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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화 (2/405)

2화

메르빙거 가의 수치

“…….”

션은 순간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아무도 이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말조심해. 탐사대가 괜히 발족한 줄 알아? 학계에서 수십, 수백 개의 논문을 발제하고, 토론하고, 검수한 다음 가능성을 재단한 거야.”

“알아.”

“아는 놈이 그렇게 말해? 여기에?”

목소리를 높였던 션이 재빨리 소곤거렸다.

“여기에 교수가 몇이나 참여했는지 알아? 넌 지금 그 꼰대들을 죄다 건드린 거라고.”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엘릭이 어깨를 으쓱하자 션이 미간을 좁혔다.

엘릭의 천재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석학들 수백 명이 수년에 걸친 연구를 두고 선을 긋는 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설명해봐.”

엘릭이 기다렸다는 듯이 계획서 안에 첨부되어 있던 지도의 한 지점을 검지로 짚었다.

“여기 이 지점. 지층과 지층이 부딪쳐서 쪼개진 균열이야. 아래로 뚝 떨어지는 절벽이라고 할 수 있지. 지질 조사에서도 만들어진 지 최소 십만 년 이상이 되었다고 하니, 확실히 용의 둥지가 있다면 이곳뿐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두 지층이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막대한 마나.

그것이 수천 년의 시간 동안 균열 사이에 내려앉아 응집됐을 거다.

이론상의 근거는 충분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균열은 지상보다 훨씬 낮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게.

-뜨거운 곳에서 찬 곳으로.

해가 전혀 닿질 않으니, 지상보다도 훨씬 차가울 테지.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갈라진 틈새의 끝은 아주 좁을 수밖에 없었다.

용의 흔적을 발견한 마도학자들이 모든 가설을 토대로 불가능한 것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했고, 마침내 한 곳만이 남았다.

그래서 선언된 것이다.

여기에 용의 둥지가 있다고.

“하지만 이 틈새는 마나 스트림의 법칙을 어기는 요소가 하나 있어.”

“말 질질 끌지 마.”

“지대가 뜨거워.”

션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뭐? 여긴 화산지대가 없어. 햇빛도 닿지 않는 지하 300미터라고.”

“하지만 화산의 용암 지대에서 출발한, 아주 뜨거운 지하수가 흐르지.”

“화산? 대체 여기에 어디에 그런 게 있다는 거야?”

엘릭이 지도의 한 곳을 찍었다.

션이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엘릭이 가리킨 곳은 대륙 남단에 위치한 용의 둥지에서도 아주 먼 북방, 금역(禁域)인 ‘불의 고리지대’에 위치한 아크란 화산이었다.

엘릭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크란 화산에서 발원한 물은 ‘불의 고리지대’의 독특한 지형 때문에 바다를 거치지 않고 대륙 아래로 관통해. 이쪽 동쪽 해안 일대에서 조성된 마을에서 식수원으로 사용되는 용천혈이 그중 일부고. 그래서…….”

엘릭이 지형을 차례로 짚어줄 때마다, 션의 시선도 똑같이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조금씩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니 이런 모든 조건을 고려했을 때, 지하수가 잔뜩 엉킨 채로 내려갈 수 있는 구획은 여기밖에 없다고.”

엘릭은 펜으로 용의 둥지가 있는 구획의 주변에다 크게 원을 그렸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알겠지만, 이 근방에서 용의 마력 파장을 채취하는 것도 성공했었다고.”

반박하듯이 내뱉는 션의 말에 엘릭이 피식 웃었다.

“난 둥지가 없을 거라고 안 했는데?”

“뭐?”

“있을 거야. 분명히. 어쨌거나 전체적으로 마나가 응집될 수밖에 없는 영소(靈所)니까. 여긴.”

“그럼 넌 둥지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 건데?”

“여기.”

엘릭은 원래 장소보다 서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어느 이름 없는 동굴을 가리켰다.

“분명히 여기에 있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했다.

* * *

“…젠장. 이걸 대체 꼰대한테 어떻게 말하지?”

션은 연구소로 돌아가는 내내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어야만 했다.

엘릭이 알려준 내용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지정해준 장소에 진짜 용의 둥지가 있을 거란 사실까지도.

그래서 더 문제였다.

지금부터 교수를 상대해야 하는 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으니까.

션의 지도 교수는 차기 총장으로까지 거론되는 권력가.

연구보다 정치놀음을 좋아하고, 논문보다 감투를 사랑했다.

션을 휘하에 억지로 끌어온 것도 그의 가문에 잘 보이기 위해서였으니.

그런 만큼 지도 교수는 자신의 권위에 먹칠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번 탐사 계획도 그가 앞장서서 꾸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둥지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확 그냥 모른 척하고 넘겨버려?’

하지만 또 그러기엔 이번 기회가 엘릭에게 가장 중요하기도 했다.

만약 엘릭이 진짜 둥지의 위치를 파악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유급이 대수일까. 전문 저널에 이름을 등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단 해보자.’

션은 지도 교수의 방 앞을 한참이나 서성이다가 곧 큰마음을 먹고 문을 두들겼다.

* * *

“음! 션 군, 그러니까 지금 자네의 말은 둥지가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거다?”

지도 교수 베럭스는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션을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 이곳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어 교수님의 고견을 구하는 것입니다.”

션은 되도록 베럭스 교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말하려 했지만.

이미 베럭스의 눈빛은 가능했다면 그를 몇 번이나 구워 삶아버렸을 만큼 뜨거웠다.

‘젠장! 내가 이래서 오기 싫었던 건데!’

만약 션의 배경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재떨이를 냅다 던졌겠지.

“왜 그렇게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지, 지금부터 날 설득해야 할 걸세. 그렇지 못한다면……. 자네가 아무리 네레스타 가의 자제라 하여도 절대 그냥 넘길 수가 없음이야.”

션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지만, 이미 당겨진 시위였기 때문에 주먹을 꽉 쥔 채로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베럭스 교수도 처음과 달리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표정이 차츰 묘하게 변해갔다.

“…이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난 뒤.

똑.

똑.

베럭스 교수는 말없이 가만히 검지로 책상을 두들겼다.

고민에 잠길 때면 항상 보이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미간에 패인 골도 더 깊어질 무렵.

“이 추측, 누구의 의견이라고 했었지?”

“워, 원소마법학과의 엘릭 메르빙거입니다!”

“메르빙거 가의 수치, 말이지? 그럼 더 깊이 생각하고 말 것도 없겠군.”

베럭스 교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교수님….”

“분명 그럴듯한 추측이긴 하네. 나 역시도 한순간 혹했으니까. 일개 학과생이 내놓기 어려운 식견과 통찰력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뿐이네. 지하수가 남단으로 흐르는 과정에서 생기는 유실은 생각도 하지 않나? 더구나 근거로 제시한 것들도 전부 추측에 불과하잖나? 증거도 하나 없이 말일세. 세간에 나와 있는 여러 논문을 그럴듯하게 짜깁기한 것에 불과할 뿐이야.”

베럭스 교수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듣자 하니 메르빙거 가의 수치가 이번에 또 학사 경고를 받고, 퇴학 위기라지? 마력 저장은커녕 응집도 못 하는 병신 같은 몸으로 추가 시험을 합격하지는 못할 테니……. 꾀라도 낸 게로군.”

병신.

그 단어에 션의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런 션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럭스 교수는 이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순진한 자네를 꼬드겨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려 했던 것 같지만, 내 눈은 피하지 못하지.”

“만약….”

“음?”

“만약… 이지만 엘릭 메르빙거의 추측이 맞을 수도 있잖습니까?”

션은 무언가를 꾹 누르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베럭스 교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말라고 한 소리를 쏘아붙이려다가, 션을 위아래로 훑더니 갑자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세상일이란 게 뒤로 걷다 얻어걸리는 경우도 있는 법이지. 학장이 되어 아직 퇴학 처분이 나지도 않은 생도의 의견을 그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럼…!”

“하면 이렇게 하세.”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순간, 베럭스 교수의 한쪽 입꼬리가 크게 비틀렸다.

“학과 차원에서 자네들에게 기회를 줄 테니,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떻겠나?”

* * *

“내기? 좋아. 콜.”

엘릭은 기숙실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지도 교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참 떠들어대던 션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션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아, 귀 떨어지겠다. 옆방 들려. 좀 작게 말해.”

션은 엘릭의 핀잔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넌 화도 안 나냐!”

“뭘?”

“학장이란 인간이 일개 학과생한테서 가보나 다름없는 걸 뺏어가겠다고 말하는데…!”

션은 아직도 베럭스 교수가 마지막에 던졌던 내기 제안이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다.

-자네들이 탐사대를 꾸릴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위임해주겠네. 엘릭 메르빙거 군의 추측도 아주 그럴듯했으니, 확인해본다고 해서 뭐가 나쁘겠나?

-다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학과의 예산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말일세. 예산부를 설득할 만한 그럴듯한 근거 자료가 필요하다네. 탐사가 실패했을 때, 둘러댈 만한…….

-그래서 말인데. 엘릭 메르빙거 군이 항상 초대 총장님의 유품을 소중하게 챙기고 다닌다고 들었네만. 그것을 공탁하는 것이 어떻겠나?

우스던 아카데미를 세운 초대 총장, 우스던 메르빙거는 엘릭에게 있어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가 직접 할아버지를 뵌 적은 없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하지만 대륙사에 워낙에 큰 족적을 남겼기에, 엘릭은 전혀 얼굴을 본 적이 없어도 동상을 통해 그의 얼굴을 알았고, 무용담을 통해 그의 업적을 알고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유일하게 가문에 남긴 유품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대대로 메르빙거 가의 가주에게 내려오는 가보였다.

빛이 잔뜩 바랜, 만(卍)자 형태의 목걸이.

일명, ‘마도경식(魔道頸飾)’.

엘릭은 늘 착용하고 다녔기에 소중함을 이따금 잊기도 했지만.

우스던 메르빙거를 추종하고, 마도명문을 숭상하는 이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줄 수밖에 없었다.

베럭스 교수는 바로 이것을 내놓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탁’을 빌미로 걸긴 했다지만, 그 뒤에 누구 손에 넘어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가문의 명예를 누구보다 우선시하는 다른 귀족들이었다면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모욕적인 제안이었지만.

피식.

엘릭은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그 양반이 이걸 탐냈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래도 고맙다. 결국 넌 끝까지 내 편 들어준 거잖아?”

“씨발.”

션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태 대신해서 화를 냈건만, 정작 당사자가 이런 반응이어서야 힘밖에 더 빠질까.

정작 엘릭은 그런 친구를 흐뭇하게 바라봤지만.

“…그래서 이제 뭐 어떻게 할 거야? 정말 짐 쌀 거냐?”

베럭스 교수는 엘릭의 추측 장소에서 정말 둥지가 발견된다면 유급을 면제해주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결국 모 아니면 도인 기로인 셈.

“어. 싸긴 싸야지.”

“하아! 결국….”

“그런데 한 가지가 빠졌어.”

“……?”

“이쪽은 가보를 거는데, 저쪽은 유급 면제만 건다고? 그래서야 저울추가 안 맞지.”

“그럼?”

순간, 엘릭은 션의 눈에 베럭스 교수만큼이나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학장님도 자기 학장 인생 정도는 걸어야지, 좀 무게가 맞지 않겠어?”

“……!”

그제야 션은 떠올릴 수 있었다.

‘메르빙거 가의 수치’라는 별명 외에 생도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엘릭의 또 다른 별명을.

메르빙거 가의 꼴통.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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