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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8화 (8/405)

8화

재능을 깨우다

정신을 잃는 동안.

엘릭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마법사에 대한 꿈이었다.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노인인지 청년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건 로브의 등 쪽에 새겨진 문장이 가문의 인장이라는 것뿐.

다만, 그마저도 최근에 쓰는 것과 모양이 달랐다. 아주 오래전에 사용했을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엘릭은 어딘지 모르게 마법사의 등이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먹하면서도, 그리운 감정.

대체 누굴까?

그때, 마법사가 로브를 흩날리면서 병풍처럼 깎아 지르는 절벽의 끄트머리에 섰다.

저 멀리.

해가 떨어지며 노을이 깔린 하늘을 따라, 거대한 어둠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칠흑색의 어둠은 끈적끈적하게 뭉치다가 점차 괴물의 형상을 띠었으니.

엘릭은 단순히 그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을 느꼈다. 심장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언뜻 마족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마족… 아니, 마왕보다도 훨씬 상위의 존재인 것 같았다.

마신(魔神).

그렇게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마법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쾌활하게 웃으면서 오른손을 허공에다 휘둘렀다.

그러자 하늘에서부터 수백 마리의 용이 무리를 이루면서 나타나 급강하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왼손을 휘두르자, 지축이 흔들리면서 용과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멸종했다고 알려진 거인들이 뛰어와 도끼를 휘둘러댔다.

그들은 마치 마법사의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의지에 따라 마신과의 전투를 개시했으니.

하늘이 꺼지고, 벼락이 내리쳤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화염 폭풍이 일어나면서 대지를 몇 번씩이나 휘갈겨댔다.

마치 신화 속에서나 그려질 법한 대전투.

하지만 그러한 거친 전장 속에서도.

마법사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이 즐거워 죽겠다는 듯.

“와라!”

* * *

“우, 위험해!”

엘릭은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때, 아주 잠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푹신한 시트와 덜컹거리는 느낌. 그리고 익숙한 천장.

마차였다.

용의 둥지를 찾아 움직일 때 탔던 아카데미의 마차.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빠아악!

엘릭은 뒤통수를 거세게 가격하는 충격에 신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아악!”

“아악? 아아악이라고 했냐, 지금?”

고개를 돌린 곳.

션이 구겨진 종이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엘릭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프지? 그래, 아주 평생 아프게 만들어줄게. 그리고 위험하다고 했지? 좋아. 아주 여기서 인생을 위험하게 만들어줄게.”

션은 마침 옆에 두었던 방망이를 쥐고 냅다 휘둘렀다.

엘릭은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도망치기엔 마차 안이 너무 좁았고.

잠시 후, 시퍼렇게 멍든 눈을 달걀로 살살 문지르면서 여전히 씩씩대는 션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러니까, 네가 구조대를 이끌고 나를 구해줬다, 이 말이지?”

“그래. 이 새끼야.”

“야. 그래도 명색이 사람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건 좀….”

“뭐 새끼야?”

“…아, 아냐. 아무것도.”

엘릭은 션의 눈총을 받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더 말을 길게 이었다간 정말 션의 눈에서 불이 튈 것 같았으니까.

션은 그런 엘릭을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다 이런 또라이와 엮여서 이런 험한 꼴을 겪고 있는 건지.

엘릭이 탐사대를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난 뒤.

션은 곧장 아카데미가 아닌 가문으로 연락을 넣었다.

아카데미에는 베럭스 교수가 있으니, 어떻게 나설지를 짐작할 수 없어 먼저 가문의 위세를 빌릴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학장님이 구조대를 파견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엘릭의 생사도 불투명해질 테니까.’

물론, 베럭스 교수만큼이나 정치적인 계산을 앞세우는 가문을 움직이는 일 역시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카데미를 압박하고, 마탑을 직접 움직여주기까지 했다.

-사료로서의 가치도 풍부한 용의 둥지를 발견한 생도, 엘릭을 구한 가문!

이것만 하더라도 앞으로 얻게 될 명성은 아주 컸으니까.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구조 작업에서.

용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사실에 바짝 긴장한 마법사들과 함께 석문을 열었을 때.

션은 텅 비어있는 공동에서 홀로 쓰러져 있는 엘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는 얼마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지.

다행히 션은 엘릭이 의식만 잃었을 뿐, 크게 다친 곳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물론, 용과 용아병이 실종되어 그들을 연구할 생각에 들떠 있던 마법사들로서는 황당하기만 했지만.

여하튼.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지금과 같았다.

마차로 옮겨져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인 것이다.

“그럼 둥지는?”

엘릭은 션이 또 화를 낼까 싶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션은 여전히 엘릭이 영 못마땅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더 따지지 않고 답해주었다.

“마법사들이 꽤 많이 남았어.”

“하긴 다들 그만큼 보존이 잘 된 둥지는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발굴 작업이 한창 이뤄지고 있겠지.

엘릭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가장 중요한 기연은 자신이 얻긴 했다지만, 그래도 다른 사료들도 독식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아니. 접근은 아무도 못 하게 막아놨어.”

“뭐? 그게 무슨…?”

“발견자는 너고, 당연히 던전에 대한 소유권은 일차적으로 너에게 있잖아? 누구 좋으라고 그걸 그냥 내버려 둬?”

은둔한 마법사들의 연구소, ‘던전(Dungeon)’은 발견되는 즉시 일차적으로 발견자에게 귀속되도록 법령이 제정되어 있었다.

던전이 조금이라도 규모가 클 경우, 자신들이 원주인의 학통을 이었다며 주장하고 나서는 경우가 많아 교통정리가 좀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재는 이차적으로 각 학파가 발굴권 계약을 따내고, 여기서 채굴되는 물품의 일정 지분을 요구하는 편이었다.

던전을 온전히 발굴한다는 게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었으니까.

션은 바로 이러한 발굴권을 아무도 주장하지 못하게 차단해둔 것이다.

엘릭이 기절한 동안, 마탑이며 아카데미가 서로 돕겠답시고 나서서 숟가락을 얹으려 들 수 있었으니까.

‘내가 친구 하나는 정말 잘 뒀구나.’

엘릭은 그런 션의 배려에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션이 평상시 얼마나 자신의 가문을 멀리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위해서 직접 고개를 숙이고 나선 것이다.

“뭘 봐?”

“고마워서.”

“야.”

“응?”

“재수 없으니까 그딴 말 좀 하지 말래?”

“…….”

엘릭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역시 오늘도 션은 션다웠다.

그러다.

‘잠깐만.’

엘릭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베럭스 교수까지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원래 생각해둔 것도 있지만, 어째 잘 엮어본다면 더 재미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엘릭은 순간 비릿하게 웃었다.

그걸 보던 션이 다시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딴 식으로 웃지 마라. 너 그렇게 웃을 때마다 꼭 사고 하나씩 터지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나만 더 부탁하자.”

“안 들려, 안 들…!”

또 골치만 썩을 일에 휘말릴 것 같아 소리를 꽥꽥 질러댔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크게 다쳤다고 소문 내줄 수 있냐?”

* * *

마차는 아카데미가 아닌 황도(皇都)에 위치한 황립마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구조된 엘릭이 갑자기 위급해졌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엘릭 메르빙거 생도는 황도로 긴급히 이송되던 중에 둥지에서 입은 상처가 급작스럽게 재발하여… 이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희 의료진들은 추후의 상황을 지켜보는 중입니다.”

덕분에.

엘릭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베럭스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진과 마탑의 인사들, 그리고 소식을 듣고 황실에서 파견된 관료들까지 모두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지만.

용의 둥지에서처럼, 이번에도 션이 데리고 온 가문의 호위병들이 병원 인근을 철저하게 외부와 격리했다.

그래서 베럭스 교수 등은 쓴 물을 애써 삼키며 돌아가야 했으니.

그들의 얼굴에는 메르빙거의 적통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몇몇은 회심에 찬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럼 쉬십시오.”

션이 붙여두었던 시종이 방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후!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엘릭은 홀로 있던 방에서 안도에 찬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션이 병원을 지키는 이들은 특별히 믿을 수 있고, 입이 무거운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니 진실이 외부로 새어나갈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게을리할 수는 없겠지.

‘션과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저들 모두를 믿을 수는 없으니까.’

마도의 중 몇몇은 진맥을 핑계로 션 몰래 엘릭의 몸에다 마력을 은근슬쩍 흘려보내기도 했었고.

“【마력 감지】.”

순간, 그가 아주 낮게 읊조린 시동어와 함께 신체에서부터 희뿌연 서광이 떠올랐다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방안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마나 스캔.

시야가 닿는 범위 내에 마력을 고루 뿌려 혹시 주변에 숨어 있는 존재가 없는지 확인한 것이다.

그랬다.

엘릭은 여태 펼칠 수 없었던 마법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마력이 발산되는 진원지는 써클이 묶인다는 심장이 아닌 명치 부근이었다.

그곳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드래곤 하트가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마력을 마구 뿜어대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

고대 용종으로 하여금 절대적인 권능을 선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심장.

이것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엘릭은 기쁘기보다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런 행운이 언제까지 이뤄지리란 보장 따윈 없었다.

기연도 힘이 있어야만 지킬 수 있는 법.

션에게 다친 것으로 위장해달라고 했던 것도, 사실 드래곤 하트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여기에 마기까지 뒤섞였으니까, 이건 데몬 쥬얼이라고 해야 하려나?”

엘릭은 단단하게 뭉친 구슬을 감지하면서 쾌활하게 웃다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메피스토?”

그의 시선이 닿은 곳.

마왕 메피스토펠레스가 팔짱을 낀 채로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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