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첫 번째 안배
상승 기류는 위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균형을 바로 잡기가 너무 힘든 건 물론, 춥기도 너무 추운 나머지 까닥하다간 정신을 잃을 수도 있었다.
바람 소리는 또 왜 그렇게 큰 건지.
메피스토가 뒤에서 뭐라고 소리쳤지만,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문제는.
‘이거… 쉽지가 않은데.’
정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심력을 소모해야 해서 좀처럼 언령을 구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건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바.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밟… 아라】!”
엘릭은 이를 악물면서 마력장을 넓게 퍼뜨렸다.
대신에 이번에 발동한 마법은 여태껏 즐겨 사용하던 ‘공중 부양’이나, ‘활공(滑空)’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이런 장소에서 도리어 발목만 잡을 수 있었으니.
즉석에서 잡은 이미지로 대체하고자 했다.
공중 계단.
자신이 떨어지고 있는 지점부터 모옥이 있는 중턱까지, 보이지 않는 징검다리를 만들어서 직접 넘어갈 생각을 한 것이다.
『옛날 무도가 놈들이 봤으면 ‘허공답보’라면서 거품을 물겠군. 하, 하하…!』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메피스토의 탄식 섞인 탄성을 뒤로 한 채, 엘릭은 단번에 중턱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후우…!”
엘릭은 땅을 밟자마자 땅이 꺼져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정말 죽는 줄 알았네.”
미끄러지기만 했었어도 꼼짝없이 죽을 판이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저승길의 문턱까지 다녀온 셈이었다.
등골이 바짝 서 있었다. 분명히 날씨는 추운데도 불구하고, 옷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흐, 흐흐흐.”
그래도 어째서인지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해냈다는 뿌듯함과 성취감. 그리고 스릴감 등이 복잡하게 섞인 웃음소리.
『기가 찰 놈이로군.』
메피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지만.
‘마족, 아니, 마왕 중에도 이렇게 막무가내인 놈은 없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엘릭은 일어서서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여전히 방망이질을 치는 심장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모옥에 다가갔다.
“겉보기엔…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흠.”
낭떠러지 끝에서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모옥은 절벽 중턱에 놓여 있다는 특징만 뺀다면 보통 사냥꾼들이 편히 머물라며 만들어둔 산장과 생김새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 크지 않은 크기와 눈이 쌓이지 말라며 세모꼴로 만들어진 지붕, 그리고 작은 창. 그게 전부였다.
저 절벽 위에서 이쪽을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푸른 눈꽃’ 부족장의 말마따나, 그래도 이따금 관리는 했었던지 지붕에 쌓인 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만들어진 지 수백 년 된 것 치고 목재도 그리 낡아 보이지 않았고.
엘릭은 혹시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 마나 스캔을 사용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옥의 문 쪽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잠겨 있어.’
순간, 엘릭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락(Lock).
정해진 마나 패턴을 입력해야만 해제할 수 있는 고대의 술수(術數).
마법진은 아무래도 외부가 아닌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패스워드가 대체 뭘까?’
엘릭은 아주 잠깐 해킹을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끝내 생각을 접었다.
아무리 수백 년 전의 선조가 만들어 현대식보다는 알고리즘 조합이 단조로울 거라고 해도, 설마 마도사 급도 되지 못한 후손이 쉽게 해제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했을 때, 패스워드를 잊은 후손이 떠올릴 수 있을 만한 조합일 게 분명했다.
엘릭은 떠오르는 단어들을 이용해 마나 패턴을 입력해보았다.
메르빙거, 마도명문, 마법사, 마왕, 마족 사냥꾼….
하지만 이리저리 조합 해봐도 전부 불발이었다.
혹시 친구였다는 설인의 왕과 관련된 건가 싶어 메피스토에게 이름을 묻기도 했지만, 여전히 잠금장치는 묵묵부답.
“…음.”
엘릭은 이대로 있다가 모옥 앞에서 얼어 죽을 판이라, 다른 뭔가가 있나 싶어 머리를 계속 굴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다.
‘만약에 필요한 게 마나 패턴이 아니라, 열쇠라면?’
“…설마?”
엘릭은 옷깃에 숨겨뒀던 마도경식을 꺼내 문가에 가져다 댔다.
순간.
파아앗!
철컥-
문에서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대로 뒤로 젖혀졌다.
엘릭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마도경식과 문을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간단한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떨 필요가 없었던 건데. 조금 억울했다.
하지만 이로써 이곳이 가문의 안가인 게 확실해졌기에 기쁘게 웃으면서 들어가려는데.
“…?”
엘릭은 여태껏 메피스토가 말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어딘지 익숙하다 싶더니. ‘겨울 현자’의 거처였나?』
고심에 찬 얼굴로, 아주 작게 읊조리는 메피스토의 혼잣말.
“겨울 현자? 그게 뭡니까?”
엘릭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물었지만, 메피스토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인의 왕에 관해서 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절대 대답해주지 않겠다는 고집이 얼굴에 가득했다.
하지만 엘릭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메피스토가 말한 겨울 현자가 자신의 선조를 의미한다는 것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정말 그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설인의 왕과 선조, 메피스토까지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뭘까?’
엘릭은 묵언과 애교 지옥을 이용해서 메피스토의 입을 열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마지막 남은 의까지 상할 것 같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상대를 괴롭혀도, 최소한 선은 지키고말고.’
엘릭은 메피스토가 들었다면 미친놈 소리가 저절로 나왔을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실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미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메피스토와 관련된 의문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까.
안가 내부는 바깥에서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수십 미터도 넘는 책장이 끝도 없이 길게 이어져 있는 서고.
족히 수십만 권은 넘을 것 같은 고서(古書)들의 퀴퀴한 냄새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절대 작은 모옥 안에 수용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공간 중첩에 기후 조절, 패턴 감지… 거기다 훼손 방지에 자동 수복까지 걸려 있는 것 같은데. 이런 것들이 이만한 규모로 가능해?’
이 정도라면 절대 ‘안가’라고 할 수 없었다. 도서관이었지.
‘그것도 중앙 마도서고나 황립도서관 쯤은 되어야 여기에 비빌 수 있을 것 같은데…?’
엘릭은 자신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마도명문의 저력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얼마나 훨씬 깊은지, 그 일부를 엿본 것 같아 가슴이 저절로 떨렸다.
그리고 기분 좋게 도서관 내부를 돌아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활자 중독일 정도로 책을 좋아하던 엘릭에게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 * *
“‘마도학의 근본 교리’, 이게 여기 있다고? 그동안 실전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들고 나가면 학계가 들썩이겠네. ‘마탄기능서’에 ‘화랑요결’, ‘법의 서’? 우리 선조님 마도서도 열심히 모으셨네. 엥? ‘사탄 복음’도 있어?”
엘릭은 책자들의 제목을 살피는 내내 기가 찬다는 얼굴이 되었다.
눈대중으로 보기만 해도 하나하나가 대부분 대단한 것들이었으니까.
이미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것들부터 시작해서, 책자 그 자체가 마법을 담고 있다는 마도서, 인간 세상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요정과 수인족의 마법들, 심지어 금서로 지정된 흑마술 계통도 있었다.
마도학과 관련된 책자는 거의 다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전부 레플리카네…. 흠!”
전체 동일한 필체로, 종이의 재질도 동시대의 것이었다.
그래도 담고 있는 내용들은 전부 대단한 걸 봐서는 진본을 옆에다 두고 필사를 한 것 같은데….
‘겨울 현자라는 분이 전부 옮겨 적은 걸까? 이 많은 것들을?’
엘릭은 내심 아쉬운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사실 여기에 있는 것들만 해도, 앞으로 그가 가진 무의식의 지평을 몇 번씩이나 넓혀주고도 남을 만큼 대단했으니까.
마법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한 보물을 얻게 된 셈이었다.
‘앞으로 이것들을 볼 시간은 많으니까. 일단 마도경식에 대한 것부터 찾아봐야겠지?’
엘릭은 가문의 역사, 특히 시조와 관련된 책자를 위주로 물색했다.
하지만 책자 중에는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것들이 많아, 일일이 살펴보면서 조금이라도 내용을 읽어봐야 해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
그러는 동안.
메피스토는 서고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내부를 살펴보기만 했다.
* * *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식음을 거의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나흘 동안 책자들을 일일이 살펴봤을 때쯤.
“…찾았다.”
엘릭은 드디어 원하던 책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깊숙한 곳에 위치한 책장에서도, 한쪽 구석에 박힌 낡고 얇은 책자.
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본래 마도의 궁극을 좇고자 했던 학자 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더 큰 힘을 갈구한 나머지 마(魔)에 물들며 세상에 커다란 폐해를 끼쳤었고, 뒤늦게 그 잘못을 깨우칠 수 있었다…」
“똑같잖아…? 그때 들었던 목소리랑.”
엘릭은 처음 마도경식에 설치된 안배를 얻었을 때 들었던 목소리를 천천히 떠올리며 작게 읊조렸다.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고 지난날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지고,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고 지난날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지고,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
“마를 박멸하는 것만이, 우리 가문에 남겨진 사명이니라.”
「마를 박멸하는 것만이, 우리 가문에 남겨진 사명이니라.」
당시에 경황이 없었어도, 워낙에 강한 충격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대사 하나하나, 목소리 톤 하나하나까지 전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자의 내용이 그 목소리와 똑같았다.
엘릭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혹시나 목소리의 뒤 내용이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마를 잡아먹고 잡아먹는다면 언젠가 자취를 감추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마도학이 이 땅에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 하늘이 우리 가문에 내린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를 잡아먹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릇되고 허무하며 맹랑한 것을 우리가 앞서서 삼킨다는 뜻이다. 삼키고 또 삼켜 올바르게 소화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새로운 마도의 조화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첫째는 올바르게 서고자 하는 정명심이오, 둘째는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며, 셋째는 평안하고 고요한 평정심이라. 이는 온갖 유혹과 욕망에서…」
순간, 엘릭은 시야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를 먹으라.」
「마를 삼키라.」
「마를 마시라.」
마치 책자에서 글자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저들끼리 뱅글뱅글 돌면서 춤을 췄다.
엘릭은 그것이 환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다 그 글자들이 전부 산산이 부서지면서 머릿속이 크게 울렸다.
『먹고, 삼키고, 마셔라. 그리하여 모든 마를 네게 담고 또 담아라. 그리하여 새로운 마를 올려라!』
그 순간, 마도경식이 화려하게 빛났다.
『이 책자를 읽었다는 것은 앞서 거론한 모든 조건들을 통과하였고, 마도경식의 시험과 안배를 풀어 첫 번째 마를 성공적으로 삼켰다는 뜻인즉.』
『그렇다면 이제부터 온전히 시작되리라.』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
엘릭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여전히 빛을 뿌려대고 있는 마도경식을 내려다보았다.
파스스-
여태껏 마도경식을 덮고 있던 녹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나비가 고치를 가르고 태어나는 것처럼, 한 꺼풀 한 꺼풀이 모두 벗겨진 목걸이는 기존의 마도경식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卍(만)’자 형태의 목걸이.
외부로 돌출된 네 개의 부위가 시계 방향 순으로 각각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우아한 인상을 주었다.
‘뭐가 달라진 것 같은데… 뭐가 달라진 거지?’
엘릭은 달라진 마도경식을 신기한 듯 매만지면서도, 분명히 체내에 있었을 변화가 무엇인지 몰라 마력을 돌려보았다.
그 순간.
화아악!
엘릭을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반전되었다.
그리고.
“네가 우리의 안배를 받기로 약속된 먼 미래의 후손인가 보구나.”
한 노년 신사가 엘릭 앞에 서서 푸근하게 웃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