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메르빙거 가의 수치
[정말 아카데미 생활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지?]
“그렇다니까, 누나도 참. 나도 벌써 스물둘이야. 이제 어린애 아니니까, 걱정 그만하셔. 이번 필기시험에는 학과 1등도 했다고.”
[그렇다면 다행이구. 밥 잘 챙겨 먹고…!]
“누나! 나 친구들이 불러서. 다음에 또 연락할게.”
[지각도 조심…!]
삐이이-
엘릭은 노이즈 너머로 누이의 얼굴이 사라지는 것을 거듭 확인한 뒤에야 겨우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참 걱정이 많다니까.
엘릭은 수정구로 통신을 나누는 내내 얼굴에서 걱정이 잔뜩 묻어나던 누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큰소리를 뻥뻥 쳤던 것과 다르게, 그는 아카데미 생활을 그리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통신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용료는 312실버입니다.”
“지정 계좌에서 인출 해 주세요.”
이제는 남은 돈도 얼마 없겠네. 당분간은 또 바게트로 때워야 하나.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통신국을 나섰다.
오늘따라 유달리 해가 쨍쨍해서 눈이 부셨다.
“조만간에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또 못 했네…….”
엘릭은 오른손으로 손 그늘을 만들면서 기숙사 방향으로 걸었다.
걷는 내내.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 * *
[기말시험 성적 공고]
· 엘릭 메르빙거
- 6대 물리원소론: A+
- 아카드 기하학: A+
- 고전주술 철학: A+
- 흑마술 역사: A+
……
- 정신계 마방술: F-
- 결계 구축: F-
- 실전 공격마법: F-
총점: 1.95 / 4.5
석차: 41 / 42
평가: 필수 과목의 이수 실패로 인한 유급 경고
‘결국 또……!’
엘릭은 벽보판에 붙은 성적표를 보고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A+도 많은 성적표였지만, 그의 눈에 밟히는 건 ‘유급’이라는 단어가 전부였다.
벌써 4번째였다. 유급 판정을 받은 것이.
우스던 아카데미의 학칙상 4번의 유급은 곧 퇴학이었다.
‘제길! 누구는 유급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냐고!’
물론, 여느 아카데미와 마찬가지로, 우스던 아카데미에서도 유급과 퇴학은 그리 잦은 행사는 아닐지언정 못 보던 행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재능만 믿거나, 든든한 가문의 지원을 받아 들어온 철없는 놈팡이들에 지나지 않았고.
엘릭 메르빙거는 그들과 다르게, 항상 도서관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공부를 하는 학구파에 속했다.
제 얼굴에 금칠하는 짓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머리도 제법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동급생들은 물론, 웬만한 강사들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옛 논문들도 즐겨 볼 정도였으니까.
필기와 이론 분야에서는 항상 만점을 받아왔던 게 그 증거였다.
게다가 마나를 감지하는 친화력과 그것을 제어하고 조작할 줄 아는 감응도도 아주 뛰어난 편이었으니.
즉, 이론부터 마력 분야까지, 마법사 지망생이라면 어느 누구나 탐낼 만한 재능을 타고 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빌어먹을 절맥증…!’
제아무리 마법학에 대해 깊은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할까?
또한, 감지하고 제어할 줄 알면 뭘 할까?
정작 가장 중요한 응집(凝集)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을.
엘릭은 대기 중에 있는 마나를 체내로 빨아들이고, 이것을 심장에다 새겨 넣는 써클(Circle) 작업이 불가능했다.
마나가 흘러야만 하는 기혈이 선천적으로 대부분 끊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도 교수는 이걸 두고 ‘절맥증’이라고 표현했다.
천만 명 중의 한 명의 꼴로 타고나는 비정상적인 체질.
명석한 두뇌를 타고 나지만, 정작 몸은 병약할 수밖에 없는 희귀병이라고.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사실 엘릭은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희귀 체질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애당초 마법은 모든 게 돈 지랄일 수밖에 없는 학문.
말만 공작가일 뿐이지, 지금은 다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인 몰락한 집안이 엘릭을 지원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덕분에 엘릭은 어렸을 때부터 오로지 독학만으로 마법의 기초를 닦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액수를 필요로 하는 체질 검사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한 일.
그래도 엘릭은 그동안 여기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검사를 할 필요도 못 느끼고 있었다.
몰락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가문은 대대로 마도학에 있어서 굵직굵직한 족적을 수도 없이 남긴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으니까.
가족력이 그리 쉽게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아니, 따지자면 너무 넘쳐났기 때문에 빚어진 참상이었지만.
‘마도의(魔道醫)도 내가 너무 나이를 먹어서 이젠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하셨으니.’
엘릭은 언젠가 아카데미의 합격통지서를 받고 누이와 같이 엉엉 울던 순간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졌다.
‘정말 이대로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4년제인 아카데미에 7년째 머물고 있는 지금.
당시에 가졌던 꿈과 희망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버린 상태.
걷는 내내 엘릭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는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낙제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계절 학기와 추가 시험 제도가 있다지만, 실전 분야의 성적이 전부 F-를 받아서야 유급은 절대 피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마법사에게는 이론보다 실전이 훨씬 중요했으니까.
“저 사람…?”
“어. 그 사람이야.”
“이번에 학장님께 퇴학 권고를 받았다던데.”
엘릭은 기숙사로 돌아가던 중에 어디선가 자신을 보며 쑥덕대는 여생도 두 명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지금은 도저히 저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더구나 어차피 저런 시선이나 험담 따윈 이제 익숙했다.
“저런 사람이 우리 학교 초대 총장님의 손자라니…….”
“그러니까. 메르빙거 가의 수치라니까, 수치.”
“대체 ‘마도명문(魔道名門)’이 어디까지 추락하려는 걸까?”
하지만 엘릭은 도중에 걸음을 뚝 멈춰야만 했다.
자신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가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야. 너희들, 1학년 물리마학과 생도들이지?”
여생도들은 갑자기 엘릭이 자신들을 쳐다보자 허리를 쭈뼛 세우고 말았다.
그제야 자신들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래도 ‘메르빙거 가의 수치’가 해코지를 하려면 뭘 얼마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 명이 뻔뻔하게 나섰다.
“그, 그런데요…?”
“너희 조교수 중에 션이라고 있지 않아? 걔가 내 입학 동기 중에서 나랑 제일 친한데.”
“……!”
“……!”
순간, 두 여생도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고 말았다.
엘릭은 그 면전에 한껏 비웃음을 던져줬다.
“내가 나이만 잔뜩 먹어서 그런가, 친구들 중에서 벌써 엘리트 코스 밟는 애들도 꽤 많더라고.”
우스던 아카데미는 옛 도제 형식의 문화가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교수와 생도 간의 질서가 아주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교수도 그만큼 권한이 막강했다.
“그래서 너희들 이름이 뭐라고?”
“어, 어서 가자! 별꼴이야, 정말.”
두 여생도는 엘릭이 혹시 자신들의 명찰이라도 볼까 싶어 손으로 가슴팍을 가리면서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얼굴은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엘릭은 시큰둥한 표정만 지을 뿐, 굳이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그래봤자 피곤해지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다만, 저 멀리 아카데미의 본관으로 향하는 계단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동상이 이쪽을 보는 것 같아 고개를 슬쩍 돌렸다.
“…….”
그는 다시 기숙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 *
기숙사의 3층으로 향하는 복도.
빠악!
엘릭은 뒤통수를 가격하는 충격에 괴성을 질러야만 했다.
“아, 씨! 누구……!”
“아 씨? 아 씨는 무슨. 너 또 내 이름 팔고 다녔냐?”
엘릭은 짜증 섞인 얼굴로 고개를 뒤로 홱 돌리다 말고, 곧 인상을 활짝 펼쳤다.
“이게 누구야. 동기사랑 나라사랑 션이 아니신가!”
“지랄한다, 아주. 내가 저번에 말했지? 내 이름 갖고 후배들 그만 괴롭히라고. 어?”
션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잔소리를 한껏 퍼부어댔다.
엘릭과 다르게 조교수를 상징하는 푸른 법복을 입고 있어 복도를 지나던 많은 생도의 이목과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지만, 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그건 엘릭도 마찬가지였지만.
“알았어. 알았다고. 우리 션 님, 신경이 아주 많이 날카로워지신 것 같은데, 머리도 식힐 겸 밖으로 바람이나 쐬러 가실까요?”
션은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려는 엘릭이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으! 내가 앓느니 죽지.”
곧 포기했다는 듯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엘릭과 함께 1층 노천카페로 이동했다.
그리고.
“빌어먹을 새끼.”
션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보이는 엘릭을 보면서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여전히 저놈 얼굴만 보면 욕지기가 저절로 나왔다.
“사람이 뭐가 그렇게 입이 험하냐? 혹시 그날이기라도 한 거니?”
“진짜 뒈질래?”
“흐흐. 웃자고 한 소리에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웃어. 웃으면서 살자고. 응?”
쯧.
션은 혀를 차면서 확신했다. 저놈과 친구로 지내는 한, 평생 말싸움으로 이기지는 못할 거라고.
“요즘 많이 바쁘냐?”
“안 바쁘겠냐? 이 형님이 이래봬도 앞에 ‘조’자가 붙긴 해도 일단 교수 타이틀 가지고 있는 몸이신데?”
“하긴. 이래서 성공한 친구를 둬야 한다니까.”
엘릭은 마치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다른 주변 동기들과는 다르게.
그렇기에 션은 씁쓸한 시선으로 엘릭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엘릭과 다르게, 션은 중앙 정계뿐만 아니라, 마탑에서도 콧바람을 깨나 낀다는 권문세가의 자제였다.
거기다 차석 졸업과 최연소 황립연구회 회원 등재, 그리고 교수 내정이라는 엘리트 코스까지 밟게 되었으니.
수치라고까지 표현되는 엘릭과는 정반대되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그런 엘릭과 션을 두고, ‘양극단을 나란히 달리는 평행선’을 운운하는 사람들까지 있을까.
그래도 션은 그런 세간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고, 엘릭과의 인연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많이 바쁘다면서? 왜 찾아온 거야? 단순히 이름 판 거 때문에 찾아온 거 같지는 않고.”
대체 누굴 닮아서 그런지 눈치 하나는 빠르단 말이지.
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류 뭉치 하나를 가방에서 꺼내 엘릭 앞에다 던졌다.
“이거 보여주려고.”
“뭔데?”
엘릭은 마침 먹고 있던 쿠키를 마저 입안에다 털어놓고 서류를 집었다.
-「다이아몬드 드래곤, 샤이나크의 둥지 탐사에 대한 계획서」
다이아몬드 드래곤?
엘릭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종명은 물론, 학명에서도 비슷한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하위 용종이라도 되는 걸까?
엘릭은 대체 이걸 왜 자신에게 주냐는 시선으로 션을 쳐다보았고.
션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학계에서 새롭게 분류된 고대 용종인데, 둥지가 있을 거라고 예측된 장소가 있거든. 거기 탐사대에 너도 참여해보라고.”
“……!”
고대 용종!
지금은 멸종하고 만, 마법의 기원이 되는 엘더 드래곤의 둥지가 발견되었다고?
엘릭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르게 서류를 훑어보았다.
션의 말이 사실이라면, 탐사의 결과에 따라서 엄청난 유물을 얻을 기회가 될지도 몰랐으니까.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어쩌면 퇴학을 피할 명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
엘릭은 미간을 좁히면서 무언가를 한참을 가만히 되뇌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던 뜨거운 찻잔이 식었을 무렵.
말이 없던 엘릭이 입을 열었다.
“야.”
“왜?”
“마나 스트림의 3법칙. 말해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뜨거운 곳에서 찬 곳으로,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뭔 이딴 걸 물어?”
“그렇지?”
마도학 입문자들이나 주고받을 법한 질문과 대답.
순간, 엘릭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근데 여기에 둥지가 있을 거라고? 말이 안 되잖아.”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