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재능을 깨우다
메피스토펠레스.
고대에는 가장 위대한 마왕이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봉인되어버린 탓에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도 없어지게 된 존재.
그는 심사가 적잖게 뒤틀린 상태였다.
『분명히 본 왕을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럼 펠레스라고 부르죠, 뭐.”
『말하지 않았더냐! 본 왕의 이름은 위대한 마신께서 단어 한 자 한 자에 유구하고 신성한 의미를 눌러 담…!』
“으하암.”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메피스토펠레스.
엘릭이 줄여서 ‘메피스토’라고 부른 그의 두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불꽃이 튈 것 같았다.
한평생 모든 마를 굴종시키고, 세상을 위험과 도탄으로 빠뜨렸던 그가 아니던가.
또한, 마지막 남은 용왕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한낱 인간 따위에게서 이런 취급을 받는 데서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수밖에.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엘릭에게 불벼락이라도 떨어뜨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육체가 남아있질 않았으니까.
『하필 이딴 놈에게 걸려서…!』
처음 메피스토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천년도 넘게 기다려왔던 안배가 모두 무너진 것으로도 모자라, 마력까지 고스란히 엘릭에게 헌납하고 말았단 사실에 미쳐버리는 줄만 알았다.
거기다 본체까지 찢기면서 남은 거라곤 고작 한 조각의 마기뿐.
과거의 기억과 정체성만 겨우 유지하고 있지, 그는 더 이상 마왕이라 할 수도 없었다.
따지자면 한참이나 격(格)이 낮아진 분신.
그 정도 표현이 옳겠지.
“분신도 분수 넘지 않아요? 그냥 주제도 모르는 부유령이지.”
『이, 이…!』
“아, 그것도 너무 높게 쳐 드린 것 같으니까, 간단하게 잡귀라고 합시다.”
『…!』
메피스토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엘릭은 간단하게 귀를 막으며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그런 태도와 다르게.
사실 엘릭은 속으로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메피스토… 뒤늦게 기억났어. 설마 고대 마신이 다스리던 가복 중 한 명일 줄이야.’
지금은 단순히 신화나 전설로만 남은 고대 시대. 신들이 아직까지 세상을 직접 다스리던 그때, 어둠을 상징하던 마신에게는 4명의 가복이 있었으니.
각각 ‘원죄’, ‘종말’, ‘광기’, ‘난교’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에 대한 구전은 거의 실전되고 없었다.
하지만 엘릭은 가문에서 우연찮게 봤던 옛 서책에서 ‘원죄’의 다른 이름이 ‘메피스토펠레스’라고 언급되었던 부분을 뒤늦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단순한 잡설이라고만 여겼는데….
‘정말 그 존재를 보게 될 줄이야.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단 말이지?’
엘릭으로서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그럼 대체 이건 뭘까?’
마도경식에 대한 궁금증도 저절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엔 여전히 아무런 특징도 없어 보이는 낡은 목걸이일 뿐인데.
어떻게 그런 강한 힘이 담겨 있는 건지, 또 어떤 다른 힘이 숨겨져 있는지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필… 많고 많은 그릇 중에 왜 또 메르빙거란 말이냐…!』
그러다 엘릭은 메피스토가 중얼거린 혼잣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메피스토.”
『왜!』
“우리 가문을 알고 있습니까?”
『흥! 본 왕이 왜 네 질문에 답해줘야 한단 거지?』
메피스토는 이미 단단히 빈정상한 듯 콧방귀를 꼈지만.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엘릭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우리 가문이 그렇게나 오래되었다고?’
엘릭은 메르빙거 가가 아주 오랫동안 마족과 전쟁을 벌여왔단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메피스토가 알 정도로 길게 이어졌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특히 그의 말 속에 강한 원한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적잖게 구원(舊怨)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잠결에 들었던 목소리도 언뜻 떠올랐다.
선조 중 누군가가 남긴 것으로 짐작되던 목소리.
-우리들의 유지를, 먼 훗날의 후손이 온전히 계승할 수 있기를.
-우리는 본래….
-바로 이곳에서, 정해진 안배에 따라 첫 번째 마를 삼키겠노라.
선조는 마치 메피스토가, 아니, 정확하게는 마왕이나 마족 중 누군가가 ‘당연히’ 자신의 후손에게 마수를 뻗칠 것처럼 말했었다.
그만큼 마족과 대립해온 가문의 역사가, 엘릭 자신은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아주 깊단 뜻이겠지.
그리고 아마도.
마도경식은 그러한 가문의 모든 내력이 집합된 마도구가 아닐까?
‘마족… 아니, 마왕을 잡아먹는 마도구.’
엘릭은 손끝으로 마도경식을 매만졌다.
‘혹시 다른 마족도 만나게 된다면, 지금처럼 똑같이 잡아먹을 수 있는 걸까?’
선조께서는 분명히 ‘첫 번째’를 운운하셨다.
그 말뜻은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는 뜻은 아닐는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엘릭의 눈빛이 요요하게 빛났다.
* * *
‘하지만 마도경식의 정확한 쓰임새를 알아내기 전에 우선 내 몸부터 단련해둬야겠지.’
엘릭은 잘게 떨리는 양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저 단순히 마력을 뿌렸을 뿐인데도 현기증이 돌고 있었다.
육체가 아직까지 마법 발현에 전혀 익숙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듯한 육체만 갑자기 주어졌을 뿐, 여태껏 마법은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
훈련이 필요했다.
‘가자.’
엘릭은 생각을 마친 뒤, 짐을 간단하게 챙겼다.
그리고 션이 미리 말해준 대로, 난로 뒤쪽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이용해 병원을 빠져나왔다.
원래 갑작스러운 암살 위협에 대비해야 하는 황족들을 위해 만들어둔 곳이었다던가.
덕분에 션의 가솔들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후…!”
엘릭은 상쾌한 바깥 공기를 맡자마자 가볍게 숨을 골랐다.
이러니 갑갑함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후는 뭐가 후란 말이더냐? 쥐새끼처럼 암굴로 다니다니! 본 왕의 힘을 지니고 어찌 이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메피스토는 그런 엘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옆에서 한껏 핀잔을 쏟아댔지만.
이미 그에 대한 판단을 어느 정도 마친 엘릭은 아주 사뿐하게 응답했다.
“잡귀 아저씨.”
『감히 본 왕에게 그런 망발을 일삼…!』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요.”
『…!』
메피스토가 다시 길길이 날뛰었지만.
엘릭은 그쪽으로 신경 써봤자 정신 사나울 뿐이었기에 그냥 무관심으로 응대했다.
‘여기가 좋겠군.’
엘릭은 비탈을 오르다가, 산길에서 한참 벗어난 공터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질 않는지, 동물들이 지나간 흔적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는 곳.
이곳이면 외부의 방해 없이 훈련에 집중하기 좋을 것 같았다.
엘릭은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감각에 집중했다.
화아아!
이미 한 번 이뤄봤기 때문일까?
엘릭은 단숨에 몰아에 흠뻑 젖어 들 수 있었다.
오감이 감지해낸 정보들이 그림처럼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청각.
저 먼 곳에서부터 산길을 타고 흘러오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손에 도토리를 쥔 다람쥐가 풀잎 사이로 달리는 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았다.
-촉각.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후각.
바람에 실린 꽃향기가 유독 짙었다.
산뜻한 개쑥갓의 향도 있었고, 어디 누군가가 키운 건지 동백꽃의 진한 향도 섞여 있었다.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정말 맑아지고 있었다.
-미각.
바람에 섞인 과일의 달콤함이 입안을 맴돌았다.
허기가 졌었지만, 금세 불러졌고.
갈증이 있었지만, 금방 사라졌다.
-시각.
여태까지 느꼈던 감각의 정보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머릿속에 조금씩 새로운 공간이 구성되었다.
그 공간은 엘릭을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세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육안에 잡히지도 않았을 것들.
풀잎 위에서 날갯짓을 하는 무당벌레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솔방울, 햇볕을 쬐기 위해 땅 위로 얼굴을 드러내는 지렁이까지….
그런 모든 것들이 전지적 시점으로 비치고 있었다.
감각의 확장과 인지의 증강은 술식 구동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기반 조건이 된다.
그런 면에서 따지자면, 이제 이 두 영역에 있어서 엘릭을 따라올 사람은 마도사 급 이상이 아니고서야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보려는 건, 결.’
엘릭은 인지 영역에서도 더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 세상의 이면 속에 숨어 있는 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굵고 얇은 선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
그러나 그가 찾는 건 그중에서도 또 따로 있었다.
‘찾았다.’
그가 고른 것은 4대 원소 중 하나인 불.
거기에다 손끝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츠츠츠-
드래곤 하트에서 마력 일부가 새어 나오면서 손끝으로 달려와 결과 뒤섞였다.
그리고.
“【타올라라】.”
엘릭의 한 마디와 함께 불길이 아주 크게 치솟았다.
화르르륵!
1미터?
아니, 2미터쯤 될까?
화력이 얼마나 거칠던지, 시전자인 엘릭도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뜰 정도였다.
분명히 자신이 주입한 건 흔히 입문자용으로 분류되는 1써클 마법, ‘불의 꽃’의 양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이건 못해도 ‘불기둥’에 못지않을 것 같은데…?’
1써클 정량으로 3써클 초급의 위력을 낸다니.
거기다 엘릭은 별다른 술식 풀이 없이, ‘불을 일으키겠다’는 이미지 구상만으로 마법 구현에 성공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원래의 마법 체계대로라면… 마나 스트림을 포착하고, 거기서 마나를 추출하여, 써클과 접목시킴으로써 마력으로 가공하고, 수식으로 풀이하면서 주문을 완성해야만 해.’
하지만 엘릭은 ‘주문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기본 과정을 전부 생략했다.
그게 전부 불필요한 것처럼.
‘드래곤 하트에 담긴 마력의 순도가 너무 맑고, 밀도도 너무 높아서 한 번 시도해본 건데… 이게 될 줄이야.’
엘릭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훨씬 적은 양의 마력으로도 마법을 빨리 전개할 수 있게 되었어.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로써 엘릭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그만의 장점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용의 둥지에서 깨달았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엘릭은 환희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의 둥지에서 엿보았던 용언 마법. 그것을 통해 새롭게 재조립한 마법적 지식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딴 걸 천 년이 지나서도 또 보게 될 줄이야…! 으으!』
메피스토는 엘릭을 보면서 옛 숙적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잖게 놀라 있었다.
‘한낱 인간이, 용언 마법을 재현한다고? 아무리 메르빙거라고 해도 뭔 말도 안 되는…!’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