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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Episode 2. 제네바 (24/24)

Side Episode 2. 제네바

[리히튼.]

가녀린 목소리가 그에게 애원했다.

[힘들어. 이제 그만 나를 놔 줘.]

리히튼은 깊게 숨을 삼켰다.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었다. 전부 꿈이었으므로.

[그때의 그 말은 잊었으면 해. 무지했던 시절의 치기였던 거야. 나는 이만 쉬고 싶어.]

아쉬움이라고는 일말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에, 리히튼은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서서히 얼어 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놓고 네 시간을 살아.]

그래, 전부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개 같은 순간을 이제껏 지겹도록 겪어 왔으니까. 끔찍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알아도, 겪어 와도 달라지는 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수년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악몽 속을 헤맸다.

[이제 그만 가.]

아니야.

[나를 이 시간에 두고 가.]

헛소리하지 마, 나는….

[나를 위한다면 그렇게 해.]

나는 너를 위해….

[고마웠어, 리히튼.]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숨이 완전히 멈추었다고 자각했을 때 눈이 떠졌다. 타는 목마름에 목을 움켜쥐었다. 눈밭 아래에 쓰러진 시체의 냉기처럼 싸늘한 피부가 이곳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손끝에 닿아 오는 심장박동 소리가 유독 커 귓등을 울릴 정도였다. 리히튼은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아그레인.”

그의 옆자리는,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비어 있을 수가 없는 공간이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뭉개지는 여름용 침구가 불안한 감정을 몰고 왔다. 아그레인의 아침은 리히튼보다 늘 늦게 시작되곤 했다. 아그레인은 그가 어스름한 새벽에 일어나 하루 일정을 정리하며 가볍게 배를 채울 즈음에야 눈을 떴다. 종종 시녀가 들어오기 전에 잠을 깨웠으면 한다는 타박을 받기는 했지만, 가볍게 웃어넘기기만 하자 관련된 언급도 현저히 줄었다.

사실을 고하자면 세상모르고 잠든 하얀 얼굴을 구경하는 게 그의 낙 중 하나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아그레인의 속눈썹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면 불안정했던 호흡이 안정을 되찾는 시간을 혼자만 누리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정적에 휩싸인 새벽. 그 새벽은 리히튼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으니까. 한마디로 어스름조차 뜨지 않은 이 시각이라면 아그레인은 그의 옆자리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그레인.”

재차 불러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게 비단 착각만은 아닌 듯했다. 몸을 일으킨 리히튼은 암막을 거두고 카펫 위로 떨어진 달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줌에 불과했던 불안의 소용돌이가 점차 거대해지고 있었다. 만약, 그간의 일들이 전부 꿈이었다면?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이 진정한 현실이라면? 극렬한 두려움에 머릿속이 핑 돌았다.

“아그….”

“리히튼?”

그러한 리히튼의 고통을 순식간에 잠재운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멈춘 자리에서 죽은 듯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어렴풋하게 내려앉은 테이블 아래에 작고 하얀 발이 보였다. 발의 주인이 의문 섞인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오늘 잉고르드로 돌아가는 것 때문에 그래?”

리히튼 본인이 해야 할 질문이었다. 아니, 그전에 바짝 긴장했던 목덜미를 주무르며 숨을 들이켰다. 젖은 손바닥에 살이 미끄러졌다. 한숨 돌리기는 했어도 심장박동은 여전히 요란했다. 그의 낌새가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숨죽이고 있던 목소리의 주인, 아그레인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몸이 안 좋기라도 해?”

“아니.”

작은 몸이 용케도 테이블 아래에 우그러져 있었다. 리히튼은 도통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건지 모를 아그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벽 옆에 그녀가 새벽 내내 줄곧 바라봤을, 리히튼으로부터 그녀를 빼앗은 존재가 작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거칠게 자란 회색 털이 다소 길면서도 볼품없었다. 덩치는 기껏해야 그의 주먹 두 개를 이어 붙인 정도였다. 작은 동물은 콧소리까지 내며 잠들어 있었다.

“별 일은 아니고….”

바닥에 주저앉은 리히튼이 아그레인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향긋한 살결과 부드러운 온기가 품에 안기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얇은 살갗을 작게 깨물어도 아그레인은 크게 상관 않고 테이블 아래에 널브러진 새끼 여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고프다고 우는 것 같아서 일단 뭐라도 챙겨 주기는 했는데, 먹자마자 금방 잠들었어.”

이 불청객은 아그레인이 사냥한 붉은 여우의 새끼로 의심됐다. 숲에서 황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이 작은 여우는 느릿하게 귀향하던 무리의 뒤꽁무니를 겁도 없이 따라왔었다. 사람에게도 정을 잘 주지 않는 아그레인이 웬일로 새끼 여우를 가엽게 여겨 거두었는데, 설마 새벽에 끼니까지 챙겨줄 줄은 몰랐다.

“울었다고?”

“작은 소리로.”

“그럴 리가. 울었다면 내가 곧장 깨어났을….”

“그런 낌새는 없었어. 나의 각하께서는 인기척도 없이 아주 잘 주무셨으니까.”

고개를 든 아그레인이 그의 턱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동시에 가슴 안쪽이 미약하게 서늘해졌다. 어떤 연유에서든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단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수십, 수백 년을 온 신경에 불을 켠 채 살아왔다. 너무 길고 고통스러워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에 의하면 숙면을 취한 시간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 자신이 고작 새끼 여우 한 마리의 기척도 못 알아챌 만큼 깊게 잠들었었다니.

‘정말 풀어질 대로 풀어졌군.’

마음이 놓일 거라면 제대로 놓여야지. 늘어지게 잠든 주제에 악몽을 꾼다는 건 너무 역설적이지 않은가.

“한숨은 왜? 또 악몽이라도 꾼 거야? 표정도 안 좋아 보이고.”

리히튼은 긍정의 의미로 아그레인의 귓가에 뺨을 비볐다. 살가운 손길이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직도 종종 그러네. 잉고르드에서는 괜찮은데 꼭 나오기만 하면….”

“당신은?”

“괜찮아.”

“그럼 됐어.”

아그레인에게 문제가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품에 가두고 있던 작은 몸을 안아 들어 침대로 향했다.

“오늘부터 일정이 고돼. 조금 더 자 두는 게 좋아.”

“가는 길에 비만 오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황성의 여름 연회가 끝난 지 열흘이 다 되어갔다. 그간 빈세르크 3세의 요구로 귀향 날짜를 미뤄 왔으나, 이틀 전 베르크네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도착했다. 며칠 내내 내린 장마로 인해 강둑에 금이 갔다는 소식이었다. 아그레인에게 달라붙는 궁정인들의 아부가 짜증스러웠던 참에 적당한 일거리였다. 빈세르크 3세는 그까짓 강둑 수리 일에 그가 나설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불만을 표했으나, 리히튼은 부득불 귀향을 주장했다. 길어지는 실랑이를 보다 못한 아그레인이 그의 손을 들어 주고 나서야 둘 사이의 언쟁이 끊겼다. 황제는 요 근래 겁이 없어졌다. 목을 베고 새로운 황제를 앉혀야 하나 싶었으나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렇다고 리히튼 본인이 가지기에는 잃는 게 더 많은 자리라 조금도 욕심이 나지 않았다.

‘아그레인 덕분에 이어지는 명줄인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아그레인이 곁에 있을 때만 혀가 길어지는 거겠지. 리히튼은 침구 아래에서 뒤척이는 두 팔을 강하게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아그레인이 거둔 여우 새끼는 잉고르드로 돌아가 검은매 기사단에 던지든지 해야겠다.

***

빈세르크 3세가 꼭두각시 황제라는 사실은 그렌페르크 제국의 귀족, 더 나아가 정치에 귀가 밝은 상인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다. 그렌페르크 제국의 실세는 빈세르크 3세가 아닌 리히튼 잉고르드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빈세르크 3세를 업신여기거나 조롱하지 못했다. 그녀와 리히튼이 오래된 정치적 동맹 관계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둘은 이상하리만큼 서로를 신뢰했다. 남녀 관계에 있어 신뢰란 오직 통정뿐이라 여기는 이들은 둘을 내연 관계로 여겼다. 그나마 아그레인의 존재가 그 징글맞은 착각의 대부분을 뜯어고쳐주기는 했지만.

“공작, 부인을 잘 부탁하네. 천성이 허약해 귀향길에 비라도 내리면 지독한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야. 부인의 성격이라면 그리 내색하지도 않을 텐데.”

신경을 돋우는 걱정에 리히튼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빈세르크 3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아그레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그렁그렁한 눈동자였다.

“벌써 떠나다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어. 연회가 끝난 지 이제 열흘인데. 가을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와야 해. 그럴 수 있지?”

뻔하다는 말은 황제를 보고 하는 말이다. 아그레인에게 동정표를 사려는 꼴이 그렇게 뻔할 수가 없었다. 수선화 자수가 놓인 손수건으로 쥐똥만큼 나온 눈물을 콕 찍으며 우는 척을 하는 꼴이 가증스러웠다.

“생각해 볼게.”

아그레인은 적당한 대꾸만 남기고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빈세르크 3세의 낯에는 아쉬움이 여실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신이 아그레인에게 ‘어느 정도는’ 특별한 존재임을 황제는 충분히 알고 있을 터였다. 아그레인이 배려하고 생각해 주는 존재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는데, 공교롭게도 그중 하나가 황제였다. 그런 면을 상기했을 때 마땅한 황실 후계자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리히튼은 그녀의 목을 벨 수 없었을 것이다. 목줄을 달아 개로 키우라고 선물한다면 모를까.

모리타트 잭도, 킨 캐롤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못마땅하더라도 아그레인의 세상에 의미 있는 존재라면 그것으로 쓸모를 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리히튼에게는 그랬다.

“이제 또 지겨운 마차 여행의 시작이네. 일 년 치 카드 게임을 며칠 내에 전부 몰아서 하는….”

아그레인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관목들을 응시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성을 떠나는 게 아쉽다기보다는 길어질 이동에 벌써부터 지친 눈치였다.

“나의 부인은 한곳에 오래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는 분이시기는 하지.”

“천박하게 살아온 티라고 하던데. 귀부인은 자고로 앉은 자리에서 열 시간은 버틸 줄 알아야 한댔나.”

“누가?”

“몰라. 얼굴에 차를 부어 버리니까 울면서 사라졌어.”

“찾는 일은 쉬워.”

“찾아서 뭐 해? 시건방지다며 입술을 꿰맬 수도 없고. 발가벗겨서 춤을 추게 할 수도 없고.”

그리 말하는 아그레인의 눈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귀부인이 발악하며 그녀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더라면 더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진실로 불가능할 거라 여기는 건 아니겠지, 부인.”

“그러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지. 당신은 이런 데서 참 눈치가 없어.”

리히튼의 무릎을 베고 누운 아그레인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곧고 작은 콧등을 감상하며 리히튼이 입술을 떼었다.

“지루해 보였어.”

“황성에서?”

“응.”

“맞아. 지루하고 재미없었지. 아부하는 자들을 보면 골려 주고 싶더라.”

아그레인은 기본적으로 작은 사교 모임이나 연회를 즐기는 성정이 못됐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잉고르드 공작 부인이라는 직위에 걸맞게 이런저런 살롱에 참여하곤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나마 꾸준히 교류하고 있는 귀부인들은 함께 사냥하다가 마음이 맞은 소수가 전부였다. 하지만 리히튼은 갈수록 폐쇄적으로 변해 가는 그녀의 성정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늘 곁에 둘 수 있으니까. 아그레인의 그러한 성정은 리히튼에게 있어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 연회 때는 병이 걸렸다는 핑계로 별장에 요양이라도 가야겠어. 그곳에서 당신과 별이나 구경하는 게 더 즐거울 거야.”

리히튼은 작은 웃음과 함께 아그레인의 가슴께에 매인 끈을 은근슬쩍 건드렸다.

“별구경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즐거운 건 따로 있지 않나.”

아그레인이 눈을 흘겨 떴다. 그렇다고 불온한 손을 쳐내거나 몸을 일으켜 멀찍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둘은 장난치듯 서로를 살피다가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약속한 듯이 지겨운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마차가 제도를 벗어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삼 년. 몹시 짧은 시간이었다. 친부, 장로, 형제, 할 것 없이 전부 내쫓은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하기를 맹세한 여자였다. 고용인, 귀족 모두가 아그레인을 잉고르드 부인이라 불렀다. 그들의 부름에 아그레인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인사했다. 리히튼에게는 종종, 아니, 항상 그 모습이 낯설다. 서서 꿈을 꾸는 건가 싶어 어금니 안쪽을 씹다가 피를 삼킨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 짓거리를 삼 년 동안 하고 있었다니. 이런 식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상기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에 머저리인지 다시금 깨닫곤 한다. 아마 나는 죽는 그 순간에도 네 시신을 안고 죽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온다면.

***

제도를 나설 때의 날은 썩 괜찮았지만, 일주일이 조금 안 되게 흐르자 해가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늦은 밤부터 호우가 쏟아졌다. 귀향까지 며칠 남지 않은 터라 늦은 밤에도 이동을 늦추지 않았는데 기어코 탈이 나고 말았다. 바퀴의 이음새가 빠져 버린 것이다. 리히튼의 외투로 몸을 가린 채 멍하니 서 있던 아그레인이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이런 일, 저번에도 있었지 않아?”

그 역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 년 전 결혼식을 위해 아그레인을 데리고 잉고르드로 귀향하던 여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다. 오늘과 마찬가지로 바퀴의 이음새가 빠져 고생했었는데 길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곤 똑같은 문제가 또 발생한 것이다. 리히튼은 비에 젖은 아그레인의 콧등을 응시하며 저택 내의 빌어먹을 마차 전부를 다시 들여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오 분 정도 되는 거리에 제네바 영지의 저택이 있습니다.”

정차 직후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떠났던 기사가 돌아왔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과 별장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성내는 불이 켜져 있었고 사람이 오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잉고르드 영지는 여기서 코앞이었으나 저택까지의 거리는 마냥 가깝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그레인이 그에게 속삭였다.

“하루 동안 말을 타고 달리면 잉고르드에 도착한다며?”

“비바람이 잦아질 기미가 안 보여. 당신을 데리고 가는 건 위험해. 잉고르드에 도착한다고 해도 몸이 성하지 않을 거야.”

단련된 기사라면 모를까, 몸 약한 귀부인은 필히 독감이나 폐렴에 걸릴 것이다.

“그 소리도 예전 그대로야.”

무언가를 더 말하려 입을 열던 아그레인은 이내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뻔했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성한 몸일 필요가 없다는 소리를 하려 했겠지. 그 장담에 리히튼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훤했기에 입을 다문 것이다. 그 정도는 제 눈치를 봐서 다행이었다.

“제네바에 잠시 몸을 의탁해야겠군.”

기사가 고개를 주억였다.

“저희는 이대로 달려서 잉고르드로 가 바로 마차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만나지.”

“예.”

그렇게 서너 명의 기사가 진흙으로 질척이는 길을 따라 사라졌다. 리히튼은 만일을 대비해 항시 구비되어 있는 우비를 아그레인에게 꼼꼼히 입혔다.

“제네바는 괜한 벼락을 맞게 됐네. 우리처럼 불편한 손님을 모시게 되다니.”

“글쎄. 당신과 나 정도면 보상도 꽤 큰 편이라.”

마차를 버리고 아그레인과 함께 안장 위에 올랐다. 며칠 내내 축 쳐져 있던 아그레인의 음성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제네바 자작은 어떤 사람이야?”

“말해 줄 구석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평범한 남자. 영지는 비옥하고 넓은 편이지. 사과를 주로 재배하고 사 년 전 사고로 부인을 잃어 새로운 자작 부인을 들였다더군.”

“제네바 부인은 황성에서 본 것 같아. 굉장히 어린 여자였는데.”

“당신보다 세 살 어려.”

“으음. 부인은 귀족 출신이 아닌 건가. 잠깐 봐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귀부인들과 못 어울리는 것 같았어.”

“하녀의 딸이라더군. 자작의 아들은 부인보다 두 살 어리던가.”

“여러모로 놀랍구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로 그럭저럭 먹고사는 변방의 귀족 가문에선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중앙의 뼈대 굵은 귀족들은 대개 가문의 체면을 개인의 행복보다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정부를 열 명 둘지언정 결혼은 급이 맞는 귀족과 치른다. 하지만 제네바처럼 중앙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섬을 이루고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가문은 체면보다는 영주 개인의 욕구가 더 큰 힘을 지닌 경우가 잦았다. 때문에 변방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소문은 귀족들의 귀와 입을 즐겁게 하곤 했다.

제네바 별장은 아담했다. 잉고르드 가문의 별장에 비하면 부지는 반의반도 못 했고, 저택의 외관을 보아하니 관리가 썩 잘되어 있지도 않았다. 문을 두드리자 경계 서린 눈의 늙은 집사가 나타나 리히튼을 위아래로 훑었다.

“누구십니까?”

리히튼은 날이 날카롭게 선 물음에 아그레인을 등 뒤로 숨기며 신분을 밝혔다.

“잉고르드의 리히튼 잉고르드요. 귀향하는 길에 마차가 망가져 문제가 생겼는데, 나와 내 부인이 이틀 정도 실례할 수 있을까 싶어 이렇게 찾아왔소.”

초대받지 못한 방문자치고는 지나치게 고압적인 어투였다. 하지만 그들은 다행히,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리히튼과 아그레인의 방문을 몹시 기꺼워했다. 한걸음에 불려 나온 아들과 자작 부인은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응접실을 찾아왔다.

“이쪽이 제 부인인 티아, 그 옆이 아들인 벤허튼입니다.”

“잉고르드 리히튼이오. 이렇게 갑작스레 실례하게 되어 면목이 없소.”

고개를 숙인 여자는 그의 생각보다 더 어려 보였다. 제네바 자작의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뿌듯한 표정이 되어 보란 듯이 부인을 끌고 오는 꼴을 보자니 우스웠다. 누가 보더라도 부인의 짝은 자작이 아닌 그 옆의 아들로 알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찾아왔다.

“물을 다 데웠다고 합니다, 자작님.”

“아. 그렇다면….”

제네바 자작이 말끝을 흐리자, 리히튼의 시선이 아그레인에게로 향했다.

“나는 됐고 부인을 부탁하오. 몸이 약해서 감기에 들지 않을까 걱정이라.”

“물론입니다. 티아?”

“예. 잉고르드 부인? 괜찮으시다면 제가 부인을 모시겠습니다.”

자작 부인의 목소리는 작고 가냘팠다. 겁먹은 시선과 움츠러든 어깨 때문에 부인이 아그레인을 이끄는 게 아닌 그 반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연신 확인하는 벤허튼의 옆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탐욕스러운 아버지와 젊다 못해 어린 어머니, 그리고 아들. 지극히 개인적일 제네바 가정의 사정은 궁금하지 않았다. 리히튼은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아그레인과 함께 잉고르드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여름 연회가 끝나고 귀향하는 길이셨습니까? 하하. 저희는 올해 피곤한 일이 연신 들이닥쳐 제네바에서 벗어나질 못했지 뭡니까.”

리히튼은 손님 된 자격으로 제네바 자작과 짧지 않은 잡담을 나누었다. 그의 대화는 구 할이 하소연이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방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긴장한 낯이었다. 리히튼을 앞에 두고 그 같은 태도를 취한 자는 여태껏 한둘이 아니었다. 아마 길고 길었던 하소연을 해소할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자작이 먼저 입을 떼지 않는 이상 리히튼 또한 먼저 입에 담을 마음은 없었다.

***

혹시나 하는 기대에도 다음날 하늘은 어두웠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는 했지만 언제 다시 비바람이 몰아칠지 모를 일이었다. 잉고르드도 그렇고, 이 지역 영지들은 여름마다 몰아치는 태풍에 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제네바 자작의 하소연도 대개 해마다 늘어나는 낙과에 대해서였으니.

불운은 겹쳐서 일어난다던 옛말에 걸맞게 아침부터 아그레인의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불사의 육체를 지닌 그녀가 미약한 몸살감기에 걸릴 정도니, 범인이었으면 필히 생명을 위협할 수준의 지독한 열 감기를 앓았을 터였다. 감기에 익숙하지 않은 아그레인은 한참 뒤척인 끝에 제대로 된 잠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네바 자작이 조심스럽게 리히튼을 불렀다. 그는 술 몇 가지를 꺼내 소모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진정한 목적을 입에 담았다. 낙과를 활용한 2차 산업에 투자를 제안한 것이다.

“각하께도 좋은 사업이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이 사업이 과연 성공했었던가? 리히튼은 머릿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먼지투성이의 쾌쾌한 기억을 더듬었다. 몇 번째 생이었는지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반역을 위한 자금을 긁어모으던 시절, 그가 대금업으로 집어 삼켰던 땅에 제네바가 포함되어 있기는 했다. 당시 제네바는 과일 초콜릿 등 이전에 시도한 적 없는 사업을 시도하다가 가세가 뒤집혔었는데, 아마 낙과를 처리하기 위한 사업이었던 듯했다. 제네바 영지는 잉고르드, 지오르타 등 쟁쟁한 가문 사이에 끼인 소박한 영지였고 연줄도 없어 유통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결국 실패했던 것으로 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해 보여도 몇 년을 내리 들이닥친 태풍에 영지 전체가 파산 위기에 놓였을 수도 있다. 그랬으니 급히 사업을 벌이다 한 입에 삼켜진 것일 테지.

리히튼은 아그레인을 떠올렸다. 아그레인은 초콜릿과 같은 단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해서 아그레인은 음식이 얼마나 달고 쓴지, 또 얼마나 비리고 느끼한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가리는 음식도 없었고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도 없었다. 과일 초콜릿을 한 아름 안긴다고 해서 기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말했으면 하는군. 지금 내게 투자를 요청하는 건가, 아니면 돈을 빌리겠다는 건가?”

“아니, 아닙니다. 각하께 빚을 질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땅과 영지민만 내어 드리는 것이고 수익의 일부분만 가져갈 뿐, 사업에 대해서도 일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직원의 관리나 급여와 같은 세세한 부분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해당 사항은 제게 일임하신다면….”

일부의 수익은 물론 영지민의 급여까지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이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자작이 누구의 배를 불리든지 리히튼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악행을 하나하나 열거하기 위해서는 하루의 시간으로도 부족했다. 죄책감을 느끼거나, 느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시기도 너무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다. 아그레인 외에는 모든 것이 지루하고 고루하고 불필요하며 소모적인 행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도와주신다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잘 잊히는 감정 중 하나다. 그가 수십 번의 회귀를 반복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계책이 바로 배신이라는 행위였다. 따라서 납작 엎드린 제네바 자작의 태도에는 감동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아그레인을 떠올렸다. 작년 말, 페사 영애가 잉고르드와 유독 먼 땅으로 시집간 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그녀였다. 이러한 사업에 재미를 붙이면 조금 더 활기가 붙지는 않을까, 싶은 기대가 들었다. 관심이 생기면 그 먼 황성에 발붙이는 시간도 줄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마음의 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군.”

“무, 물론입니다. 고려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을 마친 제네바 자작이 물 한 잔을 한입에 들이켰다. 이마를 훔치며 웃음만 보이던 자작은 어색하게 화두를 돌렸다.

“부인께서 제네바 저택을 불편해 하지는 않으신지요? 얼굴을 못 뵈어서 따로 필요한 건 없을지 묻지 못했습니다.”

리히튼은 멍한 눈으로 얌전히 누워 있던 아그레인의 붉은 낯을 상기했다. 아그레인은 늦은 아침까지 리히튼의 품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의 옷깃을 붙잡고 뒹굴다가 정오가 되어서야 다시 잠들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상상도 못 할 어리광이었다. 격렬한 고민 끝에 제 가슴에 얼굴을 묻는 뒤통수를 볼 때면 까맣게 그늘진 만족감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피어났다. 그에게 매달리는 아그레인의 얼굴만큼 흥분을 돋우는 풍경이 또 없었다. 그녀의 모두를, 작은 것 하나 빼먹지 않고 전부 빼앗아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어쩌겠는가. 그래야만 하는 것을.

리히튼은 습관처럼 몰려오는 폭력적인 정복욕을 가라앉히며, 뻐근해지려는 몸을 느긋하게 일으켰다. 그로선 아그레인을 잉고르드 저택에 결박해 두지 않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가진 모든 인내심을 소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빈세르크 3세와 모리타트 잭까지는 웃어넘길 수 있다고 해도, 그 외의 인물을 아그레인의 곁에 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마음은 이해하나 관심 둘 필요 없네. 그쪽도 무언가를 더 바라진 않을 테니까.”

차가운 대답이었음에도 제네바 자작은 오히려 밝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리히튼 각하와 달리 부인께서는 방 안에만 계시는 듯하여서….”

“그게 편할 테니까.”

앓는 몸으로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닌다면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부인을 여기저기 내보이기 바쁜 제네바 자작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짧은 상념과 함께 리히튼의 시선이 제네바 부인에게로 향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자작의 눈이 기름 때에 둘러싸인 냄비처럼 번들거렸다.

“제 부인도 썩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제네바 자작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고, 새에 모이를 주던 부인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물론 잉고르드 부인께 비할 바는 아니나, 티아 정도면 태생치고 손도 고우며 천박하지 않은 편이지요. 하녀들은 다 좋은데 손과 발이 거친 게 흠이라서 말이지요.”

제네바 부인은 입술을 악물고 수치심을 삼켰다. 익숙한 대우인 듯 몇 번 숨을 고르고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와 달리 리히튼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제네바 자작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작의 말인즉슨 그가 아그레인의 손을 훔쳐봤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유심히. 순간 눈알을 뽑아 버릴까, 하는 고민이 일었다.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거처에는 쓸 만한 하녀가 많습니다. 여러모로요.”

리히튼은 눈을 감은 채 콧등을 쓸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굳이 나서서 피곤해질 건 없다. 이제는 적어도 아그레인이 ‘왜 그랬어?’라고 물었을 때 마땅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짓거리만 벌여야 했다. 아마 ‘네 손을 훔쳐보기에 죽였어.’라고 대답한다면 짐승을 보는 눈이 되지 않을까? 다그치기 위해 잠자리라도 갈라진다면 아주, 몹시 외로울 것 같았다. 그의 묵언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했는지 제네바 자작의 입꼬리가 음습하게 올라갔다.

“제게 따로 언질만 해 주시면 조용한 침실에 보내두겠습니다. 시중을 들게 하는 건 별일 아니니까요. 오히려 하녀 따위에겐 영광이지요.”

제네바 백작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멍청한 짓거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리히튼은 매 계절 새로운 여자와 엮였다. 그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용을 위해 접근한 인물도 있었으나 반 이상은 소문만 무성했을 뿐, 실제로는 면식만 익힌 관계인 경우가 파다했다. 미혼의 젊은 공작이었던 당시, 그는 숨만 쉬어도 곤욕스러운 소문에 치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는 결혼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후계가 없기 때문에. 리히튼 공작에게는 신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있다고 해서 신혼인 것도 아니었다. 리히튼은 무려 수년 전에 혼인했으나 여태까지 자식 한 명 낳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사교계에 무궁무진한 소문을 흩뿌렸다. 얼마나 무궁무진하면 그와 정을 통한 진정한 상대가 빈세르크 3세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아그레인이 코웃음도 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기에 리히튼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종종 이런 식으로 번거로운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각하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정말, 누구든지 말입니다.”

말미에 움직인 눈동자는 정확히 제네바 부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구든지 라.

“그렇다면 자작은 어떤가?”

이따위 짓거릴 몇 번 겪어 온 탓일까? 리히튼은 꽤 효과적인 버러지 퇴치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열에 아홉은 얌전히 입을 다물도록 하는 획기적인 대처법을. 그의 말에 제네바 자작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조용한 방에서 내 시중을 들 창녀로 말일세. 손과 발도 거칠지 않을 테니 눈살 찌푸릴 틈도 없겠어.”

“…예?”

“누구든 괜찮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

제네바 자작의 숨이 가빠졌다. 파란 눈동자는 리히튼의 대답이 농인지 진담인지 판별하지 못해 당혹감에 젖어 있었다.

“설마 농담이라 여기지는 않을 테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작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 각하. 제가 주제넘는 소리를 하였습니다. 부디 잊어주십시오.”

리히튼은 혀에 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번거롭다는 얼굴과 함께 입술을 떼었다.

“천박하군.”

제네바 자작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리히튼은 그의 얼굴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이는 중요하지 않다. 잉고르드를 증오하는 리히튼에게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의 여자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이따금 아그레인이 후계를 갖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우울해 하는 얼굴을 보이곤 했지만, 리히튼에겐 그 죄책감조차 이용할 거리에 불과했다. 아그레인을 감정적으로 더 옭아맬 수 있는 이용거리. 얻지도 못할 아이가 주는 가치치고는 아주 유용했다.

“앞서 말했듯, 제안은 고민해 보겠네. 자작이 천박한 것과 사업을 하고 말고는 엄연히 다른 일이니까.”

“예, 예. 감사합니다.”

응접실을 나서면서 마주친 제네바 부인의 눈빛에는 옅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부인은 홀린 듯 그를 바라보며, 제네바 자작의 감사 인사를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가, 감사합니다.”

등에 박힌 여자의 시선은 리히튼이 응접실을 완전히 나가기 전까지 떨어질 줄 몰랐다. 침실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던 리히튼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코에 소매를 가져다 댔다. 제네바 자작이 풍기는 장미 향수의 지독한 냄새가 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더러운 상태로는 아그레인이 쉬고 있을 침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침실을 고작 몇 걸음 앞에 두고 호위 기사를 불렀다. 불려온 기사는 익숙한 얼굴로 먼저 입을 떼었다.

“부인께서는 오늘 벤허튼 제네바와 담소를 몇 번 나누셨고, 침실로 돌아오신 지는 몇 분 되지 않았습니다.”

“몇 번?”

뉘앙스로 봐선 한 번이 아닌 듯했다.

“길지는 않았습니다. 비가 잠시 그치고 부인께서 산책하셨을 때 길을 안내해 주겠다며 따라 왔습니다. 산책 후 함께 차를 마시고 방으로 돌아오신 참입니다.”

호위 기사는 리히튼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하나하나 상세히 대답했다. 잉고르드가 아닌 장소에선 빠짐없이 반복되어 온 순간이었다. 리히튼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단 십 분에 불과하더라도 아그레인의 모든 일과를 알아두려 했다. 그녀의 발걸음이 닿은 공간, 만난 인물, 오간 선물…. 옷에 밴 향수 냄새를 불쾌하게 여겼던 순간이 무색하게, 리히튼은 지체 없이 침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몸은?”

“이제 멀쩡….”

셔츠를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진 그는 아그레인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의문으로 커다래졌던 눈동자가 이내 평온을 되찾고 느릿하게 감겼다. 리히튼은 분홍빛으로 물든 뺨 위로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은 속눈썹을 핥듯이 응시했다.

저 사이사이를 온전히 씹어 삼켜 그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설탕보다 달콤한 눈물이 맺히도록 자극하고, 괴롭히고 싶었다. 그리하면 왼쪽 귓불 뒤에 박힌 자그마한 점, 미세하게 내려간 입꼬리, 참고 참다가 겨우 터지는 밭은 숨을 포함한 아그레인 잉고르드의 전부가 그에게 속했음을 확인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리히튼은 인내했다. 어느 누구와 대면했든, 아그레인이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으리라는 걸 앎으로. 뜨거운 피가 복부 아래로 한데 몰렸지만, 그 피가 리히튼의 머릿속과 손아귀 힘을 더 거칠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참아냈다. 그는 자신의 전신을 빨아 당기는 아그레인의 몸에서 아주 힘겹게 손을 떼었다. 마지막까지 여자의 혀 위를 탐하던 입술도 이성에 이성을 붙잡아 겨우 떨어뜨렸다.

“평소보다 혀가 뜨거워.”

숨이 달뜨는지 아그레인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 오른 몸을 괴롭혔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가도 거부 없이 받아들여 준 그녀의 자애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이럴 때마다 당신의 몸이 건강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

아그레인은 웃음 짓기보다는 걱정 어린 낯을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리히튼은 아그레인의 허벅지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틈만 나면 안아 옮긴 탓인지, 떨어질까 불안해하며 목에 매달리는 일이 줄었다. 아그레인은 리히튼이 그녀를 침대 위에 부드럽게 눕히는 순간까지 편안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내게 가장 큰 문제는….”

리히튼은 제 덩치에 비해 반이나 될까 하는 아그레인의 몸을 쓰러지듯 껴안았다.

“하나뿐인 부인께서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인이라는 점이지. 안타깝게도 쉬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로군.”

“그런 낯부끄러운 소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뱉는 것도 능력이야.”

아그레인은 갈수록 말라가고 있다. 그녀가 가진 불안은 리히튼의 과도한 보호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아그레인은 그녀 본인이 누리는 심신의 편안함과 평화를 사치라 여기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녀의 몸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쥐고도 한참 남는 손목을 내려다보며, 리히튼은 숨길 수 없는 위선적인 감정을 느꼈다. 아그레인이 그녀를 괴롭히는 고통과 죄악 속에서 자유로웠으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원한 악몽을 꾸며 자신의 곁에 남아 있었으면 했다. 그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길 바랐다. 그런 더러운 바람을 꿈에도 모를 아그레인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의 하루 일과를 읊었다.

“몸이 괜찮아져서 벤허튼 제네바와 잠깐 정원을 걸었어. 내게 과일 향이 나는 밀크티를 자랑했는데…. 꾸역꾸역 마시느라 고역을 좀 치렀네.”

몸을 일으킨 리히튼이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던 아그레인의 시선에 옅은 웃음기가 서렸다.

“그건 무슨 얼굴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아그레인 앞에서 표정 숨기는 일이 쉽지는 않다. 아그레인은 그런 리히튼의 속마음이 훤하다는 듯,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리히튼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힘에 순순히 끌려가 주며 말했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해 봐.”

“기분? 벤허튼 제네바와 걷는 기분을 말하는 거야?”

으음. 짧은 신음 뒤로 아그레인의 성실한 대답이 뒤따랐다.

“젊고 유머 있는 베르크네와 걷는 기분이었지. 예의 발라서 그런가, 다소 딱딱한 분위기지만, 베르크네만큼 재미없지는 않았거든.”

그의 몸을 감싼 팔이 가슴께와 목덜미를 느릿하게 타고 올라와 턱에 닿았다. 아그레인의 하얀 손이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리히튼의 턱선을 쓸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 더 잘생긴 쪽을 선호하는 것 같아.”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가슴 근처를 더듬었다.

“몸도 마찬가지고.”

마치 침대 위에서 행해지는 리히튼의 손짓을 따라하듯, 은근하면서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리히튼은 그녀의 겁 없는 장난에 웃음만 반복했다.

“제네바 부인에 대한 말은 안 하던가?”

“그쪽도 나도 딱히 화두로 삼지는 않았어. 왜? 관심 있어?”

다소 날카로워진 음성과 함께 아그레인이 그의 등을 꽈악 밀착해 껴안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얼굴도 가슴도 내 쪽이 더 괜찮지 않아? 확신하건대 발도 더 예쁠걸?”

어깨 위로 얼굴을 올린 아그레인이 리히튼의 입가로 짧은 입맞춤을 거듭 남겼다. 고작 이런 애정 표현 하나만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리히튼은 아그레인의 작은 몸을 제 품 안에 바스라트리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다가온 입술에 기나긴 입맞춤을 남겼다.

“목덜미는 왜 언급하지 않은 건지 의문인데. 당신은 이 목덜미 하나로 충분해.”

“다 빼고 목만 남으면 된다는 거지?”

“항상 극단적이군.”

미약하게 열 오른 이마가 그의 목덜미에 머문다. 리히튼은 꼼짝도 안 하고 책에만 집중했을 아그레인을 위해 몸을 일으켜 물을 따랐다. 아그레인의 집중력은 감탄할 만하지만, 지금처럼 제 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 때는 걱정이 일었다.

“이르면 내일 저녁, 늦으면 모레 새벽에 마차가 도착할 거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창밖을 훑었다. 거센 빗줄기에 튄 물방울이 온 창문에 무당벌레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날씨를 봐선 모레 새벽을 기대해야겠네.”

쉴 새 없이 울리는 빗소리와 그 사이사이에 녹아든 아그레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너무나 오래되어 반쯤 썩어 문드러진 과거의 기억과, 고작 수년이 흘렀을 뿐인 선명한 기억이 서로 상충해 리히튼을 괴롭히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한때의 끔찍했던 모든 찰나까지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더없이 완벽하고 완벽하며 완벽한 삶을 이룩하고야 말았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당시의 기억이 마냥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소중한 상흔에 가깝다면 모를까. 잔을 건넨 리히튼은 창가로 다가가 습기에 하얘진 유리창을 쓸었다. 심해 속 작은 유리 상자에 갇힌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고립된 기분도 나쁘지는 않아.”

아그레인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하지만 곧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새침하게 뜨곤 캐물었다.

“다 계산하고 하는 말이지?”

그녀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한 리히튼의 반응을 살피곤 재차 입술을 떼었다.

“그런… 혀에서 꿀이 떨어질 듯한 달콤하고 낭만적인 소리 말이야. 밤마다 고민하고 어디 적어 두는 거 맞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질문이지 않은가, 라고 리히튼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짓도 꾸밈도 없는 온전한 자신의 진심만을 담아 대답했다.

“그런 걸 적어 두는 건 머저리 같은 짓이야, 아그레인. 당장 입 밖으로 꺼내는 시간도 아까울 지경인데, 그럴 정신머리로 당신을 붙잡기 위한 세레나데를 부르는 게 현명하겠어.”

“진담이야?”

“진담이지.”

“감동적인 고백이기는 한데…. 내가 수잔이었을 때는 그런 현명한 판단을 어떻게 참은 거야?”

리히튼은 두터운 겨울용 커튼을 치고 침대로 돌아갔다. 뒤 돌고 누운 그의 곁에 바삐 다가온 아그레인이 술에 취한 건가 싶을 정도로 슬슬 웃는 낯이 되어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내게 고약한 독이나 먹이고.”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충분히 안다. 아니, 아마 그녀에게는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새벽에는 몰래 찾아와 입이나 맞추고. 음흉하시기는. 못 들은 척 말고 아무 말이나 해 봐, 리히튼.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아?”

“당신을 붙잡을 말을 생각 중이야.”

리히튼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란 소리가 전부였으니까. 현명한 아그레인은 그가 목 아래에 어떤 말을 담아 뒀는지 전부 알고도 남을 것이다.

“내가 잠들기 전에 어서 떠올려 줘, 리히튼. 모르는 척 세레나데를 불러 줘도 좋아. 아니지, 이번에는 내 쪽에서 불러 줘야겠어. 어디 보자….”

리히튼은 아그레인의 어깨를 깊이 껴안고 그녀의 음악에 빠져 꿈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아그레인은 그에게 있어 특별하다. 가끔은 미치도록 특별해 그 존재감에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녹아내리고, 시궁창에 박혀 버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리히튼은 자신의 심장과 어쩌면 정신까지 갉아 먹을지 모를 이 위대한 감옥으로부터 도망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이미 제 모든 것을 바친 포로에겐 벗어날 두 다리조차 남아 있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때때로 아그레인의 존재가 자신에게만 특별하지 않음을 깨달을 땐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자유를 허락한 것에 대한 깊은 후회와 제 방에만 가두고 싶은 고약한 갈증도 느껴졌다. 그처럼 음습한 감정이 발현되는 순간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젖비린내 나는 청년을 앞에 둔다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저는 오늘날 이렇게 마음 맞는 친구분을 갖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실 때면 언제든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제가 감히 발 벗고 맞이하겠습니다.”

즐거움이 만연한 미소로 술잔을 든 벤허튼의 시선이 리히튼을 향했다. 그는 뒤늦게 예를 치르듯 짧게 고개를 숙이며 뒷말을 붙였다.

“물론 리히튼 각하께서도.”

어디로 한눈이 팔렸을지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 리히튼의 속도 모를 아그레인은 예의 밖에서나 보이는 딱딱한 미소와 함께 다소 성의 없는 대답을 남겼다.

“감사한 제안이네요.”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점심 식사치고 상당히 호화로웠다. 리히튼은 음식의 맛을 따지지 않게 된 지 시일이 꽤 흘렀지만, 웬일인지 즐겁게 식사를 만끽하는 아그레인을 보자니 답지 않게 입맛이 돌았다. 제네바 저의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주방장의 솜씨가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같은 정보 역시 식사하는 아그레인의 반응으로 유추해낸 사실이었다. 괜찮네, 라든가, 향이 좋네, 같은 평가는 아그레인이 은연중 보이는 반응 중에 가장 좋은 평가였으니까. 제네바 부인이 조심스레 끼어들어 벤허튼을 타박했다.

“각하께 그럴 시간이 있겠니, 벤허튼. 이분을 뵙고 싶어 하는 분이 세상 천지에 널렸다는구나.”

하지만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젊음 앞에서 그녀의 소극적인 잔소리가 들어 먹힐 리 없었다.

“저는 말입니다. 주체적이지 못하고 그저 타인이 원하는 상에 따라 움직이다, 결국엔 후회하고 마는 수동적인 삶은 절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벤허튼.”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저는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쟁취해서 얻어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하께 무례하게 굴지 말렴.”

“어머니께서는 어린 시절의 객기로 여기실 테지만요. 나이 차이랄 것도 없는데.”

거침없는 언행이었지만 제네바 자작은 그런 벤허튼을 나무랄 마음이 일말도 없는 듯했다. 오히려 본 적 없는 기세등등한 분위기를 등에 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친자식의 혈기를 자랑하고 싶다는 양.

혈기 넘친다는 것. 젊은 사상을 가진다는 것. 자기 자신을 우주의 축으로 놓는다는 것. 한때 리히튼 역시 모두 지니고 있던 것들이다. 때문에 벤허튼을 언짢게 여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에게 걸리적거리는 건 여지없이 아그레인을 향해 돌아가는, 저 찢어 버릴 눈동자가 전부였다.

“저는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습니다. 물론 제네바도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기에는 좁은 감이 있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각하처럼 더 큰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런 제게 조언해 주실 말씀은 없을까요?”

“주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지난 생의 그였다면 어떠했을까? 아니, 지지난 생의 그였다면? 지나고 지나며 지나왔던 생의 그였다면, 눈앞의 벤허튼이 지껄이는 치기 어린 대화에 적극적으로 발을 디뎠을까? 아그레인에게 시답잖은 추파를 던지는 이 어린 청년과의 대화에? 리히튼은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 봤다. 장담컨대 사지 멀쩡한 제네바의 후계자는 장님이 되어 골방에 처박히게 되었을 것이다. 리히튼은 감흥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나이에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지. 듣기 불편할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 딱 본인의 주제만큼만 바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벤허튼은 도통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야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지 않습니까?”

“벤허튼 제네바 군의 숙적들이 멍청하다면야 그렇겠군.”

“그런 어려움도 이겨내야 값진 결과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호응을 요구하는 벤허튼의 눈동자가 아그레인의 뺨을 건드렸다. 그러나 아그레인은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거 맛있네. 내가 아는 맛보다 신맛이 조금 더 강한 것 같은데, 그게 더 조화로운 것 같아.”

몸이 완치되었는지 눈에 띄게 밝아진 안색으로 속삭이는데,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답 없는 머저리는 리히튼 자신처럼 느껴졌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을 상대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그는 딱딱하기만 하던 태도를 잠시 거두고,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벤허튼의 주장에 수긍했다.

“자네 말이 옳아. 그 패기를 응원하겠네.”

벤허튼이 뿌듯한 표정으로 거칠게 나이프 질을 했다. 리히튼은 기분이 묘해졌다. 아그레인이 온몸을 바쳐 자신을 사랑한단 사실을 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 곁을 맴도는 수많은 기생충들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당장 일 년 전이었다면 벤허튼 제네바는 장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인내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인의 필요성을 조금씩 낮춰가는 성장.

“죄송합니다, 각하.”

상념에 빠진 채 술을 삼키던 리히튼이 고개를 들었다. 돌연 사죄를 건넨 이는 제네바 부인이었다.

“벤허튼이 아직 혈기 왕성해서 무엇이 무례한 행동인지 아직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부인은 진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한데 그녀가 둘 사이로 끼어들기 무섭게 제네바 자작이 굳게 닫고 있던 입을 떼었다.

“하하, 부인.”

새파랗게 질렸던 제네바 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회색으로 변했다.

“각하께서도 벤허튼을 응원해 주셨잖소. 부인이 벤허튼을 대신해 사과하는 건 오히려 각하께 실례되는 행동일 수 있소.”

제네바 부인은 자작과 논쟁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듯, 곧장 고개를 주억였다.

“새, 생각해 보니 당신 말이 옳아요. 저야말로 주제넘었군요.”

유쾌하게 웃은 벤허튼이 제 어머니에 이어서 리히튼에게 사과했다.

“어머니께서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으십니다. 각하께서 너그럽게 여겨 주십시오.”

딱히 누군가와 언쟁한 것도 아니고, 자극적인 의논거리를 공유한 것도 아닌데 몇 번째 사과를 받는 건지. 그즈음 되니 리히튼은 대꾸조차 귀찮아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가만히 식사를 끝마쳐 가던 아그레인이 자의로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식사는.”

그녀는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평화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자리가 조금 불편하네요. 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 말의 저의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눈치 없지 않았다. 얼굴이 다소 굳어진 채, 벤허튼이 급히 그녀에게 물었다.

“어느 부분이 불편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가족이 너무 긴장한 모양입니다.”

“아니요. 오히려 남의 가족 사정을 너무 깊게 알게 된 독이죠.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지만, 또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 역시 리히튼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사과에 질린 모양이었다.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의 노골적이면서도 소극적인 태도가 조금은 놀라웠다. 본래의 그녀였다면 상대가 누구든 제 부정적인 감상을 가감 없이 설명했을 텐데, 손님의 위치니 예를 차리는 건가 싶었다. 리히튼은 그 점이 눈에 거슬렸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벤허튼과 제네바 부인 사이를 오갔다. 어느 쪽을 신경 쓰는 것일지 궁금했다. 어느 쪽도 신경 쓰지 않는 결과가 최선이기는 했지만.

식사가 끝난 직후, 아그레인과 잠시 떨어진 사이 제네바 부인이 그를 찾아왔다.

“죄송했습니다, 각하.”

점심 식사 때의 일을 언급하는 게 분명했다. 리히튼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필요 이상으로 눈치를 살피는 그녀가 번거롭게 느껴졌다. 무엇이 죄송하냐고 반문해야겠지만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괜찮습니다.”

짧은 대답에 죽어 가는 생쥐처럼 창백한 제네바 부인의 낯이 훨씬 나아졌다.

“잉고르드 부인께서 마음의 상처를 입지는 않으셨을까 걱정이에요.”

그보다는 제네바 부인의 얇은 입술에서 아그레인의 이름이 언급됐다는 게 더욱 불편했다. 제네바 가문은 어찌 된 게 구성원 전원이 짜증스럽다. 특히나 벤허튼 제네바. 뺀질거리는 얼굴부터 어떻게 해서든 아그레인의 관심을 끌려는 행동거지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속으로만 삭히는 이유는 아그레인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벤허튼의 노골적인 신호를 파리 내쫓듯 아무렇지 않게 쳐냈다. 그 사실이 이 작고 답답한 저택에 갇혀 버린 그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위안이었는데, 산책이나 가벼운 티타임에 함께하는 건 완벽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마 아그레인 입장에선 단순히 지루한 제네바에서의 시간을 버틸 작은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히튼은 그조차 싫었다. 마땅한 이유 없이 벤허튼의 요구나 구애에 맞춰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신경에 거슬렸다. 이렇듯 상대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귀족이든 노예이든 간에 아그레인과 엮이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오감이 피곤해진다.

리히튼은 어떤 날카로운 문장을 뱉어낼지 모를 입을 다문 후 숨을 가다듬었다. 가끔은 이 정도로 예민하게 구는 스스로가 정신병자처럼 느껴졌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사소한 일을 마음에 담아 두는 여자가 아니니까.”

늘 바닥만 바라보던 제네바 부인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서로를 잘 아시는 것 같아요.”

그 말에서 리히튼이 깨달은 점은, 제네바 부인의 입술색이 어제보다 훨씬 붉다는 점이었다.

“마, 말이 조금 이상했나요? 물론 각하의 부인이시니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만….”

“하실 말씀은 끝났습니까?”

조금도 상냥하지 않는 질문에 제네바 부인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리히튼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저…!”

여덟 발자국 즈음 옮겼을 때, 제네바 부인이 커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지닌 여자에게서 나온 목소리라곤 생각지도 못할 만큼 큰 부름이었다. 리히튼이 슬쩍 고개만 돌리자, 제네바 부인은 입술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멀어지는 제네바 부인의 등을 보며, 리히튼은 하루빨리 마차가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

늦은 오후가 되자 지겹도록 퍼붓던 비도 소강상태가 되었다. 리히튼과 아그레인은 제네바 가족과 함께 영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과일 농장을 구경했다. 아그레인이 농장 안쪽에 쌓아 올린 낙과를 퍽 아까워하는 눈치라 제네바 자작이 제안한 사업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어떻게 보자면 제네바 자작의 의도대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제네바 저택으로 돌아온 후 리히튼이 근 십 년간의 날씨 및 수확량 등 농업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싶다고 요구하자, 벤허튼은 기다렸다는 듯 아그레인을 데려갔다. 아그레인이 억지로 끌려가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사라졌기에 불쾌했던 기분도 금방 가라앉았다.

그는 작고 조용한 서재에 홀로 앉아 먼지 쌓인 책과 자료를 살폈다. 오늘 처음 찾아 들어온 제네바 저택의 서재는 이 우울하고 습기 찬 영지에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공간이었다. 낡은 종이와 먼지 냄새는 오래전, 『태양이 흐르는 강』과 얽힌 비화를 조사하기 위해 밤낮을 잉고르드 서재에서 지내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 시절만큼 괴롭고 활기찼던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흐릿했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질 즈음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던 서재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남편이 말하기를,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시라고 했어요.”

이제는 부인까지 보내는 건가. 하녀가 대신해야 할 일에 굳이 나서겠다고 한 건지, 아니면 억지로 보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리히튼의 관심은 금방 돌아갔다.

“그러겠습니다.”

제네바 부인은 리히튼이 앉은 탁자에 몇 가지의 과자와 차를 놓았다. 이내 리히튼은 다시 서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분 전부터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서재의 인기척이 조용한 빗소리에 잠식됐다.

“각하.”

그래서 제네바 부인이 여태 서재에 남아 있었단 사실을 뒤늦게야 눈치챘다. 리히튼은 아직 그곳에 있었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불편하신가요?”

제네바 부인은 찻잔을 내려놨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는 드레스의 천이 꽉 움켜져 있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 출신이 귀부인답지 않으니까…. 혹시, 말을 섞기 불쾌하신 건가요?”

리히튼이야말로 묻고 싶었다. 내가 네 출신을 불쾌하게 여길 정도의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다. 나는 이미 부인을 둔 몸이니, 다른 귀부인의 출신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심이세요?”

“예.”

긴장으로 굳어 있던 제네바 부인의 얼굴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리히튼 각하는 다정하신 분 같아요. 귀족들에게 결혼은 후계를 얻기 위한 의무에 불과한데…. 그래도, 나름대로 충실하신 것 같아서….”

아그레인의 이름이 언급되기라도 할까, 주의를 기울이며 눈을 얇게 떴으나 다행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제네바 부인은 울긋불긋해진 얼굴에 열심히 손으로 부채질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횡설수설…. 각하의 눈에도 제가 한심하게 보이죠?”

한심? 리히튼은 어쩌면 생에 가장 큰 용기를 내고 있을 눈앞의 제네바 부인을 응시했다. 그녀가 어떤 새로운 의복을 걸치든, 그로 인해 꽁꽁 감추어져 있던 어깨와 쇄골이 훤히 비치든 말든 리히튼은 일말의 새로운 감정도 느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제네바 부인이 뱉은 짧은 한마디에는 조금 관심이 갔다. 한심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리히튼 본인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으니까.

그의 삶에도 놀랍도록 평화로웠던 생이 있었다. 모든 불운을 내던지고 아주 먼 곳으로 도망쳤던 생이. 그 오랜 과거 속의 리히튼은 황성으로부터 아그레인을 돌려받은 뒤, 약속과 의무를 내팽개치고 잉고르드에서 벗어났었다. 마차에 올라 수십 일을 달려 그렌페르크 제국에서 가장 먼 땅을 밟았다.

그러나 피에 새겨진 증오와 복수로부터 도망친 건 오직 리히튼뿐이었다. 그는 아그레인의 삶이 복수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그레인이 증오를 버리고 그를 선택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끔찍했던 과거를 완전히 잊는 것뿐이었다. 때문에 리히튼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아그레인이 과거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그 약’을 먹였다.

이슬라의 뿌리. 이슬라의 잎은 이슬라의 환청이라 불리며 대개 마약이나 치료제 따위로 사용되지만, 그 뿌리를 달여 얻은 액체는 단 한 잔만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극독이었다. 이 극독을 물에 희석해 보관하면 잉고르드 가문의 비독인 잉고르드의 독이 된다. 잉고르드의 독은 얼마나 희석하는가에 따라 약간의 기억만 잃는 데서부터 영원히 백치가 되기까지 중독 현상의 편차가 심했다. 부디 마지막 삶이길 바랐던 이번 생에서, 리히튼이 아그레인을 트리비아체 가문에 보내기 전에 사용했던 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히튼이 아그레인에게 선물한 독은 희석된 독이 아닌 뿌리의 원액이었다. 불사의 저주는 아그레인의 육체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했으나, 그녀의 기억만은 지키지 못했다. 독을 마신 아그레인은 열흘을 내내 앓다가 눈을 떴고, 말만 겨우 할 줄 아는 백치로 다시 태어났다. 리히튼이 몇 번째로 반복했을지 모를 삶에서 고대하고 고대했던 순간이었다.

‘리히튼. 하늘이 붉어.’

어린아이로 퇴화된 아그레인이 말을 다시 배우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일 년이 흐른 뒤였다. 둘은 가까운 마을이라곤 걸어서 이틀이 걸리는, 인적 하나 없는 깊은 산속에서 오직 둘만 바라보며 살았다. 언어를 배운 후 아그레인의 감정 표현은 더욱 풍부해졌다. 나뭇가지에 오른 파란 새 한 마리로 반나절을 웃고 울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숲속에 갇힌 백치가 아니었다.

‘리히튼. 네가 나를 만지면 내 안쪽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

행복했다. 아그레인이 다시 말을 배우고, 사랑을 알며, 그와 감정을 교류하던 그 시간은 리히튼이 지나온 삶 중에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고,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했으며, 영원히 행복할 것임을 서약했다. 리히튼은 이 꿈만 같은 시간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기를 바랐다.

‘리히튼. 나도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모든 시간이 완벽할 순 없었다. 아그레인은 백 일에 한 번 마을로 내려갈 때마다,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는 아이들을 보며 우울한 낯을 하곤 했다. 가질 수 없는 아이는 아그레인이 지닌 유일한 욕망이었다. 반복되어 온 삶에서 그녀가 잉태의 욕구를 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제야 리히튼은 비인도적이고 고역스러운 삶이 그녀의 인간적인 모든 바람을 앗아갔음을 알게 되었다. 아그레인은 지옥에서 도망친 후에야 평범한 여자가 된 것이다. 나무에 오른 새를 사랑하고, 리히튼을 사랑하며, 아이를 사랑하는… 그런 평범한 여자가….

그랬기에 리히튼은 모르는 척했다. 소소한 이유를 명목으로 마을에 내려가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도, 아그레인을 위해 묵묵히 참았다. 아그레인은 종일 아이들과 어울렸다. 아이들을 위해 사탕을 샀고, 아이들을 위해 옷을 샀으며 아이들을 위한 요리를 배웠다. 그렇게 가지지 못할 존재에 대한 집착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갈 즈음.

‘리히튼.’

그날이 도래하고 말았다.

‘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 줘. 이 기억을 지워 줘.’

중독된 육체가 회복기에 접어들어, ‘태양의 힘’이 발현하기 시작한 그날이. 아그레인은 밤낮을 앓았다. 리히튼이 호우를 뚫고 마을에서 해열제를 구해 돌아왔을 때, 아그레인은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집 밖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얼굴로, 아니,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도 이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었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그렇지? 지금 내게 벌을 내린 거지? 말을 듣지 않았다고 벌을 주는 거잖아. 미안해, 리히튼. 이제 멋대로 굴지 않을게. 이 기억을 다시 꺼내 줘. 내 것이 아닌 기억을 다시 지워 줘….’

그때, 리히튼은 불꽃보다 뜨거운 빗물을 맞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그레인은 이런 나약한 소리를 하지 않아. 이 여자는 아그레인이 아니야. 내가 내 손으로 그녀를 죽였어. 복수와 증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그레인 캐롤드를 죽여 버리고 말았어. 아그레인을 텅 비어 버리도록 만들었어.

그는 서랍의 가장 안쪽, 잉고르드에서 도망쳐 온 그날부터 보관해 둔 여분의 독약을 꺼내 들었다. 이 독을 사용한다면 그들에겐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아그레인은 그녀의 바람대로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잃을 것이며, 리히튼은 또다시 백치가 된 아그레인과 안온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원한다면 영원히. 이 독만 그의 손에 남아 있다면, 그가 바라는 한 영원히.

‘리히튼.’

침대에 누운 아그레인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어디로 가지 마. 손을 잡아 줘.’

리히튼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약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열 살 남짓의 어린아이를 들어 올릴 정도로 건강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한심해.’

‘리히튼, 리히튼….’

‘나는 너무 한심한 것 같아, 아그레인.’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를 감싼 세상이 너무 매정하고 아파서,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 여긴 스스로가 미치도록 한심해 죽고 싶었다. 세상에 도망칠 수 있는 건 없다. 그가 등진 모든 것은 결국 새까만 그림자가 되어 턱 위까지 차오르고 말았다.

아그레인, 나는 이게 우리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어. 그게 자위라는 걸 알면서도 괜찮다고 여겼어. 내일이 기대되고 모레가 기다려졌으니까. 네가 오직 나를 위해서 순수하게 웃어 줬으니까. 나와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이토록 한심한 삶은 지속될 가치가 없다. 만들어진 허구는 결국 파도에 부딪힌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날 밤, 리히튼은 이 숲속에 다신 발을 딛지 않으리라 스스로 맹세했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거라 여겼던 나락의 수레바퀴 속으로 다시 몸을 던졌다.

한심이란 그런 것이지. 옳다고 생각했던 길이 제 바람과 정반대의 길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감정. 하지만 그 부정적인 감정과 깨달음이 리히튼을 지금의 이 시간대로 이끌었다. 그런 면에서, 리히튼에게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감상은 자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가장 확실한 사다리였다. 그는 오랜 과거의 회상을 끝내며 제네바 부인의 한탄에 지나가듯 대답했다.

“한심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그 기분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부인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경험자인 제가 확신합니다.”

접점이라곤 지극히 우연뿐인 인물과 이 정도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마 그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지 않았다면 이런 말도 남기지 않았을 터였다. 그는 따뜻한 차를 입가에 가져가며 마지막 한마디를 건넸다.

“나는 부인이 꽤 용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인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소모적이니…. 후회하고 고민하는 데는 최소한의 시간만 들이라 말하고 싶군요.”

리히튼이 할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일 새벽에 마차가 도착한다면 잉고르드로 돌아갈 테고 제네바 자작이라면 몰라도 부인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일 것이다. 이후로 제네바 부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서재가 내내 고요했던 것을 보아 조용히 나간 듯했다.

***

그날의 늦은 밤. 아그레인이 평소에 하지 않던 잠투정을 했다.

“밝아서 잠을 못 자겠어.”

일그러진 그녀의 시선은 침실 안쪽에 밝게 켜진 등불을 향했다. 리히튼은 저녁 동안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자료들을 한창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는 긴 시간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 아그레인에게 다가갔다. 불빛을 가리고 침대 맡에 앉자, 아그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리를 껴안고 앓는 소리를 했다.

“며칠 내리 잠을 잘 못 잤더니 신경이 예민해졌나 봐. 게다가 장마가 길어서 공기가 습하니까 낮이고 밤이고 불편해. 잉고르드로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새벽에. 불을 끌 테니까 걱정 말고 자.”

“자려고?”

“옆방에서 빠르게 정리만 하고 돌아올게.”

고개를 주억인 아그레인이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리히튼은 등불을 끄고 침실 옆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아그레인은 웬만해선 그에게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계속 잠을 뒤척였다고 했으니, 실제로는 제네바에 온 이래 며칠 동안 얕은 잠만 잔 모양이었다. 아그레인은 워낙 잠귀가 밝고 잠자리에 예민해 자주 방문하는 황성에서조차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더군다나 제네바 저택은 연식이 오래돼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가 잦고 습하니, 아그레인이 고역스러워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은 자료는 대충 훑기만 하고 침실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방 안에 들리는 건 빠른 속도로 넘어가는 책장의 소음과 미약하게 흔들리는 등불의 소리가 전부였다.

그러던 와중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전에 없던, 침대 앞에 작고 유려한 선을 지닌 여자가 보였다. 하루 사이에 붉어졌던 입술은 밤이 되자 장미 꽃잎을 댄 듯 더 붉어졌고, 조금은 차분했던 복장마저 이제는 가슴과 허리가 훤히 내보이는 나이트가운이 되어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리히튼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제네바 자작이 보냈나?”

“…아니에요.”

“그렇다면 벤허튼 제네바?”

여자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들리지 않는 대답에 리히튼의 고개가 다시 그쪽을 향했다. 조금은 설레는 감정이 느껴졌던 직전의 눈빛과 다르게, 그로부터 한 번 간과된 탓인지 바짝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 제네바 부인은 드러난 목덜미가 움직이는 게 보일 만큼 크게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억지로… 억지로 보내진 게 아니에요.”

그건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이다. 제네바 부인은 맨발로 그에게 다가왔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천을 자의로 내려 리히튼 앞에 섰다. 그리고 은근한 손길로 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이런 제 선택을 혐오하셔도 좋아요. 더럽다면 잊으셔도 돼요. 저는, 저는 그저….”

리히튼은 잠시 눈을 감고, 벌레가 기는 것 같은 이 감각을 어떻게 떨쳐 낼지 고민했다. 당장 옆방에는 아그레인이 선잠에 든 채였고, 저택은 고요했으며, 제네바 부인의 발걸음은 아주 비밀스러운 방문이었다. 부인은 떨림이 여실히 전달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사람과 사랑이라는 것을 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순간, 서재에서 제네바 부인과 나눈 찰나의 대화가 이 사건의 주범일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가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쯤이야 진작 눈지챈 바였다. 하지만 소심하고 조심스러워 보이는 그녀가 고작 말 한마디에 이런 식으로 대담한 짓거리를 마음먹을 줄은 몰랐다.

“하룻밤만이라도 좋아요. 저를 가져 주세요, 리히튼.”

이래서 쓸데없는 친절은 골치 아픈 결과를 이끌고 오지. 이는 리히튼이 아그레인과 외부인이 사소한 몇 마디를 나누는 것에도 학을 떼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그레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 혼미할 정도로 매력 있는 여자였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그의 목을 옥죄는데 다른 남자는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밤잠을 설칠 게 뻔했다.

이런 이야기는 아그레인과 예전에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리히튼에게 ‘당신이 반죽되다 만 밀가루처럼 생겼다면 내가 조금 더 마음이 놓였을 텐데.’라며 그런 얼굴로는 친절하든 매정하든 누구나 홀릴 테니 차라리 입을 닫고 벙어리처럼 지내라는 소리를 했었다.

리히튼이 그런 귀여운 경고를 마냥 웃어넘기지 않은 이유는 오늘 같은 일이 아그레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가 아그레인을 얻기 위해 도달한 작금의 위치엔 더럽고 같잖은 날파리가 몹시 자주 꼬였다. 아그레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나름의 방식으로 제 마음을 내보인 것일 터였다.

속이 쓰렸던 리히튼은 그 이후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방탕한 인물과는 무조건 거리를 벌렸다. 여자와는 가능한 대화랄 것도 나누지 않았으며 미혼의 여자는 더더욱 멀리했다. 한데 고작 서재에서의 한마디가 또 이런 식으로 그를 귀찮게 하고 만 것이다. 오래전의 리히튼이었다면 제네바 부인을 벌레만도 못한 취급 하며 자진해 침실을 벗어났을 것이다. 그만큼 지독하게 당해 온 역사가 기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불편함을 표했던 아그레인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리히튼이 서재에서 굳이 한마디 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작용했다. 아그레인이 이 여자에게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싶은 마음에. 리히튼은 점점 대담해지는 손길을 쳐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며 그 앞에 섰다.

“내가 기혼이란 걸 알고 있습니까?”

“모를… 모를 수가 없지요.”

“알면 나가십시오.”

“리히튼.”

제네바 부인은 뻔뻔하다 못해 애절해 보였다. 리히튼은 어느새 방 안에 가득 풍기기 시작한 지독한 향수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 부인이 오늘 일을 알면 어찌 행동할 것 같습니까?”

“그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게 조용히 사라질게요.”

“이미 더럽혀졌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숭고한 사랑과 나의 끔찍한 사랑을 충분히 더럽히고도 남았지.”

제네바 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 사랑 있는 정략결혼이 어디 있나요?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분도 벤허튼….”

“말대답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최대한 친절하게 굴고 있는 게 안 보이는 건가?”

리히튼은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로 제네바 부인을 노려봤다. 그제야 꼼짝도 않던 여자의 두 다리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겁을 줘야 말을 듣는 것도 이제는 질색이었다. 제네바 부인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리히튼 앞에 섰다.

“한 번쯤은… 단 한 번은 괜찮잖아요. 이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아 주세요. 전부 잊을게요. 없었던 일로 할게요.”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리히튼은 제네바 부인이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그를 찾아온 후부터 제네바 저택에 방문했던 과거의 선택을 무려 열 번 이상 후회하고 있었다.

“고기를 써는 나이프로 찔려 본 적 있습니까?”

“무슨….”

“경험해 보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십시오. 다음은 없으니까.”

우습게도 궁금하기는 했다. 고루한 치정극에서 아그레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리히튼은 상대 남자의 목숨을 끊어 놔야 마음이 놓일 것 같기는 했다.

“리히튼! 내게 수치를 안겨 줄 셈인가요?”

“한 번만 더 내 이름을 입에 담으면….”

그는 뒷말을 삼켰다. 대신 복도로 나와 옆방 앞에 섰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아그레인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가 침실에서 나왔다. 리히튼은 기사에게 명령했다.

“제네바 부인이 길을 잃은 모양이다. 방으로 모셔라.”

기사는 다소 혼란스러운 눈이었다. 그는 아그레인의 호위 기사가 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리히튼과 함께해 온 기사였다. 때문에 오늘 같은 해프닝의 뒤처리는 수도 없이 해왔다. 리히튼은 무례하게 구는 귀족들에게 퍽 자애로운 편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음습하게 관심을 갈구하는 귀족이나 귀부인들에겐 가차 없었다. 남녀 할 것 없이 그따위 더러운 일만 평생 하게 해 주겠다며 사창가에 내던진 적도 적잖았다. 그렇다면 제네바 부인은 어떤 식으로? 호위 기사의 의문을 눈치챈 리히튼이 재차 입을 열었다.

“다른 곳이 아닌 방으로.”

“예.”

그즈음 제네바 부인은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이 거무죽죽해 있었다. 이따위 친절은 고맙지 않다며 제 발로 돌아가려는 부인의 뒤를 호위 기사가 뒤따랐다. 그들이 시야에 사라진 후, 참았던 피로감이 리히튼의 전신을 덮쳤다.

또 더러워졌군. 이런 역겨운 향에 더럽혀진 꼴로는 아그레인에게 돌아갈 수 없다. 리히튼은 호위 기사가 돌아올 때까지 침실의 문을 지키다가 다시 옆방으로 돌아갔다. 아그레인이 곁에 없는 밤은 지겨우리만치 길었다.

***

리히튼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방 안에 진동하는 향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창문을 열어 두고 잠들었더니 바닥이 빗물로 흥건했다. 다행히 셔츠에 미미하게 배어 있던 냄새가 모두 빠져나가 있었다.

그는 구겨진 옷깃을 펴고 침실로 향했다. 분명 마땅한 침구도 없이 소파에 엎어져 잠든 것 같은데, 푹신한 담요가 어깨를 덮고 있었던 것을 봐선 해가 뜨자마자 아그레인이 찾아왔던 것 같다. 지금쯤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으려나. 문을 밀어낸 그는 챙겨 온 담요를 의자에 걸쳐두려 했다.

한데, 그보다 앞서 아그레인을 찾아온 방문자가 있었다. 벤허튼 제네바였다. 벤허튼과 아그레인은 다소 과격한 자세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특히 아그레인이 오른손에 쥔 물건은 아침 햇빛을 받아 은색으로 번뜩였다. 리히튼을 돌아본 아그레인이 답지 않게 당황하며 두 손을 들었다.

“이 나이프는, 그러니까…. 오해야. 늦은 점심을 하려던 중이었어.”

오해. 아그레인이 말하는 오해가 어떤 의미인지 안다. 고작 오전 여덟 시밖에 되지 않는 시각에, 여자 혼자 남아 있는 침실을 방문한 청년 귀족과 그 귀족을 마주 보고 선 부인 사이에 피어날 수 있는 오해를 뜻하는 것이겠지. 아니면 단순히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겨나는 상황이라거나.

벤허튼의 표정은 아그레인만큼이나, 혹은 보다 훨씬 더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는 무얼 노리고 잉고르드 내외의 침실을 찾아온 것인가. 그것도 공교롭게 아그레인만 남은 침실에. 어젯밤 지극히 자의로 그를 찾아 왔다던 제네바 부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리히튼.”

재차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리히튼이 천천히 아그레인에게로 다가갔다.

“그 점심이 벤허튼 제네바였던 건 아니겠지.”

그리고 고기가 아닌 사람에게 휘두르는 용도의 물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손에서 나이프를 가져갔다. 아그레인은 순순히 물건을 내놓고 그의 뒤에 섰다. 그녀는 이 저돌적이고 멍청한 청년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을 것이다. 모든 건 그저 벤허튼 제네바의 우발적인, 혹은 계획적인 접근에 벌어진 상황이었을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머릿속 한편에선 한 폭의 못마땅한 상상화가 펼쳐졌다.

아그레인이 익숙하다는 듯 입에 담는 벤허튼 제네바의 이름. 점심 식사 자리에서 불편함은 언급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던 아그레인. 그 이유가 벤허튼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 귀찮은 티를 내도 거절하지는 않던 산책과 티타임. 리히튼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망상을 털어 내려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그레인에게 전황을 물었다. 아니, 묻기 전에 아그레인이 먼저 설명했다.

“당신이 걱정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니었어.”

“나이프를 든 게?”

“그건….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라. 당신도 알잖아. 벤허튼 제네바가 내 몸에 손을 대려 했어.”

“그건…!”

황급히 변명하려는 벤허튼의 목소리를 리히튼이 막아섰다.

“입 닥쳐.”

“가, 각하.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의도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입을 연다면 네 부모가 작금의 상황을 알기 전에 창문 밖으로 떨어뜨려 고깃덩이으로 만들어 주마.”

리히튼의 눈이 어젯밤과는 비교도 불가할 만큼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시선은 빌어먹을 벤허튼 제네바가 아닌 호위 기사에게로 향했다. 그 눈길을 알아챈 아그레인이 리히튼의 턱을 다시 원 상태로 돌려놓았다.

“그를 탓하지 마. 요 며칠 그에게 당부했었어. 나와 벤허튼 사이를 끼어들 땐… 내가 참지 못하고 이자를 죽이려 들 때만 끼어들라고.”

“저 개새끼가 틈만 나면 당신을 건드렸다는 소리야?”

“그럴 리가! 으음. 일단 추파를 던지는 것에 그치기는 했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부터 찾아오더니, 너무 곱다는 이유로 내 손을 한 번만 잡아보고 싶다는 거야. 은근슬쩍 내 옆자리에 앉아 어깨에 손을 두르기에….”

뒷말은 없었다.

“벤허튼 제네바.”

벤허튼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예, 예. 각하.”

“내 부인을 찾아온 이유는?”

“더러운 마음은 일절 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고 생각해, 가볍게 차를 마실 생각으로….”

“그렇다면 내 부인께서 남기신 증언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맹세컨대 각하, 저는….”

“참고로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신뢰할 마음이 없다.”

조금도 말장난처럼 느껴지지 않는 단호함에 벤허튼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부디 제 말을….”

“게다가 당부한 것과 달리 내 허락도 없이 입을 여는군.”

리히튼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벤허튼이 나뒹구는 꼴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려다봤다. 이 정도면 그로서도 많이 참은, 몹시 신사적인 응대라고 할 수 있었다. 고작 주먹 한 번 휘두르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네 친부가 내게 사업 투자를 부탁했다. 다 죽어 가는 영지를 살리기 위해서였지. 수완이 좋지는 않으나, 무엇이 중요한지는 확실하게 아는 남자야. 하지만 그런 제네바 자작도 발정 난 아들 때문에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줄은 상상도 못 했겠군.”

그 말에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던 벤허튼이 전광석화처럼 몸을 일으켰다. 성공. 투쟁. 도전. 벤허튼의 바람이 순항하기 위해선 자금과 사람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제네바 영지의 난관은 반드시 타파되어야 했다. 자신 때문에 가문에 위기가 닥쳤음을 깨달은 벤허튼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각하! 아, 아니…. 잉고르드 부인!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주제를 모르고….”

“오늘 제네바 자작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남기고 떠날 거다. 한 달이 흐른 후에는 벤허튼 제네바가 감히 나의 부인을 상대로 욕정했으니, 그 대가로 제안을 거절하겠단 서신을 보낼 예정이지. 나를 포함한 그렌페르크 제국의 그 어느 귀족과 자본가도 제네바 영지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제네바 자작이 직접 네 목을 베어 영지에 걸어 놓지 않는 이상, 오늘부로 제네바 영지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거라 맹세한다.”

“각…!”

“알아들었으면 꺼져. 아무리 화가 나도 내 부인 앞에서 이 이상의 폭력은 휘두르고 싶지 않으니까. 셋을 세기 전까지 나가지 않는다면 한쪽 다리부터 잘라 주마. 내 손에 멸문한 가문이 한둘이 아님은 알고 있겠지? 하나, 둘….”

호위 기사에게 다가간 리히튼이 보란 듯이 검을 빼들었다. 그의 무위는 그렌페르크 제국민 중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창백하게 질린 벤허튼이 꼴사납게 비틀거리며 줄행랑을 쳤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확인한 리히튼이 호위 기사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던 대로 해.”

기사는 짧게 고개를 주억이고 침실을 나갔다. 벤허튼 제네바는 사흘 후 거세될 것이다. 상대도 못 봐가며 욕정을 보이느니 아예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더 유익한 일생을 보내는 데 보탬이 되리라 확신했다. 문이 닫히고, 적막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아그레인이 리히튼의 등을 껴안았다.

“역시, 나의 멋진 왕자님. 한걸음에 달려와서 벤허튼의 손가락을 구해 주셨네. 황홀할 만큼 멋져서 또 한 번 반해 버렸어.”

“손가락?”

“당신이 오지 않았다면 내가 잘라 버렸을지도 모르잖아.”

농담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그레인은 그대로 리히튼을 이끌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 식어 버린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리히튼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아그레인만을 향하자, 차를 홀짝이던 아그레인이 그를 돌아봤다.

“왜 그래?”

리히튼은 참고 참았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벤허튼 제네바를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가 뭐야?”

“질투해?”

“어서.”

아그레인은 대뜸 바람 빠지듯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곤 리히튼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당신의 그런 표정을 다 보다니. 그래도 벤허튼 제네바의 이름을 부른 보람이 있네. 정말 유일한 보람이야….”

리히튼은 어색해진 기분으로 제 눈가를 쓰다듬었다. 당장 멀지 않은 곳에 화장대가 있었으나 자신의 표정을 확인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아그레인은 짧은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그 꼬마 녀석의 역겨운 앙탈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앙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었다.

“자기를 친한 동생처럼 여기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면 내 뒤를 강아지처럼 따라다닐 거라지 뭐야? 이 표현도 물론 제네바 벤허튼에게서 나온 소리야. 글쎄, 제 입으로 자기를 강아지라 묘사했다니까? 어린 나이에 머리라도 덥수룩했다면 이런 의문을 갖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잘도 받아줬군.”

아그레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얼굴에 대고 차마 벤허튼과 함께 차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거나 하는 둥 즐겁게 놀던데, 하고 물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느끼는 소유욕이 아이의 소유욕보다 어리고 치기 없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했잖아? 상대하지 않으려 하면 되도 않는 앙탈을 자꾸 부린다고. 나는 그자의 그런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에둘러 욕하거나 면전에 대고 수치를 줬는데도 오히려 흥분하니까….”

그 순간 리히튼은 반사적으로 아그레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던 와중에 가슴께까지 옷을 들추려 하자 아그레인이 간지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소파 위로 무너졌다.

“그런 흥분이 아니야! 아닌가? 비슷한가? 하지만 흥분했어도 당신처럼 굴진 않았을 거야…. 내 말은 거칠게 대응할수록 더 사랑에 빠진 얼굴을 했다는 거야. 당신에게 말하지는 못 했지만 정말, 참기 힘들었지. 정말! 은근슬쩍 그만 만져, 리히튼. 할 거면 차라리 제대로 하든가. 하여간 처음에는 방에만 숨어 있으려 했는데, 계속 찾아오니 차라리 조금씩 상대해 주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어. 어차피 우리는 손님이고 곧 잉고르드로 돌아갈 테니까. 그리고 평생 볼 일 없겠지….”

“그러다가 나이프까지 쥐게 되었고?”

“잘 아네.”

아그레인은 근래 드물게 열성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의 존재를 기개 있으나 고요하며 파문 없는 호수로 여기는 자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을 모습일 터였다.

어린 귀부인들은 물론, 젊은 귀족들 중에는 은근히 아그레인 특유의 냉철하면서 언뜻 무례하게 느껴지는 언행을 동경하는 이가 많았다. 물론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아그레인을 폄하하고 싶으면서도 리히튼과의 결혼을 사랑 없는 정략결혼 즈음으로 여기는 자들은 은연중 아그레인에 대해 ‘저리도 기가 세고 딱딱하니 사랑을 주고받고 싶은 매력은 없다’라고 지껄이는 이도 있었다. 그 소리를 코앞에서 들은 리히튼이 술잔을 집어 던지고 발길질한 뒤부터는 그와 털끝만큼도 유사한 뒷말이 돌게 되지 않았다. 중앙 권력에서 먼, 순진한 귀족들 정도나 리히튼과 아그레인의 사이가 소원하다고 여겼다.

“당신이 잉고르드에서 평생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일들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뜬소문처럼 너의 이야기가 세상에 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존재하지도 않는 듯 사라질 텐데. 영원히. 모두들 네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또 질투하는 거야.

그러나 리히튼은 그 동경과 질투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아그레인으로부터 느끼는 수백, 수천 가지의 감상 또한 모두 자신 혼자 소유하고 싶었다. 털끝만큼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아그레인이라는 이름조차 그의 재산으로 두고 싶은 욕망으로 간절했다. 훔치면 벌하고, 욕심내면 복수할 수 있도록.

“리히튼.”

아그레인이 자신의 위로 쏟아진 리히튼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장미꽃보다 붉고 산딸기보다 탐스러운 적색의 머리칼이 하얀 어깨 위로 흐트러진 모습은 마치 불에 타오르는 나비와도 같았다.

“겁먹지 마. 당신이 원한다면 그럴 수 있어.”

네 새장 안에서만 숨 쉴 수 있어. 네 눈에 밟히는 공간에만 발을 둘 수 있어. 아무와도 만나지 않을 수 있어. 아그레인은 리히튼의 등을 껴안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위해 살아. 이런 나를 책임지기로 했잖아.”

그녀는 조금만 힘을 줘도 힘없이 꺾일 것 같은 얇은 손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그리고 위로하듯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에 차분해지려던 리히튼의 숨이 가라앉기는커녕 더 거세졌다. 그는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제 몸에 더 가까이 두고 입술에 닿는 모든 살결을 씹어 먹을 기세로 깊게 빨아 들였다.

코끝으로 밀려오는 아그레인의 향기가 그를 미치게 했다. 그녀는 리히튼을 이성의 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고, 리히튼은 그런 감각이 싫지 않았다. 자극받을수록 더 난폭하게 굴어 아그레인의 몸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모두가 알아볼 부위에 그의 이름을 새기고 싶다가도, 그 어떤 이도 열어볼 수 없게 자물쇠를 채우고 싶었다.

“사람들의 눈을 도려내고 싶어. 네 목소리를 듣는 귀도, 네 이름을 부르는 혀도 네 체취를 맡는 코도.”

때때로, 이런 넘치는 감정을 감당하기에는 그의 그릇이 너무 작다고 느껴졌다. 그럴 때면 참을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이 몰아쳤다. 수백 년을 지켜온 사랑과 집착과 고통은 그 혼자 버티기엔 너무나 거대한 감정으로 성장해 있었다. 언젠가 이 감정을 담아 둔 둑이 무너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 와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만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이 평화가 지속될 수 있을까?

“네가 아름답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그레인.”

나는 이보다 더한 상상도 해. 아그레인은 그 어떤 바람도 이해한다는 듯 리히튼의 몸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사랑스러워.”

***

정오가 되기 전에 잉고르드로부터 마차가 도착했다. 살면서 이보다 더 잉고르드의 마차가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제네바 가족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제네바 저택을 떠났다. 세 명의 제네바 중에서 오직 제네바 자작만이 기대에 부푼 웃음을 짓고 있었다. 벤허튼 제네바는 죄인이 된 듯 바닥만 바라봤고, 그나마 제네바 부인만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차분하게 인사했다.

며칠 지내지도 않았는데 그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리히튼은 제네바 쪽으론 침도 뱉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제네바 영지를 떠나는 동안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그레인.”

“응.”

“어제 식사 자리에서 마지막 말은 왜 남겼던 거야?”

어쩐지 불편하다는, 답지 않게 딱 절반만 솔직했던 그 감상. 리히튼의 질문에 아그레인은 새삼스러운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원래 그래.”

“알아. 하지만 어제는 조금 달랐지.”

“그랬나?”

아닌 척해도 은연중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다소 음울하다. 아그레인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야. 그냥, 제네바 부인이… 내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아 있었어. 머리색도, 눈동자 색도, 얼굴형도 모두. 아마 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평범하게 나이를 먹었다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아.”

“누구를?”

“당신은 잘 모를 거야.”

억지로 캐물을 의도는 없었다. 그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며, 리히튼은 가볍게 고개만 주억이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여름 나무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 혹은 십 년 후,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그레인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리히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리히튼이 잘 알지 못한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잉고르드에서 황성으로 도망쳤을 때 만난 하녀가 있어. 발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예쁘장한 하녀였지….”

비가 멈춘 하늘은 눈이 아플 정도로 화사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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