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메르빙거 가의 수치
‘그러니 이번에도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해답. 해답을 찾자.’
만약 이것이 그의 예상과 달리 시험이 아니라면, 진즉에 그들은 저항할 새도 없이 죽었어야 옳았다.
션은 이미 이 둥지의 주인이 용왕 급이라 판단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인즉, 생전에 녀석이 지녔던 힘이 신격에 버금간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만한 녀석이라면 침입자들을 입김 한 번으로 전부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둥지의 주인은 그러질 못했고, 깨어나서도 굶주린 짐승처럼 날뛰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이미 이성 따윈 남지 않아 본능대로만 움직인다는 뜻.
그래서 엘릭은 감각에 집중했다.
둥지라는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마법 구조들을 확인해야만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친화력.
감응도.
마나를 감지하고,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재능만큼은 타고났고.
무의식의 지평이 확장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체에 잔잔하게 남아있는 여운이 오감의 예민도를 극도로 올려놓은 상태였다.
거기다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극도로 치달은 집중력까지 더해지면서, 한순간 뇌의 한쪽이 쿵 하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느끼지 못했다.
파아아!
그 순간, 목에 걸었던 펜던트-마도경식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콰직!
마치 머리 한편에서 그런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느낌.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동시에 엘릭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확 하고 반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세상을 구성하고 있던 겉가죽을 강제로 벗겨 그 속에 있던 내용물들을 보는 듯했다.
“…!”
모든 명암과 색채가 사라지고, 사물들이 온통 굵고 엷은 선들로만 남아있었다.
결.
보통 생명체가 인지할 수 있는 세상, 그 이면 속에 숨어 있다는 본래의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심안(心眼)이 열린 순간이었다.
‘아!’
심안은 진리를 통찰한다는 초능력답게 너무나 많은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그건 엘릭에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반면에 이대로 있다간 뇌가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운 두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 속.
엘릭은 악착같이 살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좌로 13보! 직진으로 7보!”
엘릭은 마법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지점들, 즉, 결이 뒤엉키는 부분들만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것이, 엘릭에게는 ‘길’로 보였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
“엘릭의 말에 따르십시오! 서둘러요!”
션은 엘릭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도 어떤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라 예상하고 서둘러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 역시 엘릭의 천재성을 몇 번씩이나 보았기 때문에 전혀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이동을 개시했다.
“우로 8보!”
“직진!”
“멈추세요, 4초!”
“좌측 15도 각도로 12보!”
엘릭이 소리칠 때마다 호위병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용아병의 포위망을 통과하고, 용의 숨결이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자칫 걸음이 반보라도 삐끗거리는 순간, 모두가 쓸려나갈 수 있는 위험한 줄타기에서 그들은 등골을 바짝 세워야만 했고.
저쪽에서 용의 시선을 끌어주던 병사들도 착실하게 모여들면서 일행들은 일제히 석문이 있는 부근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사, 살았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일행이 모두 석문을 통과하는 순간, 용과 용아병은 마치 보이지 않는 장막에 부딪힌 것처럼 이동이 가로막혔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밖으로 나올 태세라, 션은 서둘러서 동굴을 마저 빠져나가고자 했다.
“저놈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계속 뛰어요, 어서!”
마법사들은 ‘신속(迅速)’이나 ‘민첩 강화’처럼 몸놀림을 날렵하게 해 주는 마법들을 잇달아 터뜨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굴 입구 쪽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션은 뒤늦게 생존자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엘릭…? 엘릭! 너 이 새꺄, 뭐 하는 거야!”
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석문 쪽에 엘릭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고 간담이 철렁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릭은 이쪽을 슬쩍 뒤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먼. 저. 가.
굉음에 파묻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엘릭의 입 모양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빛은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단단했다.
마치 처음 유급 판정을 받았을 때,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와중에도 끝까지 계속 마도학을 공부해 보겠노라고 말하던 그때처럼.
그 말을 끝으로. 엘릭이 공동 안쪽으로 들어가고.
쿵!
기다렸다는 듯이 석문이 닫혔다.
“이런 미친 새끼야아아!”
션의 고함만이 남아 메아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하여간 욕설 하나는 찰지다니까.’
엘릭은 석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션의 메아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
그가 걱정하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엘릭으로서도 사실 어쩔 수가 없었다.
석문의 투명막이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심안을 통해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누구 한 명만큼은 남아서 시선을 끌어줘야만 했다.
그래서.
엘릭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
리번이나 다른 놈들 목숨 따윈 알 바가 아니었지만, 션만큼은 달랐다. 그는 자신과 달리 엘리트인 데다가, 앞으로도 세상에 크게 이바지할 재목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을 유일하게 인정해준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녀석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더군다나.
엘릭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끝을 알고 싶었다.
정체불명의 어느 누군가가 남겼을, 이 시험의 끝을.
“마지막은 뭐냐?”
엘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타닥!
여태까지 한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용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 * *
“이 새끼, 대체 뭘 하려고…!”
션은 양손이 덜덜 떨리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 꼭 닫힌 석문이 그의 가슴을 강하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션! 뭐해! 서둘러!”
“이대로 있다간 정말 다 죽는다고!”
하지만 다른 동기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션의 등을 억지로 밀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엘릭을 찾으러 갔다간, 저놈처럼 여기 있는 사람들까지 전부 전멸이라고!”
리번이 다급한 어조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황하는 눈동자가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광기로 가득했다.
그 눈을 본 순간, 션은 한순간 뜨거웠던 머리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래.
역시 이놈들이 문제였다.
애당초 이들이 억지로 탐사대에 합류하지만 않았어도, 엘릭이 저곳에 남을 일은 없었을 것을.
션은 그놈들을 뿌리치고 석문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들 옆으로 동공이 잘게 떨리는 다른 대원들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이들이 무슨 문제가 있겠어.’
엘릭은 이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 바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요, 용아병이 내려온다!”
그때, 누군가가 통로의 천장을 뚫고 조금씩 머리를 드러내는 용아병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션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엘릭이 없는 이상, 이 탐사대의 대장은 자신이었다.
대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만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갑시다.”
그리고 욕지기를 도로 삼키면서 앞장서서 뛰기 시작했다.
리번과 일행들이 다급하게 뒤따랐다.
‘엘릭!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가문의 장로들이라도 데리고 올 테니까. 제발!’
션의 눈에는 온갖 감정이 격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 *
“【발동】.”
엘릭은 용에게로 뛰어가면서 여태껏 품속에 숨겨두고 있던 붉은 구슬을 꺼냈다.
게헨나의 숨결.
우스던 메르빙거에 이은 아카데미의 2대 총장, ‘요하나 슈미트’가 직접 악마와의 계약으로 구천지옥을 방문해서 담았다는 유황불의 봉인구(封印具).
시동어를 외우고 나면, 봉인구의 마개가 열리면서 안쪽에 있던 유황불이 잔뜩 쏟아지게 된다.
한 번 옮겨붙으면 대상이 가루가 될 때까지 활활 타오르며, 일반적인 물로는 절대 끌 수도 없었다.
핑-
엘릭은 한순간 세상이 도는 듯한 현기증을 강하게 받아야만 했다.
게헨나의 숨결이 발동되기 위해 엘릭의 생명력을 흡수한 것이다.
남들이 봤을 때는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엘릭은 다행히 철저한 계산 하에 약 5년 치의 수명만을 헌납했을 뿐이었다.
화아악!
공동 안쪽이 삽시간에 뜨거운 불길로 가득 차버렸다.
화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용아병들은 도중에 불의 파도에 휩쓸려 저만치 튕겨나야만 했다.
크오오오!
그나마 용은 권속들과 달리 밀려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역시나 불바다 속에 단단히 갇힌 채로 비명을 질러댔다.
크오, 크오, 크오오!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 머리를 바닥에 들이받고, 꼬리로 벽면을 후려쳤다.
화르르륵!
그리고 그러한 불길 사이로, 엘릭이 달렸다.
유황불이 시전자도 집어삼키려 들었지만.
“【개방】.”
엘릭은 또 다른 4성급 마도구를 발동시키고 있었다.
촤촤촤!
새하얀 빛무리가 터져 나오더니, 우윳빛 섬광이 차츰 팔다리를 따라 번져가면서 단단한 갑옷 형태가 되었다.
창공주갑.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은 오랜 과거, 하늘의 신이 자신을 대신해 복음행(福音行)을 다니는 사도에게 특별히 내려주었다던 성유물(聖遺物)을 본 따 만든 복제품.
물리 공격을 비롯해 웬만한 원소 마법에 있어서는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황불은 엘릭의 털끝 하나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이것은 시험이야. 도전자로 하여금 어떤 덕목과 기량을 시험하기 위해 누군가가 만든 시험.’
그렇다면 설계자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하고, 해답을 내놔야 한다.
‘도전자를 그냥 헛되이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을 거야. 마도사 급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이라면 그냥 어쩌지 못하고 죽어버릴 테니까. 그런 이라고 해도 재능이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게 설계해뒀겠지.’
그만한 내용이 뭐가 있을까?
아주 간단했다.
‘창.’
파앗!
엘릭은 용의 앞까지 다다르자마자 땅을 거세게 박찼다. 그러자 창공주갑 안에 새겨져 있던 마법이 일부 발동하면서 몸을 날렵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치 등에 날개라도 단 것처럼 단숨에 위로 솟구쳤다.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용의 거대한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녀석이 크게 포효하면서 아가리를 뒤로 젖혔다.
마치 자신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엘릭을 당장 물어 죽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 창은 용의 후두부를 관통해서 늑골까지 이어져 있어. 그렇다는 건 여기에 어떤 장치가 있단 뜻이니…!’
물론, 자신의 가정이 틀린다면 여기서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예상과 달리 어떤 의도가 담긴 시험이 아니라, 그냥 유희로 남겨진 장난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자신의 판단을 굳게 믿기로 했다.
어차피 이대로 아카데미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그의 운명은 불에 보듯 뻔한 것이니.
그냥 처음에 이슈 메이커나 되다가, 머지않아 곧 잠잠해지고 결국 잊히고 말 테지.
결국 마법을 직접 쓰지 못한다면, 끽해야 어느 산골에서 연구원이나 잘 풀리더라도 마도학자가 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엘릭이 바라는 건 고작 그런 게 아니었다.
몰락하고 만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만 했다.
겉으로는 영웅이니 뭐니 하면서 추앙을 해도, 결국 아무렇지 않게 차갑게 웃으며 등 돌리고 말았던 저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야만 했다.
영웅이라 추켜세우면서도 가문이 몰락하도록 방조하고, 또한 그렇게 유도했던 황실.
가문의 유산을 호시탐탐 가로채기 바빴던 마탑.
이리 떼처럼 굴던 중앙 귀족.
세가 기울자 미련 없이 등을 돌렸던 옛 봉신 가문들.
그리고 가신, 문도, 사형제들….
그들에게 소리쳐야 했다.
당신들의 선택은 잘못되었노라고.
우리는, 그리고 나는, 당당히 여기에 있노라고!
‘이것은 분명히 용이 남긴 안배야. 보상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해.’
엘릭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절대 그저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거.’
엘릭은 이를 악물면서 용의 두개골 위로 우뚝 서 있는 창 쪽으로 손을 뻗쳤고.
파아앗!
순간, 창끝에서부터 눈부신 섬광이 터졌다.
이대로 눈이 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은 섬광.
그리고.
그어어어-
쿠쿠쿵!
용이 힘을 잃고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손등 위로 무언가가 따끔거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엘릭의 의식도 똑같이 꺼졌다.
* * *
엘릭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여긴, 어디지?’
그는 새하얗게 된 백색 세상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본 순간, 시야가 확 뒤집히면서 여러 개의 영상이 잇달아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