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실전(實戰)
“헉, 헉헉…!”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설원이라는 지형 때문인가… 평소보다 상대하기가 더 힘든걸.”
“왜 평소에 이런 곳으로 병력을 파견할 때, 현장에서 마법사 충원 요청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여객들은 설인들과의 싸움이 전부 끝난 뒤, 저마다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특히 가장 많이 움직여야 했던 로브 기사들이 크게 지쳐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오러 체인을 가지면서 일반인은 월등히 뛰어넘는 수준의 육체를 지녔다고 하지만.
고산병을 안은 처지에서 걸음조차 딛기 어려운 설원의 싸움은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이고, 지형지물에 대한 이해도도 낮지 않은가.
이 정도로 끝낸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마법사의 부재에 대해서 안타까워했다.
만약 그들의 적절한 지원이 있었더라면, 훨씬 순조롭게 설인들을 상대할 수 있었을 테니까.
‘갑자기 놈들이 잘 싸우다 말고 뒤로 물러난 것도 의아하긴 했지만.’
물론, 기사 첸은 끝까지 싸웠어도, 자신과 일행들이 한낱 설인들 따위에게 당할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지쳐서야, 그놈들이 갑작스레 기습이라도 해서는 큰일이지 않은가?’
그 뒤가 문제였기 때문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음…?’
첸은 뒤늦게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가씨?”
“일행 중 한 명이 보이질 않아요.”
“한 명이라 하시면…?”
“일행 없이 혼자 계셨던 분이요.”
첸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몸도 좋지 않으신 분이 타인에 대한 걱정만 크니, 원.
첸은 ‘혼자 도망치려다 말고 설인들에게 붙잡힌 게 아니겠습니까?’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누르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아마 무사히 잘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야 할 텐데요.”
여인은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 듯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럴수록.
첸의 근심은 더 커지기만 했다.
* * *
쾅, 콰콰쾅!
‘어떻게든, 키엑! 우리, 키엑! 마을을 살려야 한다, 키에엑!’
설인 온두는 쉼 없이 폭발하는 마을을 겨우 헤쳐 나오면서 뛰고, 또 뛰었다.
이미 전신이 자잘한 상처와 화상으로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머릿속에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 지원군을 요청해야 한단 생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인간, 키에엑! 괴물이다, 키엑!’
온두는 불과 한 시간 전에 부족 마을을 찾아왔던 인간을 떠올렸다.
그냥 평범한 차림을 한 젊은 인간.
처음에는 사냥을 나갔던 전사와 같이 돌아왔기에 먹잇감인가 싶었었지만.
-이 마을에서 이 산에 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지닌 예티가 누구지?
인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부족원들은 잔뜩 경계하고 말았다.
그가 인간 중에서도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 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비록 옛 능력을 거의 잊었다고 해도, 스스로 마족이란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설인들에게 있어 마법사는 반드시 경계해야만 하는 숙적.
당연히 그 질문에 대답해줄 이유 따윈 없었다.
무엇보다.
그만한 지식을 지닌 동족이라면, 마을에서도 원로들밖에 없다. 존경하는 분들을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싸웠고, 마을은 단숨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젊은 인간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였던 것이다.
‘친구들, 키엑! 가족들도 전부 나더러 친척들 불러오라고 했다, 키엑! 온두, 키엑! 다른 부족들 데려와서 인간 쓰러뜨린다, 키엑!’
그렇게 온두는 사명을 띠고 또 뛰었다.
몰래 자신의 뒤를 쫓는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 * *
[이 다음에는 부디 찾는 놈들이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뀨, 뀨뀨?』
메피스토는 제발 이 빌어먹을 애교를 좀 끝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엘릭은 방금 박살 난 마을에서 다른 어딘가로 허겁지겁 달리고 있는 설인의 뒤를 몰래 밟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다른 설인 마을이 줄줄이 나올 거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벌써 같은 방식으로 박살 낸 설인 마을만 네 개째였다.
‘근데 진짜 이것들은 지능이 모자라나? 어떻게 뒤쫓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죽어도 못하는 거지? 흔적을 지운다던가, 방향을 다른 곳으로 유도한다거나 하는 것도 전혀 없잖아?’
엘릭은 설인을 상대하면 할수록, 점차 메피스토가 어째서 설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이렇게 개체 수가 많으면서 영역이 좀처럼 고원을 벗어나지 못하는지도 잘 알겠고. 대체 이런 빡대가리들을 데리고 전성기를 이끌었다던 왕? 하여간 그놈은 대체 어떤 놈인 거야?’
하지만 덕분에 엘릭은 질릴 정도로 많은 실전을 경험해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실험을 통해 여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들을 많이 알아낼 수도 있었다.
바로 언령 마법의 한계였다.
-첫째는 언령이 미치는 범위가 생각보다 그리 넓지 못하다는 것.
‘분명히 심안의 인지 범위는 넓어. 하지만 당장 결이 거길 전부 닿질 못해.’
엘릭은 현재 언령을 사용할 때, 필요한 결을 골라내어 마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마력장(魔力場)을 건설한다.
마력장이 곧 마법이 미치는 범위를 뜻하니, 결국 이것이 확장되는데 한계가 있단 뜻이었다.
설인 마을을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 때, 생각보다 넓게 퍼뜨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범위는 끽해야 20미터 남짓.
그것만 해도 꽤 넓은 범위였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마력을 아무리 많이 쏟아부어도 화력만 더 거세질 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미지가 닿는 한계 때문이겠지. 무한대로 만들어지는 게 더 문제야.’
차라리 지금 정확한 범위를 알아낸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거기에 맞춰서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면 될 테니.
-둘째는 언령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
‘언령은 분명히 마력 효과가 좋아. 파괴력이나 효율성, 전부 뛰어나니까. 하지만 역시 이것도 한계를 넘어서면 효율이 극단적으로 떨어져.’
마력장의 확장에 한계가 있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뽑아낼 수 있는 마력량은 많지만, 그것으로 구성할 수 있는 효율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존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효용의 체감 법칙(遞減法則)’이라고 부르곤 했다.
‘물론, 마력이 무한대라면 그런 효율성은 완전히 무시하고 전부 때려 넣어서 위력을 증가시키겠지만….’
다음 문제가 바로 걸렸다.
-셋째는 출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
‘육체가 마정석의 출력을 온전히 감당하질 못해.’
이미 기연을 얻으면서 육체가 크게 탈바꿈을 했다지만.
문제는 그 정도로도 마정석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용왕과 마왕이 남긴 마력들을 한데 뭉친 건데, 그걸 제대로 사용할 수 있으면 그게 사기인 거지. 지금의 나에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3%.
현재 엘릭이 마정석에서 뽑아낼 수 있는 마력의 최대량이었다.
이 이상을 넘어간다면?
마나 로드가 과열되고, 4%쯤 되면 육체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런 언령 마법의 모든 한계는 깨달음의 수준을 높이고, 마정석의 마력을 온전히 소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데 있어.’
마정석의 융해(融解) 정도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도착했나?’
엘릭은 새로운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부디 뭔가 알고 있는 놈이 있으면 좋을 텐데.’
츠츠츠-
그의 앞으로 수증기가 얼어붙은 매직 미사일이 한가득 생성되었다.
* * *
“그러니까 뭔가 알 것 같다, 이 말이지?”
『…일단은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 부디 자기네들만큼은 내버려 달라는군.』
“만약 그냥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려고 속이는 거라면, 그냥 끝나진 않을 거야.”
『…그것도 당연히 알고 있다고 하고.』
그렇게 몇 차례 수고를 더 하고 난 뒤.
엘릭은 드디어 협조적으로 나서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푸른 눈꽃’이라고 이름 밝힌 부족의 수장은 어떻게든 엘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썼다.
원로들을 소개해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해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길잡이까지 붙여주려고 했다.
“이놈, 얼굴에 욕심이 가득가득한데요?”
『이번 위기가 오히려 기회라고 여기는 거겠지. 세력이 붕괴한 설인들이 많으니, 그것들을 전부 통합하려는 거겠지.』
엘릭으로서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멍청한 놈들만 만나다가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놈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으니까.
덕분에 안가로 의심되는 장소도 몇 곳 찾을 수 있었고.
-다른 부족은 모르겠지만, 우리 부족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무슨 전설?
-우리 부족의 시조의 시조의 시조가 되는 분이 한때 설산을 뛰어넘어서 산맥을 차지했던 위대한 왕이었고…!
-쓸데없는 부분 각설하고.
-…그런 왕께서 유일하게 ‘친구’로 인정한 인간이 있다고 했다.
-친구?
-맞다, 친구! 자존심 강한 우리 설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구로 맞은 인간이다!
엘릭은 직감적으로 녀석이 말한 ‘왕의 친구’가 가문의 선조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왕께서 그믐마다 찾아오는 친구를 위해서 땅 주고, 밥 주고, 집 주었다고 했다.
-우리는 왕의 뜻에 따라서 그 집, 계속 관리해왔다!
-어디지, 그 집이?
녀석들은 ‘집’의 장소를 알려주는 대가로 부족의 안전을 걸었다.
엘릭도 곧바로 승낙했다. 어차피 실전 용도도 다했으니까.
그렇게 거래가 끝난 순간, ‘푸른 눈꽃’ 부족의 수장은 자신이 직접 안내를 해주겠다면서 앞장섰다.
엘릭은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혹시 함정일지도 모르니 심안은 활짝 열어놓은 상태였다.
『근데 말이다.』
“…?”
『통역 마법을 쓸 수 있으면서 왜 자꾸 대화를 나눌 때마다 본 왕을 중간에다 세우는 거냐?』
“이게 더 편하잖아요.”
『제기랄.』
말을 하지나 말지. 메피스토는 울화를 다시 삭여야만 했다. 그래도 번역기 노릇하면서 애교 지옥에서 탈출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메피스토펠레스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고 만 건지.’
메피스토는 내심 우울해졌지만, 당장은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그사이.
키에엑!
『…이 아래라고 한다.』
엘릭은 어느 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 덮인 계곡과 계곡 사이로 나 있는 크레바스.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냉풍은 왜 그리도 강하고 차가운 건지. 자칫 잘못했다간 기류에 같이 휩쓸릴 것 같았다.
공중 부양으로도 균형을 잡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
하지만 마력으로 안력을 잔뜩 돋운 엘릭의 시야에는 보였다.
저쪽 낭떠러지의 중턱에 웬 모옥이 한 채 놓여 있는 것을.
키엑, 키에엑! 키엑!
『…자기네들도 1년에 한 번씩 저 낭떠러지로 겨우겨우 내려가 청소를 하고 돌아온다고 하는군. 골짜기 틈 사이로 이따금 상승 기류가 높이 일어서 자기네들 기술이 아니면 웬만한 마법으로도 접근하기 힘들 거라고. 어떻게 할 생각이냐?』
설인은 손짓, 발짓을 다 하면서 엘릭에게 저곳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가을 그믐날, 새벽 자정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때가 되어야 자기네들도 겨우 내려갈 수 있다고.
그래서 메피스토는 그때까지 기다리겠냐고 물었고.
“보시면 모르겠습니까? 이건 저 모옥을 세운 선조님이 후손에게 내리는 시험입니다. 실력은 되는지, 된다면 그럴 만한 깡은 있는지.”
엘릭은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