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메르빙거 가의 수치
그곳에는 용이 있었다.
거대한 몸집을 잔뜩 부풀린 채, 막강한 마력 폭풍을 흘려대면서 근엄한 투로 꼿꼿하게 서 있는 용.
조금 전까지 엘릭이 상대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위세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오만하고, 강렬했다.
만물을 압도하고, 지배할 것만 같은 절대자의 시선이 눈에 잔뜩 어려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맞은편에는 용에 비하면 한없이 왜소한 체구를 지닌 인간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
그와 대조적으로 창백한 안색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용이 휘두른 앞발에 짓눌려 사라질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이리로 달려오는 용이 가소롭기라도 하다는 듯이.
엘릭은 한순간,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왕!’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妖)와 괴(怪), 그리고 인외(人外)의 종주.
순리를 추구하는 용종과도 천적 관계라 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 때문에 부딪히고 있는 모양인데….
문제가 있다면.
‘대체 누구지?’
마왕의 정체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엘릭은 마족의 계보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통달해 있었다.
용의 사멸 이래. 메르빙거 가가 천년도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마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명성을 떨쳐왔기 때문이었다.
30년 전. 가문의 명성을 가장 드높였지만, 끝내 몰락으로 몰고 간 대마전쟁(對魔戰爭)의 주역이 그들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그런데 알아보지 못한다고?
순간, 불안감이 들고 말았다.
‘설마?’
어쩌면.
여태껏 용이 남긴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안배가, 사실은 용이 남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하지만 엘릭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과 마왕의 전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고.
땅을 가르면서 불길이 치솟고, 구름이 내려앉으면서 얼음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등,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격전이 있고 난 뒤.
마왕이 거대한 창으로 용의 머리를 관통하는 것이 보였다.
‘……!’
엘릭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야만 했다.
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으니까.
용은 어떻게든 일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결국 모든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왕은 의기양양하게 그러한 용의 머리를 지그시 밟고 올라섰다.
하하하.
그렇게 한껏 웃음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광기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정확하게 엘릭을 주시하고 있었다.
『너로구나. 나의 이 지긋지긋한 봉인을 풀어줄 새로운 그릇이!』
* * *
낭패였다.
엘릭은 몸이 한순간 굳는 것 같았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어.’
왜 여태껏 못했던 걸까.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마도 그건 용의 기연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것이리라.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빠르게 재생되었다.
죽은 용에게서 새어 나온 마력이 한순간 쇠사슬로 변하여 마왕의 손발을 꽁꽁 묶고, 허공에서 짙은 어둠이 피어나면서 마왕을 잡아먹기 위해 으르렁거렸다.
용이 자신의 영혼을 제물 삼아 마왕에게 강한 저주를 덧씌운 것이다.
무저갱으로의 봉인.
그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는 어둠의 밑바닥에 마왕을 처넣어 다시는 뛰쳐나올 수 없도록 만들려 하고 있었다.
마왕은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아득바득거렸지만, 그럴수록 쇠사슬은 더 빳빳해지면서 마왕을 더더욱 거세게 구속하였고.
결국, 몸의 절반 이상이 무저갱에 빠져들었을 때,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무저갱에 처박힐 바에는 용과 함께 묻히겠노라고 결심한 것이다.
츠츠츠-
그래서 마왕은 자신의 몸뚱이를 갈가리 찢었다. 그의 사지가 검은 마기로 변해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안개는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용을 관통하고 있던 창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스로를 창과 용의 사체에다 봉인시킴으로써, 무저갱의 압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갈 곳을 잃은 쇠사슬은 대신에 창과 용의 사체를 긴밀하게 엮었다.
절대 둘이 분리되지 않도록.
마왕이 제멋대로 봉인을 풀고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리고.
천년도 넘는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여기, 이제야 겨우 네가 나타났구나!』
마왕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자신을 온전히 옮겨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나타나기를.
하지만 그동안 이곳을 발견한 인간 중에서 그의 마음에 찬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끈기를 갖고 기다렸고,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신품이라니! 좋구나, 아주 좋아!』
거기다 일이 한 번 풀리려니 계속 잘 풀리려는 건지, 이번 그릇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나 수련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만족에 찬 마왕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제길…!’
엘릭은 어떻게든 마왕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도저히 몸이 꿈쩍하질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몸이 단단히 속박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 빛무리가 어스름하게 피어나더니, 곧 자신의 양 팔다리에 단단히 묶인 쇠사슬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으로 마왕이 나타났다.
입가에 냉소를 잔뜩 머금고서.
마치 엘릭의 몸을 품평하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너는 이 메피스토펠레스와 하나가 되어 같이 세상을 오시하게 될 테니.』
‘메피스토펠레스, 라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
엘릭은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입도 열리지 않았다.
마왕 메피스토펠레스가 엘릭의 정수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럼 이제 나의 그릇이 되어라, 인간이여.』
그 말이 끝난 순간.
츠츠츠-
마왕의 신체가 부서지더니, 고스란히 엘릭에게로 스며들었다.
눈, 코, 입. 모공까지, 구멍이라는 모든 구멍 속으로 마왕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쿠드득, 쿠득!
“읍! 읍읍!”
엘릭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너무나 많은 양의 기운이 체내로 쏟아지고 있었다.
마왕을 구성하고 있던 마기뿐만 아니라, 용이 그동안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 섞여 있던 용의 마력까지!
당연히 한낱 인간의 육체로는 전부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엘릭의 육체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골격이 뒤틀렸다.
혈관이 확장되고, 세맥이 개통됐다.
모공을 따라 지난 이십 년 동안 몸 안에 축적되었던 노폐물이 모조리 빠져나오고, 마기와 용의 마력이 지나간 자리로 마나 로드(Mana Road)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마나 로드도 한꺼번에 그 많은 마력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몇 번이나 부서지고 새롭게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더 굵어지고, 개수가 많아졌다. 그러다 다발이 되어 서로 비비 꼬이기까지 했으니.
덩달아 오랜 골방 공부로 연약했던 육체도 탄탄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이 전부 강제적으로 이뤄졌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소리라도 지른다면 그나마 나을 것 같았지만, 비명도 뱉어지지 않았다.
『하하하. 샤이나크, 그놈은 한평생 나를 괴롭힐 생각밖에 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
마왕은 그런 엘릭을 보면서 크게 기뻐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일이 순조롭게 풀려간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렇게 되도록 영혼이 찢기지 않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마왕은 그만큼 그릇의 질이 좋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엘릭의 두뇌 쪽으로 움직였다.
엘릭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허물고, 그 자리를 자신의 자아로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니. 이게 무슨…?』
처음에 의기양양했던 것과 달리, 곧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도저히 침범이 이뤄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의지의 방벽이 정신세계를 보호하고 있었다.
‘네 뜻대로 둘 거 같냐, 개새끼야?’
엘릭이 마왕에게로 으르렁거렸다.
『말도 안 되는…!』
마왕은 기가 찼다. 한낱 인간 따위가 자신을 가로막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엘릭은 흡수된 용의 마력을 움직여 머리 부위를 보호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인간이 용의 마력을 다룬다고?
그것도 흡수된 지 단 몇 분밖에 안 된 것을?
원래대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문제는 엘릭이 이미 둥지에서 용언 마법에 대해서 얼추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마법은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단순히 마력을 움직이는 수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거기다 심안을 통해서, 마나 로드를 타고 움직이는 마왕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또라이 같은 놈…!』
하지만 그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로 성공해내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네가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질이 좋았던 모양이구나.』
마왕은 분노에 억눌린 목소리를 내뱉었지만.
곧 한 줄기 조소를 흘려보냈다.
『하지만. 글쎄, 과연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무리 엘릭이 초인적인 정신력을 갖고 있어도, 자신과는 다르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엘릭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떻게든 방법… 방법을 찾아야만 해!’
방법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션이라면 분명히 금방 구조대를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
그러던 그때.
『언제가 될 진 알 수 없으나, 언젠가 우리의 목소리가 먼 훗날의 후손에게 닿을 수 있기를.』
기적이 일어났다.
* * *
그 시각, 현실 세계.
화아아!
엘릭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 마도경식에서 다시 한번 더 밝은 빛이 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새벽에 동이 트면서 어둠을 물리칠 때를 보는 듯한 서광(曙光)과 같았으니.
처음 엘릭이 심안을 열었을 때처럼, 여태껏 가보에 숨겨져 있던 비밀 기능이 작동한 것이다.
파아앗!
마도경식 위로, 뜻을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속속들이 튀어 나왔다.
그것은 마치 고대에 쓰였다는 문자 같기도 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기호나 문장, 혹은 도식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문양들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엘릭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가, 잘게 부서지면서 정수리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우리들의 유지를, 먼 훗날의 후손이 온전히 계승할 수 있기를.』
누가 남겼을지 모를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절대 거스를 수 없을 구속력이 담겨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깊은 마법적 수식을 담은 언령(言靈).
『우리는 본래 마도의 궁극을 좇고자 했던 학자 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더 큰 힘을 갈구한 나머지 마(魔)에 물들며 세상에 커다란 폐해를 끼쳤었고.』
『뒤늦게나마 그 잘못을 깨우쳐,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고 지난날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지고,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
『마를 박멸하는 것만이, 우리 가문에 남겨진 사명이니라.』
『하지만 마는 어디서나 피어나 완전히 사라질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그 마를 잡아먹고 또 잡아먹는다면 언젠가 자취를 감추리라. 그리한다면 언젠가 진정한 마도학이 이 땅에 꽃피울 수 있으리라.』
마치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마도경식이 가장 밝은 빛을 내뿜다가 사그라졌다.
그리고.
번쩍!
여태 감겨 있던 엘릭의 눈이 번뜩 뜨였다.
눈가 위로 짙은 광망이 치솟아 사위를 갈랐다.
『바로 이곳에서, 정해진 안배에 따라 첫 번째 마를 삼키겠노라.』
그 순간.
츠츠츠-
마왕 메피스토펠레스가 깃들어있던 창이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폭삭 무너졌다.
그리고 가루들이 엘릭의 오른손을 타고 올라오면서 손등에 이상한 문신을 촘촘하게 각인시켰다.
마치 먹잇감을 향해 흉포한 이빨을 들이대려는 늑대를 연상케 하는 문신.
얼마나 생생한지, 당장이라도 늑대가 손등 위로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에 다른 쪽 손에서는 용의 사체가 잘게 부서지면서 팔 전체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
털썩!
엘릭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