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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2화 (12/405)

12화

재능을 깨우다

펑, 퍼퍼펑!

엘릭은 언령으로 완성한 ‘얼음 비’를 산자락에다 내다 꽂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3써클로 분류될 마법.

모양, 크기, 위력. 전부 원본과 똑같았다.

다만,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이건 ‘얼음 소나기’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옳다고 해야 할까.

수십 개의 얼음 화살이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떨어지는 족족 새롭게 채워지고 있었으니.

갓 3써클에 들어선 자라면 경악할 수밖에 없는 운용 실력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크게 놀란 건 엘릭이었다.

“와우! 그거 좀 이해했다고, 이렇게 달라진다고?”

엘릭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메피스토가 적어준 기초 개론을 본 지 닷새째.

엘릭은 그동안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거나,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처음으로 만났던 ‘벽’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마법사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을 상황.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메피스토의 개론이 이해하기 쉽다고… 아니, 메피스토의 수준이 너무 높다고 봐야겠지?’

엘릭은 힐끔 메피스토가 있는 쪽을 훔쳐보았다.

그는 오늘도 한낱 인간의 겁박에 굴복했다(?)는 사실에 한껏 좌절감의 늪에 빠져 있었지만.

엘릭은 최근 들어 메피스토에 대해 재평가를 하는 중이었다.

그가 최강의 마왕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실력을 얼추 엿보게 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정점 중의 정점에 올라,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전부 굽어살필 수 있어야만 비로소 풀어낼 수 있는 지식들.

마정석을 얻은 것이 운명을 바꾼 첫 번째 기연이었다면, 메피스토를 만난 건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 두 번째 기연이었다.

“메피스.”

『메, 메피스?』

메피스토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엘릭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뒷 내용은 언제 나와요?”

『이이…!』

마치 전당포에서 맡겨 놓은 물건을 찾아가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

메피스토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절대 욕설을 내뱉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엘릭은 도발이 통하지 않자 아쉽다는 듯이 ‘쩝!’하고 입맛을 다셨지만.

‘빌어먹을 놈, 언제까지 그렇게 희희낙락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메피스토의 두 눈이 불길로 활활 타올랐다.

‘네놈의 영혼이 주박의 인에 완전히 구속된 순간, 이 수치를 몇 배로 되갚아 줄 터이니!’

하지만 며칠 뒤, 메피스토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기대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 * *

‘왜…? 왜 아무 반응도 없는 거지? 무언가 낌새라도 있어야 하는데?’

휘휘휘!

메피스토는 4써클 ‘혹한의 바람’을 전개하는 엘릭을 보면서 손톱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개론 곳곳에다 숨겨뒀던 ‘주박의 인’이 전혀 작동하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쯤 아주 단순한 암시라도 발현되어야 정상일 텐데…?

“꼭 저한테 무슨 변화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없어서 이상하다는 얼굴이네요?”

그러던 그때, 엘릭이 갑자기 이쪽을 힐끗 돌아보면서 시니컬하게 웃었다.

메피스토는 둔탁한 뭔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놈이 무슨 귀신이라도 씌였나!’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메피스토는 최대한 잡아뗀다고 뗐지만, 엘릭은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신경 쓸 거 없어요. 어차피 안 통하니까.”

『무, 뭐?』

“설마 제가 천치도 아니고, 메피가 준 걸 아무 검토도 하지 않고 홀라당 익혔을까 봐요?”

『…!』

“너무 교묘한 곳에 숨겨둬서 찾는 데 한참 걸리긴 했지만, 뭐. 하여간 감사하게 잘 익혔습니다.”

『….』

‘제기랄, 제기랄, 제기라아아알!’

메피스토는 깐족대기 바쁜 저 빌어먹을 면상에다 당장 주먹이라도 꽂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다음 내용은 뭡니까? 이 집이 너무 맛집이라서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니까.”

결국 메피스토는 폭발하고 말았다.

『씨부럴! 네가 사람이냐!』

“칭찬 감사합니다. 오늘치 말씀 다하셨죠? 그럼 다시 묵언 상태 갑니다.”

『으으으읍! 읍읍!』

메피스토는 결국 뒷목을 붙잡고 말았다.

* * *

“메. 방금 써준 거 다 익혔어요. 다음 거 없어요?”

…이젠 ‘메피’나 ‘메피스’도 아니고, 그냥 ‘메’냐?

메피스토는 그런 눈으로 엘릭을 노려봤지만.

“호보단 메가 낫잖아요?”

엘릭은 이번에도 그의 속내를 귀신같이 읽어내고 알 수 없는 헛소리를 떠들어댈 뿐이었다.

이미 저 뻔뻔한 낯짝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아니 질려버린 터라, 뭐라고 소리를 지를 힘도 없었다.

결국 메피스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없다.』

“헛소리할 거면 또 3일 묵언 수행….”

『그게 아니라 정말 이제 언령 마법에 대해서 가르쳐 줄 게 없단 말이다!』

엘릭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자세히 말해 봐요.”

『말한 그대로다. 본 왕은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 줄 만한 게 없어. 아니, 정확하게는 언령에 대해서 일러줄 게 없다.』

“어째서요?”

『내가 알고 있는 언령은 ‘진언(眞言)’이니까.』

“…!”

진언.

크게 다섯 등급로 구분되는 언령 중에서도 가장 최고위에 위치한 언령.

물론, 그 위로 ‘신의 목소리’라는 신언(神言)이 있다지만, 그건 신격(神格)을 갖춘 초월자들에나 해당하는 이야기이니 제외.

인세에 존재하는 최고 등급의 언령을 알고 있다는 말은, 엘릭으로 하여금 메피스토와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를 절실히 실감케 해주었다.

『사실 그동안 본 왕이 가르쳐 준 것들도, 본 왕의 시각에서 진언의 아주 기본 밑바탕이 되는 부분을 구술한 것일 뿐이다. 너는 그걸 스펀지처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것이고.』

“….”

『그 이상은 말해주려고 해도 네 실력으로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머릿속에 남아 앞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서 사사건건 심마로 작용할 가능성만 크다.』

메피스토는 딱 잘라서 선을 그었다.

엘릭은 그 말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계속 붙어있다 보니, 그를 파악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하긴. 어쩌면 이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

메피스토가 보고 있는 시선이란, 엘릭으로서는 별처럼 너무 멀 수밖에 없다.

별을 억지로 따려고 하면 추락하기 마련.

“그래도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요?”

『글쎄. 그냥 미쳐버리고 말겠지?』

“…!”

『뭐, 본 왕의 입장에서는 네가 그냥 미쳐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네 상태로 그랬다간 곱게 미치지는 못할 것 같아서 말이지.』

메피스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정석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중에 입마증에 빠져서야, 나중에 수습만 힘들어질 테니까.

메피스토도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이걸 어쩌지?’

엘릭은 아주 잠깐 고민에 잠겼다.

사실 마법의 종류는 아주 많고, 언령 마법 말고도 메피스토에게 배울 수 있는 것도 그만큼 많았다.

‘여차하면 흑마술도 배울 수 있을 테고. 웬만해서는 안 하겠지만.’

아무리 메피스토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다지만, 그래도 마족과 전쟁을 치렀던 가문의 유지(遺旨)까지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메피스토를 흡수하면서 오른쪽 손등에 새겨진 늑대 모양의 문신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다른 마법들을 무작정 익히는 것도 시간 낭비일 것 같고.’

언령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건 똑같을 테니. 당장 실력 증강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네.’

엘릭의 눈이 번들거렸다.

‘실전.’

그동안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 중에 마지막 두 번째를 시도할 타이밍이 된 것이다.

아무리 마법을 연구하고 단련한다고 한들, 실전을 겪어보지 않고서야 방구석 이론 습득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

‘전장(戰場)에서만 비로소 마법이 완성된다는 건, 우리 가문의 격언이기도 하고 말이지.’

대대로 마족과 전쟁을 치른 가문답게, 이만큼 화끈한 가풍과 기조를 가진 곳도 더 없을 것이다.

‘여기 내려갈 수 있는 건, 베럭스 교수의 탐사가 전부 끝나고도 한참 지나서일 줄 알았는데…. 얼추 시간이 맞겠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엘릭은 조금이라도 빨리 전장에 뛰어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샘솟았다.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몸소 확인해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갈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황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붉은 영혼의 숲’? 아냐. 거긴 시험 삼아 뛰기엔 너무 거칠어. 그럼 ‘청비굴(凊祕窟)’? 여긴 사람이 너무 많은데. 좀 더 멀리 가야 하나?’

엘릭은 몬스터 출몰지를 일일이 검토하면서도, 절대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자신은 아직 햇병아리일 뿐이다. 난이도를 천천히 올려야지,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도전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또한, 정체도 숨겨야 하니 소문이 크게 날 정도로 유명한 곳은 안 되고, 지나치는 인파도 적어야 한다.

그러다 엘릭은 제격인 곳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설인의 고원!’

크립티드인 설인이 출몰하고, 만년설이 깔려 있어 조난하기에 십상이라 입장객이 극히 드물다는 곳.

무엇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 근방에 가문의 안가(安家)도 있었지? 여태 실력이 안 돼서 열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능하겠지. 거기서 목걸이에 대한 단서도 좀 얻을 수 있으려나.’

엘릭은 목에 걸린 마도경식을 손으로 매만졌다.

『…뭔가 재미난 걸 떠올리기라도 한 눈치인데.』

메피스토는 엘릭이 저런 눈빛을 드러낼 때마다 이상한 일들만 벌어졌기에 영 찝찝한 표정이 되었지만.

“M.”

『…이젠 줄이다 못해 아예 첫 글자만 부르는구나. 그래! 왜?』

“저 말고 남들 눈에 안 보이는 거 맞죠?”

『무슨…!』

순간, 엘릭이 씩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제기랄! 제기랄, 제기라아알! 어째서! 원죄의 마왕이라고도 불렸던 본 왕이 얌생이처럼 도둑질까지 해야 한단 말이냐아!』

“어허! 도둑질이라니요. 말씀 정정하시죠. 값은 충분히 치렀잖아요?”

『그냥 빨래 건조대 밑에다 던져두고 온 것뿐이잖아!』

엘릭은 약 한 달 동안 수련에만 집중했던 까닭에 그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다.

입고 있던 옷가지도 다 낡고 때가 잔뜩 타서 거지꼴이 따로 없었고.

이런 몰골로 산을 내려갔다간 제대로 활동도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명색이 제국의 공작이 되어서 품위가 있지, 비렁뱅이 꼴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하지만 역시나 제국의 공작이 되어서 직접 도둑질을 하기에도 내심 찔리는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메피스토에게 시킨 거였는데. 형체가 없어서 그런가, 일솜씨가 아주 말끔했다.

메피스토는 가슴을 두들기면서 분통을 터뜨릴 뿐이었지만.

여하튼.

엘릭은 흐르는 시냇물에 몸을 담그면서 마법을 적절하게 이용, 그동안 묵은 때를 시원하게 벗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열풍을 이용해 몸을 말리면서 어느 이름 모를 촌로에게서 빌린(?) 옷을 걸쳤다.

‘머리도 많이 길었네.’

엘릭은 어깨 부근을 넘어가는 머리를 보면서 묘한 미소를 띠었다.

“【잘려라】.”

칼바람이 날카롭게 일어나면서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갔다.

엘릭은 그것을 전부 시냇물에 흘려보내고, 다시 한번 더 마법을 발동했다.

“【변해라】.”

뚜둑, 뚜둑-

그러자 얼굴 골격이 미세하게 틀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광대가 살짝 나오고, 피부색이 어두워지며 눈매가 찢어졌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장난기 많은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전체적으로 날카로워 보였다.

크게 변한 게 아닌 데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이질적으로 변한 것이다.

션처럼 정말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를 보고 엘릭이라고 생각지 못할 터였다.

“그럼 이제 내려가 볼까?”

엘릭은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지난 한 달 동안 터전이 되어주었던 산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근데 M. 그 M이면 제가 아는 M은 아니죠? 좀 변태같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으으으! 어쩌다… 이딴 골 때리는 놈과 엮이게 되어서…!』

메피스토의 한탄만이 메아리가 되어 애처롭게 울릴 뿐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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