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실전(實戰)
심장이 거칠게 고동치면서 뇌에서 호르몬이 마구 분비되었다.
얌전하던 감각이 바짝 날을 세웠다. 마정석이 내뱉는 마력이 한 줄기 한 줄기까지 세세히 느껴졌다.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서. 육체의 상태를 강제로 재조정해 싸움에 가장 최적화된 상태로 만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각만큼 더 또렷해진 심안은 넓은 범위의 전장을 단숨에 스캔하고.
엘릭의 머릿속에 지형지물과 인원 배치를 포함한 전지적인 시점의 구조도를 안겨주었다.
덕분에 엘릭은 전장의 상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살짝 놀라야만 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심안이 아닌 육안으로는 절대 닿지 않을, 각이 진 능선 위쪽.
필룸을 던졌던 설인 무리가 예상보다 많이 모여 있었다.
‘사냥에 나설 때 보통 열 마리 안팎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서른 마리도 넘잖아?’
더군다나 녀석들은 잔뜩 흥분한 채로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능선을 따라 이동을 개시하는 녀석들에게는 살기까지 풀풀 날렸다.
무슨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듯한 투.
『후후! 아주 일이 재미나게 돌아가는군. 첫 대면부터 난이도가 하드코어야.』
“메.”
『왜? 오히려 막상 싸우려니까 두렵기라도 하나 보지? 하긴. 원래 인간이란 다 그렇…!』
“【다물라】.”
『읍읍읍!』
“휴! 이제 좀 조용하네.”
메피스토가 다물린 입으로 방방 뛰는 동안.
파앗!
두 기사와 몬스터 헌터들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채채챙!
기사들은 쭉쭉 앞으로 치고 나가면서 설인들을 쓸어나갔다. 검에서 피어난 오러가 번쩍일 때마다 설인이 한 마리씩 피를 뿌리면서 쓰러졌다.
부딪치고, 흘리며, 벤다.
기사들이 부리는 검은 간단히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아주 유려하고 화려했다.
반면에 헌터들은 투박했다. 기본기가 부족해서 그런지 깔끔하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실전적이었다.
‘저것이… 오러 사용법.’
엘릭은 난생 처음 기사들의 제대로 된 싸움을 보았고,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동안에도 발을 내딛는 자세, 몸을 비트는 방향, 손목의 회전, 검의 투로, 마력의 운행과 오러의 발현 등, 너무 많은 정보들이 통째로 엘릭에게로 전해졌고.
언령 마법으로 다져진 뇌는 그것들을 전부 낱낱이 해체하고, 분석하며, 각 의미들을 추론하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구성하였다.
저들이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에서, 엘릭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빠른 속도로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쐐애애액!
엘릭은 사각지대를 노리면서 이쪽으로 몰래 접근을 시도하는 설인의 무리를 느낄 수 있었다.
저대로 둔다면 로브 여인과 밍마가 있는 본진이 큰 피해를 볼 테지.
하지만 뒤집어서 말하자면, 그 말은.
‘이쪽에서 몰래 저들의 옆구리를 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엘릭은 놈들의 이동 경로를 빠르게 파악하면서 다시 한번 더 언령을 발동했다.
“【무장(武裝)】.”
그러자 여태 ‘메모라이즈’로 미리 숙지해두었던 마법들이 차례로 발현되었다.
인지 확장.
근력 강화.
민첩 증가.
공격력 증폭.
가속.
……
언령 마법의 특징은 언어로 현상을 묶는다는 것이고.
이것을 미리 비축해놓는 게 가능하다면 마력이 따르는 한 한꺼번에 동시 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엘릭의 신체적 능력을 극대화함으로써, 모든 마법사들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근접전도 가능하게 만들어주니.
그렇기에 이름도 ‘마법 무장(魔法武裝)’.
아주 오래전, 호왕의 혈계 단절과 함께 유실되고 말았다던 강체술(强體術)의 복원 형태였다.
물론, 아직은 완전한 복원이 되질 않아 기초적인 형태에 불과했지만.
이것만 해도 엘릭에게는 아주 큰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개방(開放)】.”
마력이 외부로 마구 방출되는 것과 동시에.
콰아앙!
엘릭은 바닥을 거칠게 내려찍으면서 몸을 날렸다.
‘여기서 한 놈을 생포한다.’
노리는 지점은 당연하게도, 놈들의 옆구리였다.
“【터져라】.”
엘릭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감각이 예민한 설인들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녀석들이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딛고 있던 지면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켰다.
4써클 마법 ‘화염 지뢰’에서 본뜬 것으로, 엘릭의 마력이 대신 들어간 만큼 파괴력은 그보다 훨씬 대단했다.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일어난 불길이 무리의 중심에 있던 설인들을 일차적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남은 녀석들이 헛발을 디디면서 진형이 크게 흐트러지고.
“【태워라】.”
털가죽에 붙은 불씨가 거칠게 확 타오르면서 단숨에 녀석들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키에엑!
키엑! 키에에엑!
설인들은 어떻게든 불길을 떨쳐내고자 발버둥 치거나, 눈밭을 구르기도 했지만, 불길은 좀처럼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엘릭은 가까이 접근하며 재차 마법을 발동했다.
“【뚫어라】.”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앞으로 바람이 잔뜩 뭉쳐진 화살이 나타나 앞으로 쏘아졌다.
1써클의 ‘매직 미사일’.
진짜와 차이점이 있다면. 훨씬 두껍고, 내구도가 단단하다는 것.
그리고 주변이 온통 설원이니만큼, 수증기가 잔뜩 섞여 있어 얼음을 뭉친 고드름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것 또한 엘릭이 노리던 바이기도 했다.
퍼퍼펑!
키에에엑!
가뜩이나 불길에 휩싸인 녀석들에게 한순간 차가운 화살을 박아 넣는다면, 몸이 찢길 것 같은 통증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설인들은 변변찮은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줄줄이 쓰러지고 말았다.
개중 용감한 몇몇이 괴성을 질러대면서 엘릭에게 달려들기도 했지만.
“【묶어라】.”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 포승줄이 그런 놈들의 발목을 단단히 묶어버렸다.
그렇게 엘릭이 놈들에게 다다랐을 때는 이미 여섯 마리로 이뤄진 무리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 차.
“대단… 한데.”
정작 그런 결과를 연출한 엘릭은 스스로가 더 놀란 상태였다.
충분히 놈들과 싸울만하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덤볐다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승기를 거머쥘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아무리 기습의 이점을 살렸다고 해도, 대단한 결과였다.
이래서는 미리 메모라이즈 해둔 마법 무장만 아깝게 날린 셈이었으니.
키에에엑!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설인이 괴성을 꽥꽥 질러댔다.
“메.”
『으으으읍!』
“엥? 아직도 그러고 있었어요? 말 좀 하지.”
『읍읍!』
“아, 못하지?”
엘릭이 피식 비웃음을 던지면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푸하! 이 새끼가 진짜…!』
메피스토는 숨을 몰아쉬면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힘만 돌아온다면 이놈의 면상을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텐데…!
“때리려구요?”
『이이익! 왜! 왜 불렀는데!』
“번역 좀.”
『…!』
메피스토는 엘릭이 묶여있는 설인을 가리키면서 한 말에 방방 날뛰고 말았다.
통역도 아니고 번역이라니! 욕설을 내뱉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물론, 엘릭은 그런 꼴을 보면서도 묵묵히 설인을 가리키기만 했고.
메피스토는 지글지글 타는 시선으로 엘릭을 노려보았다.
바득바득, 이가 갈렸다.
『자… 신을… 놓아라… 안 그럼 죽이겠다고… 그러는구나.』
“지금부터 묻는 걸 제대로 답하면 풀어주지. 통역.”
『…쿠아, 쿠쿠쿠쿠아! 쿠아아!』
메피스토는 엘릭이 자신이 하는 말은 번역이 아닌 ‘통역’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놈이 하는 짓에 일일이 신경을 써서는 화병만 돋울 뿐이니까.
대신에 엘릭이 ‘【들려라】’라며 설치한 통역 마법에 집중했다.
전음을 응용해, 메피스토가 발산한 사념을 마력으로 압축시켜 설인에게 전달하도록 구축한 마법이었다.
‘고작 조금 전에 배운 걸로 입밀까지 깨닫다니…! 하여간! 쓸데없이 재능만 충만해서는!’
키에엑! 키엑! 키키키!
『…동료를 살해한 적에게 말해줄 건 없다! 그냥 죽여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너네 마을, 어디냐?”
『쿠아, 쿠아아아!』
키에에엑!
“뭐래요?”
『말해줄 것 같으냐. 그냥 날 죽여라.』
“말 안 하려고?”
『쿠아아아!』
키에에엑!
『안 한다! 죽여라!』
“그래. 그럼 죽어.”
엘릭은 피식 웃더니 매직 미사일로 녀석의 가슴팍에다 곧장 바람구멍을 만들었다.
털썩!
메피스토는 여태 고생해서 통역했던 녀석이 힘없이 쓰러지자 어이없다는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다.
하지만.
엘릭은 히죽 웃을 뿐이었다.
“여기 입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요?”
엘릭이 고개를 돌린 곳.
여객들을 사냥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설인의 무리가 있었다.
* * *
엘릭은 밍마와 여객들이 있는 곳에서 몰래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아무리 봐도 너는 사탄이 울고 갈 재목이 분명하다. 어미가 보는 앞에서 자식의 관자놀이에다 화살을 들이댈 생각을 할 줄이야.』
“마왕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웃기네. 그거 칭찬이죠?”
『그렇게 들리더냐?』
“아닌가 봐요?”
『칭찬 맞지. 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미덕이고말고.』
“뭔가 비꼬는 언사가 가득하신 것 같지만, 일단 갈 길이 바쁘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
메피스토는 공중 부양을 이용해서 능선을 빠르게 오르는 엘릭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엘릭은 자신의 실력을 확인한 직후, 곧장 스무 명도 넘게 있던 설인의 무리에게로 곧장 뛰어들었다.
그 뒤에 벌어진 광경은 아주 당연하게도 학살극에 가까웠고.
이를 바탕으로 싸울 의지를 꺾을 녀석들을 몇 마리 생포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는 한 마리 한 마리씩 따로 심문을 거쳤다.
당연한 말이지만, 엘릭은 심문에 그렇게 시간을 길게 빼지 않았다.
그들의 거처를 물었고, 저항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으면 곧장 가슴팍에다 바람구멍을 내어주었다.
그러다보니 살고자 하는 녀석이 있어 곧장 위치를 바로 불게 할 수 있었다.
‘이들 혈족은 재능과 인성이 비례하기라도 하는 건가…?’
애당초 메르빙거 가의 혈족들 중에 마왕이 봐도 제정신이 아닌 작자들이 많긴 했어도, 엘릭은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인 것 같았다.
키엑! 키에에엑!
달리는 엘릭의 오른쪽 어깨 위에는 사지가 묶인 설인이 들려 있었다. 단순한 설명으로는 위치를 알 수 없으니, 강제로 끌고 온 것이다.
너무 빠른 속도로 인해 공포에 질린 얼굴이 메피스토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쿠아, 쿠쿠쿠, 쿠아!』
키에엑!
『쿠아아아!』
키에엑, 키엑!
『쿠륵, 쿠르르륵!』
키에에엑? 키에엑!
“아까 전부터 대체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겁니까?”
『험험. 무슨 말이긴. 그냥 얌전히 있으면 살 수 있단 말이지.』
키에에엑!
『쿠와! 쿠쿠와아, 쿠루…!』
“음…? 【통역하라】.”
『…그러니 이 인성이 박살난 놈에게 같이 골탕을… 음?!』
메피스토는 설인어를 쓰다 말고, 갑자기 대륙 공용어가 입 밖으로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여태껏 신나게 호박씨를 까고 있었는데, 그게 홀라당 들키고 말았으니까!
그러다 자신을 보며 싸늘하게 웃는 엘릭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이놈, 설마 통역 마법을 쓸 수 있으면서도 여태껏 일부러…!
“하여간 이 영감님 이럴 줄 알았지. 3일간 【다물어라】.”
『읍읍읍! 으으읍!』
“그리고 계속 【애교】.”
『…뀨뀨?』
메피스토는 한참 동안 이상한 애교 춤을 춰야만 했다.
쐐애액-
그사이.
엘릭은 일행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설인의 본거지로 들이닥칠 수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