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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Episode 1. 캐롤드 (23/24)

Side Episode 1. 캐롤드

‘아그레인.’

일그러진 목소리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 목소리는 텅 비어 허무한 듯하기도 했고, 애타는 심정에 달달 끓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남자의 부름에 심장이 조이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너는 영원히 내게 복종할 수밖에 없어.’

이윽고 내려오는 입술은 뜨거우면서 차가웠다. 아릿한 자극이 흔적을 남길 때마다 마치 시체가 된 듯 몸이 무겁고 딱딱해졌다. 남자는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운명이고….’

그는 내게 욕망할지언정, 내 몸을 탐하지는 않았다. 씹어 먹고 싶다는 눈으로 전신을 훑다가도 결국 인내했다. 나는 그런 남자가 우스웠다.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는 격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네 영원한 주인이며….’

남자는 오랜 시간 체취를 갈구하던 내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거칠게 쉰 음성으로 내게 명령했다.

‘너는 영원히 내 거야.’

끔찍한 손아귀가 나를 삼켰다. 나는 그의 정신적 유린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았다. 빌힐름…. 빌힐름! 나는 네가 너무 싫어.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평생 너를 저주할 거야. 평생, 죽어도 너를….

‘아그레인.’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서늘하면서도 안온한 봄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 걸레 조각처럼 찢겨 흩어진 내 몸을 모아 소중하게 그러쥐었다. 그리고 아이를 돌보듯 두 팔 안에 가득 안았다.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박동이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아아, 그였다. 그는 내게 밝은 미소를 짓거나, 내 등을 토닥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내가 그 지옥을 함께 걷게 해 줘.’

봄볕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목 안이 간지러웠지만, 그를 더 깊이 안고 싶었다. 단단한 손이 내 허리를 잡아 당겼다. 그가 내 입 안을 훑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간간히 퍼지는 열기에 안달이 나 그의 몸을 더 가까이 이끌었다. 더, 더 나를 가져 줘.

‘아그레인….’

그의 손이 급박하게 내 의복을 풀었다. 매끄럽고 단단한 손가락이 살결에 스쳤지만, 그뿐이었다. 짙은 열망에 이글거리는 청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손이 없으면 이를 사용해서라도 나를 탐하겠다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그가 내 의복을 벗겨내는 일은 없었다.

“…아.”

모두 꿈이었으니까.

“아가씨.”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침실의 암막을 거두어갔다. 나는 거침없이 내리쬐는 빛을 피해 베개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잠기운은 여전했지만, 배 아래가 이상하리만치 뜨겁고 간지러웠다.

‘아, 이런.’

내가 그런 꿈을 다 꾸다니. 머릿속에 떠다니는 ‘그’ 얼굴을 힘겹게 털어냈다. 흡사 강제로 발가벗겨진 것 같은 수치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옷을 걸친 상태였다. 누군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다행스럽게 느껴진 때가 없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오늘은 이상하게 일어나기 힘들어하시네. 후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날 강제로 일으킨 하녀가 티 트레이에 옮겨온 아침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느릿하게 마른세수를 하며 물었다.

“킨이 왜?”

“황성에서 어떤 공문이 도착한 것 같은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각하께서는 마뜩치 않으시다는 눈치라네요.”

“무슨 일인지 예상되네.”

공문은 무슨. 보나마나 혼인을 닦달하는 서신이었겠지. 차를 따른 하녀가 텅 빈 티 트레이를 끌고 나가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서랍 위에 서신 세 장을 올려놨어요. 하나는 황제 폐하, 하나는 모리타트 잭 공작님, 마지막 하나는 그분께 도착한 서신이어요. 어휴, 요 며칠은 또 그분께 답장하신다고 늦잠 자시겠어요.”

“셰즈.”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눈으로 쏘아봤지만, 하녀는 새침 떼는 낯으로 여유롭게 방을 나갔다.

하녀, 셰즈는 오래전 캐롤드 가문에서 일하던 하녀장의 딸이었다. 내가 캐롤드 후작저에서 사라진 후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용인들이 강제로 저택을 떠나게 됐는데 셰즈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해고당함으로서 불길에 파묻히는 참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셰즈는 여러 귀족 가문을 돌고 돌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캐롤드 가문의 오명이 벗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시신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은 캐롤드 저택 주변으로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었었기에 손을 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는 목숨을 잃었던 고용인들 모두가 새로운 캐롤드 후작저에 안치된 후였다고 했다. 킨은 셰즈를 바로 알아보고 그녀에게 위로금을 내렸다. 그러나 셰즈는 위로금만 받고 떠나지 않았다.

텅 빈 저택.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 겨울의 씁쓸함이 가시지 않은 황량한 공간. 셰즈는 이런 추운 곳에, 차마 킨을 홀로 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셰즈를 비롯한 열댓 명의 고용인들이 다시 캐롤드로 돌아왔다. 고택과 함께 과거의 영광을 잃은 캐롤드가 그나마 사람이 살 만한 온기를 가지게 된 건 모두 그들 덕분이었다. 과거의 캐롤드를 아직 잊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러한 사실은 킨에게 많은 힘이 된 듯했다. 어쩌면 나에게도.

‘모리타트는 또 무슨 일로 서신을 보낸 거지?’

배를 채우면서 가장 먼저 모리타트의 서신을 펼쳤다. 짧지도 않은 종이 안에는 그의 글자로 빼곡했다. 첫 줄만 훑었는데도 무슨 내용인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아그레인 캐롤드 양에게.

더위가 한창입니다. 캐롤드는 한여름에도 다른 곳보다 날이 선선하다고 들었는데, 오늘만큼 부럽게 느껴지는 날이 없군요.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맞습니다, 사실 그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나의 아즈마리아가 올해 안에 식을 올릴 상대를 찾는다고 합니다. 소문으로는 26세 내 청년을 찾는다고 하는데, 이는 올해 27세인 나를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뜻으로….>

이후 내용은 안 봐도 뻔했기에, 대각선으로 대충 훑어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서신의 마지막 세 문장만 확인했다.

<…하여 아즈마리아를 직접 만나, 그녀를 설득해 주심이 어떨지? 당신이 진지하게 대화한다면 아즈마리아의 생각이 바뀔 거라 확신합니다. 그럼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절실한 모리타트 잭 올림.>

쯧, 혀를 차며 서신을 서랍 안에 쑤셔 넣었다.

“날이 더우니 모리타트가 개소리를 하는구나.”

다음으로 집어 든 건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인장이 박힌 금빛 서신이었다.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아도 비비안느의 서신임이 분명했다. 반짝이는 종이 위에 고아한 필체가 그림처럼 휘갈겨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그레인.

잘 지내고 있니? 캐롤드는 어때? 내가 보낸 선물들이 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나는 네가 없다는 점 빼고는 평소와 같아. 지루하고, 무료하고, 그저 그렇다는 뜻이지. 황성에는 언제 다시 올 예정이니? 네가 온다면 여름이 다 가도록 내내 함께 셔벗을 즐길 수 있을 텐데….>

비비안느의 서신은 늘 그렇듯, 마지막에 곧 선물을 보내겠다는 말로 끝났다. 내 방은 이미 그녀가 보낸 옷과 장식품, 그림, 장난감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고도 자리가 부족해 비비안느의 선물만 전시해 놓은 방을 따로 둘 정도였다.

‘이번 여름은 그만 보내라고 해 둬야겠어.’

거처를 별장으로 옮긴 후, 일부러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정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리히튼 역시 사나흘 걸러 선물을 보내오는 터라 이 이상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지 벌써… 한 달인가?’

그리운 마음으로 마지막 서신을 손에 쥐었다. 잉고르드에서 온 서신은 세 개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깔끔했다. 리히튼의 성격이 한눈에 느껴지는, 유려하고 단정한 필체가 보였다. 한데 서신의 두께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두 장, 많으면 세 장까지 오던 편지지가 오늘은 겨우 한 장 들어 있던 것이다. 게다가 적힌 내용이 편지지의 반의반도 채우지 못한 터라 당혹스러웠다. 리히튼이 이럴 리 없는데. 나는 서신을 얼굴 가까이 바짝 끌어당겼다.

<아그레인.

날이 덥군. 몸 관리를 잘하도록 해. 이 서신을 읽을 즈음엔 캐롤드에 도착할 것 같아. 곧 만나지.

리히튼 잉고르드.>

음. 다시 읽어내려도 내용은 똑같았다.

“그가 캐롤드에 온다고?”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졌다. 배는 반도 채우지 못했는데, 이 이상 음식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무려 한 달만의 재회였다. 황성에서의 여름 연회가 끝난 후, 우리는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다. 마지막 날 내 손을 꽉 쥐던 그의 온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리히튼을 안 이래 그토록 아쉬웠던 날이 없었다.

‘나와 함께 잉고르드로 갈 생각은 없는 건가?’

그리 말하며, 리히튼은 어느 때보다 간절한 시선으로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피부 위로 은근슬쩍 닿아 오는 혀끝이 느껴져,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나는 두 눈을 꾸욱 감고 가까스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리히튼이 잉고르드 영지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더군다나 나는 킨이 후작 부인을 들일 때까지 장기간 캐롤드를 비울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 시간만 지나면 리히튼도, 나도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여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다. 당장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나의 의무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가끔 후회스럽기는 하지만….’

그때였다. 누군가 다소 급한 발걸음으로 나를 찾아왔다.

“아그레인!”

방문자는 셰즈가 아닌 솔레르였다. 어제도 밤새 공부에 매진했는지 눈 아래가 어두침침했다. 당혹스러운 낯으로 들어온 그녀는 활짝 열려 있던 문을 닫으며 말했다.

“리히튼 각하께서 오셨어요. 세상에. 이리도 갑작스럽게 방문하실 줄은….”

늘 느끼지만, 리히튼과 관련된 일에는 당사자인 나보다 주위 사람들이 더 호들갑을 떨곤 했다. 내 옆에 달라붙어서 하녀 일을 마다 않는 솔레르를 보고 있자 하니 그런 생각이 더 여실히 들었다. 솔레르는 능숙하게 나의 단장을 돕기 시작했다. 이럴 때의 그녀는 메어리를 떠오르게 했다.

올해 초여름, 잉고르드에서 메어리를 재회했을 때. 그녀는 내 전담 시녀를 자처하며 묻지도 않은 리히튼의 이야기를 시시때때로 줄줄 뱉었다. 기억을 잃은 후의 리히튼이 어떤 음식을 더 찾고, 얼마나 더 유해지고, 사람답게 사는지 등 그때만큼은 캐롤드의 아그레인이 아닌 잉고르드의 수잔이 된 기분이었다.

그들의 순수한 호의가 부담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메어리와 솔레르가 시궁창과 같았던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천운 중 하나라는 걸 안다. 내가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건 의심이 아닌 내가 받은 만큼의, 또는 그보다 더 후한 호의였다.

“페사에서는 이런 시기가 가장 중요했어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이 된 후에 말이에요. 반년에서 일 년 정도 흘렀을 때, 이때가 청혼을 받는 시기거든요.”

연인. 수백, 아니 수천 번을 되새겨도 낯설면서 어색한 단어였다. 리히튼과 내가 연인이라니. 살갗 위에 작은 거미가 우글거리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작년 이맘때의 내가 무얼 하고 있었더라.’

트리비아체에서 도망칠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던 때였나? 아니면 트리비아체도 이미 멸문하고 리히튼의 손에 이끌려 잉고르드에 정착했던 때였나? 그 시기에는 모든 일들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었다. 무지한 채 사지에 내몰려, 살아남기에 급급했지. 고작 두어 계절 동안 나를 둘러싼 세상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가? 태양과 강, 캐롤드와 잉고르드, 과거와 미래, 아그레인과 수잔…. 겨울이 오기 전, 낙엽이 쌓인 리히튼의 땅을 떠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눈앞에 다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기억이었지만, 동시에 오랜 꿈처럼 느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기를 지나쳐 이곳, 캐롤드에서 멀쩡히 숨을 쉬는 내가 믿기지 않았다. 캐롤드 후작이랍시고 영주 노릇을 하고 있는 킨도. 페사에서 이곳까지 따라와 준 솔레르도. 아무렇지 않게 내게 서신을 보내는 비비안느도…. 다른 말도 필요 없이, 그저 리히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말이었다. 나는 그에게 몹시 큰 은혜를 입었으며 그 은혜는 영원이 흘러도 못 갚을 것이다.

“제가 볼 때는 아그레인도 곧이에요. 그러니 당분간은…. 아니, 적어도 청혼을 받게 되기까지는 신경 쓰는 게 좋겠어요.”

헛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청혼. 그를 따라 잉고르드에서 평생을 보낸다고? 그래, 솔직한 심정으로 근래에는 그런 상상이 잦기는 했지.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 내게는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미래다. 솔레르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분과 함께한 지 얼마나 되셨죠? …아! 제 말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날로부터요.”

대답하기에 퍽 난감한 질문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와 내가 함께한 시간은, 나조차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몹시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과거에도 리히튼과 내가 사랑이란 것을 나누었을까? 나누었다면 몇 번의 생에서 나누었을까? 비단 현재만 고려해도 확실한 선을 긋기가 애매모호했다.

그와 나 사이에 있어, 솔레르가 말한 연애라는 것의 시발점은 언제였을까? 잉고르드에서 그가 날 붙잡았을 때? 황성에서 그의 진심을 알았을 때? 페사에서 그와 재회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여름 연회에서 그에게 활짝 핀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 받았을 때?

“마음을 확인한다는 기준이 뭐죠?”

솔레르가 내 머리에 열심히 핀을 꽂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고백이겠죠? 청혼과 고백은 다르잖아요.”

그녀의 말에 지옥까지 함께하자던 리히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숨이 벅차는 느낌이었다.

“그렇담 반년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요.”

“한참 남았다고요? 놀랍네요. 제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는데….”

솔레르는 곧 납득한다는 눈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하기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자, 이제 됐어요. 어서 내려가 보세요.”

거울 속의 아그레인 캐롤드는 이제 조금 사람다운 느낌이었다. 다 죽어 가는 하녀나, 건방진 집시가 아닌 캐롤드 가문의 여식처럼 보였다. 나는 방을 나서서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리히튼과 눈이 마주치면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수십 번을 그렸다. 웃어야 하나? 아니면 일단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야 하나? 적어도 인사는 해야 서운해 하지 않을 텐데. 그는 보기보다 뒤끝이 길고, 세심한 일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막상 다이닝 룸에 들어섰을 땐 그 모든 고민이 허사가 되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그레인 양. 어째 갈수록 신수가 훤해지는군요.”

킨과 함께 나를 맞이한 인물은 리히튼이 아닌 모리타트였다. 킨을 흘겨보며 그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늦장 부릴까 봐 수를 쓴 게 분명했다. 나는 찻잔에 채워지는 커피를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서신과 그 발신인이 동시에 도착했을 줄은 몰랐는데.”

“그야, 내가 직접 들고 왔으니까?”

모리타트가 뻔뻔한 낯으로 싱긋 웃었다. 나는 번거로운 티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용건을 말하면 될 것을. 쓸데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만드네.”

“내가 직접 찾아오면 상대하지 않을 게 훤하지 않습니까? 머리를 잘 썼다고 해 주시죠.”

모리타트 본인도 자신이 거머리처럼 번거롭게 군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를 보면 사랑에 미친 남자가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가 짐작할 수 있다. 이쯤이면 그의 집요한 집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칭찬이 필요하다면야. 아주 잘했어, 모리타트 공작.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구니 아즈마리아 윌이 불편해 할 만해.”

이미 여러 번 들은 악담이라 그건지, 모리타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타박한 건 오히려 킨이었다.

“아그레인. 태도 조심해라. 공작 각하께 무슨 말본새야?”

킨의 잔소리는 날이 갈수록 잦아지기만 했다.

“당사자가 상관 않는데 무슨 상관이야? 너나 조심해. 내게 거짓말이나 한 주제에.”

신경질적인 대답에 킨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거짓말로 나를 속였는지 벌써 까먹은 건가?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좋아. 더는 귀찮으니까 여기서 확실하게 하기로 하지. 공작이 캐롤드를 찾아온 데는 다른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만, 부가적으로는 그 빌어먹을 아즈마리아의 혼인과 관련된 사항도 있을 거야. 그렇지?”

모리타트가 눈을 빛냈다.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게 더 중요….”

“공작은 아즈마리아가 본인에게 마음이 있다고 확신하는 중이고.”

그의 표정이 다소 불편해졌다. 내 표현이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확신하는 중이 아니라, 확실한 겁니다.”

그래. 그 정도 정신력이 되니까 한 여자를 포기하지 못하는 거겠지.

“만약 아즈마리아가 진심으로 공작에게 마음이 떴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다른 남자에게로 보내 줄 거야? 아니, 반드시 보내도록 해. 공작이 이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낼 때마다 지겨워 미치겠으니까.”

모리타트의 낯이 눈에 띄도록 어두워졌다. 나는 그런 그에게 머리에 떠오르는 아무 조언이나 골라잡아 말했다.

“아즈마리아처럼 결혼할 상대방을 찾아. 이왕이면 혼인 일자까지 정해 두는 게 좋겠지. 아즈마리아가 정말 공작에게 마음이 있다면 늦게라도 반응을 보이지 않겠어?”

모리타트의 반응은 비관적이었다.

“그게 어디 쉽나. 그런 장단에 맞춰 줄 여자는 많지 않아요. 누가 본인의 명예에 선을 긋고 싶겠습니까?”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소리 하지 마, 공작. 상대가 누구든 당연히, 진심으로 사랑하는 척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나중의 일이야 어쩔 수 없는 거지.”

네가 나를 도와서 몇 명이나 죽였는데? 비꼬는 어투에도 모리타트의 표정은 여전히 당당했다.

“전 아그레인 양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을 마친 그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봤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 마침 딱 적당한 상대가 눈앞에 있기는 한데.”

나는 그 얼굴에 커피를 뱉어 주려다 말았다.

“그 상대가 킨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귀찮은 사안에 끼고 싶지 않은지, 모르는 척 주간 신문을 읽고 있던 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리타트는 특유의 뻔뻔한 미소로 내게 헛소리를 지껄였다.

“말이 나온 김에 아그레인 양이 도와주는 건 어떻습니까?”

도와준다, 라.

“뭐를.”

이건 나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킨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거친 감이 있었다. 내가 가만히 턱을 괴고 있을 동안, 홀로 신이 난 모리타트가 주저리주저리 제 생각을 읊기 시작했다.

“뭐기는요. 나의 혼인 상대가 되어 주는 일말입니다. 당신이라면 나 역시 뒤탈도 없고….”

“뒤탈이 없다?”

이 역시 나의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을 듯했다.

곧이어 누군가 내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인기척 없이 등장한 인영에게선 옅은 바깥바람의 냄새가 났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모리타트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남자, 리히튼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모리타트에게 물음을 던졌다.

“진심으로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공작?”

짧은 적막이 맴돌았다. 모리타트의 시선이 힐긋,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곧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지 않는 너털웃음을 뱉었다.

“하하. 아무래도 제 의사가 잘못 전달된 것 같은데, 제가 아그레인 양에게 도와달라고 청한 건….”

“킨을 혼인 상대로 두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이었겠지.”

리히튼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하하. 모리타트의 웃음이 점차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예에. 뭐… 그렇습니다.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

킨이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모리타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리히튼의 방문은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나의 타박에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던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 달 만에 재회하는 리히튼은 머리칼이 조금 자라 더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게 된 것을 제외하면 이전과 그대로였다. 한데 여전히 잘나고 멀끔한 옆선을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확실히… 기억을 잃었을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네.’

리히튼은 기억이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로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기억을 잃은 그가 단순하게 냉철한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면, 지금의 그는 작은 파문조차 없어 거울처럼 보이는 새까만 수면이었다. 물론, 침대 위에서는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수면이지만. 같은 껍질이어도 속 알맹이에 따라 천차만별의 색을 풍긴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킨이라면 물심양면으로 공작을 도울 테지.”

리히튼의 말에 킨이 눈썹을 씰룩이며 입을 열었다.

“농담이라도 끔찍합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제가 후작 부인을 들여 후손을 잇기를 바라십니다만.”

그의 대꾸에 리히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렌페르크에 정부를 두지 않은 귀족이 어디 있지? 공작이 가문의 명예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면, 똑똑한 여자의 아이를 후계자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야.”

그리 말하는 리히튼의 눈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모르는 이가 지금의 풍경을 본다면 진담으로 여길 수 있을 정도였다. 킨은 입을 떼면 뗄수록 제 손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던 모리타트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마침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리히튼 공작, 괜찮다면 저와 새로운 캐롤드 후작저의 후원을 거니시는 게?”

리히튼의 시선이 짧게 킨을 향하다가 내게로 머물렀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인사를 해야 하나?’

한창 갈등하는 와중에 그가 몸을 일으켜 내게로 몸을 숙였다. 곧 이마에 부드러운 온기가 머물다가 사라진다.

“오랜만이야, 아그레인.”

리히튼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워낙 끈덕진 터라, 나는 뒤늦게라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응.”

그제야 리히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리타트의 뒤를 따라서 다이닝룸을 나갔다. 저런 점은 기억의 유무와 상관없이 동일한 건가. 아니, 오히려 기억을 되찾은 후에는 조금 더 능청스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둘만 남았군, 동생.”

고개를 든 킨이 신문을 접었다. 비장한 말투였기에, 나는 어쩐지 간지럽게 느껴지는 이마를 쓸며 그에게 물었다.

“왜 내게는 저 둘이 온다고 말하지 않았어?”

“공교롭게도 나 역시 오늘 오전에야 알게 된, 예정에 없던 방문이었다고. 둘 모두.”

그리 말한 킨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아그레인.”

“말해.”

“너는 정말 지금으로 만족하는 거냐?”

나는 한숨을 참지 않았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하려고? 어차피 나는 아이를 가지지 못해. 캐롤드의 명맥을 잇기 위해선 당연한 선택이야.”

킨은 자신이 작위를 이음으로서 어긋나게 될 캐롤드의 정통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크게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킨의 출신이 비록 사생아라 해도, 아버지는 그를 인정했다. 따라서 킨은 캐롤드의 어엿한 일원이었다. 적녀인 내가 후계위에서 물러났으니 그가 가문을 잇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오히려 캐롤드 가문의 입장에선 킨이라도 남아 한숨 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도 이제는 눈치를 챘으리라 생각하지만….”

잠깐의 간극 후, 킨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너와 나는 조금도 피가 섞이지 않았어. 그러니 네 주장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내가 후작 부인을 들인다는 건, 실제론 캐롤드의 명맥이 끊긴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

킨 캐롤드의 태생. 이는 아버지가 서약 『태양이 흐르는 강』을 증오하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힘을 끊는 데 평생을 바쳤단 사실을 안다면 나중에라도 알게 될 수밖에 없는 비밀이었다. 킨에게는 캐롤드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후계자로 점지해 둔 킨은, 엄밀히 말해서 캐롤드 가문과 완전한 남이었다. 그래야 태양의 힘이 내 대에서 끊길 수 있으니까. 그래야, 캐롤드의 후손이 더는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나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단 투로 대답했다.

“그래서 다행이야. 이 저주받은 핏줄이 내 대에서 사라진다는 소리잖아?”

킨의 표정은 요상했다. 그답지 않게 가라앉은 것 같기도 하고, 평소처럼 시건방져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킨의 얼굴이 마뜩찮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네 그 표정을 보면 기분 더러워지는 기억이 떠올라.”

잠시간 미간을 구기고 고민하던 킨이 돌연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간만에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그래서 더 야비해 보이는 미소였다.

“아하.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내가 네게 입 맞췄던 기억 말하는 거냐?”

나를 골리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나는 이제 리히튼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쉽게 당황하지 않는다. 하지만 킨은 보란 듯이 고개를 쭉 빼고서 멈추지 않고 깐죽댔다.

“왜,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서 죽어도 안 잊히나 보지? 응?”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안 잊히는 건 그쪽 같네.”

나는 과일 잼을 바르다 만 나이프를 들며 경고했다.

“원한다면 평생 잊게 해 줄 수도 있어.”

그에 킨이 질린 눈으로 고개를 뺐다.

“네가 그렇게 폭력적으로 자란 게 내 평생의 한 중 하나란다, 아그레인.”

“알면 다신 입 밖에 꺼내지 마. 특히 리히튼의 앞에선.”

리히튼이 언급되자 그는 곧장 입을 닫았다. 옅은 씁쓸함이 눈동자에 머물다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모르는 척, 쥐고 있던 나이프를 더 강하게 잡고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아즈마리아 윌을 나로 착각했던 희대의 머저리 같은 짓을….”

‘어허!’ 킨이 경악하며 손을 내저었다.

“좋아! 알아들었어, 동생. 거기까지 하자고. 이복남매인 우리가 서로를 물어뜯을 필요는 없잖아?”

“알면 적당한 선에서 입 좀 닥쳐.”

하지만 킨은 입 닥칠 생각은 조금도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어디의 누구를 캐롤드 부인으로 데려오면 좋겠어?”

이 문제 때문에 날 부른 거였구나.

“정부를 두든 말든 아이에게 제대로 된 외척은 갖게 해.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야 해? 이미 다 정해 뒀을 거 아니야?”

킨은 내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는 듯했다.

“내가 혼인을 하면 너는 캐롤드 저택을 나갈 수밖에 없어, 아그레인.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게 국법이니까.”

설마 그런 이유에서 계속 혼인을 미뤄 왔던 건가. 킨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생각하는 것 이상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킨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그 정도에 헤맬 나였으면 여기까지는 오지도 못했을 텐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후작 부인이 생기면 나는 비비안느 옆에 눌러 붙을 생각이니까.”

그는 한동안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 말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눈치였다. 킨은 무언가 고민하듯 길게 턱을 쓸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리히튼 각하께서는 너를 언제 데려갈 생각이라시냐?”

그 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모른다면 그 누구도 모를 텐데.”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목이 탔다. 리히튼과 나는 서로를 사랑한다.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을 의심해 마지않아 온 나조차 그 사실만은 확신했다.

“그가 반드시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마, 킨.”

하지만 결혼과 사랑은 다르다. 더군다나 리히튼이 잉고르드의 공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리히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 있어 결혼은 필수 사항이 아니었다.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잉고르드이지만 잉고르드가 아닌 혈통’에게 후계자를 물려줄 터였다. 아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우리의 몸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부인에게서 외간 남자의 아이를 얻는 것이다. 나는 그조차 힘든 몸이니,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서로가 서로의 정부가 되는 것이었다.

‘정부라….’

나와는 평생 먼 단어일 줄 알았는데. 하지만 리히튼을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킨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그레인. 내가 각하라면 말이지…. 너를 절대로 내 곁에 둘 수 없을 거다. 하루라도 빨리 곁에 데려오고 싶어 안달이 난다면 모를까.”

“왜?”

그는 나의 반문에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너와 나는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까.”

리히튼도 그 사실을 안다는 뜻이구나.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모든 걸 아는 그가, 이 정도 수준의 비화쯤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킨은 쓴 음식을 삼킨 것처럼 미약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그의 음성과 함께 시가 향이 퍼졌다.

“남자의 마음은 그럴 수밖에 없어. 그러니 네가 각하께 내 진심을 잘 전달해 달라고. 내게 있어 너는 여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그 말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멈추었다. 킨이 오전의 여유를 느끼며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을 동안, 나는 앉은 자리 정면의 창 너머로 펼쳐진 정원을 구경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킨의 말처럼 리히튼도 우리가 친남매가 아니란 사실을 신경 쓸까? 마냥 아닐 거라 여기지는 않지만, 리히튼이 보내 온 시간은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은가. 긴 시간 동안 진창을 구른 그가 고작 그런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 더해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리히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름대로 나 자신도 사람의 속을 읽는 데는 타고났다고 생각하는데, 리히튼만은 어렵다. 그가 나를 사랑한단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종종 리히튼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판단을 내릴지, 추측조차 버거울 때가 있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리히튼은 이백 년쯤 살았으려나. 그러니 어렵지.’

열네 번의 삶. 리히튼은 열네 번의 삶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변명할 여지없이, 모두 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그가 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되도록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바치고 싶었다. 리히튼이 원한다면 그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면서. 하지만 리히튼의 생각이 읽히지 않으니, 도통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껏 내가 간절히 바라온 것들은 복수나 생존처럼 오로지 나 자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처럼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털어 놓자니, 무얼 어디서부터 어떻게 털어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혼인, 후계, 배려, 가문….

‘파고들면 팔수록 머리가 더 아파지는 느낌이야.’

새삼 예전의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단 사실을,다시금 깨닫게 된다. 나의 바람과 복수를 위해서라면 거리낄 것 없었던 작년의 겨울. 가문과 리히튼을 지키기 위해 더 나은 선택을 고민해야 하는 올해 여름.

“…어찌된 게 평화로운 시간이 더 피곤하네.”

킨이 힐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피곤하다면 방으로 돌아가 쉬어라. 아니면 너의 그분 때문에 차마 올라가지 못하는 거냐?”

킨과 함께 살면서 알게 됐는데, 그는 평상시 아무렇지 않게 뱉는 말도 마치 비꼬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킨을 흘겨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매일같이 말하는 것 같지만, 너는 어릴 때가 더 좋았어.”

킨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해야 할 말인지 모르겠군.”

***

곧장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눕듯이 쓰러졌다. 리히튼의 서신을 읽었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간 간절히 바라왔던 재회인데 기대했던 것만큼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와 같은 땅에 있음에도, 왜 이전만큼 마음이 설레지….

“아그레인. 몸이 좋지 않다고?”

그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리히튼이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봤다. 리히튼의 움직임은 마치 외출하고 제 방에 돌아온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벗은 외투를 내 맞은편 의자에 걸치고, 방구석에 마련된 테이블 위의 티 포트를 기울여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단단하게 매어 둔 타이를 습관처럼 풀어헤치며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몇 번이고 내 방을 찾아왔던 것처럼 행동해서 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름 감기라도 든 건가?”

차가운 손바닥이 내 이마를 뒤덮었다. 아, 시원해.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런 내 행동을 긍정으로 여긴 모양인지, 리히튼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았다.

“낯빛이 안 좋기는 해. 조금만 눈을 떼면 그새 병이 나 버리는 건가? 까다로운 애완 고양이 한 마리를 기르는 기분인데.”

그럴 리가. 불사의 육체를 지닌 내가 감기에 걸릴 일은 만무했다. 눈앞이 어두우니 그의 목소리가 훨씬 더 듣기 좋았다. 리히튼의 손끝이 닿는 피부 위에 미세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전만큼 설레지 않기는.’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끔찍한 머저리로 느껴졌다. 그와 접촉한 것만으로도 은근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내 귀까지 들릴 정도인데. 잠깐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크게 착각했던 것 같다. 조용해지는 분위기에 천천히 눈을 뜨며 물었다.

“이야기는? 모리타트와 할 말이 있다며?”

비비안느든 모리타트든, 이제껏 내가 곁에 있다는 이유로 목소리를 낮추려 한 적이 없었다. 리히튼 그리고 비비안느와 함께하는 이상, 그렌페르크 제국에 내가 몰라야 하는 일은 없다. 때문에 굳이 내가 없는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온 이유가 궁금했다.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리히튼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모리타트.”

무슨 뜻인가 싶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리히튼의 눈은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단 기색으로 나를 타박하고 있었다.

“그와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근한 사이였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친근하다고? 전혀 아니야.”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누가 들으면 사랑하는 연인인 줄 알겠군.”

거절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곧이어 이마를 식히던 그의 손도 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서운해 하는 건가.

‘애처럼.’

순간 목 안쪽이 간지러워서 재채기가 나올 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리히튼 잉고르드가 애 같다고? 킨도, 모리타트도 아닌 그가? 살아생전 리히튼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될 줄이야. 다리 위에 떨어진 그의 손을 살짝 건드리며 대답했다.

“이제 와서 그건… 불편해. 나보고 모리타트를 모리타트 각하라고 부르라는 거잖아? 차라리 얼굴을 평생 안 보고 말지.”

물론 리히튼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줄 용의가 있었기 때문에, 반쯤 장난이었다. 리히튼이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대답했다.

“안 보면 더 좋고.”

“아예 안 보고 살기는 힘들다는 걸 알면서. 모리타트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리히튼의 시선이 스르륵 아래로 향했다. 그는 나의 양쪽 손 안에서 인형처럼 뭉개지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는 듯해, 아그레인.”

“…내가?”

잠시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햇빛에 눈이 녹아내리듯 풀렸다. 리히튼은 연회장에서 자주 보이던 예의 그 신사다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괜찮아. 그런 것쯤이야 천천히 배워 가면 될 일이니. 오히려 날이 갈수록 개선될 우리의 관계가 몹시 기대되는군.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새 그의 눈길은 우리의 손보다 더 위를 맴돌아, 어깨와 배꼽 그 사이의….

“어딜 자꾸 봐!”

번개를 맞은 양 화들짝 놀란 건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리히튼의 시야를 막았다.

“갈수록 음흉해지는 거 알아? 아니, 원래 음흉했던 건가? 어이가 없어서.”

“내가 내 것을 보는 게 문제는 아니지.”

내 손을 잡아 내린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림처럼 그려낸 미소와는 확연히 다른, 눈, 코, 입 모두가 편안하게 풀어진 웃음이었다. 그에게 잡힌 손바닥 위로 따스한 입맞춤이 남겨진다. 물컹한 살이 가볍게 맞닿는 동안, 선명한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뜨거운 숨이 금방이라도 피부 위에 떨어질 것 같아, 숨기듯 손을 빼냈다. 피식 웃은 리히튼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하려는 말은, 무엇이든 반대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는 거야. 내가 윌 백작을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대하듯 아즈마리아… 라고 부른다든가. 비슷한 경우로 나타샤 밀레오나를 나타샤라 부를 수 있겠지.”

그 빌어먹을 나타샤 어쩌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에 토를 달 수는 없다지만, 그 상대가 내 남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즈마리아 윌은 제 일로 바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별 생각이 들지 않지만, 나타샤는 아니었다. 여름 연회에서 리히튼을 훔쳐보던 그 여자의 눈이 아직 잊히지 않았다. 한데 친근한 척 이름을 부르겠다고?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좋아, 리히튼. 내가 노력할게. 노력할 수 있어. 아마도.”

마땅한 반응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리히튼이 가슴 앞에 그러쥔 내 한쪽 손을 가져가 입을 맞추었다.

“자비로운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캐롤드 영애.”

날 향한 눈이 어쩐지 ‘장난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라고 말하는 기분이 든다. 몸을 일으킨 리히튼이 덥다며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곧장 하녀를 불러 차와 다과를 준비시켰다. 차와 우유, 다과가 차려지자 리히튼의 복장은 더욱 간소해졌다. 타이를 완전히 풀어 내 침대 위로 내던졌다. 그에 더해 베스트까지 풀어헤친 탓에 손님은 그가 아닌 나로 느껴질 정도였다. 리히튼은 셔츠의 소매를 접으며 방 안쪽에 마련된 책장을 둘러보곤 짧은 감상을 남겼다.

“죄다 삼십 년쯤 된 책들이야.”

그러고는 그중의 하나를 집어 읽기 시작했다.

‘황당해라.’

솔레르가 말한 연인이란 게 이런 건가? 생에 처음으로 들르는 여자의 방에서 대수롭지 않게 옷을 벗고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처음이 아닐 수도 있지.’

리히튼은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다. 그만큼의 권력과 부, 더불어 미모를 지닌 남자는 그렌페르크에 리히튼 잉고르드가 유일했다. 잉고르드의 혼처를 구한다는 소식에 온 제국이 떠들썩해질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이토록 다 갖춘 남자를 마음에 둔 여자가 과연 나뿐이었을까? 여자의 침실에서 이렇게나 자연스러울 수 있는 건, 그만큼 많은 여자와 함께 해 왔기 때문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를 훑다가 말했다.

“익숙해 보이네.”

“어느 부분이?”

“그냥, 전부.”

리히튼의 시간이 열네 번 반복될 동안, 그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품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나을 수도.’

이상한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과거에 다른 여자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에 마음이 놓이다니. 리히튼의 평생이 나만을 위해 소모되지 않았기를 바라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입으로 직접 확인받고 싶지는 않았다. 알면 더 비참하고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이 역설적이면서도 이중적인 사고를 지속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속속들이 알게 된다. 하기는. 그 정도로 이기적이니까 리히튼을 이용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겠지. 느리게 종이를 넘기며 리히튼이 속삭였다.

“이 방에 여러 번 오기는 했었지.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기억나. 캐롤드 가문이 재건된 건 이번이 네 번째니까. 그러니 적어도 네 번 이상은 왔겠어.”

아.

‘그래서 익숙했던 건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리히튼은 그런 내 속이 훤하다는 듯 말했다.

“네 생각을 맞춰 볼까? 뻔해. 내가 다른 여자들의 방을 제 집 드나들 듯 나돌아 다녔을 거라 여겼겠지.”

부정하지 않았다. 리히튼이 그런 내 속앓이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해해, 아그레인. 기억하는 건 나고, 너는…. 어쩌면 그런 나의 욕심으로….”

그는 말을 말았다. 대신 책장을 넘기던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에 기댄 내 턱과 귓바퀴를 매만졌다.

“내가 너였다면, 내가 모르는 너의 과거를 절대 참을 수 없었을 거다.”

마치 내가 잘 참고 있다는 듯 말하기에, 조심스레 지분거리는 손을 쳐내고 물었다.

“그래서 그런 적이 있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머리 좋잖아? 네가 직접 맞춰 봐.”

“나는 똑똑하지 않아.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페사에서의 일이 있은 직후 나는 리히튼의 말이 옳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리히튼의 손에 모든 걸 맡기는 것이 가장 깔끔하고 완전한 복수가 되었으리란 사실을. 그렇다고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마 나는 여기서 또 한 번 시간이 돌려지더라도 지금과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확실했다. 나 스스로를 던져서 죽이든 죽임을 당하든 결국 끝을 보고야 마는…. 리히튼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질기도록 반복해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직 나를 위해서.

“쯧. 그런 어울리지 않는 자책을….”

그가 책을 덮었다.

“자책이 아니야, 리히튼. 인정하는 거지. 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결국 너를 이기지 못한 거네.”

나는 내 손으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아니었으니까.

“네가 나를 이길 수 없다고?”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그가 얼토당토 않는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할 말이 많은 눈이었으나, 이내 그는 눈꺼풀을 지그시 닫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니야, 그래… 좋아. 내게는 네가 네 스스로를 무지하다 여기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상냥한 심성을 지니도록 해.”

리히튼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상냥한 심성? 혹시 한바탕 뒤엎어 버리라는 의미?”

똑똑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는 나를 무지하다고 표현한 적이 없는데. 별 의미 없이 넘기기에는 머릿속 한구석이 찝찝해지는 말이었다.

“진정해. 널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니까. 물론 나는 네가 뭘 해도 좋지만.”

그는 진심의 진심이라는 표정과 함께 내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어쩐지 리히튼에게 유린당하는 기분이다.

“과거에 내 방에는 뭐하느라 왔었던 거야?”

“병문안.”

리히튼은 아예 내 옆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앉았다. 여름 햇빛에 투명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색은 호우가 몰아치는 하늘의 흐릿한 청색이었다.

“또 네가 죽지는 않았을까 확인하러 온 적도 있고. 내가 이 방에 너를 감금했었으니까.”

감금?

“미쳤어?”

“미쳤느냐고? 그때의 네가 빌힐름에 미쳐 있기는 했지. 늘 눈이 벌게져 있어서, 그 눈을 볼 때마다 돌아 버릴 것 같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그 외에는….”

내 몸이 그의 체중에 눌려 소파 위로 쓰러졌다. 쏟아지는 역광에 은빛에 가까운 그의 백금발이 찬란하게 흔들렸다. 리히튼은 가벼운 손짓으로 내 턱을 건드렸다. 장난기가 여실한 웃음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보통 그 짓거리를 하러 왔던 것 같군. 그래, 그런 날이 대부분이었지.”

그는 내 입술이 아닌 목 근처에 얼굴을 묻었다.

“읏, 아파!”

이어지는 따끔한 고통에 몸을 떨며 밀어내려 했지만, 리히튼의 단단한 상체가 내게 밀려날 리 없었다. 옅은 웃음이 귓가에서 흩어졌다.

“나는 네가 아픈 게 좋아. 아프면 내게 매달려오니까….”

“소름끼치는 소리하지 마.”

“소름끼쳐? 그래도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해. 이게 내 진심이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웃기만 했다. 나는 목 아래의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제대로 된 기억은 없는 거야? 적어도 내가 미치지는 않았던….”

없었다고 대답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그는 편안한 호흡을 내쉬며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곤 말했다.

“너와 내가 늘 파국이었던 건 아니야, 아그레인. 때로는 심장이 저릴 정도로 낭만적이기도 했거든.”

나른한 목소리가 여름의 황금빛으로 물든 천장화 아래에서 울린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얀 보름달이 뜬 밤, 네 방 창문을 통해서 여기로 들어왔던 날이 떠오르는군. 늦은 봄의 따스한 바람이 불 때마다 저 커튼이 흔들렸지.”

기다란 손가락이 목 아래를 더듬더듬 타고 올라와 입술 위에 머물렀다.

“우리는 밤새 입을 맞추고.”

그리고 그대로 뺨을 쓸어내리다 눈가를 더듬었다.

“서로를 위로한 후에….”

부드러운 손끝이 눈썹 뼈를 훑고, 콧등을 타고 내려와 다시 입술 위로 떨어졌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었어. 그리고 나는 밤새 네 곁을 지키다가 해가 뜨기 전에 캐롤드를 나갔지. 전부 빌힐름에게 빼앗기기는 했지만.”

잠시 침묵이 머물렀다. 내려앉은 고요함에 눈을 떴을 땐, 리히튼이 내 머리 양옆을 짚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히튼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옛 이야기를 할 때마다 너는 꼭 그런 표정을 지어.”

“어떤 표정?”

“죄를 지은 것 같은 표정.”

목이 막혀 여러 번 침을 삼킨 후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아마 잘 본 게 맞을 거야.”

굳은 표정과 함께 리히튼이 내 몸을 일으켰다. 나는 힘겹게 그와 눈을 마주했다. 속내를 털어놨기 때문일까? 그의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과거의 이야기는 나의 흥미와 죄책감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를 향한 사랑을 인정하니, 그만큼 나약해져가는 마음 또한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이런 내가 낯설었다. 약해지기 위해 나를 걸고 복수한 게 아니었다. 예전과 다른 내가 된 것 같아 때때로 그에게 마음을 내준 것이 후회됐다. 그렇다고 지나온 시간을 없던 일로 하고 싶은 건 아니라,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바닥 없는 물가에서 힘이 빠져가는 기분이 든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리히튼이 내 목덜미를 천천히 끌어 당겼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모두 너를 믿기 때문이야. 네가 남은 평생을 나와 함께할 거라 여기기 때문이라고.”

그의 숨이 콧등 위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럴 거잖아, 아그레인.”

“응.”

서서히 눈꺼풀을 감자, 리히튼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수놓던 번거로운 사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신없이 숨을 나누다 보니 내 몸은 어느새 소파가 아닌 침대에 누여 있었다. 리히튼은 부드러운 입맞춤과 정반대되는, 거칠고 사나운 움직임으로 셔츠 단추를 풀어헤쳤다.

“나는 네가….”

단단한 그의 맨몸이 나의 허리를 더 가까이 끌어 당겼다.

“사실은, 더 깊은 죄책감을 느꼈으면 해.”

정신이 혼미했다. 나는 그저 리히튼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발끝이 뜨겁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 죄책감이 너의 족쇄가 되었으면 좋겠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이번 생에도 기꺼이 나를 바칠 텐데.”

사랑해, 리히튼. 나의 고백에 그가 웃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하고 내 심장을 조이는 현혹적인 웃음.

“그러니 아그레인, 너는 내게 평생을 미안해하도록 해. 평생, 영원히.”

어쩌면 조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 미소가, 나에게 깊은 안도감을 선사했다.

***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땐 하늘이 이미 어두워질 만큼 어두워진 후였다. 시침은 자정에 가까운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맑았다.

“늦게도 일어났군.”

리히튼은 밝은 등불을 곁에 둔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리히튼은 그런 내 앞으로 물이 든 잔을 밀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고작 잔 하나도 들 기력이 없었다.

“먹여 줘.”

리히튼은 망설임 없이 물을 들이켜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엉겁결에 입술을 벌리자 미지근한 물이 마른 입 안을 적시며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먹여달라는 게 아니라, 잔을 입가에 대 달라는 뜻이었는데. 뻔뻔한 얼굴을 보니 따지기도 귀찮아졌다. 몸을 일으킨 리히튼이 침구를 끌어와 내 몸을 감쌌다. 목까지 꼼꼼하게 덮으며 타박하는 음성이 다소 느긋했다.

“아그레인. 아무리 침실이라도 벌거벗고 돌아다니지 마.”

“몸이 피곤해.”

“그렇게 자 놓고 피곤하다니. 애가 다 됐군.”

다시 자리에 앉은 그가 읽다 만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어깨가 아닌 허벅지에 머리를 눕히며 물었다.

“안 잤어?”

리히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너와 달리 나는 하고 난 후에 더 활기가 도는 편이라서.”

“그래 보이네.”

억울했다. 누구는 여섯 시간을 넘게 자도 죽을 만큼 노곤하고, 누구는 자정까지 두 눈이 말똥하고.

“그래서, 어제 모리타트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던 거였어?”

리히튼은 무언가 단단히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모리타트?”

…아, 그렇지. 나는 뒤늦게 모리타트의 호칭을 정정했다.

“아니, 모리타트 공작과.”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책의 모서리를 툭툭, 건드렸다.

“안 그래도 네게 말하려 했는데 잘 됐어. 황성의 별채는 곧 폐쇄할 거다. 머리의 주인을 식별해서 각 가문에 돌려보낼 예정이야. 대개 잉고르드 아니면 캐롤드의 것이겠지만.”

황실 별채 지하에 마련된 그 끔찍한 실험실. 그간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였다. 나는 페사에 묻고 온 발레리아의 머리를 떠올렸다. 제정신이라 하기엔 한창 넋 놓고 있던 시기라, 마지막으로 확인한 발레리아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쯤 무덤 위로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겠지. 텅 빈 유리병을 버리고 왔던 기억을 되새기니 감정이 가라앉았다.

“그거 아나? 잉고르드와 캐롤드 가문에 안치된 관은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해. 유서 깊은 집안의 기록이라 여기기에는 한참 적지.”

리히튼의 말이 맞았다. 캐롤드는 자손이 워낙 귀해, 가계도에 적힌 이름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저택에 안치된 관의 수는 더더욱 적었다. 이유는 명료했다.

“모두 그 성 아래 묻혔으니까.”

“때문에 장례에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 황성에서 책임질 거다. 킨도 대강의 진행 사항은 알고 있을 테니, 곧 적당한 자리를 비워 두겠지.”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리히튼은 고개를 주억였다.

“레그윈 황실은 멍청하지 않아. 별채에는 당시 희생된 모든 이의 이름과 외양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리히튼은 정말 모르는 게 없구나. 그렇다면 그 살생부에 수잔의 이름도 적혀 있을까?

‘나보다 조금 더 갈색에 가까운 머리칼이라고 했지.’

만약 구분할 수 있다면, 그 애의 머리는 내 관 바로 옆에 두고 싶었다.

“그게 정리되면 정말 모든 게 끝나는 거야.”

리히튼의 눈은 오로지 책에만 고정되어 있었으나,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무상함을 느꼈다. 언제나 그러했듯, 리히튼이 정확하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긴 고난을 끝낸 뒤, 불현듯 찾아오는 허무함을 느끼지 않도록.

“응. 그렇네.”

몸을 둘둘 감싼 침구를 힘겹게 풀고, 그의 등을 껴안았다. 리히튼은 그런 내 얼굴을 힐끔 바라보다가 코끝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몸을 빼지 않고 조용히 얼굴만 구겼다. 살풋 웃은 그가 코끝을 비볐다.

“가끔 궁금해, 리히튼.”

“내 몸이?”

침구 안쪽으로 팔을 두른 그가 내 허리를 당겨 밀착했다. 그러고는 능숙한 눈짓으로 몸을 훑는데, 이제 익숙해졌는지 뭐라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건 이미 알 만큼 알지 않을까?”

리히튼이 한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다시 테이블 위에 덮었다. 내가 곁에 앉은 뒤로 계속 육십일 페이지에 고정되어 있던 책은 이제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잊힌 듯했다.

“아니, 한참 남았어. 평생을 보여 줘도 부족하니 지금부터라도 분발해야 해.”

작게 웃자, 가슴 위로 얼굴을 묻으려던 그가 진중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못 믿어? 믿게 해 주지.”

“아니야, 믿….”

그의 입술이 내 호흡을 틀어막았다. 리히튼이 곱게 걸쳐 입었던 셔츠를 다시 벗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또 다시 몸을 겹쳤다. 지친 내가 반쯤 앓는 소리를 내서야 아쉬움 가득한 버드키스를 남기고 떨어졌다.

“너는 너무 약해. 네 몸도 네 정신만큼 강하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야. 너의 그… 건강함은 어떤 여자라도 버틸 수 없을걸. 나는 그리 말할 기운도 없어 침구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짧게 혀를 찬 리히튼은 내 몸을 다시 눕혔다. 그가 내 옆에 나란히 눕자, 익숙했던 침실의 풍경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리히튼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요한 방에 생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평소에는 잘 들지 못했던 잠도 이상하게 별똥별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머릿속이 몽롱하니 어쩐지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거의 ‘나’는 과연 어떤 용기로 죽을 수 있던 걸까? 대체 어떤 미래를 봤기에, 스스로 목숨을 포기할 수 있던 걸까?

“내가 본 미래 말이야, 리히튼.”

나는 녹진한 몸을 끌어 리히튼의 몸 위로 올라탔다. 함께 천장을 올려다보던 리히튼이 내 허리에 팔을 둘러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아닌, 리히튼 너를 이곳까지 이끈 아그레인 캐롤드.

“너와 처음으로 만났던 나. 누구를 말하는지 알겠어?”

“알아. 너잖아.”

그렇기는 하지.

“그래, 맞아. 내가 본 미래.”

너를 내게 데려온 아그레인 캐롤드. 그녀가 보았던, 우리의 미래. 너를 그 끔찍한 지옥 속으로 내몰도록 한 그 미래.

“어떤 장면을 봤던 걸까?”

짧은 정적의 끝에서, 리히튼은 대수롭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일지도.”

리히튼은 쭉 뻗은 팔로 내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혹시 몰라. 내 위에 올라타, 나를 정복하는 너를 보며 모든 복수로부터의 자유를 직감했을지.”

진득한 웃음 한 점 없이 뱉은 말에는 미묘한 진중함이 녹아들어 있었다.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아무 말이나 막 하네.”

리히튼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왜인지 조금은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곧 자신의 얼굴을 주무르고 있던 내 손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경고하듯 속삭였다.

“네 선택을 막지는 않겠어. 하지만 확인하려면 내가 보는 앞에서 행동해.”

…역시 내 속을 훤히 읽는다니까. 리히튼의 손에 잡힌 나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작은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지만, 지금껏 미래를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칼날에 서너 번 뚫려 온 살갗이었다. 아마,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미래와 더불어 과거도 확인할 수 있겠지.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아.”

“네 의문은 자연스러운 거야, 아그레인. 억지로 막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네 표정이 좋지 않잖아. 다시 고개를 젓고 리히튼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가 나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누군가의 상태를 염려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아니까.

‘예전 같았으면 마음먹은 즉시 찔렀을 텐데.’

역시 마음을 내준다는 건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행위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인정하게 된 이 약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나는 너른 풀밭 위에 서 있었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지금은 캐롤드 후작저가 된 별장의 후원을 지나서, 언덕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세상이었으니까. 하늘은 불길이 타오르듯 붉기도 했고 가을 하늘처럼 푸르스름하기도 했다. 나는 그 너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어쩐지 가슴 안쪽이 참기 힘들 정도로 벅찼다. 숨을 참지 않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아그레인.]

나를 부르는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아름다운 캐롤드의 별장과 장미꽃이 만발한 후원을 배경으로 리히튼이 서 있었다. 다가온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리고 무어라 입을 열었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가 멀어지면서 시야가 어두워졌다. 나는 이 느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깊은 꿈에서 깨어나는 감각이었다.

***

“윽.”

숨이 가빴다. 얼어 있던 혈관에 뜨거운 피가 돌았다. 머릿속이 맑아지자, 잊고 있던 손등의 통증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천으로 다소 헐렁하게 묶인 손등이 굳은 피로 붉다 못해 새까맸다.

‘아파.’

잠에 들기 직전의 새벽. 나는 리히튼이 잠든 틈을 타, 결국 손등에 상처를 남겼다. ‘그날’ 본 미래에 대한 궁금증으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손등에 상처를 입힌 후 쓰러지기 직전에 급히 지혈을 해 두긴 했으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피와 함께 굳은 천을 떼어 내려면 고생을 조금 해야 할 듯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몇 시간 내리 내 머릿속을 괴롭혔던 의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 장면이 내가 처음으로 봤던 미래.’

여명이 떠오르는 하늘과 푸른 언덕. 그리고 나를 불러 세우던 리히튼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별거 아니었다. 그 미래 하나로 리히튼에게 모든 걸 걸었었다고? 어째서? 과거의 나는 그 꿈의 어느 부분에서 『태양이 흐르는 강』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속이 답답했다. 나는 던져두었던 의복을 대충 걸치고 방을 나왔다. 시각은 아직 스산함이 옅게 감도는 이른 오전이었다. 들리는 것이라곤 맑게 우는 새소리가 전부였다. 내 두 다리는 후원을 지나 꿈에서 마주했던 그 언덕 위를 오르고 있었다. 종일 늘어져 있던 몸으로 오르려니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어쩐지 저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하아, 하아.”

그렇게 도달한 언덕 끝에서, 시야에 넘치듯 들어온 하늘은 장미꽃처럼 붉으면서 수레국화처럼 푸르렀다.

이거였구나.

“아그레인.”

그때였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뒤따라온 리히튼이 걸음을 멈춰 서 있었다. 그래, 이거였어. 아아… 이거였던 거야. 다가온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굳은 피로 엉망이 된 오른손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눈가가 붉어질 것 같았다. 이윽고 리히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고요한 목소리는 기어코 내 심장을 건드렸다. 흘러나오는 언어 하나하나가 내 귀에 또렷하게 틀어 박혔다. 기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이제야 이 순간이 온 것에 대한 아쉬움과 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벅참이 공존했다.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끼며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가 말을 마친 후에야 나는 힘겹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응.”

동시에 참지 못한 눈물이 뺨 위를 타고 흘렀다. 리히튼은 그런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내려 입을 맞추었다. 그와 나누는 숨결은 입술이 떨릴 만큼 황홀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

얼마나 지났을까?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리히튼의 손을 꽈악 잡은 채 멍청히 서 있던 나는 비에 홀딱 젖은 채 돌아와야 했다. 언덕에서 바라본 하늘은 푸르렀다 해도, 등 뒤의 흐릿했던 회색 구름을 인지하지 못했던 탓이다.

“세상에. 아가씨, 괜찮으세요?”

저택에 들어온 즉시 계단 위쪽에 있던 하녀, 셰즈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리히튼을 힐끔 살핀 그녀는 당부의 말과 함께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젖은 머리의 물기를 짜며, 마찬가지로 짧게 머리를 털고 있는 리히튼을 바라 봤다.

‘…아아.’

셰즈가 왜 그를 두어 번 훔쳐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얇은 여름 셔츠가 홀딱 젖어, 안쪽 상체가 훤했던 것이다. 굴곡진 가슴과 그 아래의 경계, 두터운 어깨가 흐릿한 경계 하나를 두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그의 등을 계단 쪽으로 밀어냈다.

“왜?”

하지만 리히튼은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의문 서린 눈으로 내 허리를 잡아 끌 뿐이다. 물기가 느릿하게 흐르는 얼굴을 보니 평소의 그보다 조금은 노곤하면서 나른해 보였다. 누가 보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나 다시 밀어냈지만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셰즈가 도착했다. 그녀의 품에는 막 세탁된 하얀 침구가 안겨 있었다.

“여름 감기는 독해요, 아가씨. 아가씨는 몸이 약하시니까 이런 날에 조심하셔야 한다고요. 이걸 몸에 두르고 방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저희가 곧 데운 물을 가지고 올라갈….”

키 작은 셰즈가 두 발로 힘껏 까치발을 서 내 어깨에 이불을 둘러주려 할 때였다.

“내가 하지.”

다가온 리히튼이 그녀의 손에서 이불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 네.”

셰즈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허리를 숙이고 사라졌다. 그녀의 등에 고정된 내 시선을 리히튼이 가로막았다. 그는 방에서 그러했듯, 마른 침구로 내 몸을 감싸고 안아 들었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민망했다.

“걸을 수 있으니까 내려 줘, 리히튼.”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어. 됐으니 얌전히 있어.”

그러고는 날 안은 손에 더 강한 힘을 주는데, 도저히 그 힘을 떨쳐내고 발버둥칠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말에 껌뻑 죽을 것처럼 굴다가도 가끔씩 이렇게 제멋대로 굴었다.

리히튼은 그리 낮지도 않은 계단을 두 개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걸음이 워낙 빨라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바짝 붙어 있어야 했다. 그는 한쪽 팔로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나를 의자에 앉혔다. 이러다가 벽난로에 불까지 켜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손등이 욱신거렸다.

‘하아.’

아무렇지 않은 척, 이불 아래에 손을 숨기고 리히튼의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손등에 빗물이 닿아서 그런지 그을린 듯 화끈했다. 욕실 쪽을 확인하던 리히튼이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지나가듯 말했다.

“내게 한소리 들을까 봐 겁먹은 눈인데. 그런 주제에 잘도 제멋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군.”

나는 불에 덴 것처럼 급히 시선을 돌렸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저리도 쉬이 알아채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곧장 표정을 잘 숨기곤 했는데 그의 눈에만 어리숙해 보이는 걸까?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머릿속 한구석에 계속 떠올라서….”

“변명하는 건가? 나쁘지는 않으나 그럴 필요 없어, 아그레인. 이미 예상한 일이니까.”

벽에 기대고 있던 리히튼이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손이 미끄러운지 아주 느릿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음은 안 돼. 내가 보는 앞에서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면 허락하지 않아.”

그 말에 기분이 살짝 욱했다. 내가 마치 애라도 된 양 구는 그가 조금 답답했다.

“과보호하지 마, 리히튼. 어차피 금방 나을 몸이니 과도하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이 짓거리가 한두 번도 아니고.”

젖은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풀던 그의 손이 딱딱하게 굳는다. 리히튼은 다소 황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그의 반응이 어둡고 무거웠기 때문일까?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는 나를 탓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건가?”

그럴 리가. 무언가 오해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오해를 풀기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운 물을 가지고 올라온 셰즈임이 분명했다. 나는 리히튼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들어와.”

덜컥, 열린 문과 함께 대여섯 명의 하녀가 커다란 나무통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흘러넘칠 듯 일렁이는 수면에서 하얀 김이 올라왔다.

“데운 물을 가져왔어요, 아가씨. 제가 아가씨의 목욕을 도울 테니….”

방 안쪽으로 들어오려던 셰즈가 말을 멈추었다. 리히튼의 존재를 알아챈 셰즈는 멍하니 서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약하게 흔들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 고, 공작 각하께서 계시는군요. 목욕은 나중에 하실 건가요?”

“아니. 내가 목욕 시중을 들 테니 놓고 가도록.”

대답은 내가 아닌 리히튼에게서 나왔다. 깜짝 놀란 셰즈가 두 눈을 질끈 감는 동안, 나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

리히튼의 표정은 확고했다. 그와 반대로, 셰즈는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것처럼 낯이 창백해져 있었다. 미혼의 귀족 여식이 혼인 상대가 아닌 연인을 두는 것은 만연한 일이다. 다만 거기에는 두 가지 명제가 필요했다. 외동딸이 아닐 것. 공공연한 비밀의 연애일 것.

첫 번째의 경우는 이후 탄생할 후계자의 출신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가주의 혼전 임신은 가문의 명예를 추락시키기 때문에, 외동딸을 둔 부모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기도 했다. 두 번째의 경우는 단순히 체면을 위해서였다. 이는 가주가 남자든 여자든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교계의 암묵적인 규칙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미혼의 잉고르드 공작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이미 혼기가 넘어갔다.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 귀족 여식은 혼기가 넘어가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졸부 혹은 한참 부족한 가문에 시집가거나 황성으로 들어가 황족의 시중을 드는 이들이 대개였다. 그중에서 그나마 나은 건 변변찮은 가문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변변찮아도 귀족 가문이기는 하니까.

그러나 내가 리히튼과 연인 관계임이 소문난다면 그조차 불가능해질 것이다. 셰즈는 아마 그런 점을 걱정하는 듯했다. 내가 정말로 노처녀가 될까 봐. 사교계에서는 노총각 노처녀만큼 폄하되는 이들이 없었다.

“아가씨. 물은 다시 가져… 갈까요?”

셰즈는 내게서 긍정의 답을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반응은 리히튼의 반감을 산 듯했다.

“캐롤드의 하녀들은 말을 두 번 해야 알아듣나?”

단추를 다 풀어낸 리히튼이 문손잡이를 잡고 섰다.

“놓고 나가.”

셰즈와 다른 하녀들은 리히튼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 봤다. 그의 다소 억압적인 어투가 두려웠는지, 셰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가씨.”

무엇이 리히튼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과보호 하지 말라는 말? 신경 쓰지 말라는 말? 아니면, 이 짓거리도 한두 번이 아니라는 자조 섞인 말? 무엇이든,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면 내 탓이 맞았다. 리히튼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지 않은가. 나는 리히튼의 옆에 서서 셰즈의 어깨를 쓸었다.

“괜찮아. 그와 나는 연인 사이야. 물만 놓고 돌아가도 좋아. 괜히 킨에게 알려서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불안해하던 셰즈는 결국 내 명에 따라 데운 물만 옮기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리히튼의 등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벗겨진 셔츠가 의자 위로 던져졌다. 나는 그 뒤를 따르며 한숨을 삼켰다.

‘그래. 나 같아도 그에게 신경 쓰지 말란 소리를 들으면….’

빈말로도 좋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걱정 말라는 의미였는데, 아무래도 표현이 잘못됐던 것 같다.

“아그레인.”

주춤하는 사이 리히튼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욕조에는 이미 따뜻한 물이 채워져 있었다.

“벗어.”

“…정말 시중을 들 생각이야?”

“그럼 거짓말일까?”

팔짱을 낀 리히튼이 내게 턱짓했다. 나는 차마 그에게 됐으니 어서 나가라고 소리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네게 나쁜 짓이라도 할까 걱정하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너에게?”

“그건… 아니야.”

머뭇거리며 두르고 있던 이불을 내렸다. 막 저택에 들어 왔을 때만 해도 인지하지 못했는데, 막상 리히튼 앞에서 젖은 채 서 있으려니 목이 뜨거워졌다. 나이트가운만 걸친 채 나갔던 터라 물에 젖으니 속까지 적나라하게 비쳤다.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리히튼과 잠자리를 안 가져본 것도 아닌데.’

심지어는 횟수만으로 열 손가락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열 손가락을 다 채우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직도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게 떨리고 긴장되는데. 민망한 건 어쩔 수 없다. 가슴께의 끈을 더듬더듬 풀면서 그에게 요구했다.

“잠깐만 뒤돌아 있을래?”

“나는 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도 봤어. 심지어는 어제도.”

“그래도 돌아서 있으면 안 돼? 네가 보고 있으니 도저히 못 벗겠어.”

고개를 저은 리히튼은 결국 몸을 돌리고 섰다. 난 그의 맨 등을 바라보며 빠르게 옷을 벗었다. 그리고 급히 욕실 안으로 들어가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이제 됐어.”

리히튼은 욕조 뒤쪽에 낮은 의자를 두고 앉았다. 시중을 든다는 말을 무를 생각이 없는지, 내 머리를 부드럽게 끌어 욕조 위에 기대도록 했다. 리히튼의 단정한 얼굴이 시야 너머에 자리 잡았다. 그는 비에 구불구불해진 내 머리칼에 물을 적셨다. 기다란 백금색 속눈썹이 여러 번 깜빡이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놀랍게도, 리히튼은 내 머리를 감기는 일에 진지하게 몰입한 듯했다. 대체로 평온하게 풀려 있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정말 시중만 들 생각이었구나. 그 모습에 괜히 더 죄책감이 일었다.

“미안해, 리히튼.”

그의 시선이 짧게나마 내 눈을 향했다. 욕조에 누워 올려다보는 자세로 사과하려니 다소 면구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더 미루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 봤는데… 내가 너에게 하면 안 될 말을 했던 것 같아.”

“무슨 말.”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던 말.”

따스한 물이 이마를 적시고 머리칼을 따라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앉아.”

괜히 애완견이 된 느낌이지만, 그의 말에 착실히 따르기로 했다. 잘못한 건 이쪽이었으니 최대한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옳았다. 한 번쯤 내 몸을 훑으며 능글맞은 장난도 칠 법한데, 리히튼의 눈은 오로지 내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에게 진정으로 상처를 줬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쩔 거지? 사과한다는 건 내 말에 따르겠다는 뜻인가?”

리히튼의 목소리는 진흙 아래에 박힌 것처럼 무겁고 녹진했다. 욕조에 두 팔을 기대며 내 의중을 묻는데, 나만 알몸이어서 그런 걸까? 어쩐지 맹수 앞에 놓인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여기서 긍정하면 앞으로 미래나 과거를 볼 때마나 리히튼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나는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건 내게 있어 족쇄가 채워지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대답이 늦어, 아그레인.”

“…왜인지는 너도 알거라고 생각해.”

“그럼, 잘 알지.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주 잘 알아.”

리히튼은 두 팔 위로 턱을 기댔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낯에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가 점차 수그러졌다. 은근하게 풍기던 압박감은 사라지고 다소 지친 눈의 리히튼만이 남았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일같이 악몽을 꿔.”

“악몽?”

“그래. 너와 함께하는 이 모든 순간이 꿈이고, 나는 여전히 시간을 되돌릴 수밖에 없는 악몽. 그렇게 백 번을 넘게 되돌려도 널 구할 수 없더군.”

나는 리히튼의 손을 잡았다. 기다란 손가락을 쥐자, 그의 팔이 욕조에 미끄러져 물 아래로 빠졌다.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리히튼의 고통을 알게 될 때마다,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곤 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 너는 나를 구했잖아?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거야.”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리히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맨몸 위로 그의 매끄러운 피부와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리히튼을 안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그 역시 젖은 팔을 들어 내 등을 마주 안았다. 나른하고도 우울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각인되듯 심어졌다.

“또다시 너를 잃을까 봐 두려워. 세상이 무너지는 것 정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어떻게 해야 리히튼이 그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너른 등을 두드리며 그의 안도를 바랐다. 리히튼은 잠시간 조용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곧 바라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 내 허리를 바짝 당기며 명령했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해.”

거절은 용납할 수 없다는 양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리히튼은 밀어내려는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빗물에 차가워졌던 그의 몸이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다.

“리히튼.”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아그레인. 모두 널 위한 거잖아. 내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게 맞다면, 너는 반드시 그래야 해. 나는 다른 게 아니라 오직 너를 위해서 이곳에 있는 거야.”

그의 축축한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날카로운 이가 여린 살을 깨물고 끊임없이 지분거렸다. 얕은 통증에 앓는 소리를 내자, 그의 움직임은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내가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는 건가? 응? 너는 그렇게 생각해?”

“아, 알았….”

말을 채 마치기 전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삼켰다. 나를 끌어안았던 그의 팔이 수면 아래의 더 깊은 곳으로 빠졌다. 눌린 가슴이 쓸릴 때마다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사실을 안다는 듯, 리히튼이 짓궂게 내 몸을 건드렸다.

“너에 대해선 전부 다 알아, 아그레인.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 어떤 몸을 가지고 있는지도 속속들이 알지. 그런 내 말에 따르는 게 널 위한 일이야.”

네가 어디를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지도 훤해. 그의 속삭임에 살갗이 배는 더 예민해지는 기분이었다. 리히튼은 평소보다 더 거칠게 내 입 안을 휘저었다. 그의 바람을 거절하면 지금 당장 내 몸을 씹어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입술이 떼어진 찰나의 틈을 타 급히 말했다.

“네 말대로 할게. 그러니까….”

그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전과 다르게 두 눈이 기분 좋게 휘어져 있었다. 리히튼은 내 입 안에 숨을 불어 넣으며 작게 읊조리듯이 칭찬했다.

“착해.”

정신을 차렸을 땐 욕조에 거품이 흥건했다. 내 머릿속과 입 안을 이리 저리 휘저으면서 입욕제까지 푼 것이다.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빠른 행동이었다.

“물이 식기 전에 씻고 나가자.”

나를 욕조 안으로 밀어 넣은 리히튼이 내 몸을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고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리히튼은 너무나 능숙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빠져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너는 살이 너무 여려. 늘 느끼지만 자국이 너무 쉽게 나고. 아니면 여자들의 피부는 다들 이런 건가?”

기다란 손가락이 내 목과 어깨를 쓸었다. 새벽 내내 그에게 괴롭혀졌던 부위였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꽃처럼 피어 있을 붉은 자취들이 눈에 선했다.

“불쌍하면 그만 깨물어.”

“그래도 확실한 내 것이라는 표식 같아서 기분 좋은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았다. 어깨를 지나 가슴 근처를 닦을 때는 뜨겁게 익은 내 낯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놀렸다.

“좋아?”

“아니.”

단호한 부정에도 그의 미소는 짙어져만 갔다. 이제껏 날 탓하며 타박했던 모양새는 전부 거짓이었던 양, 놀랍도록 여유로운 행태였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 평생 네 목욕 시중을 들어줄 테니까.”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지금 그 얼굴 귀여워.”

그 말과 함께 한껏 풀어진 표정을 짓기에, 나 또한 내심 안도했다. 화가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런데 마음을 놓기 무섭게 허리와 복부를 맴돌던 그의 손이 무릎 사이로 내려갔다. 깜짝 놀란 나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 그만, 리히튼. 이제부터는 내가 할게.”

쉬이. 리히튼은 걱정 말라는 듯 오므려진 두 무릎을 천천히 벌렸다.

“괜찮아. 긴장 풀어. 나는 네 목욕을 돕고 있는 거야. 물이 식기 전에 어서 나가야지?”

“아니야, 그만 나가. 네가 하는 건 시중도 아니야. 목욕하는 느낌이 아니라고!”

“왜 목욕하는 게 아니야? 내 손길이 닿을수록 이렇게 깨끗해지고 있는데.”

그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까지 서려 있었다. 변태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더 징글맞게 괴롭힐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리히튼은 태연히 하던 짓을 계속했다. 그렇게 더 안쪽을 건들려던 순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나가, 리히튼.”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가 지금 이 장난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 뚜렷하게 보였다. 느릿하게 일어난 그는 거품이 가득한 손으로 내 턱을 툭, 건드렸다.

“너는 몸뿐만이 아니라 성격도 예민해.”

죽어도 싫다며 욕조 옆에 머물 줄 알았는데, 그의 반응은 의외로 순종적이었다. 비누가 풀리지 않은 물에 순순히 손을 씻고 문 쪽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래. 리히튼이 아무리 짓궂어도 내가 싫다는 짓을 고수할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어진 그의 행동은 내 생각과 정반대였다. 그대로 침실로 나가기는커녕, 열린 문을 굳게 닫고선….

“아그레인. 네가 자꾸 목욕하기를 거부하면 나로선 이럴 수밖에 없어.”

“무슨 소릴….”

“힘이 빠지면 발버둥칠 기운도 없겠지.”

리히튼은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벨트를 풀었다. 그의 뻔뻔한 낯 위로 진한 웃음이 걸렸다.

“물이 식기 전에 전부 끝내 줄게. 그 짓도, 목욕도….”

결과적으로 그의 호언장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이 다 식은 후에야 욕실을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리히튼이 캐롤드를 방문한 지 나흘째가 되었다. 나는 모리타트가 잭 영지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캐롤드에 도착한 지 나흘째 점심 식사 자리에 나타났다. 그에게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 있는지 몰랐다고 말하자 황당하단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당신은 나흘 내내 리히튼 각하와 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힐끔 킨을 바라봤다. 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네 번째 신문을 정독하고 있었다.

“아그레인 양을 탓하진 않겠습니다. 원래 그 시기의 연인들은 다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제 존재가 방해되지는 않을까 걱정이군요.”

킨과 마찬가지로 리히튼 또한 소리 없이 눈을 깜빡이며 점심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넓은 식탁에서 말하는 사람이라고는 모리타트와 내가 전부다. 그마저도 열에 여덟은 모리타트의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방에서 나오셨으니, 아그레인 양에게 받던 조언을 계속 받고 싶은데요. 그래도 됩니까?”

그 지겨운 아즈마리아와 관련된 하소연 말인가. 둘의 관계를 돕든 망가뜨리든,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난 후에 따로 보면 될 듯해.”

나는 보란 듯이 뒷말을 덧붙였다.

“모리타트 각하와 내가 말이지.”

모리타트가 아닌, 모리타트 각하에 힘을 주면서. 리히튼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봐선 새로운 호칭이 그의 마음에 찬 모양이었다. 정작 모리타트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로 귀를 후볐다.

모리타트는 비비안느가 황위에 오른 직후 다시 미혼으로 돌아왔다. 대업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잭 부인과 바로 이혼 서류에 사인을 남길 줄은 몰랐는데, 그들의 별거는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한 줌의 정도 느끼지 않은 정치적 결합이었던 거지.’

후에 전해 듣기로, 그 시기 사교계에서의 가장 큰 화제는 모리타트 공작의 이혼과 힐마르티노 후작의 혼인이었다고 했다. 특히 모리타트의 경우에는 유서 깊은 잭 가문의 젊은 공작인데다 전 공작 부인 사이에서 후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 적령기의 여식을 둔 귀부인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전 공작 부인은 잘 지내요?”

여름의 끝물이라 그런지, 내리쬐는 햇빛에 비해 날이 퍽 선선하다. 나는 바닥 위에 그려지는 양산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대답하는 모리타트의 음성에는 미약한 흥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모릅니다. 딱히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아서. 한데 그쪽은 갑자기 왜 말을 높이고 그럽니까? 사람 소름끼치게.”

“공작 각하와 나는 서로 내외하는 사이인데 앞으로 적당히 선을 그어야죠.”

“킨 후작의 잔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잖습니까. 보나마나 연인으로부터 한소리 들었나 보군요.”

“알아들었으면 앞으로는 우리, 서로에게 예의를 차리도록 해요.”

모리타트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자질구레한 뒷말이 이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리타트가 연인 운운하며 떠들 때마다 골리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는 내게 맞췄던 보폭을 조금 더 느리게 이으며 본론을 꺼냈다.

“내가 며칠간 고민해 봤는데, 아그레인 양의 제안이 꽤 쓸 만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안. 그런 걸 했었나.

“내가 뭐라고 말했었죠?”

“벌써 잊었습니까? 혼인을 발표하고 아즈마리아의 반응을 살피라 조언했잖습니까?”

아아. 진담이기는 했으나 혈기왕성한 시기에나 벌일 법한 사건이지 않은가. 모리타트가 진중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기억났어요.”

“작위 없는 집안의 여자를 한 명 데려올까 생각 중입니다. 혼인 후에 적당히 대가를 쥐여 주고 떠나보낼 수 있는 쪽으로요.”

고민해서 나온 결과가 그 정도라면 할 말이 없었다. 똑똑하다고 해서 모두 연애 쪽에 머리를 쓸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

“두 번의 이혼을 거쳤다는 명예로운 별칭이 붙겠네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 징글맞은 아즈마리아를 향한 순정을 위해서라면 말이지. 이 바보 같은 순정남이 이따위 일로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확실한 계책이 필요해 보였다.

“머리를 좀 더 굴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각하. 제가 윌 백작이라면 평민 여자를 상대로 질투를 느끼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모리타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 뒷받침할 설명을 친절히 덧붙였다.

“쪽팔리잖아요?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치워 버릴 수도 있고.”

“차라리 후자면 낫겠군요.”

그의 취향은 조금 거친 쪽인가 보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정보였다.

“각하의 혼인 상대는 최소한 귀족 가문의 여자여야 해요. 무시할 수 없는 핏줄이지만, 작위를 갖지 못하는. 그래서 윌 백작의 위기감을 자극할….”

이를테면, 나 같은 여자.

‘…모리타트 잭 정도면 나쁘지 않지.’

그래. 꽤 나쁘지 않았다.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게 흠이기는 했으나, 서로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성정에 어떠한 욕구를 가지고,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나는 모리타트에게 제안했다.

“나와 혼인할래요?”

하지만 그의 거절은 민망할 정도로 단호했다.

“아니요.”

모리타트의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내 제안을 농으로 받아들였나 싶을 정도였다.

“왜요? 각하에게도 윌 백작에게도 그게 가장 상책이에요. 윌 백작은 작위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공작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각자 부인과 남편을 두고 연애하는 편이 훨씬 편할 텐데.”

“그게 괜찮았다면 전 부인과 이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귀족이 아닌 여자와는 위장 결혼하겠다며? 몇 분 안에 말이 바뀌는 것들 보니 나와의 결혼은 싫다는 의사가 확고한 듯했다. 곧 짧게 한숨을 내쉰 모리타트가 내게 당부했다.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아그레인 양. 리히튼 공작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워서.”

입 안이 썼다. 그런 뜻이었구나. 나는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을 나타냈다. 한데 그 다음 질문에는 쉬이 반응할 수 없었다.

“후계를 갖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겁니까?”

후계라.

“캐롤드 전 후작이 황성에 어떤 식으로 당신의 대역을 바친 건지 잊었습니까? 아이는 구하기 쉬워요. 계획을 잘 세워 두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리히튼이 과연 달가워할까? 후계 문제는 쉽지 않다. 명예로운 가문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가문의 재산과 직위를 지키기 위해 정당성을 따지고, 그러한 이유로 손이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귀족이 이 정당성에 목숨을 건다. 불행의 연쇄를 끊기 위해 킨을 데려온 아버지와 같은 선택은 절대 흔한 것이 아니었다. 리히튼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가 나를 부인으로 맞이한다면 바깥에서 아이를 데려올 수밖에 없고, 잉고르드의 정당성은 땅에 곤두박질칠 것이다.

하지만 유서 깊은 가문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이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리히튼의 핏줄이 아닐지언정, 귀족들이 혐오하는 평민처럼 ‘완벽하게 비천한 태생’은 아니게 될 테니까. 친부가 누구든, 적어도 유서 깊은 부인 가문의 핏줄은 반 정도 잇게 되지 않겠는가? 이는 외부에 가문의 비화를 꽁꽁 숨길 수 있느냐, 마느냐와 무관한 일이었다. 리히튼이 과연 ‘완벽하게 비천한 태생의 후계자’를 인정할 수 있을까? 나는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각하의 말도 옳아요. 그게 더 쉬운 방법이기는 하죠.”

“아그레인 양은 혼인이 두렵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리타트의 얼굴을 힐긋 돌아봤다.

“전 부인이 내게 그런 말을 했었죠. 결혼식장에서 내게 영혼을 바쳐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려니 겁이 난다고.”

“왜요?”

“시간이 흘러 그 맹세가 의미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더군요.”

“그녀가 당신을 사랑했었나요?”

“당시에는 그랬죠. 지금은 아니지만. 서로에게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 감정이지 않습니까?”

전 공작 부인도 끊어 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리타트는 왜 버리지 못하는 걸까? 이야기를 들을수록 잭 전 공작 부인이 퍽 대단하게 느껴졌다.

“당신도 평범한 여자 같은 고민을 하기는 하나 봅니다.”

번드레한 얼굴을 가만히 흘겨봤다. 그는 나를 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 건지.

“뭐, 누군가를 마음에 둔다는 게 무서운 일이기는 하죠.”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래, 마음에 두는 게 두려우니 혼인도 무서운 거겠지. 나는 리히튼과의 혼인이 무섭다. 내 욕심으로 그의 남은 것들까지 빼앗게 될까 봐.

“어쩐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소리 같은데요.”

“물론 저도 무섭습니다. 아즈마리아가 백작위를 포기해야만 그녀와 내가 혼인할 수 있으니까. 아즈마리아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내가 죽어도 데려오고 싶다는데.”

마치 아이와도 같은 집착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 거나 갖다 붙이지 마요.”

“함께한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누군가는 항상 손해를 보고, 참아야 하죠. 참아 온 건 나니까 아즈마리아는 손해를 봐서라도 나한테 와야 해요.”

대단한 논리가 납셨군. 이쯤 되니 그의 애절함이 안타깝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혼인 말이에요. 일단 진행하지 말아 봐요. 내가 말을 흘려 볼 테니까.”

비비안느에게 말하면 어떻게 해서든 아즈마리아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모리타트의 낯이 대번 밝아졌다. 우리는 그대로 후원을 반 바퀴 더 걸어 본관으로 돌아왔다. 양산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익숙한 뒤통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 좋아 보이더군.”

종이가 팔랑이며 넘어가는 소리 끝에, 리히튼의 음성이 나지막하게 걸렸다. 아직도 모리타트를 신경 쓰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로 다가가 뺨에 입을 맞추었다. 마음을 풀라는 의미였다. 한데 몸을 빼기 직전에 그의 손이 내 목덜미를 다시 끌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거친 호흡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리히튼이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쓸며 말했다.

“내일모레 잉고르드로 돌아갈 거야.”

“벌써?”

“너도 나와 같이 가.”

당장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제의였다. 그리하지 못하기에 더 아쉬운, 그런 제의.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천천히 장갑을 벗으며 대답했다.

“아쉽지만 나는 같이 못 가. 킨의 일도 도와야 하고, 그러려면 황성을 자주 오고 가야 해. 적어도 올해까지는 이곳을 나가기 힘들 것 같아.”

“킨 캐롤드야, 나야?”

짧은 질문이었으나, 다소 놀란 마음으로 리히튼을 돌아봤다. 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리히튼의 표정은 확실히 아니꼬워 보였다.

“그게 무슨 유치한 소리야, 리히튼? 킨은 가족이고 너는 내 연인이야. 비교할 게 못 된다는 걸 알잖아.”

“그가 왜 네 가족이지?”

왜냐니.

“너와 킨 캐롤드는 남이야, 아그레인. 성은 같아도 피는 통하지 않은 남.”

벗은 장갑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아니야, 킨과 나는 가족이다. 우리는 유일하게 남은 캐롤드의 후손이야. 그러니 그와 내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매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나의 유일한 가족이란 점이었다.

“알아. 그래도 그와 나는 가족이야. 어릴 때부터 남매로 자랐으니까.”

“…하.”

겨우 참아 내는 듯한 헛웃음이었다. 나는 장갑을 쥔 채 다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리히튼은 손을 들어 얼굴 전부를 가려 버렸다.

“가족, 가족… 아주 빌어먹을 단어로 환상적이게 포장하는군.”

문득, 며칠 전 식사 자리에서 킨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각하라면 말이지…. 너를 절대로 내 곁에 둘 수 없을 거다.’

‘남자는 그럴 수밖에 없어. 그러니 네가 각하께 내 진심을 잘 전달해 달라고. 내게 있어 너는 여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킨의 말대로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아그레인. 내가 이딴 부분에서까지 성인군자처럼 굴어야 하나?”

나의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불구하고, 리히튼은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가 이 정도로 불편하게 여길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왜 이리 열을 내는지 의문을 가졌던 것도 잠시. 일전에 리히튼이 조언했던 대로 반대의 상황을 상상하니 생각이 바뀌었다. 나 역시 그가 피를 나누지 않은 여자와 가족이랍시고 살아간다면 절대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여기자 조금씩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유치한 소리 말라고 타박하지 말걸.’

그는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너와 킨 캐롤드가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걸 참아야 하냐고.”

묻지 않아도, 리히튼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내 앞에서 이토록 날것의 신경질을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장갑을 테이블 위에 놓고, 그런 리히튼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이유야 알고 있다. 내게 화내고 싶지 않아서. 리히튼이라면 그럴 인물이었다.

“미안해, 리히튼.”

그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날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이런 잘못을 저지른 건지. 나는 리히튼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경솔했어. 아무리 그래도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됐는데….”

네 마음 이해해.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여러 번 속삭인 끝에, 리히튼이 두 팔을 천천히 내렸다. 눈이 마주쳤다. 한창 들들 끓었을 때의 목소리처럼 무자비하게 냉랭한 낯은 아니었다.

“내게 미안해?”

“응.”

“그러면 잉고르드로 와.”

언제 성을 냈냐는 듯, 리히튼의 시선과 음성은 놀랍도록 차분해져 있었다.

“나는 네 마음만으로는 만족 못해. 네 전부를 가져야 마음이 놓이겠어.”

그건 제안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웠다. 차가운 손이 나의 손등을 덮었다. 나는 가지런한 그의 손톱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리히튼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서늘한 청회색 눈동자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아주 깊고 어두워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분명한 애정이.

한데 그 애정은 나를 타이르기는커녕,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억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리히튼이 있는 잉고르드는 좋을 수밖에 없다. 그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천국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그곳에 가면? 잉고르드 공작 부인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만 머무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화풀이하듯 그에게 쏟아냈다.

“지금 프러포즈 하는 거야?”

내 입으로 말하고서도 놀랐다. 마치 그의 고백을 구걸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해서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리히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어졌다. 넋을 놓은 눈동자가 내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왜 대답이 없어? 아니면 아니라고 해.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굴지 말고.”

그리 말하고 나니 또 화가 났다. 나와 잉고르드는 가고 싶은데, 프러포즈 할 마음은 없다니.

“그런데 어떻게 프러포즈가 아닐 수 있어? 아니, 프러포즈도 없으면서 어떻게 날 데려갈 생각을 해?”

여전히 리히튼에게선 말이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가 정말 나와의 혼인은 일절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거라면? 그저 함께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던 거라면?

‘…괜찮아, 이미 예상했던 일이야. 또 그게 옳아. 리히튼은 한 가문의 수장이니까.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거였으면 붙잡지도 않았어.’

울렁이는 가슴을 느리게나마 누그러뜨렸다. 리히튼은 나를 사랑한다. 그 진실 하나면, 이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조금 흥분했던 것 같은데…. 좋아. 안 그래도 근래 고민했던 사안이 있으니, 지금 말해 두는 게 편하겠네.”

용기를 내는 데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바짝 말라가는 침을 삼키며 리히튼에게 물었다.

“혼인은 어떤 여자와 할 거야?”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꽉 다물려 있던 리히튼의 입술이 뒤늦게 열렸다.

“뭐?”

“네 혼인.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와 해야 할 거 아니야. 연고도 모르는 아이를 데려올 순 없으니까.”

흐릿했던 그의 눈에 새까만 그림자가 졌다.

“계속 이야기해 봐.”

“무슨 이야기?”

“날 다른 여자에게 보내고, 넌 어쩌려는 생각이었는지 말하라고.”

리히튼은 지금 당장 내 뒷목을 잡아 씹어 먹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또 언제 봤었더라. 목 안쪽이 메마른 우물처럼 퍽퍽했다. 리히튼은 분노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까의 일보다 훨씬 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거뭇해진 눈을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역시 거기서 멈추는 게 좋겠군. 그런 되도 않는 헛소리를 더 들을 필요는 없지.”

한데, 어째서인지 이전에 비해서 리히튼의 낯이 눈에 띄게 파리했다.

“리히튼? 어디 안 좋아?”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아니, 돌연 호흡을 깊게 들이키기는 했다. 그런 리히튼의 모습은 보는 이를 더 걱정스럽게 할 뿐이었다.

“안 되겠어. 솔레르에게 약이라도….”

“내가.”

단호하게 입술을 뗀 리히튼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감히 변명하자면… 캐롤드가 아닌 잉고르드에서 하려고 했었어.”

“뭐를?”

리히튼은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던 내 팔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기다란 손가락이 벽에 걸린 외투의 안쪽 주머니를 뒤적였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푸른색 벨벳으로 마감된, 사각형의 낯선 상자가 쥐여 있었다. 리히튼은 그 상자 안에서 물건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가지런한 치아 사이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건은 기이하게도 반지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상자를 내려놓은 손이 내 왼쪽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약간의 힘도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리히튼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자태를 조용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의 입술이 내 약지를 삼켰다.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던 손가락 위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아 왔다. 리히튼은 그 모든 순간 동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운 혀가 내 손가락 사이를 훑었다. 목 안쪽을 건드는 뜨거운 열기에 몸이 떨렸다. 익숙하면서 낯선 그 감각은 아주 느릿하게 멀어졌다. 이윽고 정면으로 눈을 마주한 그가 고백했다.

“사랑해, 아그레인.”

이제껏 본 적 없는, 속이 미치도록 울렁일 만큼 선명한 설렘과, 그보다 더한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멍청한 얼굴로 리히튼을 바라보는 데 그쳤다.

“나와 결혼해 줘.”

찰나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가. 이윽고 리히튼은 나를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듯, 거칠게 눈을 감아 버렸다.

“제길. 드디어 말했군.”

리히튼 잉고르드가 내게 고백했다. 결혼하자고. 영원히 함께하는 것으로 모자라, 서로에게 서로의 영혼을 바치는 맹세를 하자고.

“나는….”

코끝이 맵고 눈가가 뜨거웠다. 울컥 올라오려는 무언가를 삼키며, 나는 힘겹게 말을 뱉었다.

“나는 모리타트와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번쩍 눈을 뜬 리히튼이 내게 소리쳤다.

“제정신이야?”

“하지만 너도 알잖아. 우리는 둘 다 아이를 갖지 못해. 그렇다고 해서 잉고르드에 방계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지. 서로의 정부가 되는 게 최선이잖아.”

변명처럼 늘어지는 말에, 리히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래서 지금 나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씹어 내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잘 생각하는 게 좋아, 아그레인. 나는 너를 다른 새끼랑 나눌 생각 없어. 도망치기에는 늦었다는 소리야. 네가 원하든 말든 나는 언제든 너를….”

“조용히 해, 리히튼.”

너야말로 헛소리는 거기서 그만두라고. 나는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믿기지 않아. 그가 나를 선택했다고? 후계를 포기하고? 왼쪽 약지가 불에 덴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황홀한 감각에 온 정신을 집중하며 리히튼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 입 좀 다물어 줘.”

그동안 혼자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해 왔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두려워서 피해 왔다. 그래서 끝까지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야. 리히튼에게는 후계가 필요해. 나는 이해할 수 있어. 그가 잃어 온 것에 비하면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야.

결론적으로 시간만 아까운 고민이었다. 필수가 아닌 게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기분 좋은데. 리히튼의 땅에서 한 방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결혼이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데.

“아이는 어떻게 해?”

“네가 원한다면 데려오도록 하지.”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잉고르드는 내 대에서 끝나는 거다. 차후 황실에 재산과 작위를 반환하겠다는 유서를 남기면 될 일이야.”

“아쉽거나 아깝지 않아? 전부 네가 이룬 것들이야.”

“그래. 너 하나만을 위해서.”

리히튼이 내 등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게 있어 잉고르드는 아무런 의미 없어. 내 선조 또한 너와 나를 지옥으로 이끈 원수에 불과하지.”

평화로운 속삭임이 내 머리 위에 떨어졌다.

“네가 나를 받아들이면… 그때가 되어서야 내게 첫 가족이 생기는 거야.”

나의 대답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아마, 기억나지 않는 머나먼 과거에서부터.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야. 죽어도 이 반지를 낀 채 죽을래.”

리히튼의 몸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그 약속 잊지 마, 아그레인.”

***

은은하게 빛나는 백금 반지. 중앙에 자리한 연녹색 에메랄드와 그 주위에 가지런히 박힌 다이아들.

‘예쁘네.’

정말 예쁘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종일 쳐다본 덕에 다이아의 개수가 일곱 개인 것도 외웠다. 그렇게 한참을 침대에 누워서 구경하다가, 팔이 아프면 잠시 내린 채 휴식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나면 손을 들어 구경했고, 저리면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길 수십 번째였다.

불현듯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리히튼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읽다 만 낡은 서적이 들려 있었다. 리히튼은 대부분의 시간을 내 방에서 지냈는데, 나와 침대 위를 구르는 일과 외엔 늘 독서를 했다. 그는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단 일 초도 헛되이 보내려 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시간이 마치 죄악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잉고르드에서도 마찬가지였었다. 리히튼은 수면에 드는 대여섯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무언가로 바빴다. 독서는 오히려 그에게 휴식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토록 치열한 삶이 지금의 리히튼을 만들어낸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이게 잉고르드 가문의 반지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 반지는 일종의 혈통서와도 마찬가지다. 반지는 가주의 혼인식 때 그 결실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며, 이후 안주인의 보석함에 고이 모셔졌다가 후계자의 혼인식 때 물려준다. 잉고르드나 캐롤드 가문처럼 유서 깊은 집안의 인장 반지는 오랜 역사만큼 투박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기억하기로 캐롤드의 인장 반지 또한 무식한 크기의 루비 반지였다.

‘이걸 보니 캐롤드의 반지가 더 못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한데 리히튼이 선물한 반지는 구식이라고 표현하기에 훨씬 더 세련된 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인장 반지 특유의 엄지에 끼워야 할 정도로 헐렁한 크기가 아닌, 내 손가락에 딱 맞는 크기라는 게 신기했다. 마치 나만을 위해 세공된 것 같았다.

“아니. 네 손에 그런 더러운 물건을 끼울 순 없지. 그건 새로 제작한 거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이었구나.

“고마워.”

그 말에 내려놨던 손을 다시 들어 반지를 확인했다. 오직 나만을 위한 선물. 그 말을 들으니 이전처럼 쉬이 만질 수 없었다.

‘그런데 잉고르드의 인장 반지를 더러운 물건이라고 표현할 줄이야.’

잉고르드를 향한 리히튼의 증오가 그만큼 컸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나는 리히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과거는 다 무너져가던 힐 성과 예일 성에서 마주한 게 전부라고 해도 무방했다.

“리히튼.”

조용히 책을 훑던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황성에서는 어떻게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오랫동안 참아 온 질문인 만큼, 그의 반응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리히튼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건 아닐까 걱정됐다. 우려와 달리, 리히튼의 대답에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다나한 2세의 사냥개가 된 것부터 시작이었지.”

“암부를 말하는 거야?”

“황실을 대신해 더러운 짓거리를 한다는 면에서는 비슷해. 대외적으로는 황실 소속의 기사가 되어 황성을 지켰고, 해가 지면 황제의 은밀한 명을 수행했지.”

어떻게? 혀끝에 맴도는 의문을 힘겹게 참았지만, 당사자인 리히튼은 다시 고개를 돌리곤 무덤덤하게 과거를 밝혔다.

“평생 할 역겨운 짓거리를 그때 다 했을 거다. 덕분에 황금 같은 정보를 모을 수 있었지. 거대한 백금 광산, 트리비아체를 비롯한 온갖 가문들의 더러운 비화,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미래….”

책장이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 짓거리를 반복할수록 다나한 2세의 신뢰를 얻기도 손쉬웠지. 뜨거운 물에 우유를 섞는 것보다 훨씬 더. 그 당시에 모은 쓸 만한 것들로 아버지와 거래를 한 거야.”

“어떤 거래?”

“나를 데려가면 그렌페르크의 왕좌를 바치겠다고 했다. 잉고르드가 황실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리히튼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 그런 것일까? 터무니없는 만용처럼 들리지 않았다.

“쉽지 않았어. 그 와중에도 너는 계속해서 내 손을 벗어났고…. 그럴 때마다 새로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까마득한 과거를 헤집 듯 무겁고 느렸다.

“그 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충분해. 가치 있는 고난이었어. 적어도 내게는.”

가볍게 웃은 리히튼이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아그레인, 네게 이런 말을 하는 날이 다 올 줄이야. 감격적이군.”

진심 어린 그의 미소는 언제나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나는 그런 리히튼의 얼굴에 대고 반지를 흔들었다.

“오늘처럼 내게 반지를 준 적도 있었겠네?”

“아니, 맹세코 처음이야.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예전에는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게 전부였는데….”

흐려지는 음성에는 미약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리히튼은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까? 고통스럽지 않은 회상이라면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늦은 밤이 내려앉은 후였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났다. 방 안은 고요했다. 리히튼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계의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는 저녁 열 시. 리히튼은 침실로 돌아간 듯했다. 그는 답지 않게 꼬박꼬박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잠을 청했다.

‘그와 나의 관계를 다들 알고 있는데.’

고작 그런 걸로 내 체면이 서는 것도 아니고. 역시 리히튼은 이상한 부분에서 꽉 막힌 감이 있다.

‘아, 그래. 킨에게도 말해 두어야지.’

방을 나서 킨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온기로 가득했던 집무실은 이제 킨의 침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종일 그곳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손님을 만났으며, 잠을 청했다. 시간이 모자라니 좋아하는 검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종종 스트레스를 못 이겨 악을 지르곤 했는데,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안쓰러웠다.

킨은 나의 방문을 새삼스레 여기지 않았다. 아마 또 왔나 싶었겠지.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이곳에서 함께 시답잖은 대화를 나눴으니까. 집무실은 늦은 밤에도 밝다. 킨의 곁에 놓인 등불의 수만 다섯 개가 훌쩍 넘어서, 그의 표정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보였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탓일까? 킨이 내가 앉은 소파 쪽을 힐끔 바라봤다.

“뜸 들이지 말고 해. 너답지 않으니까. 아니면 뭐, 지천이 흔들릴 만큼 대단한 선언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일 모레 리히튼을 따라서 잉고르드로 가려고 해.”

예상과 달리 킨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의 시선이 흘긋, 내 손가락을 향했다.

“날짜는?”

“내일 모레.”

“네가 떠나는 날 말고, 결혼식 날짜.”

아. 봤구나. 괜히 민망해진 기분으로 반지를 매만졌다.

“각하께선 가을을 염두에 두셨던데.”

“가을? 올해?”

“당연한 걸 물어.”

“나는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더불어 리히튼이 킨과 그런 대화를 나누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작 내게는 말 못하고 계속 뒤로 미뤘으면서.’

망설이는 리히튼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못 들은 걸로 해. 젠장, 내가 입방정을 떨었군.”

긴 한숨과 함께 킨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쥐고 있던 펜을 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활짝 열린 창문 앞에 서서 양쪽 어깨를 번갈아 돌리며 말했다.

“필요한 건 따로 적어서 떠나기 전에 남겨 두고 가라. 당장 챙겨야 할 건 내일 전달해 두고.”

“누가 들으면 나가서 안 돌아오는 줄 알겠네.”

“곧 그렇게 되겠지.”

그는 차갑게 식은 게 분명해 보이는 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어서 믿기지 않는단 투로 입을 떼었다.

“네가 혼인한다니, 덕분에 이 오라비는 한시름 놨다.”

“네가 혼인을 못해서 나는 한시름 못 놓고 있어.”

킨은 푸석푸석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에 어떻게 하라는 거냐? 오래전에 공중 분해된 백합 기사단도 정비해야 하고…. 네 결혼식이 캐롤드 가문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는 첫날이란 걸 잊지 마.”

“비비안느가 알면 징글맞게 화려해질 거야. 괜히 뭘 더 얹으려고 하지 마.”

“황실이 준비하는 것과 캐롤드가 준비하는 게 같을 순 없지.”

어느 날부턴가 킨의 고집이 단단히 세졌다. 특히 나와 관련된 사안에는 더더욱. 어릴 때 하지 못한 오라버니 노릇을 하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만두라고 비꼬기는 해도, 실제 그런 행세가 아니꼬운 건 아니었다. 다만 킨이 죄책감에서 벗어났으면 했다. 나 역시 그게 어려울 거란 걸 알고 있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서신이나 사람을 보내. 비비안느와는 계속 연락할 것 같으니까.”

킨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럴 일 없을 테니까 떠나면 이곳 일에는 일체 관심 꺼라. 황성도 내가 직접 가고 폐하도 내가 직접 찾아뵈면 돼.”

이제는 혼자서도 할 만하다고 나를 내치는 건가. 마음 같아선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위협과 함께 킨의 멱살을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곧 나가니까.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 혼자 일으킨 가문 아니야, 킨. 가주로서 압박감도 심하고, 힘든 거 알지만….”

“아, 그것 참 말 많네. 그걸 내가 몰라? 알만큼 아니까 이제 나 혼자서도 다 무너진 캐롤드 좀 일으켜 보자고.”

킨이 성큼성큼 내 옆으로 걸어 왔다. 그는 내 어깨를 쥐며 말했다.

“의무에서 벗어나도 괜찮아. 내가 있잖아.”

“의무? 그게 왜 의무야? 캐롤드에는 너와 나만 남았어.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하지 마.”

왜, 라는 물음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에 걸렸다. 나를 응시하는 킨의 눈빛이 어떤 반문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차갑고 단호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하지 마. 너를 힘들게 하고, 네 발목을 붙잡으려 한다면 아무리 캐롤드라고 해도 잊어. 앞으로는 너를 위해 네 인생을 살아, 아그레인.”

그는 내 몸을 당겨 안았다. 그리고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으로 두어 번 등을 두들겼다. 밀린 위로라도 하는 양 서툴고 어색한 몸짓으로. 많은 업무에 시달려 왔음에도, 그의 손은 한겨울처럼 차갑고 시렸다. 마치 황성을 떠나던 그날처럼.

“네게는 그럴 자격이 있어.”

그리고 그 차가움은 내가 아는 한기 중 가장 따뜻한 온도였다.

***

사흘은 빠르게 흘렀다. 또한 그 사흘은 내가 캐롤드에서 지낸 시간 중 가장 바빴다. 먼저 성질 급한 모리타트의 닦달을 못 이기고 비비안느에게 서신을 보내야 했다. 옆에서 계속 끈덕지게 관여한 탓에 수신하기까지 반나절이 걸렸다. 솔레르는 나를 따라 캐롤드를 떠나기로 했다. 이제 막 정착했는데 힘들지 않겠느냐고 묻자, 조금도 괘념치 않아 했다.

“나는 아그레인을 믿고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이때가 아니면 언제 잉고르드 공작저에 의탁해 보겠어요? 이것저것 정리하고 일주일 후에 뒤따라갈게요. 큰 영지니 배울 것도 많을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페사 아가씨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그리고 잉고르드로 떠나는 전날에는 킨과 함께 전 캐롤드 후작저에 방문했다.

이제는 옛 터만 남은, 새까만 재로 뒤덮인 땅. 우리는 돌무더기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희미하게 형체만 남은 가구들이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언뜻 낯익은 것 같은 양탄자와 장식품들이 땅을 구르고 있었다. 킨은 그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집더니, 반 이상이 까맣게 탄 분홍색 봉제 인형을 툭툭 털곤 내게 건넸다.

“네가 안고 자던 인형.”

…아. 그에게서 인형을 받아 들었다. 인형은 이곳저곳이 터지고 찢기고 타서 도통 무슨 형상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촉감만은 이상하게 익숙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아. 동물 인형이었나?”

“네가 하도 침을 흘려서 이틀마다 세탁했었지.”

“웃기는 소리 하네. 내가 속을 줄 알아?”

킨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주변을 훑었다.

“이건 아버지가 아끼셨던 크리스털 잔. 캐롤드의 오래된 가보 중 하나였지만 네가 공부하기 싫다면서 역정을 부리다가 두 동강 냈었어.”

때때로 기억도 안 나는 물건을 들이대며 이상한 소릴 해댔는데,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듣고만 있어야 했다. 다시 마차에 오르기 직전. 킨이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영지가 안정되면 이곳에 다시 후작저를 지을 거다.”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좋네.”

언제쯤 멀쩡해진 저택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

그렇게 하루가 더 흘러 잉고르드로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높고 푸르렀다. 새벽부터 본관이 분주했다. 가을이 되어서 다시 돌아올 텐데, 고용인들은 모두 평생 못 볼 것처럼 굴었다. 특히 셰즈는 딸을 혼인시키는 어미라도 되는 양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 손을 잡고 놓지 못했다.

“아가씨가 건강하게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는데… 좋은 분과 평생을 함께하신다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저와 어머니를 거두어 주신 캐롤드에 뼈를 묻을 거예요. 그러니 언제라도 다시 돌아와 주세요.”

“호들갑 떨지 마. 보름 후에 또 볼 거야.”

“아가씨는 이런 면에서는 정말 눈치가 없다니까요! 제 말 명심하시라구요….”

훌쩍이며 배웅하는 하녀들과 달리, 킨은 가볍게 내 어깨를 안고 토닥이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나는 이 포옹이 우리 사이의 최고의 인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어서 그는 리히튼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그레인을 잘 부탁드립니다, 각하.”

리히튼의 대답은 간결했다.

“건방진 부탁이로군.”

이윽고 우리를 실은 마차가 캐롤드를 떠났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니, 화창한 여름 하늘 아래의 아담한 저택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캐롤드. 내게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생겼다. 그런 곳에서 멀어지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괜찮았다.

“나중에는 더 먼 곳으로 떠나자.”

리히튼은 그 연유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어디든.”

***

캐롤드에서 잉고르드는 가깝지 않았다. 쉬지 않고 계속 달려도 열흘이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잉고르드는 공기부터 다르다. 연안에서 가깝기 때문에 피부로 닿아 오는 공기가 캐롤드에서보다 더 습하고 상쾌했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여행도 잉고르드 공작저를 코앞에 두고 문제가 생겼다. 마차의 바퀴가 빠진 것이다. 이음새에 긴 흠집이 나 고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눈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거세게 비가 떨어져 걸어갈 수도 없었다. 리히튼의 판단은 빨랐다.

“비가 거세니 나와 아그레인은 근처에서 하루 묵는 게 낫겠군. 저택으로 달려가 새벽까지 마차를 보내라. 가장 가까운 여관에서 기다릴 테니까.”

“예, 각하.”

그의 명령에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 두 명이 말을 타고 멀어졌다. 나는 희미해지는 그림자를 응시하며 리히튼에게 물었다.

“함께 가지 않고?”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몸이 약해. 게다가 슬슬 날이 서늘해지고 있으니, 빗속을 달리다가 지독한 감기에 걸리면 고통스러울 거다.”

“이틀이면 멀쩡해질 텐데.”

하아.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리히튼은 내 머리를 외투로 가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아그레인…. 네 몸을 쉽게 다루지 마. 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마차에서 내렸다. 리히튼은 나를 아이처럼 끌어안고 말을 몰았다. 시내에서 많이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리히튼. 답답해.”

“조금만 참아.”

말에서 내린 후, 리히튼은 여관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고 방문을 닫는 일련의 과정 동안 나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가 바깥으로 얼굴을 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그 누구에게도 나를 보이기 싫은 것처럼. 하지만 방문을 잠근 후에는 기다렸다는 듯 내 몸을 덮쳤다. 젖은 의복이 벽난로의 열기에 마를 동안, 우리는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나중에는 그의 괴롭힘을 참지 못한 내가 한소리 할 정도였다.

***

다음날, 태양도 제대로 뜨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 우리는 마중 나온 마차에 올라 잉고르드 저택에 도착했다. 수십 명에 달하는 고용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크네, 메어리, 하녀장 같은 익숙한 얼굴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머뭇머뭇 내 곁을 맴돌던 메어리는 목욕 시중을 도우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셔서 기뻐요. 앞으로는 저를 꼭 옆에 두셔야 해요! 아직 제대로 말씀 드리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단 말이에요.”

나 역시 잉고르드의 시녀들 중 그녀가 가장 편했기에, 합방 전까지 침실 시녀로 두기로 했다. 베르크네는 그날부터 바로 나를 공작 부인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킨과 함께 잉고르드에서 잠시 머물 때도 느꼈지만, 상황에 따른 대처가 놀랍도록 재빠른 남자였다.

“각하께 전부 전해 들었습니다. 내일부터 당장 결혼식 준비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지시하실 사안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잉고르드에서의 시간은 몹시 평화로웠다. 낙엽이 지는 계절은 빠르게 찾아왔다. 코앞으로 다가온 결혼식에 하나둘 하객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흘러, 마침내 떠오른 그날 아침의 태양. 잉고르드의 결혼식은 그해 열린 결혼식 중 가장 성대하게 열렸다. 우리는 그렌페르크의 모든 귀족이 보는 앞에서 영원을 맹세했다. 서로에게 영혼을 바치고, 서로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축하 갈채가 사그라질 동안 리히튼과 나는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맹세가 끝나고, 하객들로부터 축언을 받는 순서가 되었다. 그전에 만인지상인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축언을 듣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비비안느는 황제의 체면도 잊고 친히 다가와 나를 안았다.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 우리는 계속 함께할 거야, 아그레인. 그렇지?”

나 역시 그런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응.”

힐마르티노는 냉소적인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승자의 권위란 참으로 높아 보이는군요, 부인.”

모리타트는 뻔뻔한 낯으로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으며.

“결혼식이 끝나면 저한테 시간 좀 내주십시오. 급합니다.”

아즈마리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축하 인사를 남겼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네요. 빚은 차차 갚겠습니다. 건강하시길.”

그리고 킨은….

“행복해라.”

늘 그랬듯, 짧은 말로 진심을 보였다. 식은 끝났지만 연회는 이제 시작이었다. 맹세가 끝난 후 열리는 성대한 연회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결혼식이라 할 수 있었다.

해가 뜨고 시작된 연회는 자정이 지나고도 끝나지 않았다. 잉고르드 공작저의 새벽은 마치 낮과 같아서, 손님과 술, 음악으로 넘실댔다. 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연회를 즐기기 위해 밤낮 없이 달려온 하객들이었다. 그들은 쉬이 잠에 들 생각이 없는 듯 너른 연회장에서 웃고 떠들었다.

“아….”

하지만 리히튼과 나는 아니었다. 우리는 발 댈 틈도 없이 빽빽한 연회장을 벗어나 그림자 아래로 향했다. 함께 계단을 오르며 입을 맞추었다. 흥분을 참지 못한 리히튼이 벽 뒤로 몸을 숨기고 깊은 입맞춤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뜨거운 숨에 숨통을 조이는 웨딩드레스가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거칠게 열린 침실의 문은 열릴 때보다 더 거칠게 닫혔다. 침대 위에서 그의 몸에 올라탔다. 청회색 눈동자가 열기로 일렁였다. 금방이라도 내 목덜미를 뜯어먹을 기세의 사나운 시선이 몸을 옭아맸다. 나는 리히튼에게 물었다.

“아카시아 숲의 호수, 기억나?”

헐렁해진 그의 타이를 천천히 잡아 당겼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머릿속에 각인하고 싶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을 놀려 구겨진 타이를 풀어냈다. 정갈하지 못한 숨을 내쉬며, 리히튼이 내 하얀 웨딩드레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대답 없는 그를 상대로 말을 이었다.

“그 호수로 가기 전에 말이야.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워서 울었었어.”

아닌가. 울지 않았었나.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을 만큼 두려웠던 건 확실했다. 타이를 바닥으로 던지고, 리히튼의 턱 아래까지 꼼꼼하게 채운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내 몸을 가까이 끌어당긴 그가 등 뒤의 드레스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푸는 게 아니라 찢는 행위에 가까웠다. 난폭한 손길에 천이 너덜너덜해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나는 살고 싶었어. 그런 나를 살린 게 바로 너였지.”

거울 너머로 비치던 창백한 낯을 회상했다. 꿈처럼 흐릿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뚜렷했던 그때 그 감정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영혼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너밖에 없었던 거야.”

그때, 순순히 내 몸 아래에 누워 있던 리히튼이 돌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느리게 가까워지고, 우리는 진득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가빠진 호흡 끝에서 그가 말했다.

“미안해, 아그레인. 네 다리에 족쇄를 채운 게 나라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중심이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리히튼의 아래에서, 그의 목에 매달리고 있었다. 황홀한 감각에 정신이 몽롱했다. 그의 입술은 한참 만에야 떨어졌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 보던 시선이 곧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리히튼은 내 두 눈을 감겼다. 그리고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게 영혼을 주었으니, 너는 절대 돌려받지 못할 거다.”

우리는 더더욱 깊은 나락으로 함께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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