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메르빙거 가의 수치
황홀은 무의식의 지평을 넓힌다.
세상을 보는 눈을 달라지게 하고, 사고를 트이게 하여 명민한 오성을 가져다준다.
또한, 닫혀 있던 감각을 열게 만들어 더 많은 마나를 쌓을 수 있게 만들기도 하니.
흔히 마법사들이 대게 ‘마도사’로 분류되는 6써클로 넘어가기 위해 황홀을 추구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기연을 얻은 셈이었다.
‘이것들을 내가 펼쳐볼 수 있다면……!’
그렇기에 엘릭은 더더욱 마법에 대한 속 타는 갈증을 느껴야만 했다.
제아무리 기연을 얻으면 뭘 할까.
전혀 쓰질 못하는데.
부르르!
꽉 쥔 주먹 위로 핏대가 단단히 올라오던 그때.
“도, 도착했다!”
선두에서 길을 개척하던 대원이 크게 소리를 쳤다.
엘릭도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석문을 볼 수 있었다.
“너무 큰데.”
“이걸 대체 어떻게 열지?”
족히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이 너머에 둥지의 공동이 있을 거란 생각에 탐사대는 어떻게든 석문을 열 방법을 찾고자 했다.
힘으로 밀어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들지도 않았다.
검주 급이 아니고서야 엄두도 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도통 좋은 의견이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봐도 여기선 방법이 없을 것 같으니, 일단 한발 물러서는 건 어떨까?”
그러다 리번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사실 그는 한창 조바심이 난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그도 마법사로서의 호기심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지만, 베럭스 교수가 남긴 명령을 생각해본다면 어떻게든 엘릭의 공적을 깎아야만 했다.
“그래. 이미 사전 탐사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까, 아카데미에 연락을 넣자.”
“아마 이 소식을 들으시면 교수님들은 물론이고, 마탑에서도 부리나케 사람들을 파견할걸? 이건 희대의 대발견이라고!”
“맞아. 그러니까 이만 물러나자.”
다른 연구원이며 탐사대원들도 그제야 리번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여론을 그쪽으로 돌리고자 했다.
션이 그런 녀석들에게 뭐라고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 했지만.
쿠쿠쿵!
별안간 엄청난 진동과 함께 석문이 아주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행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고.
“다들 뭐해? 안 들어가고?”
그 앞에 있던 엘릭이 시큰둥하게 턱짓을 하면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
“…….”
“…….”
대체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탐사대원들은 이미 비슷한 경험을 몇 번이나 했었기에 별반 크게 더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 닫고, 엘릭의 뒤만 따를 뿐.
* * *
‘술식의 해를 찾아서 역산을 시도해본 거긴 하지만. 그래도 바로 이렇게 풀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아주 잠깐이지만 용언 마법이 준 깨달음을 바탕으로 석문에 설치된 마력구동회로에 손을 댔을 뿐이건만.
너무나 쉽게 석문이 열리자, 도리어 엘릭이 얼떨떨할 정도였다.
뭐랄까.
마치 어렸을 적에 산수를 배우고 나서 갑자기 쪽지 시험을 봤는데, 만점을 맞은 듯한 느낌?
‘잠깐.’
순간, 엘릭은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듯 정신이 확 깼다.
‘시험이라고?’
그동안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둥지 곳곳에 설치된 마법들은 뭔가 하나같이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용언 마법이라고 해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어. 그러면서도 작동이 중단된 부분도 많았고. 마치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중단된 것 같은…….’
엘릭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탐사대는 공동 전체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보, 보물산이다!”
“여기는 서고야. 이렇게나 많은 양의 고대 서적들이 온전하게 있다니…! 이, 잊혀진 역사와 관련된 것들도 있는 것 같은데?”
“2층에는 실험실도 있어! 이건 멸종되었다던 빅 맘모스의 박제인가?”
“여긴 무기고 같아. 마도구가 이렇게나 많을 수가 있다니. 허, 허허!”
거대한 너비를 자랑하는 공동을 중심으로.
벽면에는 온갖 종류의 벽화와 조각이 괴괴하게 놓여 있었고, 여러 계단과 통로를 따라 구획이 각각 분할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온갖 금은보석이 산을 이룬 한 창고가 있었고.
방대한 양의 서책과 양피지, 죽간 따위의 자료들을 모아 놓은 서고, 갖가지 플라스크와 실험체들이 놓인 실험실, 용이 모아놓거나 제작한 것 같은 마도구가 보관된 무기고 등.
학계가 알게 된다면 몇 번씩이나 역사책을 수정해야 할 것 온전한 형태의 고대 자료들이 대량으로 쏟아졌다.
그야말로 대발견이었다.
“엘릭! 해냈어! 우린 해냈다고!”
션은 기쁨에 겨운 나머지 엘릭을 와락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베럭스 교수의 방해와 여러 사람의 손가락질이 있었지만, 결국 엘릭이 해내고 말았다는 사실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다.
엘릭도 친구가 그래서야 더 깊게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찝찝한 부분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유급은 이로써 완전히 철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이 정도 대발견이 가질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엘릭 메르빙거’라는 이름은 학계나 정계, 심지어 사교계에서도 단연 화두가 될 게 분명했다.
몰락한 메르빙거 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이 이상 수치가 아닌 동량이 되는 것이다!
엘릭도 션의 마음을 알고 살짝 웃으려는데.
“여기 숨겨진 공동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방을 일일이 탐사하던 대원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무언가 잔뜩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였기에 엘릭과 션은 다급히 그쪽으로 달려갔고.
“이럴 수가……!”
“허!”
“요, 용이 이렇게 있다니!”
그들은 둥지의 원주인이라고 생각이 드는 용의 사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장장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몸체.
부리부리한 눈이며 발톱, 몸을 감싸고 있는 날개와 피막. 그리고 얼굴이 비칠 것 같은 비늘까지.
당장이라도 일어나 꿈틀거릴 것 같은 생생한 모습을 한 용은 마치 거인이 내리꽂은 듯한 장창에 머리가 꿰뚫린 채로, 지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용이 이렇게 화석이 아닌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바.
탐사대원들의 눈이 광기로 일렁였다.
“저거… 크기만 따지면 족히 4천 년 이상은 묵었을 것 같은데?”
4천 년이면 거의 ‘용왕’ 급이잖아? 션이 기가 차다는 듯이 그렇게 혼잣말을 하는 사이.
엘릭은 용의 사체에 다가가는 일행들을 보면서 불현듯 위화감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
시험.
“조심하…!”
엘릭이 뭐라고 소리를 치려는 순간.
감겨 있던 용의 눈이 뜨였다.
호박(琥珀)처럼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 위로.
놀란 얼굴이 된 탐사대원들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그리고.
콰아앙!
갑자기 쏟아진 불길에 모조리 녹아 사라졌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 남은 건, 그을린 자국과 희뿌연 매연, 그리고 그 사이로 흩날리는 재뿐.
“……!”
“……!”
“……!”
운 좋게 불길의 범위에 놓여 있지 않았던 일행들은 하나같이 잔뜩 굳어버리고 말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고에 머릿속이 하얗게 지새고 만 것이다.
“뭐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그때, 엘릭이 다급하게 내지른 소리에 일행들은 일제히 정신을 차리고 한 자리로 모여들었다.
마법사로 살다 보면 온갖 기괴한 일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마법이라는 학문 자체가 신비와 기적을 탐구하기 때문에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현상들과 몇 번이고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에서는 그러한 돌발 상황에 대비해 생도들에게 대응 메뉴얼을 제공하고, 기초 군사 훈련도 병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일행들은 몸에 밴 버릇대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건 보조하러 온 탐사대원들도 마찬가지.
마법사들이 중앙으로 집결하고, 등에 방패를 들고 있던 이들이 그들의 주변을 둘러싸면서 방진을 형성했다.
그리고 창과 칼을 패용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용 쪽으로 돌진했다.
용의 시선을 끌어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거나, 탈출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데릭이… 사이먼이 죽다니….”
“대, 대체 용이 어떻게 사, 살아있는 거지?”
“젠장, 젠장, 젠장!”
마법사들은 공포에 단단히 젖어 몸을 덜덜 떨면서도, 욕지기를 내뱉기에 바빴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이 눈앞에서 죽고 만 것이니.
특히 연구원 자격으로 참여한 마법사 다섯 명 중 세 명이 죽어버린 탓에 전력 면의 손실도 너무 컸다.
크롸롸롸!
그때, 용이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
동굴이 울렸다.
천장이 떨리고, 공기가 무거워졌다.
일행들은 몸이 바짝 굳다 못해 심장까지 쪼그라드는 어마어마한 공포심을 맛봐야만 했다.
드래곤 피어(Dragon Fear).
일정한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질겁하게 만들고, 존재감을 각인시켜 전술적 우위를 점한다는 용의 습성.
여태껏 학술 논문으로만 접했던 내용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플레어라도 날려!”
이번에도 먼저 일행들을 일깨운 건 엘릭이었다.
“제기랄! 【불에 젖는 섬광】!”
“【플레어】!”
“【플레어】…!”
“【너울대는 화도(火濤)】!”
션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일제히 자신들이 발동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 마법들을 퍼부어댔다.
하지만 마법은 용에게 닿기도 전에 투명한 막에 부딪혀 흩어지고 말았다.
애당초 그들 정도로 용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었다.
쿵, 쿵, 쿵!
느릿한 걸음으로, 용이 이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만한 거체가 움직이다 보니 마치 동산이라도 움직이는 듯한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다.
병사들은 그런 용을 가로막고자 용감하게 나섰지만, 불길로 이글거리는 숨결과 공간을 마구잡이로 찢는 꼬리 채찍질에 모조리 쓸려나갔다.
“탐사대, 전원 후퇴한다!”
결국 이대로는 전멸하고 말겠다는 생각에 션이 다급하게 소리쳤고, 호위병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
일행 중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친 목소리에 일제히 시선이 천장 쪽으로 향했다.
“저, 저건 또 뭐야?”
종유석 사이사이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단한 흑색 뼈로 된 창과 방패, 그리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
용아병.
역시나 동화 속에서 용의 둥지를 지킨다고 알려진 가디언이었다.
키에에엑!
키륵! 키르륵!
용아병들은 방진 위로 우수수 쏟아지면서 호위병들에게로 창을 날렸다.
“크아악!”
“아악!”
“내 눈, 내 눈! 컥…!”
호위병들은 일제히 방패를 위로 올렸지만, 그보다 먼저 떨어진 용아병들이 휘두른 창에 줄줄이 꿰어나갔다.
가까스로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방진 사이사이로 떨어진 용아병들도 있었으니.
그런 녀석들이 턱뼈를 달그락거리면서 뼈로 된 창을 휘둘러대니, 진형도 삽시간에 와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뒤에 빚어지는 것은 학살이었다.
공포 같은 감정 따윈 없는 용아병들의 틈에 둘러싸여서야 저항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로! 뒤로 물러나! 어서!”
그래도 호위병들은 어떻게든 진형을 유지하고자 하면서 계속 후퇴를 시도했다. 그럴수록 쏟아지는 용아병의 숫자도 계속 늘어났다.
‘방법. 방법을 생각해야 해…!’
엘릭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면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시험이야.’
엘릭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둥지를 찾고, 공동의 석문을 열고, 날뛰는 용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까지 전부 하나로 연결되는 시험!’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