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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0. 리히튼 Ⅱ (22/24)

Episode 20. 리히튼 Ⅱ

: 소리 없이 피는 덩굴

‘손님이 늘었다.’고 정오 즈음 되어 베르크네가 리히튼에게 보고했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손님의 출신을 물었다. 기억하기로 오늘의 손님까지 합하면 도합 다섯 개 가문이 잉고르드에 머물게 되는 상황이었다. 다섯 개의 가문 모두 별다른 차이는 없고, 다른 점이라면 여식을 포함한 일행이 몇 명인가 정도였다. 가장 적게는 결혼적령기의 적녀와 그 오라비 둘이서만 방문했으며, 많게는 가족 전부가 찾아와 다섯을 웃돌았다. 리히튼은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꺼렸기 때문에 이번 방문자는 부디 세 명을 넘지 않길 바랐다. 한데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 조금 다른 손님이었다.

“킨 후작님이 방문하셨습니다.”

“…킨? 찾아온다는 서신이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잉고르드를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르셨다고 합니다.”

잉고르드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모두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가문의 여식을 잉고르드의 가주인 리히튼의 눈에 들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근 보름간 제국 사교계에는 귀부인들이 눈독 들일만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었는데, 바로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이 혼인 상대를 찾는다는 소문이었다. 신체에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도 함께 돌았으나, 고작 기억을 조금 잃은 정도였으니 문제될 것 없었다. 무엇보다 현 황제를 황위에 올린 장본인이니, 현재 리히튼은 제국 내 최고의 혼처나 다름없었다. 만년필을 내려놓은 리히튼이 베르크네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머문다던가?”

“아마 각하께 따로 말할 것 같습니다.”

“마침 시간도 적절하군. 킨과 식사를 하도록 하지.”

“준비하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요 근래 리히튼은 제아무리 대단한 손님이 찾아와도 빠르면 그날 저녁, 늦으면 이튿날 저녁 식사에 첫인사를 나누었다. 누군가 도착할 적마다 그때그때 맞이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더러, 연애하기 위해 결혼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소한의 예의로 손님맞이를 했다. 그나마도 리히튼 잉고르드였기 때문에 가능한 푸대접이었지만.

하지만 킨 캐롤드는 달랐다. 리히튼이 모종의 사건으로 기억의 일부를 잃고 돌아온 날. 그는 베르크네와 함께 밤이 새도록 앞으로의 계획을 논했었다. 당시 킨 캐롤드에 대한 베르크네의 언급은 이러했다.

‘만약 각하께서 제게 신의할 수 있는 자를 단 한 명만 고르라 명하신다면, 저는 주저 않고 킨 캐롤드 후작을 고르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지?’

‘킨 후작은 각하께 평생 지우지 못할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캐롤드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 각하의 그늘 아래에서 때를 기다린 자지요. 다른 이는 몰라도 킨 캐롤드 후작만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베르크네는 그의 사소한 습관, 취향과 사고를 모두 꿰뚫고 있는 남자였다. 때문에 리히튼은 소위 ‘비비안느 황녀파’라고 불렸던 많은 인물들 틈에서 베르크네를 가장 신뢰했다. 그런 베르크네가 보증한 인물인 만큼, 리히튼은 킨을 홀대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캐롤드 가문은 잠시 기울었던 시기가 있기는 했어도 잉고르드 가문 못지않은 명가였다. 킨 캐롤드는 수완도 좋고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터라 가까이 하는 게 여러모로 이점이 컸다. 리히튼은 하던 일을 가볍게 마무리 짓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항상 생각하지만,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은 것은 리히튼에게 천운이었다. 그의 뇌는 놀랍게도 인물 정보 열람 부분에만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 외의 대부분은 온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며, 베르크네나 킨처럼 친밀히 교류를 나눈 인물에 대한 기억도 조금씩이나마 돌아오는 상태였다. 그러니 언젠가는 잃었던 모든 기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라진 과거에 대한 욕심은 알게 모르게 커져가고 있었다.

리히튼이 향한 곳은 그의 집무실이 있는 층의 다이닝 룸이었다. 보통은 손님이 있든 말든 그곳에서 혼자 식사를 하곤 했는데, 오늘은 킨이 리히튼을 기다리고 있었다.

“킨 후작.”

그의 부름에 창 너머를 응시하고 있던 킨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각하? 저번에 뵈었을 때보다는 안색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그래 보인다니 다행이군. 일단 앉아서 식사부터 하지.”

리히튼과 킨이 마주보고 자리하자, 식탁 위로 음식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검은매 기사단에서 부기사단장 노릇을 하다 제자리를 찾아갔기 때문인지, 킨은 갈수록 말쑥해지고 있었다. 가문을 재건하는 일이 우선이라 당장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했으나, 그가 마음먹고 신부를 물색하면 사교계가 퍽 소란스러워질 듯했다.

“대충 보아하니… 잉고르드를 방문한 손님이 많은 것 같더군요.”

“예상했던 일이지. 다소 번잡스럽다는 걸 제외하면 불편한 건 없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식기를 들며, 킨이 은근한 표정으로 리히튼에게 물었다. 리히튼은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신부 후보들이 어떠냐는 물음이었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지.”

킨은 리히튼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다섯이면 적은 수는 아닌데요. 아가씨들과 개인적인 자리를 가지시긴 합니까?”

“딱히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

“개인적인 교류도 없이 각하와 함께할 여자를 어떻게 찾습니까? 설마 첫눈에 반할 상대를 기다리시는 건 아니겠지요.”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방금 대답은 진심이었다. 혼인 상대를 찾을 목적으로 은근슬쩍 소문을 뿌리기는 했으나, 정작 때가 되니 그 어떤 여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잉고르드를 찾아온 다섯 명의 귀족 영애 외에도 그간 많은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나같이 웃는 얼굴이 어여쁘고, 걸음걸이가 나비처럼 가볍고, 하얗고, 상냥한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여자들을 상대하며, 리히튼은 조금도 동하지 않았다. 육체적인 끌림도, 정신적인 끌림도 느끼지 못했다. 리히튼 나름대로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고민 끝에 리히튼은 아직 정식적인 여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고 더 미룰 마음도 없는 터라, 빠른 시일 내에 조건도 외모도 모두 문제될 것 없이 적절한 여식을 고를 생각이었다. 리히튼이 킨에게 물었다.

“얼마나 머물고 갈 건가?”

“글쎄요. 일단 급한 불은 전부 끈 상태라서 말입니다. 당장 며칠은 여유가 있습니다.”

“며칠을 지내도 상관없으니 편히 지내다 가게.”

“그런 말씀은 다른 이들에게도 하십니까?”

“아니. 보통은 앞부분을 생략하는 편이지.”

킨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 꽤 자부심이 생기는군요. 말씀대로 아주 편히 놀다가 가겠습니다.”

킨과는 말이 통해서 편하다. 게다가 베르크네를 포함한 가신들과의 관계도 좋았기 때문에 공작저의 분위기에 여러모로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던 와중이었다. 물로 목을 축인 킨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제 여동생도 데려왔으니 다음 식사 자리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캐롤드 후작의 여동생이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아그레인 캐롤드 말인가? 의외로군. 끼고 돌아서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다고 하더니.”

“각하께도 그럴 수는 없죠. 뭐든지 예외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킨 캐롤드 후작의 누이, 아그레인은 황제 빈세르크 3세가 총애하기로 유명한 여자였다. 그녀에 대한 황제의 신뢰가 엄청나서, 항간에는 우스갯소리로 제국의 실세가 잉고르드 공작이 아닌 아그레인 캐롤드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리히튼은 기억을 잃은 후 단 한 번도 자신이 제국의 실세라 여긴 적이 없었다. 따라서 아그레인 캐롤드라는 여자의 존재가 꽤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킨이 감싸고 돈다는 유일한 혈육이기도 했으니.

“이런 시기에 여동생을 내게 소개한다는 건, 후작이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나?”

리히튼이 킨을 은근히 떠보았다. 하지만 킨은 되도 않는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그레인은 결혼적령기를 한참 넘었습니다. 그러니 각하의 눈에 차지 않으리란 것을 압니다.”

대개 귀족 사회에서 스물이 넘은 여자는 혼처를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캐롤드 후작의 여동생이면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혼인에 목을 맬 필요가 크지 않다는 뜻이었다.

“소문에는 대단한 미인이라던데.”

리히튼의 말에 킨이 잠시 미간을 구겼다. 미인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뭐, 객관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요.”

“본인이 결혼에 욕심이 없는 건가?”

“그런 점도 있을 뿐더러… 일단 아그레인을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몇 없을 겁니다. 황제 폐하의 총애가 워낙 커, 다들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는 점도 있고 말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평이었다.

“그래 봤자 한낱 귀족 아가씨에 불과할 텐데. 감당 못할 이유는 뭐지?”

캐롤드 가문은 한때 반역죄로 멸문한 시절이 있었다. 장남인 킨이 잉고르드 가문에 몸을 의탁했었다고 하니, 여동생 역시 성치 않은 시간을 버텨왔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황제와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는 관계라 하지 않았는가? 고생을 해도 킨만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킨 캐롤드라는 인물 자체가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여동생을 고생시킬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 안전한 마을에 숨겨 두고 잘 보호했겠지.

“이유를 물으신다면…. 저야말로 여쭙고 싶군요. 그 아이와 어떤 일이 있으셨던 건지.”

미묘하게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이었다. 게다가 킨의 시선이 정확히 리히튼을 향했기 때문에, 리히튼은 잠시 기억을 잃기 전의 본인이 아그레인 캐롤드와 인연이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곧 킨이 그의 생각을 부정했다. 시선을 거두며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은 것이다.

“황제 폐하와 아그레인에 대해 말씀 드린 겁니다. 아그레인은 어릴 적에 폐하와 퍽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때부터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사납거나 정신없는 아이는 아니니, 대화 상대로 나쁘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는 썰린 고기 조각을 나이프로 찍어 먹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아마도요.”

***

그날 저녁, 리히튼은 번화가로 내려가기 위해서 저택을 나왔다. 본래 그의 개인적인 용품을 구하는 일은 베르크네나 시녀장이 전담했으나, 기억을 잃은 뒤로는 자의로 나가곤 했다. 베르크네의 증언에 의하면 기억을 잃기 전 그는 크고 작은 일에 몸소 나서지 않고 베르크네나 다른 귀족을 통해 움직였다고 했다.

하지만 리히튼은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하루라도 빨리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머리 안쪽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듯한 이 기분. 배우고 감상하는 모든 것이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 답답하고 불편한 감각을 어서 빨리 없애고 싶었다.

“리히튼 각하?”

시종이 끌고 나온 말의 안장에 이제 막 오를 때였다. 지나온 정원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역시 각하가 맞으시군요. 외출하시나 봐요.”

리히튼은 고개만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모르는 얼굴이 분명하나, 옷차림을 봐선 잉고르드에 머물고 있는 귀족 여식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바라보고만 있자 여자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타샤. 저는 나타샤 밀레오나예요. 이틀 전에도 한 번 뵈었었어요.”

“그랬군. 좋은 저녁입니다, 나타샤 양.”

“어디 가시는 건가요?”

“공작저 아래쪽 번화가의 서점으로 갑니다.”

“어머. 각하께서 직접 책을 사러 가시는 건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나타샤가 걸음을 옮겨 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날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는 듯했다. 리히튼은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시죠.”

곧 시종이 나타샤가 탈 말을 끌고 왔다.

“고마워요. 잉고르드의 번화가로 내려가는 건 처음이라 기대되네요.”

“특별히 즐길 만한 부분은 없을 겁니다. 도시의 번화가는 다 거기서 거기니.”

“그래도 잉고르드인걸요!”

둘은 길을 따라 빠르게 내려갔다. 나타샤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내려가길 바라는 듯했으나, 리히튼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마 나타샤가 아닌 다른 여자였어도 똑같았을 것이다. 리히튼도 자신의 행동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부를 찾기 위해 그런 소문까지 냈으면서, 정작 찾아온 여자들은 멀리 하다니. 어쩌면 잉고르드를 방문한 이들은 전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그가 고르게 될 여자는 작위만 남아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면식도 없는 귀족 영애일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겠어. 참견당할 일도 없으니.’

결혼의 목적은 후계 생산이다. 권세를 누리는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는다면 좋겠지만, 무려 잉고르드의 공작인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었다. 가문은 볼품없어도 병치레 없이 건강한 여자가 가문을 돌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울 것이다. 애초에 혼인 상대를 찾는 이유도 심리적 안도감을 얻기 위해서였으니까.

…아이라. 그런데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었나?

“이곳인가요?”

리히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안장에서 내렸다.

“맞습니다.”

“고즈넉하고 좋네요. 잉고르드는 저택도, 사람들도, 영지도 모두 참 따스한 분위기예요.”

리히튼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잉고르드가 따스하다고? 얼마나 많은 정적들이 개처럼 끌려와 이곳에서 눈을 감았는지 안다면,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몇몇 귀족 가문에게 잉고르드의 존재는 지옥이었을 터였다. 리히튼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지?’

리히튼은 멍해지려는 정신을 붙잡고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마치 꿈속을 헤매듯, 잃어버린 기억과 새로운 기억 사이에서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그를 알아본 서점 주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잉고르드 저의 서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공간이었으나, 리히튼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각하. 괜찮으시다면 돈을 조금 빌릴 수 있을까요? 온 김에 책을 한 권 사려는데, 제가 맨몸으로 나온 터라….”

“마음 편히 고르십시오. 동행해 주셨으니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제가 값을 치루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타샤가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그럼 말씀하신대로 마음 놓고 고르겠습니다. 각하도 만나고 책도 얻고, 오늘은 여러모로 운이 좋은 날이에요.”

나타샤는 대화가 통하는 여자다. 리히튼은 책장에 꽂힌 책을 대충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해둔 탓인지, 나타샤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 점도 꽤 마음에 들었다. 대화도 통하고 눈치가 있으니 동행하는 데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히튼은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몇 달을 밤새 가며 공부하고 일해 온 탓인지,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았던 담배와 거의 한 몸이 된 상태였다.

‘예전에는… 그래, 예전에는 담배와 연이 없었지.’

이런 식으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과거의 파편들이, 리히튼에게는 몹시 반가웠다.

“이 서점, 아직도 장사하나요?”

그때였다. 어두운 길목 저편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리히튼을 향한 질문임은 분명해 보였다. 리히튼은 연기를 내뱉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것 같군요.”

“왜 멀쩡한 거죠? 분명 폐점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영지민인가.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의 목소리는 특별하게 높거나, 낮은 것도 아니었는데 존재감이 뚜렷했다.

“그리 여긴 이유라도?”

“영주를 시해하려던 범죄자들의 은닉처였으니까요.”

리히튼은 눈을 얇게 뜨고 여자를 살폈다. 그러나 달과 별이 구름에 가려졌는지, 평소보다 더 날이 어두워 실루엣 외에는 어떤 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여자에게 질문했다.

“혹시 그쪽은 소설가인가?”

“잉고르드라면 추리 소설의 배경지로 두기에 알맞겠네요. 어둡고, 음습하고, 위험하니까.”

리히튼은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정했다. 잉고르드에서 명을 다한 자들은 한둘이 아니지….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금은 죽고 없는 빌힐름 황자파와 비비안느 황녀,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했던 귀족들 중 소수의 최측근들이 전부였다.

“보아하니 잉고르드 저의 사람 같은데… 공작 각하를 뵌다면 이 서점은 한때 빌힐름 황자와 잉고르드의 하녀가 내통하던 장소라고 전해 주세요. 물론 내 말이 신뢰 가지는 않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끈 리히튼이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가볍게 지나가듯 말하고 있었으나, 내용은 그럴 만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리히튼은 테라스를 벗어나 서너 걸음 만에 여자의 앞으로 도달했다. 그제야 여자의 얼굴이 눈에 제대로 들어온다. 작은 코,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분위기를 겸비한 선명한 눈매, 짙은 아치형 눈썹, 짧고 얇은 턱….

리히튼은 순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진기한 감각을 경험했다. 유수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의 세상만이 멈춘 기분을. 그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뒷걸음쳤고, 리히튼은 자신도 모르게 멀어지려는 손목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흐릿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리히….”

“나를 아나?”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리히튼은 여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손목을 끌어당겨 캐물었다. 손 안의 살결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전부 어디서 들은 거지?”

여자는 대답 없이 조용히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그의 앞에서 이 정도로 속내를 숨길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았다. 리히튼은 어쩐지 여자의 이름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전에 거친 발길질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손아귀 힘이 약해진 사이, 여자가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달려 나갔다. 리히튼은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곧 걸음을 멈추었다. 잉고르드에서 지내고 있는 여자라면 뒤쫓을 필요 없을 터였다. 이곳에 존재하는 건 모두 그의 것이니까. 잠시 후, 서점의 문이 조용히 열렸고, 나타샤가 나왔다.

“각하. 저는 책을 골랐는데 각하께서는….”

리히튼이 어두운 길목 안쪽을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에, 나타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닙니다. 골랐다면 이제 잉고르드 저로 돌아갑시다.”

“값은….”

“서점 주인이 내 얼굴을 봤으니, 외상으로 올리면 됩니다. 어서요.”

리히튼은 급히 잉고르드 저로 돌아왔다. 나타샤는 영문도 모르는 채 새 책을 옆구리에 끼고 안장에 올라야 했다.

***

자신의 방으로 곧장 올라온 리히튼은 베르크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베르크네. 브릿길 서점이 내 저택의 하녀와 빌힐름 황자가 내통하던 장소라더군.”

“확인해 보겠습니다.”

베르크네답게 전후 사정은 묻지 않고 오롯이 제 할 일에만 집중한다. 시종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으며 리히튼이 물었다.

“몰랐었나?”

“저는 처음 듣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각하께서는 알고 계셨을 확률이 높습니다.”

“치울 필요성도 못 느꼈다, 이건가.”

“어쩌면 미끼였을 수도 있지요.”

늘 느끼지만, 베르크네에서 전해 듣는 과거의 자신은 소설 속에나 나오는 완전한 존재처럼 다가왔다. 기억을 잃기 전의 그가 모르는 진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베르크네는 그런 리히튼을 마치 신처럼 맹신하고 있었다. 리히튼은 어둠 속에서 또렷했던 여자의 인상을 되새겼다.

“한 여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나이는 이십대 초중반인 듯하고,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긴 적발을 지녔어. 목소리는 명랑하지 않고 차분하며, 다양한 지방의 억양을 섞어서 사용했으나 고상한 티가 났지. 신장은 평균보다 한 뼘 정도 크고 말랐더군.”

이쯤이면 곧 ‘찾아오겠다.’는 대답이 나와야 할 터였다. 하지만 베르크네의 반응은 답지 않게 조용했다. 결국 리히튼이 먼저 명령해야 했다.

“찾을 수 있겠나?”

“찾아서 어쩌시려는 겁니까?”

“무엇을 더 알고 있느냐고 캐물어야겠지.”

“그러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내일이면 만나실 수 있을 테니까요.”

리히튼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베르크네는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베스트를 한쪽 팔에 걸치며 말했다.

“제 예상이 맞다면, 그 여자는 아마 아그레인 캐롤드일 겁니다. 킨 캐롤드 후작의 여동생말입니다.”

***

이튿날 정오. 이제 막 일처리를 끝내고 한숨을 돌릴 때였다. 마무리를 돕던 베르크네가 집무실을 나가기 직전에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각하. 나타샤 밀레오나 영애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나타샤 밀레오나라면 어제 저녁에 그를 따라 서점까지 동행했던 여인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니 아직도 눈가가 뻐근한 것 같았다. 여인, 그러니까 나타샤 밀레오나가 아닌 아그레인 캐롤드에 대해 생각하느라 새벽이 되어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생각이라고 해 봤자 별것 없었다. 그녀와 나눴던 몇 마디의 짧은 대화가 이상하게 잊히질 않았다. 리히튼에게는 근래에 새로운 습관이 생겼는데, 바로 상대방의 표정과 말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 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아그레인 캐롤드를 떠올리면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그레인은 리히튼, 혹은 잉고르드에 대해 아는 바가 꽤 많은 듯했다. 눈이 마주친 후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으니 리히튼의 존재를 아는 것은 확실했다. 다만 리히튼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그때 아그레인이 보였던 반응이었다.

여자의 표정은 정말 기이했다.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연인을 보는 얼굴이기도 했으며, 죽이지 못한 원수를 만난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 또렷한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박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도 이제껏 리히튼이 알아 온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다. 여타 귀족들처럼 잉고르드 공작을 두려워하는 눈이 아닌, 리히튼이라는 존재 자체를 꺼려하는 눈이었던 탓이다.

기억을 잃은 후, 리히튼은 자신에게 그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는 인물을 처음 보았다. 물론 별 볼 일 없는 사소한 이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몹시 기이하게도. 당시 마주했던 아그레인 캐롤드의 얼굴은 거머리처럼 망막 안쪽에 맺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각하?”

사념에 꽤 깊게 잠겨 있었던 것일까? 베르크네가 재차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리히튼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식사 시간은 저녁 일곱 시로 잡아 둬.”

“그분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베르크네는 사적인 질문을 거의, 아니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의 낯선 질문에 리히튼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되물었다.

“궁금한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야. 마음, 마음이라…. 잘 모르겠군. 마음이 생기길 바라서 참석하는 자리라고 대답하면 되겠나?”

베르크네는 충분하다는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밀레오나 백작 가문은 큰 사건사고 없이 조용하게 명맥을 유지해 온 가문입니다. 각하께서 원하시는 혼처로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이후 잉고르드를 방문한 다섯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오갔다. 대단할 건 없었고, 나타샤 밀레오나와 식사할 생각이라면 이후 다른 여자들도 한 번씩은 만나 보라는 소리였다. 오늘 점심은 킨과 함께하는 터라, 베르크네와의 대화가 길어지지는 않았다. 리히튼은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자신의 걸음이 퍽 빠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구는 자신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 각하. 오셨습니까?”

“일어설 필요 없어.”

킨의 안색은 훤했다. 어제 저녁에도 훤했는데, 고작 반나절이 흐른 오늘은 그보다 곱절은 더 훤했다. 이유를 생각하기 전에, 리히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킨의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 여자가 있었다. 조금은 창백한 인상 때문인지 어제 느꼈던 분위기보다 훨씬 더 가냘프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의례적으로라도 웃기 마련인데, 그런 형식적인 눈인사도 없었다. 오히려 여자는 그에게서 금방 시선을 떼었다. 적어도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신했다. 베르크네의 추측대로 어젯밤 서점 앞에서 스치듯 만났던 그 여자가 맞았다. 자리에 앉은 킨이 답지 않게 어색해진 얼굴로 여동생을 소개했다.

“이쪽이 어제 말씀드렸던 제 동생, 아그레인입니다. 아그레인? 이쪽은 리히튼 잉고르드 각하이시다.”

아그레인이 리히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킨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들었던 대로 놀라운 미남이시네요. 각하의 환심을 사려고 여러 귀족 아가씨가 찾아올 만해요.”

착각이 아니라면 고작 두 마디의 말에 뼈가 박혀 있었다. 하하, 리히튼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킨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답지 않게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 사교계에 돌고 있는 각하의 소문이 워낙 무궁무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그레인의 말은… 각하께서 어서 좋은 여자를 찾으셨으면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아그레인의 반응은 어쩐지 시큰둥했다. 남매의 분위기는 리히튼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듯했다.

“여동생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동생이라기에는 오라비 되는 킨을 마치 친구처럼 부른 감이 있었다. 그의 질문에, 아그레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릴 적부터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요. 각하께서 불편하시다면 자중하겠습니다.”

“남매 사이의 일에 내가 끼어드는 것도 무례한 일이지.”

“각하께서는 저희 남매의 은인이신걸요. 전혀, 조금도 무례한 일이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뱉는 말마다 비꼬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킨이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는 걸 봐선 착각이 아닌 듯했다.

“각하. 그, 아그레인이… 아그레인의 화법이 조금 독특한 편이기는 합니다.”

“내가? 전혀. 너를 제외하곤 누구도 내게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겠지.”

“그 말은 내가 각하 앞에서만 독특하게 군다는 거야?”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본다, 아그레인.”

놀라운 점은 그런 모습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귀엽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리히튼 자신이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린 누이가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귀엽게 보였다.

그래서일까? 눈앞의 아그레인은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금세 사라질 흐릿한 안개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색감도 존재감도, 태양보다 강렬한 붉은 장미처럼 보였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던가. 장담컨대 아니었다. 리히튼은 이 미묘한 감정이 친근함에서 비롯한 애정이라고 결론지었다. 생판 남이 아닌, 킨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느끼는 친근감인 것이다. 그리고 리히튼은 이 생경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아그레인 양.”

그의 부름에 아그레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리히튼은 찰나의 순간, 녹안 속에 깃들었던 혼란과 실망을 놓치지 않았다. 고작 하루 사이에 다양한 감정을 보이는 여자였다. 리히튼은 그 감정의 근원이 궁금했다.

“어젯밤에는 왜 홀로 저택을 나가 있었던 건지 궁금하군요.”

“나가 있었다고요?”

킨이 매서운 눈으로 아그레인을 쳐다봤다. 여동생을 싸고돈다더니, 성인이 되어서도 외출할 때마다 허락받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너는 제발, 부디 그 제멋대로 구는 성정을 고칠 필요가 있어. 위험하게 혼자 나갔다고? 캐롤드의 후작 영애씩이나 되는 여자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아그레인은 그런 킨의 타박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리히튼의 물음에 답했다.

“각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잉고르드는 제게 꽤 그리운 장소라서요. 한밤의 정취를 느끼며 거리를 걸어 보고 싶었죠. 거기서 각하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리운 장소?”

리히튼의 추측이 맞아 떨어졌다. 그와 아그레인은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는 것 같았다. 말끝마다 비꼬는 것처럼 들린 이유도 그녀의 서운함 때문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리운 장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군요.”

“뜻이랄 게 있나요? 저는 각하와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그 인연 덕분에 잉고르드에서의 기억이 나쁘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알은체를 했던 건가. 하지만 그것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하게 안면 있는 사이란 이유로 저리 갖가지 감정이 그를 향할 순 없었다. 이 순간, 리히튼은 잃어버린 과거가 또 다시 아쉽게 느껴졌다.

“그 귀중한 인연을 기억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만 드는군. 내 사죄를 받아 줄 수 있겠습니까?”

“각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어쩐지 우울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관계라면 어떤 관계였는지? 꽤 힘든 유년 시절을 지냈던 것으로 아는데.”

물을 삼킨 아그레인이 이제껏 본 얼굴 중 가장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대단한 관계였죠. 각하와 저는 몸까지 섞은 연인 관계였거든요.”

식기끼리 부딪히는 소음이 났다. 킨의 나이프가 접시 위로 떨어져 나동그라지는 소리였다. 식탁은 순식간에 무거운 적막으로 휩싸였다. 침묵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그 사이 리히튼은 아그레인의 낯을 샅샅이 훑어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아그레인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얼어붙은 공기를 깼다.

“놀라셨죠? 농담이에요. 요즘 황실에 이런 농담이 유행이라서요.”

하하. 때맞춰 킨이 억지로 웃음을 흘렸다. 그는 긴 한숨과 함께 리히튼에게 사죄를 구했다.

“말씀드렸지만, 각하. 제 여동생이….”

“말썽꾸러기로군.”

하지만 여전히 싫지 않다. 왜일까?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리히튼이 아그레인을 불렀다.

“아그레인 양.”

“말씀하세요.”

“아그레인 양만 괜찮다면, 그대를 내 의동생으로 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번에는 찰나의 순간도 아니었다. 아그레인의 얼굴에서 돌연 미소가 완전히 거두어졌다.

“제가…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 알아챌 미약한 서글픔이 깔려 있었다. 왜일까? 그녀와 자신은 대체 무슨 관계였던 것일까?

“킨의 동생은 내 동생이기도 하지.”

리히튼은 인정하기로 했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은 눈앞의 여자에게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대단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 흥미가 너무 깊고 짙어, 언뜻 흥분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요. 그럼 저도 각하를 오라버니라고 부를게요.”

그는 아그레인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심혈을 기울여서 파헤칠 생각이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 과정 자체가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그레인은 손에서 나이프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정식으로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리히튼 오라버니.”

물로 목을 축였음에도, 이상하게 바짝 메마른 것처럼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아그레인은 속이 좋지 않다는 말과 함께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사 자리를 떴다. 리히튼은 그녀의 주장이 당연히 거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나서서 아그레인을 막지 않았다. 사실의 유무를 떠나서, 그녀의 안색이 실제로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아그레인과는 더 애틋할 것 같은데, 킨.”

둘만 남게 된 식사 자리는 자연스럽게 가벼운 술자리로까지 이어졌다. 투박하면서 은근히 섬세한 킨은 우습게도 알코올에 약하고 주량이 약했다. 그는 고작 한 잔 만에 제 머리칼처럼 붉게 달아 오른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긴 시간 떨어져 있기도 했고. 헤어진 후 다시 만났을 땐 못 알아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시기가 많이 후회됩니다.”

“그래도 둘 다 멀쩡히 살아남아 캐롤드를 일으켜 세웠군.”

“예에. 각하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그레인의 일도 마찬가지로요.”

“아그레인의 일이라 하면?”

“뭐…. 이런저런 일 말입니다. 각하께서 한때 아그레인을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털어 놓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잠시 말이 없던 킨은 술기운에 살짝 풀어진 얼굴로 입을 떼었다.

“그래서 아그레인이 조금 까다롭게 구는 걸 겁니다. 서운한 거겠지요.”

그 정도의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리히튼은 굳이 그에게 캐묻지 않았다. 제삼자인 킨을 통해 들어 봤자 그리 의미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은 멀쩡해진 낯으로, 킨이 그에게 질문했다.

“그 애를 의동생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유랄 게 있나? 말했듯 후작의 동생이 곧 내 동생이기 때문이지.”

그의 대답에 킨이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로 의동생을 만들 분이 아니란 걸 압니다. 저는 그저….”

“말하게.”

“혹시 아그레인에게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라면, 청하건대 그 애의 마음을 흔들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티내지는 않았으나, 리히튼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킨이 그 정도까지 자신을 파악하고 있을지 몰랐을 뿐더러, 건들지 말라고 당부할 줄은 더욱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정이 꽤 깊군. 동시에 리히튼은 미약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오롯이 자신만이 가져야 할 범위 내의 무언가를 침범당한 기분이었다.

“흑심을 품었다면 의동생 소리는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괜한 걱정을 접어 두라고 말하고 싶군.”

쓴웃음을 뱉은 킨이 이내 자신이 건방졌던 것 같다며 용서를 구했다. 리히튼은 문득 궁금해졌다. 굳이 킨이 그런 부탁을 한 이유는 아그레인을 아끼기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상대가 리히튼 잉고르드이기 때문일까?

***

해가 지고 나서는 나타샤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밀레오나 가문에서는 장녀인 그녀를 비롯해 밀레오나 부인과 여동생이 함께 방문했는데, 저녁 식사 자리에는 나타샤만이 참석했다.

“죄송해요, 각하. 어머니께서는 사냥에 정신 팔려 먼 곳까지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 것치고는 식사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를 너무 세세히 파악하고 있다.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끔 일부러 늦게 돌아오는 것이겠지. 의도를 읽었음에도 리히튼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젯밤에 사 주신 책, 흥미진진해서 오늘 하루 종일 읽었어요. 괜찮으시다면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 보실래요?”

“좋습니다. 나타샤 양 덕분에 식사 시간이 적적하지 않을 것 같군요.”

은은한 촛불 너머로 보이는 나타샤의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이윽고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나타샤가 책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히튼은 그녀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에 미약한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

이튿날 오전에는 유독 하늘이 맑았다. 완연한 여름 날씨에 리히튼은 소매를 접고 창문을 열었다. 집무실이 저택 남향에 위치한 탓에 유독 열기가 뜨거웠다. 창문을 열어도 이미 흐른 땀은 전혀 식지 않았다.

“각하. 나타샤 밀레오나 영애가 방문했습니다.”

리히튼은 나타샤가 몹시 부지런한 아가씨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몇 번 대화를 나누었다고 직접 찾아오는 배포도 퍽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타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외양만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자태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각하.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덕분에 좋은 밤 보냈습니다. 용건이 있으십니까?”

리히튼이 곧장 용건을 묻자, 나타샤가 살짝 당황한 눈을 했다.

“용건… 까지는 아니에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함께 차라도 마시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리히튼은 어젯밤 그녀와 함께했던 저녁 식사 자리를 떠올렸다. 마냥 지루했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유익한 시간도 아니었다. 휴식을 취한다면 혼자 쉬는 게 나았다. 구태여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면….

“아쉽지만 이미 선약이 있군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요.”

나타샤가 기운 빠진 낯으로 대답했다.

“다음이라면 언제가 괜찮을까요?”

“괜찮은 시간에 제가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거절에도 나타샤는 곧장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할 말이 있는지 여러 번 입을 열고 닫다가, 마지막 한마디만 겨우 남기고 집무실을 나갔다.

“기다릴게요.”

리히튼은 나타샤가 사라진 즉시 베르크네에게 물었다.

“베르크네. 아그레인 캐롤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아마 서재에 있을 겁니다.”

당연히 알아보겠다고 다녀올 줄 알았는데, 들려온 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리히튼은 어쩐지 허점을 공격당한 기분으로 입을 떼었다.

“잘 아는군.”

“가깝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그레인 영애와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영애가 잉고르드를 그리운 장소라고 표현하던데. 그건 자네와 관련 있는 건가?”

베르크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그 모습에서 리히튼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에 아그레인이 속해 있다. 어떤 시간이었을지 당장 확인하고 싶었다.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군요. 하지만 있어도 없는 수준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가 잉고르드를 그립다고 표현한 건 절대로 저 때문이 아닐 겁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것부터가 이미 멀지 않은 관계란 방증이었다. 리히튼은 곧장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아그레인은 커튼을 거두고 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맞은편 자리로 걸어갔다.

“발소리를 죽이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최대한 인기척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아그레인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책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라고 한때 제게 말씀하셨던 적이 있죠, 오라버니. 기억하세요?”

대답하지 않고 의자를 빼 앉았다. 아그레인의 작고 곧은 콧대 옆과 깊게 파인 눈매 안쪽으로 회색빛 음영이 져 있었다. 리히튼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정적인 그 풍경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대답이 없자, 아그레인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실망스럽다는 눈빛이었다.

“괜한 물음이었네요.”

“누이는 늘 내게 무언가 바라는 얼굴을 하는군.”

무얼 바라는 걸까? 속 시원하게 밝혔으면 하는 마음과 계속 비밀스레 숨겼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그레인은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떨었다.

“웬만하면 누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제가 듣기 싫어하는 단어라서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원래 그렇게 까다롭나?”

“예민하단 소리는 더러 들었어요.”

하기야 워낙 섬세하고 여린 선을 지닌 여자라,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예민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 킨과는 조금도 닮은 점이 없다. 이복 남매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머리색과 눈색이 비슷한 걸 제외하고는 완전한 타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할 말 있으세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리히튼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다시 책으로 돌아갔던 시선이 금방 그를 향했다.

“아그레인.”

“네.”

“본인이 예쁘다는 걸 알고 있나?”

아그레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이윽고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기죽지 않고 이것저것 요구하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이래서 아그레인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곧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 나 놀려요?”

리히튼은 솔직한 속내를 밝힌 것에 불과했다. 한데 아그레인이 한 소리를 하고 나서야 어감이 조금 이상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변명하듯 뒷말을 덧붙였다.

“구애하는 남자가 많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미혼인 이유가 궁금해서.”

“그런 게 왜 궁금해요?”

“의동생의 사정을 궁금해 하면 안 되는 건가? 서운한 소리야.”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대화했을까? 눈앞의 아그레인이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할 정도니, 적어도 지금보다는 친근했을 게 분명했다. 아그레인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리히튼은 문득 자신이 몇 살은 더 어린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는 건가 싶었다.

“아그레인. 혹시 내가 싫거나, 혐오스럽거나, 불편한 거라면 바로 말해도 돼.”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바로 입이 열렸다.

“전혀요. 차라리 그런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네요.”

아그레인은 처음으로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이전처럼 은근히 시선을 피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여실히 표현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면으로 마주한 아그레인 캐롤드는 이전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저는 오라버니가 싫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이런 식으로 구는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 할걸요. 일부러 선을 지키고 있는 거라고요. 예전처럼 굴면 놀라 까무러질 테니까.”

리히튼은 아그레인이 이토록 길게 말하는 걸 처음 봤다. 문장에 담긴 의미는 격정적인데, 정작 그 말을 뱉은 주체는 격양된 감정 없이 차분하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제 뜻을 확실히 관철시키겠다는 듯 매서웠다. 이쯤 되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궁금하라고 몰아붙이는 심보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해 봐.”

그의 답에 아그레인의 숨이 미세하게 가빠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지만, 방금 그 말로 더 궁금해졌어. 내가 어찌하면 되는 거지?”

리히튼의 손끝이 책 위에 놓인 아그레인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겨우 살갗이 닿은 것에 불과한데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아아.”

그를 바라보는 아그레인의 입매가 처음으로 호선을 그린다. 아그레인은 말 그대로 싱긋 웃었다. 잠깐이라지만, 숨 쉬는 일이 사뭇 곤욕스런 행위로 느껴졌다. 하얀 손이 돌연 아슬아슬하게 닿은 리히튼의 손등을 확 움켜쥐고는 그대로 놓아 버렸다.

“싫어요.”

그리고는 책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그레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책장에 책을 끼워 넣었다. 여린 뒷모습이 그렇게 새침해 보일 수가 없었다. 단호한 거절에 김이 샐 만도 한데, 어찌된 게 전신을 휘감고 있는 긴장감은 여전한 것 같다. 리히튼은 마치 날카로운 갈퀴가 할퀴고 간 양, 이상하게 헛헛한 손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를 잘 가지고 노는군.”

“그건 제가 할 말이네요. 기억을 잃었어도 여자 꼬시는 재주는 여전한가 봐요.”

아그레인은 문을 밀어 서재를 나가려다 말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쪽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아가씨들이나 꼬셔 보는 게 어때요? 다들 각하와 놀지 못해 안달이던데.”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지, 까다롭게 구는 것도 다 귀엽게 느껴진다. 의자에 기댄 리히튼이 다리를 꼬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쪽이 아니라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아그레인은 날이 선 눈빛으로 욕설을 대신하고 서재를 나갔다. 분명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 이리도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

해가 구름에 가려진 늦은 오후. 그가 아그레인이 잉고르드의 하녀로 일했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경로를 통해서였다. 검은매 기사단의 재정 상황을 보고 받는 와중에, 새 부기사단장이 지나가듯 아그레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다들 킨 경… 아, 죄송합니다. 호칭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했습니다. 킨 후작 각하와 대련하느라 바쁩니다. 겁 없는 녀석들이 반드시 후작 각하를 이겨서 아그레인 아가씨를 소개받고 싶다더군요. 아가씨께서 이곳에서 몇 달을 하녀로 일하셨을 때도 하나같이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긴 했습니다.’

하녀라니. 손님으로 며칠을 묵었던 것도 아니고, 고작 하녀로서 일했던 시간이 그리웠다고? 리히튼이 당시의 아그레인에 대해 몇 가지 질문하자, 기사는 당시에 아그레인이 시녀, 메어리와 가까운 사이였다고 밝혔다.

리히튼은 곧장 메어리를 불렀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불러온 후에는 아그레인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당사자에게서 직접 듣지 않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상기한 것이다. 리히튼은 다시 메어리를 돌려보냈다. 한데 메어리는 그의 집무실을 나서기 전에 조심히 입을 열었다.

‘감히 먼저 입을 열자면… 저는 지금이 더 좋아 보인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무슨 의미지?’

‘아그레인 아가씨도, 각하도 지금이 훨씬 편해 보이세요. 저는 두 분이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남기고, 메어리는 후다닥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덕분에 리히튼의 머릿속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지금이 더 나아 보인다? 그 말은 즉 전에는 최악이었단 뜻이지 않은가. 그라는 존재 때문에 잉고르드가 그리웠단 말은 단순히 비꼬는 의도였을까? 알아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

이튿날 리히튼은 일찍 눈을 떴다. 여름은 해가 길게 떠서 다른 계절보다 깨어 있는 시간이 길다. 더군다나 그는 백짓장처럼 하얗게 지워진 기억의 일부를 메우기 위해 앉아서 서류를 들여다보는 일이 잦았다. 사람과의 관계를 잊다 보니, 어디에 얼마만큼 대금을 대줬는지도 하나하나 찾아서 살펴야 했다. 머리와 눈, 그리고 사지가 쉴 틈 없이 일하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시가를 피우는 시간이 더 늘었다. 아마 그의 집무실에도, 몸에도 온종일 진한 시가 향이 배어 있을 게 분명했다. 베르크네가 방 안쪽 구석에 배치된 테이블 위에 향수를 두고 갔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사용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흰 연기가 짧은 시간 시야를 가리다가 하늘 위로 올라가 사라진다. 찌르르, 찌르르 우는 새소리가 지겹도록 들렸다. 리히튼의 시선은 창 너머 울창한 활엽수로 이루어진 숲의 앞쪽, 시원하게 흐르는 냇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날이 더워지고 냇가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그건 잉고르드를 방문한 아가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뜨겁겠군.”

한데 그중에서도 유독 해가 높게 뜬 정오에 물가를 밟는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아그레인이었다. 아그레인은 바위에 걸터앉아 냇물에 발목을 담그거나, 종종 옷을 걸친 채로 물가에 뛰어 들어 수영을 즐겼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대개 킨이 함께했다. 둘은 함께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크고 작은 다툼하는 데 소비했다. 리히튼이 며칠을 가만히 지켜본 결과,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킨은 다 자란 숙녀인 아그레인을 마치 걸음도 못 뗀 갓난아이처럼 대하고 있었다. 짧은 외출도 반드시 허락을 받도록 했으며 특히 사람을 만날 때는 더 간섭이 심했다. 그렇다고 아그레인이 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굴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킨의 집착을 끔찍하게 여겼다.

때로는 ‘귀찮게 굴지 좀 마. 너한테 오라버니 노릇은 바라지도 않아. 너는 내게 잘못한 것 없고 난 속죄해 줄 생각도 없어. 혼자서 염병 떨지 말라는 소리야.’ 같은, 이해 못할 타박과 함께 큰소리를 치고는 했다. 그에 리히튼은 자신이 여겼던 것보다 이복 남매 사이의 서사가 퍽 복잡하구나 싶었다. 나서서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일말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서로 죽고 못 사는 남매 관계였다면 명치가 서늘해졌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왜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 시작하면 아그레인을 향한 감정의 골이 손 쓸 겨를도 없이 심연보다 더, 더 깊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런 식으로 햇빛을 쬐다간 그림자와 구별도 못할 정도로 타고 말지.”

아그레인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혼잣말이 집무실을 울렸다. 아그레인이 냇가에 머무는 동안, 그의 시선도 그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시간은 리히튼이 숨을 돌리고 휴식을 취하는 때였다. 그는 시답잖은 짓을 하는 자신이 가끔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데 어느 날부턴가, 아그레인만 찾아오던 정오의 냇가에 또 다른 손님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슷한 시간대에 물가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몇 분 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그레인은 킨이 아닌 이상 다른 이들과 부딪히는 걸 꺼려했으므로, 자연스레 그녀를 보는 날도 줄어들었다. 아그레인의 자리를 대신한 여자들은 우아하게 물놀이를 즐기다가 리히튼 쪽으로 힐긋 고개를 돌리곤 했다. 여자들의 시선은 정확히 그가 앉은 집무실의 창가를 향하고 있었다. 리히튼은 뒤늦게 냇가에 여자들이 늘어난 이유를 눈치챘다.

리히튼이 관심을 끊자 냇가도 조금씩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문득 창밖을 확인했을 때, 물가에 다시금 아그레인이 나와 있었다. 리히튼은 고민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을 나갔다. 아그레인은 킨과 함께였다. 킨은 땀을 닦아 내듯 냇물로 여러 번 제 얼굴과 목을 적셨고, 아그레인은 흘러내려가는 수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곧 리히튼을 알아본 킨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각하!”

아그레인이 곧장 고개를 들어 리히튼을 찾았다. 저런 반응을 보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건 확실했다.

“각하께서도 결국 더위를 참지 못하고 나오셨군요.”

리히튼은 대놓고 아그레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새로운 의동생과 근래 친해질 기회가 없어서.”

“아하….”

킨이 조심스럽게 그와 아그레인을 살폈다. 아그레인은 제 이름이 나왔음에도, 마치 더 해 보라는 듯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무릎에 턱을 괸 채 리히튼을 바라봤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킨을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이제 곧 검은매 기사단의 오후 대련이 있을 시간이었다.

“이런, 저는 먼저 자리를 뜨겠습니다. 아그레인. 각하께 무례하게 굴지 마라.”

“그 말은 지겹지도 않니?”

킨이 떠나고 나자, 둘 사이에는 노골적인 침묵이 내려앉았다. 리히튼은 처음으로 여자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왜 자꾸 피하느냐고 물어야 할지, 왜 아무런 말이 없냐고 물어야 할지.

그러나 그런 고민을 끝마치기 전에, 등 뒤에서 바삐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꼈다. 나타샤였다. 그녀는 햇살처럼 해사한 미소와 함께 리히튼의 곁으로 뛰듯이 걸어왔다.

“좋은 오후예요, 각하. 안 그래도 요즘 날이 더워 자주 냇가에 나오곤 했는데… 이런 식으로 뵙네요.”

“좋은 오후입니다.”

예전이었다면 흥미를 끌고자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녀를 좋게 봤을 텐데. 어쩐지 지금은 번거롭게 느껴지기만 한다. 나타샤는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안부 인사를 길게 건넸다. 냇가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는데, 물놀이를 하러 온 것치고 그녀는 너무나 정복에 가까운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는 언제 갖게 되실까요?”

시간, 시간이라. 그가 어떤 식으로 거절할지 고민하는 사이,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좋아 죽는 티를 숨기지 못하네.”

아그레인의 음성은 다분히 신경질적이었다. 그녀의 젖은 몸이 물살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가까워졌다.

“잘 생각해 봐요, 나타샤 영애. 나타샤 영애도 그런 적이 있죠? 조금도 관심 없는 영식이 좋아한다는 눈치를 풀풀 풍기며 사사건건 참견하려 들 때 말이에요. 짜증을 넘어서 혐오스럽지 않던가요?”

나타샤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낯으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뭍으로 올라온 아그레인은 나이트가운에 가까운 차림이었던 터라, 새하얀 레이스로 뒤덮인 천 안쪽의 살이 훤히 비쳤다. 리히튼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무더위를 감수해서라도 상의를 입고 온 자신의 선택을 다행이라 여겼다. 걸치고 있던 상의를 어깨에 걸쳐 주자, 아그레인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눈인사도 없이 나타샤만을 바라보는데, 리히튼은 이상하게 그 새하얀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웬만하면 남의 일에 참견 안 하는데, 보다 못해 하는 소리예요. 그쪽 아가씨들이 내 아침 수영 시간을 빼앗은 탓에 요 며칠 몸이 무거웠거든.”

눈 둘 곳도 찾지 못하던 나타샤는 이내 굳어 있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그레인 캐롤드 양. 평소에는 인사 한 번 없다가 이리도 갑자기 절 타박하시니, 저로선 조금 당황스럽네요.”

“잉고르드에 방문한 이들 중 서로 아침 인사를 나누면서까지 친근한 관계가 있나? 있다면 친근한 척을 하는 거겠지. 상식적으로 따지면 서로가 연적이나 마찬가지인데.”

나타샤의 코앞으로 다가간 아그레인이 손가락을 들어 구불구불한 금발을 툭, 건드렸다.

“서로 잘 지내는 게 더 멍청한 거 아니야? 그러다가 한 명이 우리 오라버니와 눈이 맞기라도 하면? 바보처럼 축하해 줄래? 계속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싱긋 웃으면서 보란 듯이 조롱하는 아그레인과 그 앞에서 입술을 깨문 채 주먹을 쥔 나타샤. 그 둘 사이에 낀 리히튼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그레인을 달래고 저택 안으로 끌고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몸소 나서 나타샤 밀레오나에게 비참함을 선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그레인이 끌고 간다고 얌전히 끌려갈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반대로 나타샤를 데려가는 건…. 아그레인과 한 공간에 있는 이상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선택지였다.

나타샤는 표정 관리 자체가 버거워 보였다. 그 역시 아그레인처럼 상대방을 앞에 두고 무참히 깎아내리는 귀족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뒷담을 하거나 고상한 시로 에둘러서 조롱하기 마련인데, 아그레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혼인하기 전까지 귀족 여식들은 서로 친구도 될 수 없겠네요.”

나타샤의 말에 아그레인이 이마를 짚었다.

“아, 제발… 그런 머저리 같은 소리하지 마요, 나타샤.”

리히튼은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가까운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들은 리히튼이 선 방향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아그레인 캐롤드. 당신은 정말 입조심해야겠….”

“나타샤도 알잖아요? 결국 여우 같은 애들이 더 많은 걸, 아니 모든 걸 가져간단 사실을. 바로 당신처럼 말이야. 친우가 대수인가? 다 가지면 자연스레 생기는 게 그 친우인 것을. 여우라는 표현은 비하에 불과해. 오히려 똑똑하다고 해야 옳지.”

“그건 신의 없이 구는 자들을 미화하는 것에 불과해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신의가 없잖아.”

리히튼에게 아그레인은 정말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나타샤의 속을 긁기 위해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그런 행위가 애먼 데에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려야겠군. 이 말다툼이 단순히 아그레인의 화풀이에 불과하다면, 그건 이 저택의 주인인 리히튼으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한데 리히튼이 걸음을 떼기 전에, 아그레인이 먼저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보란 듯이 한쪽 어깨에 젖은 얼굴을 기대며 나타샤를 비꼬았다.

“우리 오라버니는 그쪽에게 일말의 마음도 없거든. 그러니까 그만 찝쩍대라는 소리야.”

리히튼이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를 말렸다.

“아그레인.”

“내 말이 틀렸어요? 오라버니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 없잖아요. 있는 게 더 말이 안 돼요. 당신은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애매하게 둘러서 표현하고 있었지만, 아그레인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녀는 리히튼에게 그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보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의아한 점이 있다면 부탁도 명령도 아닌, 마치 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순리를 말하는 듯한 아그레인의 어투였다. 기억을 잃었기에 그 이유를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리히튼은 아그레인의 그런 모습에서 기이한 만족감과 고양을 느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원하는 아그레인의 행위와 발언이 더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랬기에 모르는 척 아그레인을 꾸짖었다. 최대한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가능한 부드럽게.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내게 할 말이 있다면 따로 자리를 가지면 될 일이야.”

“그런 식으로 어중간하게 구는 건 이 아가씨들에게도 실례라고요. 귀족들에게는 혼인 적령기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하게 할 셈이에요?”

고개를 든 아그레인이 예의 그 여동생의 음성과 몸짓으로 그를 바라봤다. 물기에 축축해진 적발이 맞닿은 리히튼의 어깨를 적신다. 리히튼은 살갗 위로 스며들어오는 그 차가움이 마음에 들었다. 나타샤를 옹호하는 척, 그를 나무라는 목소리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나타샤는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눈에 아그레인이 얼마나 아니꼬워 보일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그레인 양? 갑자기 저에게 적의를 보이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제가 감히 그쪽에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데.”

나타샤가 밀려 올라오는 화를 참아 내듯, 다소 높아진 목청과 붉어진 뺨으로 물었다.

“마음에 둔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그리도 지탄받을 일인가요?”

그의 어깨에 바짝 붙어 있던 아그레인이 다시 나타샤에게로 다가갔다. 떨어진 한기가 살짝 아쉬웠다.

“그새 내가 말한 걸 잊은 거야? 반대로 생각해 보래도. 나는 우리 리히튼 오라버니의 동생으로서, 오라버니를 괴롭히는 사람은 두고 볼 마음이 없는 거예요.”

하. 나타샤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본인의 적을 치워 버리고 싶은 건 아니고요?”

“미안하지만… 그 누구도 내 적이 될 수 없어, 나타샤 영애. 내 유일한 천적은 이미 명을 달리했거든.”

내려앉은 공기가 고요했다. 아그레인은 나타샤가 고개를 돌리기 전까지,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푹 숙인 나타샤의 얼굴이 패배감으로 까맣게 변한다.

“알아들었으면 앞으로 아침에는 내 냇가를 빼앗아가는 일이 없으면 싶네. 너무 티를 내면 그건 그것대로 추하단 걸 잊지 말고.”

아그레인은 그렇게 리히튼의 상의를 어깨에 걸친 채로 그들을 지나쳤다. 젖은 걸음이 자갈 위에 흔적을 남긴다. 나타샤는 뒤늦게 그 뒷모습을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당신이 잉고르드 부인이라도 돼?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요! 나도 엄연히 리히튼 각하의 손님이라고!”

멀찍이서 대답하는 아그레인의 목소리가 코앞의 나타샤의 목소리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렸다.

“누가 뭐래니?”

아그레인이 사라진 후, 리히튼은 나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 나타샤에게로 다가갔다.

“나타샤 양.”

그녀의 눈에는 옅은 물기가 고여 있었다. 분함과 억울함이 한데 공존하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리히튼은 나타샤에게 작게나마 안쓰러움을 느꼈다.

“제가 아그레인을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햇볕이 강하니 이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방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나타샤에게 이토록 길게 입을 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며 저택 쪽으로 이끌자, 나타샤가 겨우겨우 걸음을 떼며 그에게 울분을 토했다.

“각하께서 왜 저 여자를 대신해 사과하시는 거예요?”

리히튼은 대답 대신 그녀의 등을 한 번 더 토닥였다.

“아무리 의동생이라지만, 각하께서는 더 예의 바르고 곧은 사람을 곁에 두셔야 해요. 저는 저렇게 험악한 말을 하는 귀족 여식은 처음 봐요.”

리히튼은 그녀의 등에서 팔을 내렸다.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나타샤의 목소리는 더욱 격양되어 갔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앞뒤 분간 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구는 게 말이 되냐는 소리예요. 캐롤드 영애는 분명 각하께 독이 될 거예요. 저는 그런 각하가 무척 걱정스….”

“밀레오나 영애.”

앓는 소리를 하던 얇은 입술이 닫혔다. 여자의 시선이 리히튼에게로 향했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나긋한 음성과 함께, 리히튼은 나타샤에게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나타샤는 그를 따라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눈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귀를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서 들어가시죠.”

나타샤는 리히튼의 말에 군말 없이 따랐다. 그녀를 꽤 눈치 있다고 여겼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무래도 성급한 판단이었던 듯싶다.

***

그날 저녁, 리히튼은 아그레인의 주장을 꽤 심도 있게 고민했다. 마음이 없다면 여자들을 더 이상 잉고르드에 붙잡아 두지 말라던 주장을. 고민 끝에 그는 베르크네에게 명령했다.

“베르크네.”

“예.”

“손님들에게 내가 사흘 후 저택을 비우게 될 거란 이야기를 전달해.”

베르크네는 리히튼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한 듯했다. 신부를 찾는 일은 이쯤에서 끝내겠단 뜻이었다. 여러 가문의 여식들이 잉고르드에 들른 동안 그렇다 할 염문 한번이 없었으니, 사교계에는 당분간 여러 자극적인 소문이 돌 터였다.

그가 잉고르드를 찾아온 여자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었다. 잉고르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를 찾아온 여식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품행과 교양이 뛰어났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 역시 언제 잉고르드를 방문했었냐는 듯,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올릴 것이다. 이후 아이를 낳으면 각자 사랑을 불태울 정부를 두며 데면데면한 부부 생활을 이어 가겠지.

리히튼이 미안하게 여길 부분이 있다면, 그들의 시간을 한 달 가까이 빼앗았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정도는 어련히 각오하고 찾아왔을 테니, 결론적으로는 그 누구도 리히튼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없을 터였다. 베르크네가 물었다.

“캐롤드 후작에게도 말씀을 전할까요?”

리히튼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곧장 부인했다.

“아니. 그쪽은 상관없어.”

베르크네의 입술이 작게 열리다가 닫힌다. 무언가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리히튼은 그가 어떤 말을 입에 담으려 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그레인에 대해 묻고 싶었겠지. 그녀에게 특별한 마음을 가졌느냐고. 그런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자신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리히튼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

다음날 늦은 오후. 각 가문에 리히튼의 전언을 밝힌 베르크네가 집무실을 찾아왔다.

“각하. 나타샤 밀레오나 영애께서 모레 밀레오나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 저녁 식사를 나누길 청했습니다.”

서류에 사인을 갈기며, 리히튼이 되물었다.

“다른 가문은?”

“나머지 가문들은 오늘 내에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에는 밀레오나 가문의 손님과 캐롤드 가문의 손님만이 남게 되겠군.”

“예.”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리히튼이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오전부터 하늘이 어둑한 것을 봐선 며칠 안에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잉고르드는 해안과 가까운 영지였다. 여름에는 특히 비가 많이 내렸는데, 그간 조용했던 것으로 봐선 태풍이 몰아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릎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려놓은 채 한동안 잠잠했던 리히튼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경우에는 다 같이 저녁 식사를 즐기는 게 옳지. 킨 후작과 아그레인에게도 말해 두도록. 오늘 저녁에 만찬이 예정되어 있으니, 부디 참석해 달라고.”

“알겠습니다.”

어제까지와 달리 해는 금방 졌다. 먹구름이 짙어지면서 밤도 한 박자 이르게 찾아온 듯했다. 날씨는 점차 더 안 좋아질 기미를 보이는데, 캐롤드 가문과 밀레오나 가문을 제외한 모든 가문은 잉고르드에 전염병이라도 도진 것처럼 허겁지겁 저택을 떠났다. 리히튼이 거부 의사를 나타냈으니, 그들 또한 마음이 떠 버린 것이다. 저녁이 되고 다이닝 룸에는 호화로운 식사가 준비되었다. 리히튼은 가장 늦게 내려와 상석에 착석했다.

“제가 그동안 가문을 돌보는 일에 바빠, 손님 분들 대접이 시원찮았습니다. 뒤늦게 이런 자리를 가지게 된 점, 사과드리고 싶군요.”

그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밀레오나 백작 부인과 밀레오나 자매가, 왼쪽에는 킨과 아그레인이 앉아 있었다. 리히튼은 가장 먼저 아그레인을 확인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리히튼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밀레오나 부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닙니다, 각하. 각하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다는 사실은 제국의 귀족들이라면 모두들 알 겁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세요.”

리히튼에게서 떨어진 그녀의 시선이 킨에게로 향했다.

“또 평소에 접점이 없던 캐롤드 가문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으니, 저희로선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저야말로 이런 특별한 자리를 갖게 되어 기분이 좋군요.”

킨이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반응을 보이자 밀레오나 부인이 상체를 나타샤 쪽으로 틀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드리게 됐네요. 저는 밀레오나 가문의 아스란 밀레오나입니다. 제 옆에 앉은 아이는 장녀인 나타샤 밀레오나, 그 옆의 아이는 올해 막 성인이 된 이브 밀레오나예요.”

밀레오나 부인은 이브의 이름을 특히 강조해 소개했다. 이제 보니 부인 입장에선 두 딸의 혼처를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있는 자리이지 않은가? 나타샤와 이브가 차례로 고개를 숙였고, 특히 이브는 킨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소문대로 두 따님 모두 아름다우시군요. 저는 캐롤드 가문의 킨 캐롤드 후작이고, 이쪽은 제 하나뿐인 여동생, 아그레인 캐롤드입니다. 아그레인?”

리히튼이 입술을 축이고 있던 물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그레인이 어떤 말로 첫 운을 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아그레인에게선 별다른 반응이라 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있는 듯 없는 듯 굴며 식사에만 집중했고 간간히 들려오는 질문에 답할 뿐이었다. 나타샤는 그런 아그레인을 지속해서 훔쳐봤다. 어쩐지 애 닳은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번처럼 모욕적인 언사라도 오고 가길 바라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만찬이 열리면 필연적으로 공작저에 머무는 모든 손님이 초대되니, 그런 상황을 노렸을 수도 있을 터였다.

***

그날의 저녁 식사는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모두가 잠들었을 늦은 밤. 착각이 아니라면 마른 저녁 하늘 아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곧 비가 쏟아질 듯 저택 내의 공기가 습하고 무거웠다. 리히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덮고 침실을 나갔다. 복도 끝의 응접실에서 노란 등불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리히튼이 그 불빛을 따라 도착했을 때에는, 까만 그림자가 작게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아그레인이었다. 여름치고 스산한 공기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벽난로에 불을 붙일 만큼 추운 것은 아니다. 리히튼은 불가의 건조한 공기를 뚫고 들어가 아그레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모르는 척, 벽난로와 등불에 의존해 책을 읽고 있던 아그레인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떼었다.

“그렇게 재밌었어요?”

무엇에 관한 물음이었는지는 뻔했다. 저녁 식사에 초대된 일을 말하는 것일 테지.

“내가 웃었던 적이 있었나?”

“나는 바보가 아니에요. 원래는 밀레오나 가문과의 식사 자리였죠? 그런데도 굳이 나를 부른 거잖아요. 나타샤 밀레오나와 개처럼 싸우길 바라는 것처럼.”

몸을 일으켜 아그레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그레인은 작게 어깨를 움찔거리긴 했으나, 그를 피하지는 않았다. 코앞의 선명한 녹안을 바라보며 리히튼이 대답했다.

“눈치가 빠르군.”

아그레인이 그를 위한답시고 어디까지 거칠어질 수 있는지 궁금했었다. 그의 답에 아그레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 여자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나를 아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더군요.”

“나는 아그레인, 네가 저번처럼 그녀에게 예민하게 굴 줄 알았는데.”

“그 기대가 보여서 가만히 있던 거예요.”

자신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기대하는 얼굴이었을 줄은 몰랐다. 리히튼은 아그레인의 낯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불길에 일렁이는 녹안에는 그조차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존재했다. 아그레인이 어느 곳에 있든 형형한 존재감을 내뿜는 이유가 바로 그 우울감 때문이다. 리히튼은 먹구름 같은 아그레인의 눈이 좋았다. 그와 마주할 때면 더 까맣게 그늘지는 모습이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어떤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알아요?”

응접실을 울리는 목소리가 더없이 나직하다. 리히튼은 그녀의 물음에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이 어떤 형태일지, 상상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역겨워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음습해지는 그의 생각을 아그레인이 모르기를 바랐다. 아그레인을 알고부터, 리히튼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를 이루고 있는 숨과 생각, 사상, 관념 그 모든 것을 샅샅이 파헤쳐서 알아내고 싶었다.

전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욕구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비이상적이고 이질적인데, 동시에 피와 살에 새겨진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아그레인을 향한 갈증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야. 어때, 아그레인. 너를 보는 내 눈은 어떤 식으로 빛나고 있지?”

아그레인은 대답을 망설였다. 작게 달싹거리는 입술을 바라보고 있자면 가슴 속의 무언가가 은근하게 끓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당신은 자꾸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요.”

너는 아마 모를 거야. 네가 보는 내 모습이, 사실은 인내에 인내를 깎아 그럴싸하게 빚어낸 모습이라는 것을.

“바보 같은 짓이지. 지금의 당신은 그때의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아는데?”

이 인내의 둑이 빠른 시일 내에 무너질 것을 알고 있다. 리히튼은 사실, 아그레인과 자신이 과거에 어떤 관계였을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를 보는 눈은 그때 그대로야.”

“어떤 식으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라도 좋았다. 그는 이제 온전히 아그레인이라는 존재 자체만을 원했다. 그 근원을 모르기에 더 지독하고 빠르게 퍼져나가는 열망이었다. 아그레인이 말했다.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잖아.”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팔을 뻗었다. 아그레인은 고개를 틀어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손끝에 얇고 뜨거운 피부의 감촉이 닿는다. 아그레인의 뺨은 보아 온 것 이상으로 부드러웠다. 동시에 갈증은 더 심해져만 갔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도, 이런 식으로 네게서 눈을 떼지 못했나?”

아그레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리히튼의 온기를 느끼려는 듯, 그의 손에 천천히 고개를 기댔다. 그리고 속삭였다.

“궁금해요?”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얇은 머리칼이, 그의 이성을 갈가리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가만히 눈을 뜨며, 아그레인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을 부르고 싶어 하는 눈이야.”

리히튼에게는 그녀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눈앞의 아그레인이 그에게 보여 주는 섬세한 표정 변화에 집중했다. 투명한 녹안 속에 오롯이 그의 존재만이 가득 차 있단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했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이 의미 없이 단순한 소리를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 해도 만족했을 것이다.

“오라버니는 그래요.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은… 내 이름을 쉴 새 없이 불러서, 나의 시선과 의식 모두를 곁에 잡아 두고 싶어 하는 눈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나를 유혹하고 있잖아요.”

뺨과 턱을 쓸던 리히튼의 손끝이 아그레인의 귀를 건드린다. 그의 눈길은 제 손아귀에 걸려 있는 아그레인의 여린 살결과 거침없이 말을 쏟는 입술, 당연하다는 듯 구는 당당한 눈동자를 끊임없이 반복해 오갔다. 아그레인의 표정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다. 한데 지금은 어딘가 숨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낯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 그런 척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계속해서 신경 쓰일 수밖에 없도록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고요.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눈을 떼지 말라고.”

“믿지 못하겠어. 그건 어쩌면 너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

아마 자신은 옅은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단칼에 발뺌하는 그를 원망하듯, 새침하게 흘겨보는 표정이 안 그래도 갈증이 느껴지는 목을 더 타게 만들었다. 리히튼의 손길이 귓불과 눈매를 살살 매만지다가, 목선을 타고 점차 밑으로 내려간다. 아그레인은 그런 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귀여운 이유로 그를 탓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나를 조금 궁금해 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그런 기미가 덜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상대방이 궁금하다는 건, 그에 응하는 호의와 흥미를 가졌을 때다. 지금의 리히튼은 달랐다. 그가 아그레인에게 지니는 욕망은 고작 호의나 흥미 따위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시기도 분명 있었지만, 게눈 감추듯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고 말았다.

“아그레인. 나는 네가….”

너는 내 손길을 어디까지 허용할까? 과거에는 어디까지 허용했었을까?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좋아.”

어느새 그들 사이의 간격은 서로의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리히튼의 손등이 얇고 하얀 목선을 쓸어내릴 때마다, 아그레인의 눈동자가 차츰 흔들리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목덜미의 근육이 이전과 달리 조금 뻣뻣해진 것 같기도 했다.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의 모습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의 혀는 이미 수십, 수백 번 아그레인이라는 이름을 소리 없이 부르고 있었다.

“서로를 알아간다는 건 의남매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의무지.”

그의 말에 아그레인이 코웃음을 쳤다.

“의남매요? 내가 아는 의남매는 이런 식으로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 바짝 붙어 앉아서, 그런 식의 눈을 하고, 그런 식의 손길로 만지지 않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러고는 보란 듯이 더 강하게 아그레인의 피부를 감싸 쥐었다. 뒷목을 타고 올라가 부드러운 적발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뒤통수를 끌어 당겼다. 아그레인은 그런 리히튼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제는 옅게 보였던 수줍음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치 더 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고 그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내가 노골적으로 표현해 줘야 알아요? 마치 애무 같잖아요.”

무언가 미묘하게, 아니 확실하게 걸리적거렸다.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마치 누군가 네게 그래왔다는 것처럼.”

그 누군가가 과거의 리히튼 자신이었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다른 남자의 손길을 받고,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고, 마치 잡아먹으란 것처럼 굴었다면….

“앞으로는 그 누구와도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거야.”

알게 모르게 들떠 있던 숨이 빠르게 식어 감을 느낀다. 혈관으로 핏줄 대신 서리가 흘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리히튼은 점차 뻐근해지는 손을 천천히 풀었다. 이 기분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그레인에게 큰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았다. 그러나 아그레인은 그런 리히튼의 속내를 낱낱이 꿰고 있는 듯했다. 조금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눈으로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어떤 일?”

리히튼은 그녀의 얇고 붉은 입술이 이름 모를 사내새끼에게 침범당하는 상상을 했다. 아니, 상상을 멈추었다. 고개를 뒤흔들어 내던졌다. 이런 식으로 이성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남녀 간의 음습하고 비밀스러운 일.”

아그레인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나타샤 밀레오나처럼 어리고 깜찍한 아가씨가 아니라서요. 오라버니도 나도 각자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지 않겠어요?”

그녀의 과거는 더 이상 리히튼이 알 바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어땠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그 어른의 사정이란 놀이를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즐길 일은 없을 것이다.

“오라버니로서의 당부라고 생각해.”

어떻게 보자면 미안한 사람은 그녀가 아닌 리히튼이었다. 그는 아그레인이 놀라지 않게. 도망치지 않게. 벗어나지 않게. 발버둥치지 않게. 고통스러워하지 않게…. 아주 서서히, 천천히 목구멍 안으로 삼켜 갈 생각이었다. 의남매라는 얼토당토 않는 단어를 이용해 아그레인을 잡아 쥘 상상을 할 때마다 명치가 뜨거워졌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숨이 벅찼다.

리히튼이 아그레인에게 느끼는 감정은 남녀 간의 본능적이고 은근한 육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건 고작 서로를 떠보고, 웃고, 간파하고, 우세를 잡아 쥐려는 연애 감정 같은 게 아니었다. 리히튼조차 납득할 수 없는 이 어둡고 더러운 욕구를, 아그레인은 반드시 몰랐으면 했다. 지금은 이 정도로도 만족해. 내가 보이는 이 표정과 반응이 질투 정도로 비춰진다면…. 리히튼은 하늘에게 더없이 감사할 것이었다.

“친오라비인 킨조차 내게 그런 당부할 자격 없어요.”

“그럼 어떤 자격이어야 하는 거지? 남편?”

아그레인의 반응은 건조한 웃음이 다였다. 아직 쉬이 건들 수 없는 선인 걸까? 그렇다면 그녀를 위해 기꺼이 관심을 물릴 수 있었다.

“그 자격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한데.”

“그런 걸 가져서 뭐 해요?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눈에 비친 아그레인은, 현실보다 과거에 더 목을 매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리히튼은 과거의 그녀와 자신이 연인 이상의 감정을 교류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아그레인이 이런 식으로 기억을 잃은 그를 탓할 때마다, 그녀를 원하고 바라는 소유욕이 조금이나마 채워짐을 느꼈다. 아그레인은 아직도 그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과 얼마나 절절한 애정을 나누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퍽 고마운 일이었다. 리히튼은 그녀에게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미세한 아쉬움이 아그레인의 얼굴에 겉돌다 사라진다.

“좋아하는 색은?”

“…청회색.”

정확히 그의 눈을 바라보며 뱉은 대답이었다.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

“좋아하는 차는?”

“차보다는 커피가 더 좋아요.”

“친구는 몇 명?”

아그레인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런 건 왜 물어요?”

“네 성격에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다행일 것 같아서.”

“적어도 두 명 이상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네요.”

그중 한 명은 황제겠지.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일지 궁금했다.

“평소에는 저택에서 무얼 하지?”

“킨의 일을 돕거나,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다른 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 대답을 할 때의 아그레인은 이제껏 본 얼굴 중에서 가장 무료해 보였다.

“마음에 둔 남자는?”

되도록 가장 아무렇지 않게 질문했는데, 아그레인은 금방 코웃음 쳤다.

“은근슬쩍 묻는 거지? 비밀이에….”

콰앙.

그때였다. 갑작스레 들려온 하늘이 찢기는 소리에 아그레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서 고요했던 저택이 빗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날이 좋지 않더니 결국 비바람이 몰아치는 모양이었다. 한데, 어쩐지 그를 바라보는 아그레인의 표정이 불안하다. 눈의 깜빡임이 잦아졌다. 혀로 연신 입술을 축이며 리히튼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 리히튼은 다시 입을 닫았다. 지금껏 봐 온 아그레인을 생각하면 그 이유에 대해 절대 말할 것 같지 않았다. 이제까지 생기로 넘쳐흘렀던 눈에 공포와 불안이 번지기 시작했다. 리히튼은 다시 손을 뻗어 아그레인의 얼굴을 쓸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에 박힌 공포는 여전했다.

“좋아하는 날씨는?”

차라리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게 하는 게 나아 보였다. 아그레인이 천둥을 무서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 천둥에도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밤새도록 곁을 지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메말라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비 내리는 날을 제외하곤 전부 좋아요.”

“그 점은 나와 다르군.”

다른 이는 몰라도 아그레인이라면 비를 좋아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아그레인은 한 몸처럼 어울렸다. 흐리게 피어나는 안개와도.

“비 오는 날이 좋아요?”

정말 그러냐고 되묻는 눈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유약하게 흔들린다. 리히튼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아주 짧은 긍정이었다. 그 긍정에 아그레인은 지독하게 외로운 낯을 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엉망으로 구겨진 얼굴에, 리히튼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그레인은 적어도 천둥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다. 이후로 서너 번 창밖을 번쩍이며 번개와 천둥이 오고갔지만, 아그레인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때때로 그를 탓하고 미안해하고 고독해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중에는 두 손으로 자신을 가리며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리히튼이 해 줄 수 있는 건 이유 모를 좌절에 빠진 아그레인의 등을 토닥이는 것이 전부였다. 리히튼은 그때 처음으로 공허함을 느꼈다. 그와 아그레인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함을, 아주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아그레인이 울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땐 눈물 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리히튼은 다소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직접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마지막에는 순수한 걱정의 의미로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껴안았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가녀린 몸이었다.

***

그날 밤. 리히튼은 아주 긴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여자에게 안겨 있었다. 아니, 그가 여자를 안은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짙고 중독적인 향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

그는 여자와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여자의 작은 입 안을 전부 삼킬 기세로 거칠게 숨을 밀어 넣었다. 작은 몸이 그의 아래에서 헐떡였다. 상대방은 입맞춤 내내 그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얇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의 살갗에 닿을 때마다 숨이 뜨거워졌다. 여자는 리히튼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그 역시 그러했지만 손 안의 몸이 깨질까 걱정되어 수십, 수백 번을 인내했다.

여자는 그런 리히튼을 계속해서 타일렀다. 그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여 어깨를 감싸고 고개를 비틀었다. 서로를 더 깊이 탐할 수 있게 되자 머릿속이 점차 흐릿해져 갔다. 자신의 몸 아래에서 잘게 떠는 허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억제된 신음이 그의 뇌리에 그림처럼 틀어 박혔다. 리히튼은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을 서서히 잃고 있었고, 그 과정이 너무나 황홀하게 느껴졌다.

‘리히튼….’

여자의 몸은 작았다. 자신의 그림자 아래에 전부 가려질 만큼 여리고 가녀렸다. 자칫하면 부러뜨릴 수 있겠다는 우려가 그를 더 강한 흥분과 정복욕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리히튼은 여자의 목과 가슴 위를 타고 내려가며 여린 피부 위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었다. 흥분에 젖어드는 땀도, 긴장으로 뻣뻣해진 선도 모두 향긋했다. 정원을 나뒹구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와 여자는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강한 유대감과 가슴이 저릿할 만큼 강렬한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이 순간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이제껏 버텨 온 것이다.

‘아…. 으음.’

입을 맞추면 맞출수록 갈증이 들끓었다. 이대로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 누구도 욕심낼 수 없도록 오롯이 자신의 냄새와 존재로 영원히 각인하고 싶었다.

동시에 두려웠다. 여자가 이토록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 이 본능에 홀려 여자를 가진다면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무서웠다.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그녀를 향한 염원과 욕구는 너무나 강했다. 제 몸을 훑은 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 여자가 그에게 보였던 진심이 잘 꾸며진 거짓이었다고 해도…. 그를 개처럼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리히튼은 기꺼이 그 놀음에 넘어갈 마음이었다.

열에 맺힌 땀이 여자에게로 떨어졌다. 흥분에 젖어 그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 흐트러진 표정, 힘없이 따라오는 몸짓, 사랑한다고 말하는 입술.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럼에도 리히튼은 두려웠다. 그녀가 다시 자신을 떠날까 봐. 그래서 더 간절하게 여자를 껴안았다. 이 순간이 꿈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

꿈에서 깨어났을 때, 리히튼은 헛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지는 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속을 헤집어도 여자의 얼굴과 목소리, 향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미치도록 황홀했던 순간순간의 감각들과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불안함. 그 여자를 향한, 스스로를 내던질 듯 간절했던 감정이 전부였다.

“빌어먹을.”

욕설과 함께 침대를 벗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이건 단순하게 욕망에 젖은 꿈이 아니었다. 단언컨대 그가 꾼 꿈은 과거의 편린이었다. 리히튼은 과거의 그가 이토록 절망적인 감정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꿈속의 여자는 그의 전부였다.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이었으며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이기도 했다.

“아그레인.”

그녀를 향한 감정이 계속해서 짙어지면, 아마 이런 기분을 평생 느끼며 살아야 하겠지. 꿈속의 여자는 누구일까? 아그레인일까? 아그레인이겠지. 장담하건대 그녀 외에 그를 이런 절망감에 빠지도록 만들 만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의 정체가 아그레인이 맞다면 그간 생겼던 모든 의문이 해결된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바라봤던 건지. 무엇을 그리 서운해 했던 건지. 왜 그렇게 잘 아는 양 굴었던 건지에 대해, 모두.

찬물로 목을 축여도 꿈속을 헤매는 기분은 여전했다. 비는 멈추지 않았고, 하늘은 이른 오전에서 저녁이 되었음에도 똑같은 어두운 빛이었다. 아그레인을 향한 욕망은 몸을 웅크리지 않았다. 오히려 꿈을 꾼 뒤에 기다렸다는 듯 더 커졌다. 스스로가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 여자는 내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그제야 리히튼은 이 깊이도 모를 집착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그레인을 놓을 생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취하거나 가져선 안 된다. 리히튼은 인형처럼 죽은 아그레인이 아닌, 살아 있는 아그레인을 원했다. 꿈속에서 보고 만지고 느꼈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그녀를 보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

***

늦은 밤, 리히튼은 베르크네를 시켜 자신의 방으로 킨을 불렀다. 킨과는 종종 늦은 밤마다 술을 즐기곤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이상하게 잠들기 어려워서 술김에 그와 체스를 두거나 귀족들의 행보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몇 가지 시답잖은 대화가 오간 후, 리히튼은 바로 자신의 본론을 꺼냈다.

“앞으로 아그레인의 혼인 상대를 물색할 생각이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애가 가정을 갖고 안정되길 원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수 없겠죠.”

“원한다고 해도 찾지 못하도록 해.”

킨은 리히튼의 속마음을 단번에 간파했다. 리히튼이 한 말은 고작 두 마디에 불과했음에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리히튼의 뜻을 물었다.

“아그레인에게 마음이 있으십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데려올 생각이다.”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 아이를 의동생으로….”

“그때는 확신할 수 없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정도로 마음이 커질 줄 몰랐다. 그는 사람에게 신뢰를 주거나 받아도, 그 이상의 애정을 느끼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데 설마 만난 지 고작 며칠도 안 된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낯간지러운 표현이었으나, 운명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기억을 잃었는데도 같은 여자를 염원한다, 라. 이런 게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 운명일까?

“빗줄기가 약해지고 있으니, 내일 오전에는 거의 멈추겠군. 해가 뜨자마자 캐롤드로 돌아가도록.”

“급한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

지금 상태에서 아그레인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꿈속에서 보았던 흔들리는 몸과 끊어질 듯한 목소리, 손 안에 감기던 감촉들이 떠오를 것 같았다. 리히튼은 자신이 그 환상들을 떨쳐내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아그레인을 멀리해야 할 것 같았다. 남은 잔을 비운 킨이 옷깃을 정리하면서 물었다.

“아그레인은 어떤 반응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아그레인은 나를 원해.”

그때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알 수 있다. 아그레인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원했다. 리히튼에게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며 놀리듯 말했지만, 그건 아그레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도 리히튼을 보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그녀가 리히튼을 보고 있었고, 반대인 경우도 허다했다. 누가 먼저 고개를 트나 대결하듯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승자는 늘 리히튼이었다. 그 이유는 아그레인이 그와 눈을 마주치길 수줍어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더군. 하지만 그래봤자 한낱 과거의 기억일 뿐이야. 현재를 이길 수는 없지.”

기억? 돌아온다면 막을 생각은 없다. 오히려 좋았다. 과거를 빌미로 아그레인을 더 강하게 옭아맬 수 있으니까. 킨은 그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째서 감사하다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오라버니로서 아그레인이 과거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걸까?

***

다음날 이른 오전. 날이 밝자마자 킨과 캐롤드가 공작저를 나섰다. 리히튼은 준비된 마차로 향하면서, 한편으로는 아그레인이 잉고르드에 남아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킨의 옆에 나란히 서서 리히튼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히튼은 아쉬움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기이한 기분을 느끼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아그레인은 그의 얼굴을 본 즉시 입을 열었다.

“보름 후에 황성에서 연회가 열려요.”

여름 연회를 말하는 건가. 황성의 여름 연회는 마창 시합과 사냥 시합 등이 열리는, 황성의 연회 중에서는 황제 탄신일 다음으로 성대한 연회였다.

아그레인이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친구라고 해 봤자 고작 둘에 불과해서요. 괜찮으시다면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실래요?”

남매 모두가 미혼인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의 파트너가 된다. 그럼에도 리히튼에게 제안한 이유는… 깊게 생각할 필요 없겠지. 사실 그녀가 제안을 한 순간부터, 리히튼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아그레인이 옅은 미소와 함께 리히튼에게 안겼고, 잠시 후 마차는 캐롤드를 향해 떠났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리히튼은 벌써부터 연회가 기다려졌다.

***

여름 연회는 시간이 흘러 부르는 이름이 변경되었을 뿐, 본래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건국을 축하하는 건국 축하 연회다. 따라서 황제 탄신일을 제외한다면, 해마다 열리는 황실 연회 중에서는 여름 연회가 가장 시끌벅적했다. 당대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연회의 격식과 일정은 조금씩 바뀌었는데, 빈세르크 3세는 전대 황제에 비해 검소하고 조용하며 딱딱한 편이라 귀족들 모두 이번 연회는 격식 차린 고아한 자리가 될 거라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까지는 연회 전날의 전야제가 몹시 화려하게 열렸는데, 올해는 조용한 것으로 봐서 귀족들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각하. 도착했습니다.”

리히튼은 활짝 열린 마차의 문틈으로 황성을 바라봤다. 연회에 대한 기대감이나 긴장 같은 건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 무료한 표정이었다. 그가 성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이미 도착해 있던 귀족 자제들의 시선이 끊임없이 엉겨 붙었다. 세간은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이 혼인 상대를 찾고 있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게다가 공작은 기억까지 잃은 터라, 혼인 적령기의 여자들은 앞다퉈 공작의 첫 연인이 되길 희망했다. 그가 공작저를 방문한 가문들에게 퇴짜를 놓은 후였기에 욕심 있는 귀부인들은 이번 여름 연회를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비단 귀부인뿐만 아니라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도 리히튼은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렌페르크 제국에 그만큼 젊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미혼의 남자는 없었다. 게다가 이전과는 달리, 최근에는 그에게 다가가기가 마냥 어렵지도 않았다. 기억을 잃기 전의 리히튼도 뭇 여자들에게 다정하고 원숙했지만, 당시의 그에게는 함부로 눈을 마주칠 수 없는 껄끄러움과 위험한 분위기가 강했다. 또한 연회에서 그의 곁을 둘러싼 자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가문의 어른이거나 후계자였기에 정치에 관심 없는 어린 여자들로선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전처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붓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주진 않았지만, 은연중에 느껴지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것이다.

“저, 리히튼 잉고르드 각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던 차였다. 기둥 뒤에서 갑작스레 뛰어 나온 여자가 그를 불렀다. 리히튼은 걸음을 멈추고 길을 가로막은 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여자의 나이는 아그레인보다 서너 살 적어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했다. 무엇이 그리 수줍은지 새하얀 얼굴이 복숭아처럼 붉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여쭙고 싶은 일이 있는데, 괘, 괜찮다면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디선가 어린 여자들이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리히튼의 앞을 가로막은 여자의 뺨이 더더욱 붉어졌다. 리히튼에게는 어쩐지 이 상황과 광경 모두가 지루한 극을 보는 듯했다.

“그러시죠.”

그는 이 여자의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알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대충 대답해 주고 갈 길을 마저 가려는 마음뿐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떼었다.

“이번 연회에, 그, 그러니까 저녁의 무도회 말이에요. 혹시 파트너가 있으신지….”

“있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여자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작은 인영은 나타났을 때처럼 쏜살같이 사라졌다. 리히튼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기둥 뒤로 흩날리며 사라지는 분홍빛 레이스 드레스 자락이 끝이었다.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긴 동안 절대 작지 않은 목소리들이 등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

“어쩜, 그 사이에 누가 가로챘구나!”

“누군지는 몰라도 약아빠진 계집애야. 이럴 줄 알고 가장 먼저 달려갔던 건데.”

“나타샤 밀레오나 아니야? 각하께서 책을 선물해 주셨다고 그렇게 자랑하고 다닌다던데.”

“누가 됐든 무도회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어.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굴지 궁금해.”

리히튼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아그레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게 나타샤를 조롱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시종장은 황제에게 그의 방문을 알리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리히튼은 묘한 기분으로 방 내부에 들어섰다. 황제를 알현할 때마다 느끼지만, 빈세르크 3세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리히튼이 아는 군신의 관계와 조금 달랐다.

“폐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황제는 햇빛이 내리쬐는 창가에 서서 후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여자의 얼굴은 천장화에 그려진 미의 여신이 그대로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답고 우아했다. 황제는 아무런 대답 없이 리히튼의 얼굴을 살폈고, 그에 리히튼은 불편함을 나타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황제는 한참 만에 입을 떼었다.

“짐의 눈에는 아직 공작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군.”

“예.”

옅게나마 황제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 하신 겁니까?”

“그렇지. 몹시 중요한 사안이니까.”

빈세르크 3세가 이런 식으로 그의 건강을 챙길 때마다, 리히튼은 눈앞의 여자가 자신과 퍽 특별한 군주와 신하 관계였음을 다시금 깨닫곤 했다.

“기미는 없나?”

기억이 돌아올 기미를 뜻하는 것일까? 황제의 물음에 리히튼은 지난 몇 주간 자신을 괴롭히던 꿈들을 떠올렸다. 잠들 때면 나타나는 그 과거의 기억들은 리히튼의 인내를 시험하듯 갈수록 대담해지고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대단한 기억은 아니었다. 꿈속에서 그는 늘 과거의 아그레인과 사랑을 나누었다. 열기로 들뜬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귀는 물론이고 몸속의 장기가 모두 녹아내릴 듯 달콤했다. 덕분에 리히튼은 단 하루도 아그레인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주 곤욕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모두들 공작이 곧 기억을 되찾을 거라 확신하고 있네.”

“단정할 수는 없지요.”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마치 단정할 수 없다는 그의 대답이 잘 꾸며진 거짓말이라 여기는 것처럼.

“짐 또한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야. 처음에는 단순한 사고였다고 여겼으나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예전과 달리 시시때때로 그대를 언급하는 아그레인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지….”

웬만한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리히튼이 아그레인의 이름에는 곧장 반응했다.

“그녀가 제 이야기를 합니까?”

황제의 눈이 음울한 분위기를 띠었다.

“하지. 짐의 눈에는 마치 거미줄에 둘둘 감긴 어여쁜 나비를 보는 기분이야. 달갑지만은 않더군.”

황제의 시선이 서늘하다. 리히튼이 생각하기에, 빈세르크 3세는 오래된 친우인 아그레인을 그에게 빼앗겼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여간 공작은 한시라도 빨리 기억을 되찾아야만 해. 그대와 의논할 것이 많다. 짐의 후계와 관련된 사안부터 시작해 그간 일이 태산같이 쌓였어.”

리히튼은 납득할 수 없었다. 황실의 후계를 어째서 그와 의논한단 말인가? 과거에 친분을 나누었다는 인물들과 대화할 때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리히튼 잉고르드’라는 인물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측근들은 대체로 이전의 그를 무자비한 독재자라고 표현했다. 사교계의 평가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인 평이었고, 때문에 리히튼은 본인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공작. 혼인 상대는 잘 물색하는 중인가?”

그런 것은 그만 둔 지 오래였다.

“폐하께서 추천이라도 해 주실 생각이십니까?”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공작은 이미 상대를 정하지 않았나? 정했어야 할 거야. 또한 그 상대가 내가 예상하는 인물이 맞기를 바라. 공작이 기억을 되찾은 후에 그릇된 선택을 내린 것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싶지는 않으니까.”

리히튼의 귀에는 황제가 혼인 상대를 강요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여자를 들이밀든, 리히튼의 마음은 확고했다. 그는 그 마음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아그레인 캐롤드를 부인으로 맞이할 예정입니다.”

“마땅한 판단이야.”

예상과 달리 황제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의 상대로 아그레인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문득 그는 이 모든 상황이 섬세하게 짜인 판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머릿속 한구석이 찝찝했다.

“공작은 본래 황실 여름 연회에는 죽어도 참석하지 않았지. 한데 올해는 참석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하루 일찍 찾아왔군.”

황제는 리히튼의 머릿속이 훤하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턱짓했다.

“아그레인은 후원을 산책하고 있을 거다. 이만 나가 봐도 좋다.”

응접실을 나오면서, 리히튼은 아무렇지 않게 그와 아그레인을 엮는 황제의 태도를 생각했다. 그녀는 리히튼이 아그레인을 마음에 두었단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양 행동했다. 아그레인의 성격상 잉고르드에서의 일을 쉬이 입 밖에 꺼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말은 즉 황제가 기억을 잃기 전의 그와 아그레인의 관계를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또한 거미줄과 같은 의미 모를 발언을 제외하곤 별다른 소리가 없는 걸 봐선 그들의 사이를 훼방 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그레인을 제 부모이자 자식인 양 구는 황제가 그들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건, 그간 아그레인과 리히튼 사이에 큰 문제가 없었음을 의미했다.

한데 아그레인은 어째서 그를 볼 때마다 종종 우는 얼굴을 하는 걸까? 단순하게 서운하다는 표현으로는 완전히 나타낼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할 터였다. 리히튼은 여름 꽃이 만발한 후원을 가로지르며 아그레인을 찾았다. 미인으로 넘치는 황성이지만 그녀만큼 선명한 적발을 가진 여자는 없다. 따라서 오래 헤맬 필요도 없이 금방 원하는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그레인.”

그는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퍽 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책장을 넘기던 아그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곧 책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간 얼굴에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그레인이 뛰어올 동안 리히튼은 그 모습을 넋을 놓은 채 바라봤다. 아그레인의 웃음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그레인은 리히튼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웃음이 지워지지 않은 낯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햇빛에 선명한 녹색으로 일렁이는 눈동자엔 거짓 없는 기쁨이 만발했다. 리히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그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토록 반가운 티를 내니 도저히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한데 그의 손이 매끄러운 머리칼에 닿은 순간을 기점으로, 아그레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멍해졌다. 자신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흠칫, 몸을 굳힌 그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금붕어처럼 소리 없이 입술만 열고 닫히길 반복됐다. 아그레인은 활짝 핀 얼굴을 뒤늦게 갈무리하고 입을 열었다.

“일찍 오셨네요. 비비는 내일이나 되어야 만날 수 있을 거라 단언했었는데.”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밝은 웃음은 어디로 가고 순식간에 그가 알던 아그레인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분명 또래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어른스러운 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종종 이런 답지 않은 행태를 보일 때마다 놀리고 싶어졌다.

“내가 언제 도착하는지 폐하께 여쭈었었나 보군.”

그러나 아그레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제 파트너의 일인데 당연하죠.”

“가슴 깊이 신경 써 주다니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오늘은 특별히 내 파트너를 생각해 하루 일찍 도착했지.”

리히튼은 벤치로 다가가 아그레인이 읽다 만 서적을 집었다. 그리고 그녀를 후원의 산책길로 능숙하게 이끌었다.

“괜찮다면 잠깐 걸을까? 이대로 헤어지기엔 날이 썩 괜찮아서.”

아그레인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그리고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여름의 꽃이 만발한 후원을 함께 거닐었다.

“폐하께 내 이야기를 했었나?”

아그레인이 힐끔 그의 옆선을 바라봤다. 불만스러운 눈빛이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셨지. 너를 찾기 전에 그분을 먼저 알현했으니까.”

“비비가 그런 사적인 소릴 했다고요? …믿기질 않네요.”

황제와 아무리 특별한 사이라 하여도 아그레인은 한낱 귀족 영애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가 타인 앞에서 황제를 애칭으로 부른단 사실이 퍽 놀라웠다. 하지만 사소한 부분에 딱히 대거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 리히튼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 말은 폐하의 말씀이 사실이란 뜻이겠지. 어떤 이야기를 했기에 폐하께서 그런 식으로 나를 대하셨는지 궁금하네.”

아그레인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빠르게 눈만 깜빡였다. 머리를 굴릴 때마다 보이는 습관인 듯했다. 리히튼은 나비처럼 팔락이는 기다랗고 얇은 그녀의 속눈썹을 살피며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궁금했다.

“비비가 오라버니를 어떤 식으로 대하기에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건 말할 수 없지. 내가 밝히면 네게 말조심하라는 압박밖에 더 되겠어? 나는 오히려, 아그레인 네가 이곳저곳에서 실컷 떠들길 바라는데.”

“떠들 것도 없어요. 아니, 떠들 만한 이야기도 없다는 게 옳겠네요. 그냥 말해 주세요. 오라버니를 곤란하게 했다면 앞으로 조심할게요.”

조심하지 말고 계속 경솔하게 굴라는 뜻이었는데, 아그레인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했다. 리히튼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입을 열었다.

“너를 확실히 책임지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아그레인이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리히튼은 문득 그녀의 이런 솔직한 반응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반응인지 궁금했다. 킨이나 나타샤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매사에 무덤덤하고, 조롱하든 무시하든 파문 없는 수면처럼 고요했기 때문이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지금 나를 놀리는 거죠? 미안하지만 비비는 그런 소릴 할 아이가 아니에요.”

황제 폐하를 ‘아이’라 지칭하는 인물은 아그레인밖에 없을 것이다. 리히튼은 즐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진실이 밝혀질 거짓말은 하지 않아. 신하인 내가 황명을 거절할 수 있나? 마땅히 그리하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아그레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리히튼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물론 그전에 내가 널 공작 부인으로 맞이할 거라 말씀드렸지만.”

황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리히튼, 너 미치….”

아그레인은 말을 끝내기 전에 입술을 오므렸다. 이전에는 나이, 신분에 관계없이 서로 편히 말을 놓는 사이였던 건가.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가슴 안쪽을 간질일 정도로 기분 좋았다. 꿈속에서 수십 번 들어 온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옅은 헐떡임과 함께 그를 깊게 끌어당기던 부름.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던 눈짓까지. 리히튼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아그레인과 꿈속의 아그레인이 자꾸 겹쳐 그를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오라버니의 의남매인데요.”

싫다는 소리는 없다.

“의남매 같은 건 그다지 의미를 갖지 않지.”

심지어 아그레인은 싫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속내를 가늠하기 힘든, 미묘하게 풀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 맞추고 싶단 충동에 사로잡혔다.

“내게 다른 여자는 필요 없어.”

아그레인의 낯이 조금 서글퍼진다. 문득 그녀가 자신을 향한 호감과 별개로 그의 마음을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히튼은 걸음을 멈추고 아그레인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하얗고 작은 그녀의 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너는 아닌가? 너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도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무엇이 아그레인을 힘들게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리히튼은 그녀의 모든 불안을 해결해 줄 자신이 있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건 아그레인이 유일했다. 그에게 잡힌 손을 조용히 응시하던 아그레인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나는 오라버니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선택해야 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리히튼은 곧장 부정했다.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내가 정하는 게 맞아요. 늘 그래왔으니까.”

딴지를 걸기 힘들 만큼 단호한 어조였다. 리히튼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흐를 수 있다는 걸 그 순간 처음 알았다. 그는 아그레인을 억지로 취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거절한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데려갈 마음이었다. 하지만 리히튼은 자신이 그런 행동과 판단에서 최대한 멀어지길 바랐다. 그런 방식으로 얻은 몸과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곧 무언가 다짐한 듯, 아그레인이 확고한 눈과 음성으로 말했다.

“내일까지 시간을 드릴게요.”

리히튼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어 쥐고 있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런 리히튼의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그레인은 그에게서 자신의 손을 매정하게 빼냈다.

“그전까지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거예요. 내일이 지나면 나도 나만을 위해 아주 이기적이고 못되게 굴 테니까. 당신은 죽어도 그 말을 못 무르게 될 거거든요.”

리히튼은 머릿속이 깨끗하게 빈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아그레인의 대답은 상당히 묘했다. 그의 구애를 거절하거나, 조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리히튼은 마음이 놓이기는커녕 아그레인의 머릿속을 파헤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너는 지금…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는 건가?”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언젠가 그녀 스스로 입을 여는 날이 오게 될까? 아그레인의 맑고 깨끗한 눈을 바라보며, 리히튼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내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았다. 그러니 괜히 그녀를 보채 관계를 그르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우리 사이에는 한 번쯤 진지한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 부부 사이에 숨기는 일이 많으면 관계가 소원해지기 마련이지.”

아그레인은 황당하단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예전에는 이렇게 뻔뻔하지 않았는데.”

그리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 리히튼은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서 아그레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두 팔 가득 품에 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잠재웠다.

***

다음날 정오. 연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황제, 빈세르크 3세가 몸소 나섰다. 여름 연회는 당대 황제가 숲에서 가장 큰 수사슴을 사냥하면서 시작된다. 황제가 수사슴을 성공적으로 사냥하면, 황성은 수사슴의 뿔을 황제의 침실에 걸어 그해의 안녕을 기원한다. 연회 참석자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사슴의 뿔을 자르고 함께 축배를 올림으로써 황실의 평안과 제국의 무궁한 발전을 기렸다.

빈세르크 3세는 뛰어난 사냥 실력을 가진 황제라, 수사슴을 잡기까지 그리 긴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다. 뿔이 잘리면서 시작된 연회의 첫 일정은 마창 시합이었다. 황성 마창 시합은 일 년에 고작 두 번 열리는 터라 귀족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리히튼은 영주의 명예를 걸고 격해지는 시합을 조용히 감상했다. 귀부인들의 반응이 뜨거웠으나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옆으로 누군가 인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본래는 해마다 잉고르드의 검은매 기사단이 마창 시합에서 우승을 하곤 했는데 말입니다.”

리히튼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말을 건 젊은 남자는 잭 가문의 가주, 모리타트 잭이었다.

“킨 후작이 검은매 기사단의 대표로 나설 때는 모두들 찍소리 내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지요. 올해부터는 그 호쾌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하니, 괜히 아쉽군요.”

모리타트 잭. 베르크네의 말에 따르면 모리타트 잭은 리히튼과 함께 비비안느 황녀를 지지하던 주요 인물이라고 했다. 또 다른 특이사항은, 그에게로 오기 전까지 아그레인의 옆자리에서 시시덕거리던 남자였단 점이다.

리히튼은 황성에 온 이래 아그레인에게서 계속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침실까지 찾아가 괴롭힌 건 아니었으나 일단 눈에 보이면 어디서 누구와 무얼 하는지 구경하는 게 기본이 되었다. 때문에 그는 모리타트라는 인물을 머릿속에 각인할 수밖에 없었다. 아그레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하나같이 무덤덤하거나 냉랭하게 굴곤 했다. 하지만 모리타트 잭에게는 조금 달랐다. 그는 마치 아그레인의 오랜 친우라도 되는 양 쉽게 다가가서 시답잖은 소릴 지껄이고 사라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리히튼이 지켜 본 결과, 아그레인은 적의를 가진 상대가 아닌 이상 상대방의 앞에서 대놓고 귀찮은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모리타트가 옆에서 껄떡댈 때면 번거로운 마음을 얼굴에 대놓고 나타냈다. 그럼에도 그를 매정하게 내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껏 그녀와 대화를 나눈 수십 명의 귀족들 중에서 가장 지인다운 대우를 했다면 모를까. 아그레인과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한 명. 심지어는 킨처럼 피가 반만 섞인 것도 아닌 완벽한 남남. 리히튼의 시선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은 탓일까? 모리타트가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물었다.

“제게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신지? 말씀하시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리타트 잭과 리히튼은 지위도, 나이도 같았다. 한데 그는 리히튼을 한참 상관이라도 되는 양 공손하게 대했다. 그러한 태도 역시 과거 둘의 관계와 연관이 있을 터인데,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리히튼 앞에서 변함없이 예를 갖춘다는 점이 다소 놀라웠다.

“모리타트 공작은 아직 혼인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으신 건지 궁금하군요.”

그의 물음에 모리타트가 미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혼인을 주제로 하는 담화는 모리타트에게 그다지 유쾌한 주제가 아닌 듯했다.

“없을 리가요? 다만 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뿐입니다.”

“마음에 둔 여자라도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렌페르크 제국에는 세 개의 공작 가문이 존재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세대에는 두 명의 젊은 공작이 미혼이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제국의 귀족 사회에선 새로운 약혼이나 혼인 소식이 뚝 끊긴 상황이었다. 여식을 둔 가문에서 두 공작 가문의 부인 자리를 놓고 눈치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히튼의 대답에 모리타트가 작게 헛웃음을 뱉었다.

“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당신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모자라, 하대도 하지 않는 날이 오다니.”

크흠. 그는 제가 뱉은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실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즐기나 싶어서 말이죠. 말씀대로 저는 마음에 둔 여자가 있습니다. 한데 그쪽의 마음이 워낙 단단해 틈이 보이질 않는군요. 그 아가씨도 아직 상대방이 없다는 사실 하나가 그나마 위안이긴 합니다만….”

모리타트는 말이 많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 ‘상대’라는 여자에 대해 홀로 술술 불기 시작했다. 한데 들으면 들을수록, 모리타트가 묘사하는 여자는 아그레인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혼인 적령기를 지난 여자.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미인. 쉽지 않은 성격 등. 리히튼이 모리타트가 마음에 둔 상대를 아그레인으로 확신할 때 즈음, 모리타트가 대뜸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말씀드리지만, 캐롤드 가문의 아그레인 캐롤드 영애는 아닙니다. 그 아가씨는 죽어도 아니에요. 폐하의 성지가 내려오지 않는 이상 그 여자와 엮일 일은 없을 겁니다. 암, 그렇죠.”

어쩐지 리히튼의 귀에는 변명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냉랭해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것치곤 가까워 보이더군.”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는 가까울 수밖에요. 하지만 원하신다면 거리를 두겠습니다. 아니, 확실히 둬야 할 것 같군요. 앞으로 거리를 두도록 하지요.”

모리타트의 표정은 마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맹약을 나누듯 더없이 진지했다.

“저는 공작의 혼인을 응원합니다. 부디 아그레인 양과 부부의 연을 맺고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일생일대의 소원이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어디서 들어 본 소리인가 했더니, 빈세르크 3세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둘 모두 아그레인의 이름을 꺼내는 걸 봐선, 베르크네의 말대로 빈세르크 3세와 모리타트 공작은 기억을 잃기 전의 그와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게 맞는 듯했다. 그 둘만 알고 있다는 건 아그레인과 자신의 관계가 그리 요란스럽지는 않았음을 의미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관계였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아그레인의 불안은 그러한 부분에서 기인한 것일까?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창 시합이 끝난 직후에는 첫 연회가 열렸다. 황제는 마창 시합 우승자에게 상을 내린 후, 모든 귀족들에게 새벽까지 연회를 즐기길 명했다. 아그레인은 의도적으로 리히튼을 멀리하려는 듯, 종일 황제의 곁에서 술잔을 나누었다. 그녀와 파트너로 움직이는 무도회는 연회의 마지막 날 밤이었기에 억지로 끌고 와 곁에 둘 수도 없었다. 그 작은 입술로 내일까지 두고 보겠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가볍게 인내할 수 있지.

“각하. 술을 잘 드신다고 들었어요. 저와 술 내기 하실래요?”

“잉고르드의 바다가 그렇게 멋있다면서요? 저도 한 번쯤 구경하고 싶어요.”

텅 비어 있던 리히튼의 주위는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는 귀족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면서까지 귀찮음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그를 모르는 체하는 아그레인을 보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리히튼은 그를 환대하는 여자들을 성심성의껏 대했다. 그들은 리히튼의 다정한 태도를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즐거움을 숨기지 않았다.

“각하께서는 기억을 잃으셔도 여전히 상냥하고 즐거우셔요!”

“차가워지셨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역시 소문은 소문에 불과한가 봐요.”

“마음에 둔 여자가 생기신 건가 싶어 다들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요.”

“그러니 어서 저와도 술 내기를 해요. 이번에는 절대 지지 않을 거예요.”

그날 리히튼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고, 기억을 잃은 이후 가장 깊게 취한 채 침실로 향했다. 그가 문을 닫고 넥타이를 끌어내려 던졌을 때, 시계의 시침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들러붙은 귀부인은 한둘이 아니었고, 되도 않는 술 내기까지 받아 줘야 했으니 피곤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리히튼은 사람을 상대하는 게 귀찮았다. 이 같은 성정은 기억을 잃기 전에도 똑같았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하나하나 상대해 주는 태도가 여전하다는 평을 듣는 걸 보면,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퍽 대단하다고 생각됐다. 지위도, 부도, 명예도 모든 것이 완벽한 그인데. 타인들에게 조금은 냉정하게 굴 법도 한데. 무얼 위해서 그리도 번거로운 삶을 선택했던 걸까?

“리히튼….”

막 셔츠를 벗으려던 때였다. 누군가 등 뒤에서 그를 안아왔다. 얇고 낭창한 몸이 리히튼의 몸에 감겨오며 농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위해 오늘 밤을 바칠게요. 어서 날 가져 줘요.”

하얀 손가락이 셔츠 안쪽의 그의 맨살을 더듬기 시작했다. 리히튼은 잘 다듬어진 손톱 끝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그레인이 아니로군.’

“연회는 길어요. 밤마다 당신을… 아!”

당황하거나 망설일 일은 아니었다. 리히튼은 제 살갗 위를 뱀처럼 기어 다니는 손을 앞으로 강하게 끌었다. 마음 같아선 손가락 전부를 잘게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숨을 가다듬으며 몰려오는 폭력성을 참아냈다.

“리, 리히튼….”

“내가 언제 내 이름을 허락했지?”

술기운이 돌기는 했으나, 당장의 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건 아니었다. 그의 침실에 숨어 들어온 여자는 몸의 선이 노골적으로 비치는, 반투명한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나마도 가슴 쪽이 깊게 패여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방을 착각한 것 같군요.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나름대로 친절한 거절에 용기가 생긴 것일까? 여자는 침착한 표정으로 다시 그의 팔에 몸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셔요. 저는 혼인을 빌미로 리히… 아니, 각하께 온 게 아니어요. 그저 당신이 즐거우면 그만….”

“해가 뜨면 돌아갈 수 없을 텐데.”

리히튼의 말을 어찌 해석했는지 몰라도, 여자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저는 그게 더 좋아요.”

그런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리히튼은 연회에서 그러했듯 더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버러지들은 하나같이 곱게 말할 때 말을 들어먹지 않는군.”

살이 베일 듯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리히튼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게 더 좋다고? 원한다니 어쩔 수 없지. 창가의 포주에게 아주 비싼 값으로 팔아 주마. 그곳의 쓰레기들은 곱게 자란 귀부인들에 사족을 못 쓰거든.”

“차, 창가라니, 어찌 그런….”

“놀라는 이유를 알 수 없군. 지금 네가 보이는 짓이 그 짓이지 않나?”

그를 유혹하던 손이 빠르게 멀어졌다. 여자의 눈동자가 치욕과 공포로 덜덜 떨렸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내 침실에 숨어들었을 텐데.”

수치도 모르고 제 몸을 더듬거렸던 눈앞의 여자가 참을 수 없이 역했다. 과거의 그에게 이러한 일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으리라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눈치 빠른 여자는 급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각하! 저는 그저 어, 어머니의 명으로….”

하지만 리히튼은 그녀의 변명을 들어 줄 마음이 없었다. 자신의 공간에서 허락하지 않은 여자의 존재를 한시라도 빨리 지워내고 싶었다.

“역겨운 목소리 내지 말고 꺼져.”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흘러내리는 옷깃을 붙잡고 급히 리히튼의 방을 떠났다. 리히튼은 소리 내며 닫힌 문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천박한 짓거리에 대응해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급격하게 몸이 피로해졌다. 이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그의 잘못이었다. 시종에게 다른 이들의 출입을 엄금시켜야 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잦았을 텐데, 과거의 그는 어떤 식으로 처리했을지 궁금했다. 리히튼은 셔츠를 내던지고 곧장 침대로 올라가 눈을 감았다.

***

여름 연회라고 해 봤자 보통 연회보다 일정이 조금 더 길고 중간 중간 사냥 대회와 마창 시합이 껴 있을 뿐, 며칠 내내 술을 마시고 카드 게임하며 진탕 취하는 건 똑같았다. 그랬기에 리히튼은 더더욱 무료했다. 이튿날 낮부터 귀족들은 각자 후원과 응접실에 모여 술을 마셨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엉겨 붙는 여자들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해가 늦게 진다. 리히튼은 하늘이 노래질 즈음 술과 시가, 텁텁한 마약 냄새로 가득한 실내를 벗어났다.

“어디 가세요?”

처음에는 아그레인을 골리려는 생각이었고, 그 다음에는 과거의 자신이 사교계의 평판을 신경 쓴 데 마땅한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그랬기에 리히튼은 귀부인과 늙은 귀족들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 주었다. 이러한 자신의 행동이 차후 아그레인이 잉고르드에 왔을 때 그녀의 사교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여긴 것도 있었다.

“각하. 어디 가셔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하지만 갈수록 시간 낭비라고 느껴졌다. 헛소리에 귀 기울이며 연회를 즐기느니 나뭇잎에 매달린 송충이의 수를 헤아리는 게 더 생산적일 것 같았다. 리히튼은 진득하게 달라붙은 팔을 떼어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기 바쁜 여자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랄 게 없었다. 여자의 몸에서 마약과 시가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힘을 쓸 필요도 없이, 엉겨 붙는 몸을 살짝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여자가 비틀거리며 멀어진다. 속이 좋지 않았다.

리히튼은 기다란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는 진정으로 성을 나가 나뭇잎에 달라붙은 송충이의 수를 셀 생각이었다. 복도 끝, 밤의 테라스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달 아래에 보이는 기다란 적발이 어쩐지 눈에 익다. 리히튼은 본능적으로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틀었다. 그가 다가가자 테라스에 기대어 있던 여자가 시선을 돌렸다. 리히튼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옆으로 물러섰다.

“다가오지 마. 약 냄새 나니까.”

오라버니라는 호칭은 이제 아그레인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더는 그리 부를 가치를 못 느끼는 것이겠지. 리히튼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었다. 그녀의 냉소적인 음성에 리히튼이 셔츠 소매를 코끝으로 가져갔다. 향수와 시가, 마약 냄새가 한데 뒤섞여 지독하고 텁텁한 향이 났다.

“냄새가 뱄군.”

리히튼은 두 사람 정도 들어설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베란다에 몸을 기댔다.

“이 정도 거리면 되나?”

아그레인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리히튼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낯을 꼼꼼하게 훑었다. 그의 시선을 알아챈 아그레인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즐거워 보이던데. 연회를 계속 즐기지, 뭐 하러 나온 거야?”

“끔찍하리만치 지루하기에 나왔지.”

“우스운 소리를 하네. 지루한 것치고는 어젯밤엔 꽤 뜨거운 밤을 보낸 것 같던데.”

그런 이유로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건가. 확신할 수는 없어도 괜히 작은 기대를 갖게 된다. 리히튼은 대답을 고민했다. 부정한다고 해서 그녀가 자신의 말을 쉬이 믿어 줄 것 같진 않았다. 두 손에 담고도 남을 법한 작고 하얀 얼굴에는 이미 불신의 기운이 충만했다. 머저리처럼 대답해서 의심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리히튼은 말을 골랐다. 하지만 정작 아그레인의 눈에는 신중한 게 아닌, 어떻게 변명할지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 듯했다.

“입을 닫은 이유는 긍정하기 때문이야?”

아그레인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리를 좁혔다. 밝은 달빛이 그녀의 맑은 피부를 어루만지며 떨어졌다. 선명한 녹안에는 늪과 같은 우울함이 깃들어 있었다.

순간, 리히튼은 꿈속의 아그레인과 현실의 아그레인 사이에서 지독한 혼란을 느꼈다. 꿈속에서 그를 괴롭히던 아그레인의 얼굴이 바로 이러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뒷목과 허리를 움켜쥐고 입술을 삼킬 것 같았다. 때문에 그는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이 진득한 욕구를 이기지 못해 그녀를 가진다면, 아그레인이 자신을 혐오하게 될까 두려웠다.

“…피해?”

그가 물러서자 아그레인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리히튼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리히튼은 뒤늦게 자신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했음을 인지했다.

“아그레인. 피한 게 아니야, 나는 그저….”

네게 실수하지 않으려 했을 뿐인데. 달에 비춰지는 하얀 낯은 여전히 고요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아그레인은 곧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아그레인.”

아그레인의 걸음은 빨랐다. 어느 순간부터는 머리를 휘날리며 그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리히튼은 그런 그녀를 뒤따랐다. 마음먹고 따라간다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겠지만, 위태롭게 흔들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아그레인!”

그들은 어느새 아카시아 향이 가득한 숲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향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숲은 벌레 우는 소리로 가득했다. 여름의 정취가 깊게 풍겼다. 리히튼은 그 속으로 아그레인이 사라져 버릴까 덜컥 겁이 났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그레인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여름바람에 잎사귀가 부딪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은하수의 은은한 빛이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떨어져 아그레인을 비췄다.

“어때? 오늘까지 마음을 정하라고 말해 두길 잘했지?”

기다란 길을 내달리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그레인은 미동도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언가 포기한 얼굴로.

“적어도 네게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네. 설마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음을 바꿀 줄은 몰랐지만.”

리히튼은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그레인은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그러나 거리가 좁아질수록 들려오는 목소리의 끝이 격정적으로 떨렸다.

“나에게 고마워하도록 해. 하루라도 더 지지부진했으면 다른 여자는 꿈도 못 꿨을 테니까!”

이어진 숨은 거칠었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다. 붉게 달아오른 아그레인의 눈은 감히 추측할 수 없는 갖가지 감정들로 뒤덮여 있었다. 리히튼은 조심스럽게 두 손을 들어 아그레인의 어깨를 잡았다. 위로하듯 토닥이다가, 손을 내려 차가워진 두 손을 쥐었다.

“할 말은 더 남지 않았어? 그러면 이제는 내 말을 들어 줘, 아그레인.”

시야를 맞추기 위해 등을 굽히고 눈을 맞추었다. 리히튼은 감춰 두던 속마음을 밝혔다.

“나는 매일같이 너를 가지는 꿈을 꿔.”

아그레인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바람이 불자 길고 얇은 속눈썹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리히튼은 그 평화롭고 아득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빌어먹을 꿈이 도통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아. 모든 꿈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뚜렷해. 너는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어깨를 쓸면서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지.”

굳어 있던 아그레인의 표정이 점차 느슨해졌다. 리히튼이 손을 들어 서늘하게 식은 뺨을 쓰다듬었다. 욕망에 점철된 속내를 낱낱이 밝히려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너는 내가 종일 네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놓고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거다.”

리히튼은 자신의 완전한 진심을 털어 놓았다. 하지만 아그레인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심이야. 너 아닌 다른 여자는 손도 잡은 적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목이 무겁다. 이토록 무거운 말을 한 건 살아가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상하게 가슴 안쪽이 저리고, 아그레인이 어떤 반응을 할지 두려웠다. 나를 거절하면 어쩌지?

아그레인의 대답은 한참 만에 들려왔다.

“리히튼. 너는 나를 선택하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아그레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언젠가 느꼈듯, 지금의 그녀는 지독히도 외로워 보였다.

“나는 하루에 수천, 수백 번을 생각해. 네가 있을 곳은 내 옆자리라고. 이번에는 내가 널 구해야 한다고.”

무엇으로부터? 그가 되묻기 전에 아그레인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어.”

리히튼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너를 놓아 버리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나간 아그레인의 손을 다시 쥐었다. 다신 빼낼 수 없도록,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아그레인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네가 짓는 웃음, 표정… 전부 예전과 달라. 너무 달라. 마치 다른 사람 같아. 그래서 더 행복해 보여. 잃어버린 삶을 되찾은 것처럼.”

목소리의 끝이 잘게 떨린다. 아그레인은 지금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리히튼은 자신의 존재가 아그레인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단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그레인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지 마, 아그레인.

“지금의 너는 너무 아름다워, 리히튼. 내가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빛나. 나는 네가 숨 쉬는 그 아름다운 세계에서 너를 빼앗고 싶지 않아.”

아니야. 그러지 마. 나야말로 너를 억지로 가지고 싶지 않아. 내가 너를 억지로 취하게 하지 마.

“그게 옳아. 그게 분명 널 위해 옳을 거야. 그러니, 그러니까….”

꽉 막힌 숨을 들이키며, 아그레인이 이를 악물었다. 리히튼은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수십 가지의 사념이 그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아그레인이 내 손을 놓는다면? 어떤 식으로 이 여자를 빼앗아 와야 하지? 잉고르드 공작저에 가두어야 하나? 그러다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참지 못하고 자해한다면?

“그러니까….”

가녀린 두 손이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아그레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애걸했다.

“내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줘, 리히튼.”

눈물은 없었으나 우는 것처럼 들렸다. 아그레인은 더할 나위 없이 처절한 눈으로 리히튼에게 매달렸다.

“당신은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아니, 아마 후회할 거야. 나는 당신이 그리 될까 두려워…. 하지만 후회해도 좋으니, 내가 사랑해도 된다고 허락해 줘.”

그 순간, 리히튼은 심장이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극도의 안도감을 느꼈다. 어느 순간 시작되었던 긴 이명이 멈추었다. 머릿속이 더는 어지럽지 않았다. 아그레인이 그에게로 왔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리히튼은 주저하지 않고 아그레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막혀 있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죽어도 후회할 일 없어.”

힘없이 끌려오는 몸은 깊은 상처를 입은 사슴처럼 위태롭고 약했다. 더 멀리 도망칠 방도가 없어 그에게 패를 맡기고 항복하는 것처럼.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을 품 안 가득 안았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평화가 전신을 덮쳤다.

“그러니까 더는 헤매지 말고 나만을 사랑하도록 해, 아그레인.”

그윽하고 몽롱한 체향을 들이켰다. 이제 모두 그의 소유였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몸도, 심장을 에이게 했던 시선도, 그녀의 불안까지 모두 다. 전부 그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

그날 저녁, 리히튼과 아그레인은 밤이 새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아그레인은 그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고, 리히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연회의 불이 꺼지지 않는 황성을 바라보며 둘은 후원과 호숫가를 끊임없이 거닐었다.

“나는 당신의 작은 습관까지 다 알아.”

때때로 아그레인은 그가 쉬이 부정하지 못할 확언을 했다. 그러고는 어떤 습관인지 되묻길 바라는 표정을 짓는데, 자신만만한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귀엽게 보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그레인을 안아 들어 장미향이 가득한 꽃밭 사이로 쓰러지고 싶었다.

“내 습관이 어떤지는 나조차 아직 잘 몰라.”

“그만큼 몸에 밴 거지. 당신의 습관이 얼마나 철저한지, 또 당신이 어느 부분에 예민한지 궁금하면 날 딱 하루만 당신의 침실이나 집무실에 두면 돼. 하루면 충분히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니까.”

무슨 느슨한 마음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걸까? 리히튼은 아그레인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침실이란 단어에 목 아래가 뜨거워짐을 인지했다. 그녀를 안 이래, 그녀와 손을 잡고 코끝을 맞대는 것으로는 이 충동을 억누르는 데에 한없이 부족하다는 걸 시간이 흐를수록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 리히튼의 속도 모를 아그레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제대로 잠도 잘 수 없는 끔찍한 독에 중독됐었어. 정확히는 네가 나를 중독시켰다는 말이 옳겠네.”

독? 웃어넘기기에는 짧은 한 어절의 의미가 작지 않다. 리히튼이 대답하기 전에 아그레인이 그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여?”

공교롭게도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살짝 벌어진 얇은 두 입술밖에 없었다. 리히튼은 자신도 모르게 내려가려는 시선을 겨우 끌어 올려 아그레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부위를 바라봤다. 말끔해야 할 눈동자의 흰 부분에, 멍처럼 푸르스름한 흔적이 묻어 있었다.

“이게 그 독의 흔적이야. 네 눈도 자세히 살피면 나와 비슷한 흔적이 남아 있어.”

흔적이라니. 그런 걸 남길 정도로 끔찍한 독인 건가. 하지만 아그레인의 얼굴은 조금의 유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을 응시하던 리히튼은 팔을 들어 아그레인의 목덜미를 더 가까이 끌어 당겼다.

“안 보이는데.”

깜짝 놀란 아그레인이 숨을 들이켰다. 둘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서로의 온기와 숨이 느껴질 만큼, 몹시. 긴장으로 굳어 있던 아그레인은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순식간에 가다듬어진 얼굴을 보며, 리히튼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마음에 들어. 네가 내 것이라는 표식 같군.”

그가 손을 놓기 전에 아그레인의 몸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기억나지 않는 일이라 죄책감이 느껴지지는 않아. 네가 원한다면 노력은 해 보지.”

“뭐를? 죄책감을 느끼는 일?”

아그레인이 리히튼의 위아래를 훑으며 되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니 파렴치한 그의 행동에 위기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리히튼은 그 모습이 귀여워 또 한 번 웃음을 지었다. 아그레인이 말했다.

“그런 건 느낄 필요 없어, 리히튼.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아니까.”

“너를 위해 독을 건넸다고? 내가 네 자살을 도우려 했다는 뜻인가?”

“그 반대에 가깝지 않을까?”

그녀와 자신의 과거가 복잡하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까. 베르크네가 말하기를, 리히튼은 잃어버린 기억을 완전히 되찾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간극이 이리도 늦춰지는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곧 모든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테니 조급해하지 말라 조언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리히튼은 지금 이 순간이 벅찰 만큼 만족스러웠다. 기억 같은 건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돌아와도 좋다. 아그레인이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되새기고 싶었다.

“아.”

그때였다. 호숫가를 따라 조용히 걷던 아그레인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황성의 호수는 인공호수라 뭍에 가까워도 머리가 전부 잠길 만큼 깊다. 리히튼은 재빨리 팔을 뻗어 아그레인이 호수 안으로 빠지는 불상사를 막았다. 그녀의 젖은 모습은 혼이 빠질 정도로 매혹적이지만, 황성에서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모두와 공유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그레인은 리히튼에게 허리가 붙들린 채로 어깨를 움츠렸다. 잠깐의 정적 이후, 그녀가 손을 뻗어 리히튼의 눈가를 매만졌다.

“거봐. 여기에 있지? 독의 흔적.”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가볍고 따스한 손길이었다. 리히튼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아그레인의 손길을 즐겼다.

“네 것은 내 흔적보다 더 짙어. …더 자주 사용했다는 뜻이겠지.”

이전과 달리 서글픈 목소리였다.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과 이마를 맞댔다. 오늘만은 그녀가 자신이 모르는 우울한 기억에서 멀어졌으면 했다.

“네가 하는 말은 전부 나에 대한 이야기로군. 내가 궁금한 건 너야. 지금부터는 내가 아닌 네 이야기를 해 봐.”

“내 이야기?”

이마를 맞댄 채로 아그레인이 작게 웃었다.

“네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야, 리히튼. 나는 아주 긴 시간을 네게 기생해서 살아왔거든.”

아그레인은 자조가 습관인 걸까? 아니면 모두 믿기 어려운 진실인 걸까? 어느새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그레인이 웃음기 서린 음성과 함께 리히튼의 어깨를 밀었다.

“아직 본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은데요, 오라버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제 입술을 바라보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아요.”

리히튼은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켰다. 아그레인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도 놓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아그레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황홀한 체취가 풍겼다.

“그런데 도망가지 않는군.”

다시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했다. 아그레인은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을 돌려 도망가지도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리히튼이 홀린 듯 얼굴을 가까이했다. 서로의 코가 스쳤다. 그 감각을 느끼듯 아그레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시점이 질긴 인내의 끈을 끊어낸 최후의 순간이었다.

리히튼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아그레인과 입을 맞추고,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흔적을 새겼다. 작은 얼굴, 작은 어깨에 걸맞게 아그레인은 입술조차 작고 아담했다. 하지만 닿은 살결만큼은 불처럼 뜨거웠다. 숨결은 부드럽고 향은 나긋했다. 꿈속에서 느꼈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때 그 느낌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았다. 미칠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한순간에 몽롱해질 정도였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십 번 입 안을 탐해도 갈증은 심해져만 갔다. 리히튼의 손길은 본능적으로 아그레인의 몸을 따라 내려갔다. 잘게 어깨를 떤 그녀가 리히튼을 밀어내고 타이르듯 말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런 새끼가 있다면 내가 직접 눈알을 도려내 주지.”

아그레인이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점령했다. 입맞춤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리히튼은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아그레인은 그의 단호한 선언을 신뢰하지 않는 듯했다. 자신의 입 안쪽을 헤매는 살을 깨물고 그를 저만치 밀어냈다. 그녀는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리히튼을 탓했다.

“어쩜 기억을 잃어도 짐승 같은 건 똑같은지!”

아그레인은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달아오른 열기를 힘겹게 가라앉히며, 리히튼이 뒤늦게 그 뒤를 따랐다.

“너는 너무 무정해.”

그리고는 보란 듯이 아그레인을 품에 안은 채 걸었다. 반항하는 작은 몸을 안아 들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뭐하는 짓이냐며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자 결국 순순히 제 방의 위치를 밝혔다. 아그레인을 방 앞에 내려다 놓으며, 리히튼은 그녀의 손등을 입가로 가져갔다. 한겨울의 눈처럼 하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오는 움직임이었다.

“오늘 밤은 네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아.”

그 빌어먹을 꿈을 또 꿀 수도. 상상하자 벌써부터 몸이 뻐근했다. 그러나 이어진 아그레인의 말은 그의 몸을 뻐근하다 못해 늪에 빠진 것처럼 무겁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가지 않으면 안 돼?”

리히튼의 옷깃을 붙잡은 손은 짧은 바람이 불면 그대로 떨어질 것처럼 약했다.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의 손끝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수줍어한다거나, 부끄러워하는 감정은 없었다. 아그레인은 순수하게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통해서, 리히튼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형용하기 힘든 진득한 지배욕을 느꼈다.

리히튼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아그레인은 방 곳곳에 위치한 등불을 밝혔다. 리히튼은 창문을 열고 밀려오는 밤공기를 들이켰다. 희미하게 아카시아 향이 나는 듯했다.

“나로 괜찮겠어?”

그의 옆으로 다가온 아그레인이 물었다. 리히튼이 대답했다.

“너로 괜찮은 게 아니라, 네가 아니면 안 괜찮은 거야.”

“우리 사이에 아이를 가질 수 없을 텐데도?”

그는 잠시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리히튼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베르크네에게 듣기로 태생부터 그런 몸이라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그레인에게 따로 밝히지는 않았다. 그녀야말로 리히튼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아그레인은 그 모든 게 자신의 탓인 양 이야기했다. 리히튼은 그녀의 자책이 싫었다. 그가 멀쩡한 몸이고 아그레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해도, 리히튼의 선택은 변함없을 터였다.

잉고르드처럼 고명한 가문에 후계를 남기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리히튼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문제가 아그레인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후계를 어찌할지에 대해선 나중에 의논해도 충분했다. 때문에 리히튼은 오히려 아그레인에게 되묻고 싶었다.

“괜찮겠나?”

그녀야말로 아이를 갖지 못해도 괜찮겠느냐고. 아그레인은 대답 대신에 조용히 웃었다.

“우리는 이런 점까지 참 닮았어. 그렇지?”

그녀는 두 팔로 리히튼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더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숨을 내쉬고 들이쉼에 따라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 사랑스러웠다.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영원히 우리밖에 없을 거야.”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낭만적이군.”

리히튼이 아그레인에게 깊게 입맞춤을 했다. 그녀가 더는 아무런 생각도, 말도 못하도록 이전보다 거칠게 숨을 앗아갔다.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허리와 목덜미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여린 입 안쪽 살과 치아를 괴롭히던 리히튼의 흔적이 귓가를 따라 목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그레인이 어깨를 떨며 잘게 몸을 비틀었다.

“아….”

그녀의 두 다리는 힘없이 밀렸다. 어떨 때는 카펫에 닿지도 못하고 붕 떴다.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의 몸을 안아 들어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눕혔다. 탐스러운 적발이 새하얀 침구 위로 넓게 흩어졌다. 리히튼의 두 눈 위로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들끓었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그레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꿈속의 나도 이랬어?”

“아니.”

리히튼이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는 이와 혀를 이용해 아그레인의 가슴 앞쪽에 묶인 리본을 천천히 풀었다. 끈이 풀리며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아그레인의 두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남은 매듭을 손으로 느릿하게 풀어냈다. 리히튼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아그레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더 부드럽고… 달콤해. 몸이 녹아 버릴 것처럼.”

마침내 그의 손에서 얇은 천이 떨어졌을 때. 아그레인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뺐다. 하지만 리히튼은 그녀를 놓아 줄 마음이 일말도 없었다. 선을 지키려던 리히튼을 이곳으로 이끈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는 한손에 잡힐 만큼 얇은 허리를 자신 쪽으로 강하게 끌어 당겼다.

“자꾸 떨어지려 하지 마. 내가 더 거칠어지지 않길 바란다면.”

이상하게 숨이 거칠다. 아그레인이 눈을 감았다. 리히튼은 그녀의 품에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

다음날 해가 떴을 때. 리히튼은 방 안으로 떨어지는 햇빛에서 평소와 다른 선명한 이질감을 느꼈다. 무언가 다르다. 매일같이 달라지는 하늘의 색이라지만, 오늘 그가 보는 하늘은 이제껏 보아 온 하늘과 너무나도 많은 점이 달랐다. 그의 곁에는 아그레인이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워 있었다. 하얀 어깨에 지난밤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리히튼은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얇은 이불을 아그레인의 턱 끝까지 올린 뒤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카펫 위로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는 의복을 걸치고 침실을 벗어났다. 황성을 나가니, 가까워지는 후원에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붉은 캐노피 아래에 앉아 야외에서 펼쳐지는 현악 사중주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황제가 지나가듯 물었다.

“간밤에 공작을 찾는 여자들이 많더군.”

리히튼은 작열하는 햇빛을 즐기듯, 느긋한 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늦은 시간까지 적발의 여자와 후원을 거닐었다던데. 공작의 움직임이 이토록 빠를 줄이야. 모두들 그대와 여자의 염문을 한창 즐기는 듯했다.”

리히튼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본래부터 나만을 위한 나의 여자였는데, 다른 것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있나?”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투였다. 그에 황제의 눈빛이 달라졌다. 리히튼은 바삐 움직이는 악사들의 현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오늘 저녁에 폐하의 시간을 잠시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황제는 곧장 대답했다.

“적절한 때에 시종을 보내도록 하겠네.”

볼일이 끝났다는 듯, 리히튼이 곧장 몸을 돌렸다. 노골적으로 따라붙던 황제의 시선은 그의 등이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멀어진 후에야 떨어졌다. 리히튼은 방향을 틀어 사원으로 향했다. 황성에서 가장 고요한 공간으로 향하는 길은 망자가 머무는 땅처럼 적막하고 차분했다.

아주 오래전, 그렌페르크 제국에도 국교가 있었다. 후원에서 한참을 이동해야 나오는 사원은 그 시절에 세워진 건물이었다. 황실은 국교가 사라진 후에도 이 사원을 허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와 핏줄을 끔찍이 사랑했기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세월의 흐름에서 지키고 싶어 했다. 그들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레그윈의 핏줄은 지키지 못했어도, 그 역사만은 살아남았으니.

“각하.”

사원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리히튼은 기사를 지나쳐 사원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관마다 각기 다른 색의 꽃들이 꽂혀 있었다. 리히튼은 그중에서도 가장 우측에 위치한 관 앞으로 걸어갔다.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풍성한 꽃과 그 향 앞에, 먼지 한 톨 없이 멀끔한 석판이 놓여 있었다. 리히튼은 석판에 쓰인 이름을 읽었다.

<빌힐름 조나단 레그윈.>

다나한 2세의 아들. 이제는 죽고 없는 적통 황자. 빈세르크 3세의 유일한 쌍둥이 남매. 그의 시체가 보관된 관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레그윈 황실 가문의 붉은 휘장이 관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닥쳐오는 모든 불운에서 보호하겠다는 듯, 틈 하나 없이 꼼꼼하게. 리히튼은 실소했다.

“내가 보아 온 너의 죽음 중 가장 비참하군.”

리히튼은 관 앞에 놓인 화병에서 백합을 꺼내들었다. 이제 막 꺾은 것처럼 싱싱하고 맑았다. 황실의 온실에서 자라는 귀한 백합이었다.

“꽃의 향이 아무리 짙은들, 너희의 멸족을 가릴 순 없지.”

그의 손 안에서 백합의 줄기가 힘없이 우그러졌다. 리히튼은 산산조각이 나 추락하는 흰 꽃잎을 내려다 봤다. 그의 발치로 떨어진 꽃잎은 허약하고 볼품없었다.

레그윈 황실은 멸문했다. 적통인 빌힐름과 비비안느가 동시에 하늘의 힘을 지니고 태어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손을 쓰거나, 비비안느가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이를 갈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일어날 멸문이었다는 의미다.

리히튼이 손수 나서 황실의 사생아들을 전부 지워냈으니, 하늘의 힘은 비비안느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출 것이다. 잉고르드와 캐롤드에도 그와 아그레인을 제외하곤 반쪽짜리 핏줄조차 남지 못했다. 기록과 달리 킨 캐롤드는 전 캐롤드 후작의 사생아가 아닌, 완전한 타인이었다. 전 캐롤드 후작은 가문의 비운을 끊어내기 위해 캐롤드 핏줄의 멸족을 자처했다. 킨 캐롤드는 전 후작이 준비한 최후의 패였다.

캐롤드 가문이 반역죄로 멸문한 후, 황실은 수년 간 캐롤드의 마지막 후손인 킨 캐롤드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를 발견했어도 태양의 힘은 아그레인을 끝으로 사라질 예정이었으니, 이 또한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운명. 그것이 수십, 수백 년을 살아가며 리히튼이 깨달은 진실이었다. 그들의 멸망은 운명이었다. 레그윈은 평생에 걸쳐 힘과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은 이미 멸망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아그레인이 미래를 보지 않고, 리히튼이 시간을 돌리지 않았어도 세 가문은 자연스레 멸족했을 것이다. ‘태양이 흐르는 강’도 그저 이름만 남기고 땅 속에 고요히 묻혔겠지.

“쓰레기들을 담기에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관이야.”

리히튼은 걸음을 옮겼다.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후원으로 향했다. 생명의 기운이 만발한 후원에는 가지각색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리히튼은 그중에서 가장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꺾었다.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처럼 싱그럽고, 완연한 생기를 내뿜는 꽃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다시 황성으로 향했다. 황제는 여전히 캐노피 아래에 앉아 사중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그러진 운명이 있다면 빌힐름이 아닌 비비안느가 황위에 올랐다는 점일 터였다. 그녀는 아그레인이 없었다면 황실의 개로 영원히 썩어갈 존재였으니.

리히튼은 운명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 번 반복된 삶은 그가 운명을 수긍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아그레인은 빌힐름을 이기지 못했다. 열네 번의 삶이 반복돼도 아그레인은 빌힐름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건 운명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하고 끔찍한 인과였다. 그러므로 리히튼이 맞서야 할 진정한 적은 빌힐름이 아닌 이 운명이란 이름의 신이었다.

다행히 그는 수십 번 회귀하면서 인내라는 것을 배웠다. 기다림을 터득했고, 그 기회를 이용해 아그레인을 파헤쳤다. 잔혹한 운명의 신에게서 아그레인을 빼앗아 올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도록 할 것. 그녀 스스로 리히튼 잉고르드를 선택하도록 할 것. 그녀 스스로 리히튼 잉고르드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채우도록 할 것. 그럼으로써 모든 인과를 받아들여 그의 전부가 될 것. 또는, 그를 전부로 여길 것.

그러기 위해 버텨 온 시간들이었다. 그러기 위해 아그레인을 사지로 내몰고, 그녀가 직접 선택하게 했다. 황성으로 돌아가 진실을 파헤치도록 했으며, 그 속에서 살아남아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그녀 스스로 삶을 살아가게 했다. 업과 운을 짊어지도록 했다. 빌힐름과 함께 추락하는 그의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게 했다. 그래야 그를 잃었을 때 더 처절해질 테니까. 그래야, 아그레인 캐롤드가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고 리히튼 잉고르드의 품으로 스스로 걸어올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또한 운명이라면 운명이지 않겠는가? 아그레인 캐롤드가 리히튼 잉고르드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 리히튼은 침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체의 여자가 얇은 천만 어깨에 두른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그레인.”

리히튼의 부름에 아그레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눈이었다. 그녀에게로 다가가,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겼다. 아그레인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한 눈이 리히튼을 향했다. 리히튼은 그런 아그레인의 뺨에 입 맞추며 말했다.

“너는 복수가 끝난 후의 시간을 지옥이라 말하곤 했지.”

아그레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그녀는 리히튼의 몸을 밀어내고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예측할 수 있는 수십, 수백 가지의 감정이 아그레인의 얼굴에 녹아 있었다. 그리움. 반가움. 후회. 걱정. 기대. 공포. 행복. 기쁨….

하지만 괜찮아, 아그레인.

“내가 그 지옥을 함께 걷게 해 줘.”

이제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테니까.

아그레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리히튼을 올려다보다가, 그가 내민 장미꽃을 느리게 받아 들었다. 알겠다거나, 마땅히 그리하겠다는 긍정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아그레인의 뺨 위로 눈물 한 줄기가 떨어졌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눈물이었다. 아그레인이 그의 품에 안겼다.

“응, 꼭.”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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