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실전(實戰)
[다가오는 우스던 아카데미의 총장 선거, 그 결과는?]
[베럭스 학장이 지지율 52%로 다른 후보들을 월등히 앞서.]
[유급만 전전하던 낙제생에게도 색안경을 끼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다가간 인품이 주요 인기의 요인으로 꼽혀.]
“후후. 여론이 마음에 들게끔 돌아가는군.”
베럭스 교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기사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축하드립니다, 총장님.”
옆에 서 있던 리번이 양손을 비비면서 아부를 떨자, 베럭스 교수는 입이 저절로 양가로 쭉 찢어졌다.
그러다 뒤늦게 실책이라 생각했던지 헛기침을 하면서 짐짓 꾸짖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직 선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망발인가!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어! 나는 어디까지나 이 아카데미의 미래와 생도들의 장래만 걱정하고 있을 뿐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총장님의 그런 깊으신 마음을 제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험험!”
“그래도 모든 여론이 총장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곧 있을 탐사에서도 큰 발견이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어느 학장도 총장님의 명성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참! 나를 너무 많이 띄워주는군.”
하지만 말과 달리 그는 전혀 싫지 않은 눈치였다.
[또 하나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이번에 발견될 둥지의 역사적 가치는, 얼마?]
베럭스 교수가 주도하였던 탐사대가 이틀 뒤에 아카데미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이미 수많은 여론이 이번 탐사를 집중 조명하는 중이었으니.
일각에서는 엘릭이 발견한 것보다도 훨씬 큰 규모의 용의 둥지가 발견될 거라 추측하기도 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엘릭의 대발견을 지원한 공로에 이어 새로운 둥지 발견까지 더해져, 베럭스 교수의 명성은 하늘을 모르고 치솟을 게 분명했다.
“한데 엘릭 생도는 아직도 차도가 보이질 않고 있나?”
“여전히 네레스타 쪽이 병실 일대를 에워싸고 있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경비에게 듣기로는….”
“듣기로는?”
“이미 몇 번씩이나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합니다. 아마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저런…. 안타까운 일이로군.”
말투와 다르게 입가는 웃고 있었다.
리번의 미소도 덩달아 짙어졌다.
“네레스타 가문이 저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건, 전부 발굴권을 타내기 위한 개수작이 아니겠습니까? 계속 저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면 즉각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보석룡의 둥지는 우리 아카데미의 재산이야. 그런 것을 저들에게 한낱 사유물로 건넬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발굴권의 향방은 점차 아카데미와 네레스타 가문, 두 곳으로 집약되는 중이었다.
거기다 엘릭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도니, 이 위에 소유권까지 더해진 상태.
당연히 두 곳 모두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럭스 교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탐사가 성공한다면 그만큼 정치적인 분위기나 여론도 아카데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여간 지금은 모든 게 오리무중이니, 마지막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세나. 내 후임 건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
베럭스 교수가 총장이 된다면 원소학부의 교수직이 하나 비게 된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과연 누구에게 전해질까?
리번은 눈을 한껏 빛내면서 정수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였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후후후.”
베럭스 교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이 풍미처럼,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도 산뜻할 것 같았다.
* * *
“‘탐사대, 수많은 기대와 환영을 받으며 길을 떠나다…?’ 참 거창하게도 출진식을 치렀네.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런데?”
엘릭은 가판대에 올라온 신문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자신이 유도했다지만, 어떻게 예상한 그대로 일들이 척척 진행되고 있는 건지.
혹시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곧장 달려온 자신의 수고가 부질없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저 탐사 결과는 사실 불에 보듯 뻔했다.
‘그럴듯한 영맥은커녕, 그냥 깊은 굴만 있고 아무것도 없겠지.’
순 맹탕이었단 사실이 알려진다면, 한창 기세등등한 명망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된다. 그때, 베럭스 교수는 어떻게 나설까?
‘그만큼 내 둥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겠지. 어떻게든 총장 선거는 이겨야 하니까. 그 과정에서 네레스타 가문과 갈등은 계속 커질 테고.’
그때부터 엘릭은 하나둘씩 소문을 몰래 퍼뜨릴 예정이었다.
엘릭의 대발견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던 베럭스 교수의 선행이, 사실은 거짓말이었단 소문.
둥지의 위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엘릭과 션의 의견을 묵살하고, 오히려 내기를 걸어 마도명문의 가보를 강탈하려 했다는 소문을.
이 작업을 위해 현재 션의 충복인 카를이 물밑에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어차피 언론이 좋아하는 건 가슴 따뜻한 선행이 아니라, 자극적인 음모론이니까. 열심히 휘갈겨대겠지. 네레스타 가문이나, 다른 총장 후보들도 그걸 개 떼 같이 물고 늘어질 테고.’
그런 상황에서 엘릭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베럭스 교수는 완전히 몰락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수님.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건 노리지 마셨어야죠. 선을 넘으셨으니 이렇게 되는 거 아닙니까?’
엘릭은 옷깃에 가려진 마도경식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중한 보물이기에 엘릭은 베럭스 교수가 더 탐탁지 않았다.
‘하여간 이 덫을 어떻게 해결하실 수 있을지, 어디 한 번 지켜보겠습니다.’
화르륵!
엘릭은 불길을 일으켜 손에 쥔 신문을 태운 다음,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목적지로 이동했다.
그가 있던 자리로, 검은 재가 나풀나풀 날리면서 떨어졌다.
* * *
“설원으로 가는 길잡이를 구하신다고?”
엘릭은 자신을 미친놈 보듯이 보는 중개자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집단으로 자살하러 가는 게 유행이기도 한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개자는 엘릭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뭐, 돈만 두둑이 준다면야 길잡이를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요. 요 몇 년 동안 흉작이 계속되어서, 이 근방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하나 같이 궁핍하거든.”
“음, 그것이….”
“돈이 넉넉지는 않으시구만?”
엘릭은 한순간 쓰게 웃고 말았다.
아카데미의 등록금이며 생활비까지 전부 누이가 지원해줬던 것을 감안하면, 수중에 남은 돈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누나한테 연락도 제대로 못 넣었는데… 나중에 크게 혼나겠는데.’
션에게 상황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연신 그런 기사들만 쏟아지는데 마음이 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걱정이 그리 많은 성격이란 것을 생각하면, 더 속이 타들어가겠지.
나중에 따로 전보라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중개자에게 말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오. 다른 일행에 합류해서 품삯을 나누는 것도 방법 아니겠소?”
엘릭으로서도 어차피 설원을 오르기만 하면 길잡이와도 도중에 헤어질 생각이었기에 나쁠 것이 없었다.
“다리 좀 놔주시겠습니까?”
“3일 뒤, 오후 1시까지 이곳으로 오시오. 그때 출발할 예정이니.”
“감사합니다.”
엘릭은 돈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어딘지 모르게 지형이 좀 익숙하다고 했더니. 예티의 거주지였군.』
마을 외곽에 잡아 둔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메피스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산골 오지에 위치해 가호 수가 100여 개 안팎밖에 되지 않는 마을.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만년설로 뒤덮인 높다란 산지뿐이었다.
제국의 동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거룡이 죽어 남은 척추가 하늘을 뒤덮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거칠고 험한 산맥들이 즐비했다.
‘설인의 고원’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만년설을 터전으로 삼은 설인이 이따금 산골 마을들을 약탈하고, 등산객들을 납치해 잡아먹곤 했으니까.
그런데 메피스토는 이곳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예티(Yeti)란 설인을 가리키는 이곳 지역만의 고유 명사였으니까.
“와 본 적이 있으신가 봐요?”
메피스토는 콧방귀를 꼈다.
『있다마다. 감히 우리를 흠모했던 떨거지들인데.』
“떨거지?”
엘릭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설인이 마족이었어요?”
메피스토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같은 부류로 묶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하지만 엘릭은 이미 적잖게 놀란 상태였다.
‘그럼 하위 마족이라도 된단 뜻이잖아?’
단순히 인육을 즐기는 몬스터라고만 알고 있었건만.
‘하긴 마족은 인간과 대적한 역사가 긴 것과 별개로, 제대로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래도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메피스토가 같은 부류로 묶이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설인의 저급한 지능 때문일 것이다.
마족은 대개 정신체인 만큼 고귀하고 화려한 취미를, 그리고 오만한 성품을 지녔으니까.
『그래도 이놈들의 옛 왕은 생각보다 많이 쓸 만했었지만. 만약 그놈의 운명이 그리 못나지만 않았었어도, 이들이 마신의 은총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옛날에 설인들을 이끌던 지도자라도 있었던 걸까?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건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흠! 그놈의 무덤이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겠군.』
그 순간.
엘릭의 눈이 반짝였다.
* * *
사흘 뒤.
엘릭은 중개사의 말대로 자신을 ‘쿡 밍마’라고 이름을 밝힌 길잡이를 만날 수 있었다.
“저희 부족은 대대로 태어난 날을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서요. 밍마란 두 번째 해가 떠오르는 날을 의미하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냐구요? 오늘이 바로 일주일 중 두 번째 해가 떠오르는 날… 그러니까 제국어로는 화요일이니, 여러분들은 저만 따라다닌다면 절대 아무런 변고도 겪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열세 살쯤 되어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년.
『그놈 참 말도 더럽게 많군. 저대로 두면 쫑알쫑알 쉬지도 않고 떠들어댈 판인데. 꼭 굳이 저놈이어야만 하는 거냐?』
메피스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사실 엘릭을 비롯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길잡이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기도를 숨기고 있는 사람 다섯에 몬스터 헌터 셋… 그리고 약초꾼 네 명이라.’
설인의 고원이라서 이런 특이한 조합이 만들어진 걸까.
특히 가장 후방에 떨어져서 수시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다섯 명은 수상쩍기까지 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네 명이 철저하게 한 명을 보호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듣자 하니 저들이 이번 여객(旅客)에 가장 먼저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거겠지.
엘릭으로서는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다.
‘그나저나 좀 아쉽네. 또 무슨 기연이라도 얻나 싶었더만.’
엘릭은 저 멀리 보이는 설원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메피스토가 사흘 전에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 탓이었다.
-무덤? 이미 도굴됐겠지. 본 왕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냐?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