하니 나를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엘릭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 한 메르빙거.
그 이름을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오랜 가문의 역사 동안, 가문을 이끌어온 역대 가주 중에서도 다섯을 꼽으라면 반드시 그중에 들어가는 중시조였으니까.
특히 그가 세운 가장 큰 위업은 가문의 마법들을 한데 정리하고,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니.
엘릭이 구성한 무의식의 지평도 상당수 오토 한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럼 안가에 그렇게 많은 서책이 있던 것도 이해가 가.’
그만큼 방대한 양을 정리했으니 그런 위업도 가능한 것이겠지.
그때, 엘릭의 머릿속으로 문득 메피스토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당신이 ‘겨울 현자’인 겁니까?”
여유롭게 엘릭을 바라보던 오토 한의 시선에 처음으로 미묘한 반응이 맺혔다.
“음? 그 별칭은 어디서 들은 것이더냐? 알고 있는 후손은 거의 없을 텐데?”
“메피스토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메피스토…? 설마 원죄의 마왕, 메피스토펠레스를 말하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네가 그놈을 어떻게 아는 것이지? 놈은 분명히 샤이나크에게 봉인되었을… 설마? 푸하! 하하하!”
오토 한은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먼 후손, 네가 삼킨 마족이 설마 메피스토펠레스인 것이냐?”
“그렇… 습니다.”
엘릭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오토 한의 파안대소는 더 커졌다.
“아무리 안배가 있었다고 해도, 처음으로 삼킨 마족이 장교급이기만 해도 대박이라 여겼었건만. 원죄의 마왕이라니. 푸흐흐. 그럼 용왕의 것까지 같이 따라왔나 보지?”
“예.”
“참으로 천운이 따랐구나.”
“…?”
“만약 메피스토펠레스가 조금이라도 힘이 온전했더라면, 안배가 완전히 틀어졌을 테니까.”
엘릭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잘 되었으니 되었다. 도리어 언젠가 다시 세상을 도탄으로 빠뜨렸을 위험 요소를 제거한 셈이니, 기뻐해야지. 이거, 아무래도 미리 설정해뒀던 것보다 안배의 난이도를 좀 더 상향 조정해야겠는데! 하하하!”
엘릭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배.
벌써 몇 번째 듣는지 알 수 없을 단어.
“나는 언젠가 나타날 먼 후손을 안배로 인도하고 시험하도록 배정된 안내자다.”
오토 한이나 되는 사람이 단순한 안내자라고?
엘릭은 뭔가 묻고자 입을 열었지만, 오토 한은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이 외에도 궁금한 게 많을 테지. 이해한다. 얼떨떨할 테고, 기대되면서도 조금 짜증도 날 수 있겠지. 뭔가 준비해놓은 게 있다면 가문에 그냥 남겨두었으면 되었을 것을, 왜 굳이 그렇지 않고 이리 복잡한 설계를 해뒀는지도 알고 싶을 테고.”
“…예.”
“하지만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먼저 말해주고 싶구나.”
오토 한의 목소리는 아주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어서, 엘릭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못했다.
“우리가 준비한 건, 아주 거대한 수레바퀴와 같아서 한 번 구르기 시작하면 절대 멈출 수가 없거든. 그러니 그것을 아무에게나 허투루 줄 수 없었다.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철저하게 사람을 거르고 또 걸러야만 했지.”
오토 한이 말하는 ‘우리’는 단순히 가문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여하튼 너는 우리들의 시험을 통과하였고, 여기까지 왔다. 사실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너의 선택이다. 수레바퀴를 멈출 것인지, 굴릴 것인지.”
오토 한이 심연처럼 깊은 눈을 하고서 엘릭을 가만히 응시했다.
질문을 던지는 눈.
엘릭은 가문의 안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대로 쫓다가 인생을 거기에 전부 저당 잡힐 수도 있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빠져나갈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굴리고 싶습니다.”
엘릭은 고민 따위 하지 않았다.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위대한 영웅이셨던 조부님과 선조들의 뜻을 잇는 것.
그리하여 시조보다도 더 위대한 마법사로서 이 땅에 길이길이 이름을 알리고 남기는 것.
그것이 엘릭이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꿈이자, 야심이었으니.
“좋다. 그만한 배짱은 있어야, 우리의 후손이라 할 수 있겠지.”
오토 한은 흡족하게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이 다시 한번 더 바뀌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하게 불던 동산이, 한풍이 휘몰아치는 설원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 만큼 매서운 강풍.
살이 에일 것 같은 추위.
눈 뜨기 어려운 눈보라.
늪처럼 발이 깊게 푹푹 빠지는 적설.
거기다 주변은 온통 빙산으로 가득했고, 저 아래로 보이는 땅은 빙하가 흐르고 있어 절대 사람이 생존하기 힘들 것 같은 환경이었다.
엘릭은 재빨리 보온 마법을 발동하면서 오토 한을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얇은 예복을 입고 있어도 별반 추워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디입니까?”
“첫 번째 안배를 얻기 위한 시험장이다.”
“…!”
엘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장소에서 시험을 치르겠다고?
순간.
두근, 두근!
엘릭은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웃고 있군. 응시자로서 아주 좋은 자세다. 그럼 저곳을 보거라.”
오토 한은 그런 엘릭의 태도를 아주 반갑게 여기면서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엘릭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주변 설원에서도 눈보라가 가장 매섭게 몰아치는 곳이었다.
다만, 그가 뭘 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더 멀리, 더 깊게 보려무나.”
엘릭은 심안을 활짝 열면서 안력에 마력을 잔뜩 실었다.
그러자 포커싱이 먼 곳까지 잡히면서 새하얀 세상에 가려져 있던 무언가를 하나 잡아냈다.
설원의 끄트머리.
그림자로 둘러싸여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이쪽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 사이로 나 있는 그것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흡!”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등골이 쭈뼛 섰다.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렸다.
절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았다.
공포심이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엘릭은 저절로 떨리려는 음색을 강제로 누르면서 물었고.
오토 한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설산왕(雪山王).”
“…?”
“최초이자 최후로서 설인의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원을 한 손에 틀어쥐고, 나아가 거룡 산맥을 통치하는 왕이지.”
“…!”
“그리고 마에서 비롯되었으나, 저급하다 하여 축출되고 말았던 설인을 다시 마족의 일원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야심가이기도 하고.”
엘릭은 메피스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이 따라주질 않아 마신의 은총에서 빗겨 나고 말았다던.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야심에 완전히 잡아먹혀 타락에 타락을 거듭하고, 끝내 영락하고야 만 한낱 마귀일 뿐이다.”
또한, 설인의 고원 어딘가에 무덤이 있을 거라는 말도 했었으니.
아무래도.
“그리고.”
이곳이 그 무덤이었던 모양이었다.
“네가 원죄의 마왕, 다음으로 삼켜야 하는 첫 번째 마(魔)다.”
* * *
먹는다.
삼킨다.
마신다.
엘릭은 책자에서 강요되던 단어가 오토 한의 입에서 빚어 나오자 그게 뭐냐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것을 꺾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삼켜야 한다.”
“그게 무슨…?”
“누누이 설명하지 않았더냐. 우리는 마를 삼키기 위해 이 안배를 마련했노라고.”
엘릭은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등 위에 그려진 늑대의 문장.
“원죄의 인장이로군. 메피스토펠레스의 상징이지. 마족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뛰어난 것이기도 하고.”
“이걸 아십니까?”
“마족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엘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냥 보이는 족족 박멸할 생각만 하지, 그것을 분석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건 그 시대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지?”
엘릭은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오토 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어쩐지 모르게 비웃음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마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연구가 금지되어 있을 테니까. 육망성, 그놈들이 하는 짓이야 뻔하지.”
육망성.
마탑을 이끄는 여섯 개의 위대한 학파.
“본가가 마도명문이니 뭐니 하면서 오랫동안 칭송을 받으면서도, 마탑의 육망성과 왜 거리를 두고 있는지 아느냐?”
“…혹시 마족 때문입니까?”
“맞다. 마족을 박멸하고자 하는 태도는 같으나, 추구하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이지.”
오토 한이 엄숙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마(魔)란 본디 인간을 비롯한 여러 지성체와 생물들이 내뿜은 원초적이고 어두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공포, 우울, 원망… 그런 것들이 서로 뭉쳐서 ‘사념(邪念)’을 띠면서 자아를 갖추지.”
사념. 사특하고 괴이한 생각들의 덩어리.
엘릭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모르고 있던 지식을 같이 들었다.
“그래서 마족은 저마다 각자 고유한 사념을 갖고 있다. 저급한 것에서부터 크게는 원죄처럼 개념적인 부분까지. 사념은 그들의 성질이며 계급이고, 상징이다. ‘인장’은 바로 그런 사념이 저장된 심장이라 할 수 있지. 마족의 근본. 즉, 뿌리인 것이다.”
“아.”
엘릭은 오토 한이 ‘원죄의 인장’이라고 말한 늑대 문장을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이건 메피스토,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터.
“너는 지금부터 마족들을 사냥하고, 그들의 뿌리인 인장을 갈취할 것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인장 속 능력들은… 마족들의 재능은 전부 너의 것이 될 것이니!”
“…!”
“설산왕을 삼켜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지?”
“…예. 조금은요.”
엘릭은 그제야 가문의 선조들이 마련했다는 안배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족의 힘을 갈취한다니!
이보다 확실하게 성장할 방법이 또 어디에 있을까?
마족에 따라서는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이상 현상들도 빚어내는 존재도 있다.
당연히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어째서 마족들이 그토록 가문을 두려워하고 증오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인장을 흡수해서 강해질 수 있다면, 그만큼 마정석의 용해율과 수용량도 같이 높아지겠는데…?’
이제야 비로소 마정석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는지 길이 열린 셈이었다.
다만, 문제는 있었다.
저렇게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릴 정도로 강한 설산왕을, 대체 어떻게 삼키라는 걸까?
아무리 전성기와 비교하면 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도, 마도사 급은 되어야 겨우 비벼나 볼 수 있을 것 같건만.
엘릭은 힌트라도 달란 얼굴로 오토 한을 바라봤지만.
오토 한은 이쯤은 얼마든지 혼자 해보라며 가만히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