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ㅇㅇ]
공금, 요게X
조연의 반격은 없다 5권
Episode 19. 비비안느
근래 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였다. 파란 하늘 아래는 흰 구름조차 없었고, 바람 한 점 없어 뱃놀이에도 딱 적당한 날씨였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비비안느는 성을 나갔다. 본래 그렌페르크 제국이 추구하는 황실의 위엄이란 ‘움직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지만, 비비안느는 그따위 황실 법도 따위 내버린 지 오래였다. 모두 레그윈 황실 가문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려 온 법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녀가 몸소 나서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옳았다.
“배를 띄워라. 그리고 짐이 초대한 손님을 이곳으로 안내해라.”
“예, 폐하.”
비비안느는 캐노피 아래에서 느긋하게 앉아 시종들이 배를 띄우길 기다렸다. 곧 호수 위에서 즐기게 될 음료와 디저트가 하나둘 준비되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비비안느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불퉁한 얼굴의 남자가 다가와 시중을 도왔다.
“꼭 이러셔야 했습니까?”
“무슨 뜻이지?”
“뱃놀이 말입니다. 꼭 저와 함께 하셔야겠냐는 물음입니다. 누가 보면 폐하와 제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수줍은 연인 사이인 줄 알겠군요.”
남자, 모리타트 공작이 영 마뜩찮은 눈으로 유감을 표했다. 황제의 앞에서 취하기에는 몹시 불순한 태도였으나, 그 누구도 모리타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다. 비비안느는 모리타트의 불만을 뒤로 하고 배에 올랐다. 이윽고 그들이 탄 배는 천천히 호수 한가운데로 밀려갔다. 호수에 그려진 파문을 응시하던 비비안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짐이 그대를 부른 이유는, 그대의 혼사가 계속 미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리타트의 표정이 좋든 말든, 비비안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잭 가문의 적통은 현재 그대가 전부다. 잭 전 공작 부인과는 후계를 보지 못했으니, 어서 새 부인을 맞이해 후계를 봐야함이야.”
이어진 모리타트의 대답은 답답함을 참는 듯, 짧고 간결했다.
“곧 볼 겁니다.”
“그러길 바라는 것이겠지. 아즈마리아 백작은 포기해. 백작의 성격 상 지위를 버리고 그대를 선택할 확률은….”
“싫습니다. 제가 제 여자를 선택하겠다는데, 왜 자꾸 폐하께서 왈가왈부 하시는….”
“백작의 청이다.”
“…이유가 있으셨군요.”
아즈마리아가 언급되자 모리타트의 언성이 급격히 낮아졌다. 비비안느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한 달 안에는 어떻게든 끝을 보겠습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말하는 건가?”
“꼬셔내겠다는 의미지요.”
“다시 한번 말해 두지만, 공작이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용서하지 못해. 잭 가문의 적통이 끊기는 일은 허용할 수 없으니.”
모리타트 공작은 그녀가 아는 이들 중 손에 꼽게 현명한 남자였다. 그런데도 흠모하는 여자의 이름만 나오면 답답한 머저리처럼 구니,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존속을 도와야 하는 입장으로선 한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비비안느가 귀족 영애 목록까지 작성해 재촉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 역시 모리타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종류의 사랑이라 표현하기에는 분명 어폐가 존재할 테지만…. 그녀 또한 ‘양보할 수 없는 애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모리타트가 긴 한숨을 뱉어 내며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듣는 소신의 입장에선 억울하기만 합니다. 제 혼사보다 중요한 것이 폐하의 혼사이지 않습니까?”
상대가 바뀔지언정, 항상 약혼자가 정해져 있던 빌힐름과 달리 비비안느는 단 한 번도 혼약을 약속한 적이 없다. 또한 세간에 알려진 정인조차 없었다. 아마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는 조금도 쓸모없다 여겨 왔을 터였다. 모리타트는 비비안느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신하로서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이왕이면 외모와 몸이 쓸 만한 청년으로 고르시길 추천 드립니다. 적어도 잠자리는 즐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항상 똑같은 소리만 해.”
“신하로서 군주께 드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마음에 드는 청년을 선택하시면, 제가 홀리지 않고는 못 배길 여자를 준비해 간통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아이를 뱄을 때, 그 아이를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모리타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부마의 혈통은 최대한 건실한 혈통으로 골라 주십시오. 그래도 레그윈을 이어서 새로운 황실 가문이 될 핏줄인데, 레그윈처럼 피에 미친 혈통을 들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눈앞의 황제가 레그윈 황실 가문의 적통임에도, 모리타트의 폭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비비안느는 진노하기는커녕 짧게 웃어넘겼다. 모리타트의 주장에는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그윈 황실 가문은 비비안느를 마지막으로 대가 끊길 예정이었다. 빌힐름이 죽은 시점에서 레그윈의 적통은 비비안느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비비안느는 하늘의 힘을 계승한 존재로서, 태생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다나한 2세의 사생아들은 진작 정쟁에 휘말려 명을 달리했다. 제국을 이 잡듯 뒤진다면 레그윈 가문의 방계를 찾을 수 있겠으나, 비비안느는 그럴 마음이 한사코 없었다. 레그윈 핏줄의 종말이야말로 그녀가 오랫동안 바라온 결말이었으니까. 비비안느는 자신의 대에서 ‘태양이 흐르는 강’이라는 저주를 끝낼 마음이었다. 레그윈을 향한 증오와 아그레인을 향한 애정은 비비안느가 리히튼의 손을 잡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녀의 대답 이후, 둘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호수 너머의 풍경을 감상하던 모리타트가 넌지시 말했다.
“이제 본론을 말씀하십시오. 굳이 이 흔들리는 호수 위까지 저를 불러낸 이유가 있으실 것 아닙니까?”
비비안느는 그의 제안을 곧장 받아들였다.
“어젯밤 리히튼 공작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리히튼 공작의 서신. 그 말을 들은 모리타트의 표정이 드물게 진중해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을 되찾으셨답니까?”
“아니.”
망설임 없는 부정에 모리타트의 표정이 괴팍하게 일그러졌다. 기억을 되찾지도 못했는데, 혼인이라니? 모리타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혹시, 뭐… 잉고르드 공작과 아그레인 캐롤드는 세상의 풍파도 못 막아낼 운명의 사랑이라, 한쪽이 기억을 잃었어도 서로 사랑에 빠져 정을 나눴다, 이런 말씀이신지?”
비비안느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올해 안으로 혼인할 계획이라더군. 짐의 허락을 미리 구하는 서신이었다.”
“혼인이라면… 아그레인 캐롤드와 말입니까?”
“아니. 당장은 사교계에 소문만 흘릴 생각인 듯했다. 기억을 잃어 판단력이 여러모로 흐려졌으니, 직접 귀족 가문들을 상대하며 적당한 여자를 찾을 계획이겠지.”
“허.”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그 말은 즉, 리히튼 공작과 아그레인 캐롤드의 질기고 질겼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뜻이지 않은가.
“갑작스럽군요.”
두 달 전,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에게 변고가 생겼다. 페사 영지에서 발생한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은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렌페르크 제국에서 리히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 그 자체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황제가 아닌 리히튼 잉고르드가 제국을 휘두를 거란 평이 지배적이었다. 모든 귀족이 그를 시기함과 동시에 존경했다. 감히 그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리히튼이었다.
그런 리히튼 잉고르드에게 변고가 생겼다니? 세간은 황제가 리히튼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제국을 지배할 천운이 내려온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두 달이 흐른 지금에도 황제와 리히튼 공작의 관계는 여전히 공고했다. 불화랄 것도 없었고 눈에 띄는 한쪽의 움직임도 없었다. 귀족들은 태평한 황제의 태도에 의문을 표했지만, 모리타트만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것도 리히튼 공작의 계획이겠지요?”
비비안느는 터무니없다는 어투로 그의 질문을 받았다.
“그대는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럼 폐하께서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리히튼 잉고르드가 이리도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우발적으로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리히튼 잉고르드는 오롯이 아그레인만을 위해 살아온 남자다. 이런 식으로 끝내려 했을 리 없어.”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분이 생각해 온 결말일 수도 있지요. 저라면 마땅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아니, 저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죠. 그러니 리히튼 공작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비안느가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공작은 그에 대해 잘 모르는군.”
“아니요. 저만큼 리히튼 공작과 비슷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래. 고작 한 명의 여자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 끔찍하리만큼 비슷하기는 해. 십 년 전의 그대는 상상도 못했겠지. 아즈마리아라는 여자를 위해 지위를 내던질 각오도 하고 있다는 현실을 말이야.”
모리타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는 듯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께는 도무지 말로 못 이기겠습니다.”
“본래 잃을 게 없는 사람에게는 이기기 힘든 법이지.”
비비안느는 리히튼 공작에게 닥친 불운을 말 그대로 ‘불운’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공작. 리히튼 공작이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그녀의 말이 옳았다. 기억을 잃든 말든, 리히튼 잉고르드는 여전히 리히튼 잉고르드다. 수많은 역경을 뛰어넘어, 레그윈 황실을 무너뜨린 장본인. 그것이 비비안느가 리히튼의 손을 놓지 않는 이유일 터였다. 모리타트는 식어 버린 차 한 잔을 쭈욱 삼켰다. 그리고 느리게 멀어지는 황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 지루한 뱃놀이는 언제 끝나는 겁니까?”
“배에 올라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내리라 재촉하는 건가?”
재촉이라. 모리타트는 신하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황제 역시 알고 있을 사안을 다시 상기시켰다.
“오늘은 빌힐름 전하의 입관식이 있는 날이지 않습니까? 친형제의 입관식이 열리는 날에 뱃놀이를 하는 황제는 그렌페르크 역사상 폐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모리타트가 계속해서 뱃놀이를 불편해 했던 터라, 둘은 결국 뭍으로 올라왔다. 모리타트는 황성에 가까워지면서 ‘한데 그 소식을 말씀해 주시려고 호수 한가운데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라는 질문을 했고, 비비안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단순히 뱃놀이를 즐기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모리타트는 비비안느에게 앞으로는 이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행동은 자제해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그래봤자 아즈마리아가 그대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텐데. 한 번 뜬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거야 해 보지 않고선 모를 일이지요.”
말과 말리 모리타트의 안색은 영 좋지 못했다. 비비안느는 멀어지는 모리타트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모리타트가 만약 강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아즈마리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을까? 되돌렸다면 과연 몇 번을 포기하지 않고 되돌릴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번을 넘게 회귀한 리히튼의 선택이 비정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제정신이었다면 애초에 견뎌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비안느는 모리타트의 주장이 꽤 그럴싸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했다. 하지만 ‘왜’냐는 의문은 여전했다. 리히튼의 목적은 단순히 아그레인의 죽음을 막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그레인 캐롤드가 스스로 삶을 이어 가길 바랐다. 적어도 리히튼과 뜻을 함께해 온 비비안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그레인이 잉고르드의 독을 통해서 스스로 기억을 되찾고, 복수를 다짐하고, 그 복수를 시행하고, 살아남는 과정의 전부가 리히튼이 바라온 것이었다. 그 속에서 그녀가 사람들을 만나고, 선택하며, 고뇌했던 시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리히튼은 힘을 지녔음에도 판을 뒤집지 않았으며, 늘 기다리고, 인내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아그레인에게 집착하고 그녀의 복수를 도우면서도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비비안느도 그 이유가 단순히 ‘아그레인이 그러기를 바랐기 때문에’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리히튼의 진정한 바람은, 아그레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복수의 끝에서 찾아올 공허함을 채워 나갈 수 있도록.
그렇다면 리히튼의 끝은? 모든 바람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때, 리히튼이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미래를 살아갈 기대감? 아그레인 캐롤드와 함께할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지독한 공허감? 모리타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리히튼은 삶의 이유를 잃고 정신적 자살을 선택한 게 아닐까?
하지만 비비안느는, 순전히 그녀 본인의 바람으로… 모리타트의 추측이 빗나갔으면 싶었다. 리히튼마저 예측하지 못했던 우연한 사고이길 바랐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래야 아그레인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빌힐름의 입관식은 성대하게 진행됐지만, 다나한 2세의 입관식 때와는 달리 불참하는 가문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잉고르드 가문의 가주와 윌 가문의 가주가 그러했다. 다만 모두가 불참할 거라 예상했던 캐롤드 가문의 가주, 킨 캐롤드는 입관식에 모습을 보였다. 그의 참석은 모두의 눈길을 끌었으나 아주 잠시의 일이었다. 소문대로 훤칠하고 멀쑥한 모습에 뭇 여자들이 관심을 보인 것을 제외하곤 특별하다 할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비비안느는 빌힐름의 관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빌힐름의 시체는 온전치 못했다. 특히 유리 아래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반이 뭉개져 있었다. 아무리 반쪽이라도 불사는 불사. 그런 빌힐름이 목숨을 잃을 정도니, 육체의 훼손이 말도 안 되게 심각했을 터였다. 그녀가 생각해 온 형제의 마지막보다 훨씬 더 처참한 모습이었다.
“한때는 네 권력이 영원할 거라 여겼던 때도 있었지.”
그래서 모든 것을 놓아 버렸었다. 바닥을 기는 개. 차라리 개가 되는 게 더 편했던 시절. 미쳐 버린 레그윈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했던 길. 비비안느는 자신의 쓰레기 같은 인생이, 개가 됨으로서 명을 다할 줄 알았다. 아그레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마워, 오라버니. 아그레인은 오라버니가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야.”
아그레인은 죽어 가던 그녀의 이성에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모자란 개 취급을 받았지만 적어도 빌힐름 때와는 달랐다. 그동안 비비안느는 아그레인에게서 몸을 낮춰서 인내하고,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황실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 비비안느를 가엽게 여기고 동정했으며, 동질감까지 느꼈다. 비비안느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존재는 아그레인이 유일했다. 그녀가 있었기에 리히튼의 선택을 받아 황위에 오를 수 있지 않았는가.
그녀의 세상에서 리히튼이 왕이라면, 아그레인은 신이었다. 나의 유일한 친구. 유일한 주인. 유일한 어머니이자 아버지. 한때는 리히튼이 그 맹목적인 사랑에 의구심을 표한 적도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애증이라고도 하지. 맹목적인 애증은 네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이다.’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자조 섞인 경고였다. 하지만 비비안느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아그레인과의 기억이 전부였다. 빌힐름의 개임을 알면서도 내치지 못했던 아그레인. 그녀와 함께 보냈던 짧으면서도 긴 시간들. 그 기억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두 오라버니 덕분이네.”
썩어 가는 시체에서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났다. 하지만 비비안느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죽은 쌍둥이의 얼굴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겼다.
“잘 가. 지옥에서도 영원히 고통스럽기를.”
그리고 관이 닫혔다.
***
아그레인이 황성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날 저녁이었다. 비비안느는 소식을 전달 받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아그레인은 도착하자마자 적통 황족의 관이 묻히는 사원으로 향했다고 했다. 캐롤드로 돌아갔다는 소리만 들었지, 그녀와의 만남은 빌힐름 독살 사건 이후의 첫 재회였다. 사원 안에서 풍기는 꽃향기는 짙다 못해 지독했다.
사원의 가장자리, 수백 가지의 꽃과 화관이 장식된 관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비비안느는 홀리듯 아그레인에게 다가갔다.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쪽은 아그레인이었다.
“빌힐름이 그리워진 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비비안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다.
“그냥 궁금했어.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자의 관은 어떤 모습일지.”
그래서 비비안느는 안심했다. 또 그러한 사실이 너무나 아그레인답다고 생각했다. 비비안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접 확인해 보니까 어때?”
“특별한 구석은 없네.”
어쩐지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그리 감정적인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아그레인이 곁에 있으면 온갖 다양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비비안느는 목 멘 음성으로 대답했다.
“잘 돌아왔어. 언제든지 와도 돼, 아그레인. 무얼 원하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제는 내가 널 지켜 줄 수 있으니까.”
그제야 아그레인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낯은 창백했고, 눈가는 생기 없이 푸르스름했다. 잉고르드의 독에 중독된 상태인 듯했다. 그녀는 흐릿한 미소와 함께 비비안느를 껴안았다.
“이제야 감사 인사를 하네. 그때 도와줘서 고마워, 비비. 덕분에 페사에서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어.”
비비안느는 아주 천천히,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아그레인을 마주 안았다. 바로 이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그녀가 바란 평화였다. 차분해진 숨소리를 느끼며, 비비안느가 입을 열었다.
“아그레인. 페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잠깐의 침묵 끝에 아그레인이 대답했다.
“머저리 같은 일들이 있었지. 리히튼이 기억을 잃게 된 경위를 묻는 거라면, 오롯이 내 실수야.”
“그건 절대 네 탓이 아니야. 경황은 잘 몰라도 확신할 수 있어.”
비비안느가 빌힐름의 부재를 알게 된 건, 그가 황성을 벗어난 날의 저녁이었다. 그는 전 시종장, 카이로 백작의 도움으로 황성에서 도망쳤다. 따지자면 그녀가 빌힐름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물론 진정한 주범은 빌힐름 그 자체이겠지만. 천천히 몸을 뗀 아그레인이 텅 빈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놨다.
“복수라는 건 참 허무해. 그렇게 바랐는데, 정작 그 끝에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으니.”
“후회해?”
“아니.”
대답과 동시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지. 그래… 후회해. 그때 더 확실히 죽여 버려야 했는데.”
빌힐름의 관을 내려다보는 아그레인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냉랭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은 실수를 하겠지. 인정할 때가 됐어. 나는 빌힐름을 죽이지 못해.”
“아그레인.”
“결국 그를 죽일 수 있는 건 리히튼이었어. 그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조금 후회되네.”
비비안느는 불안해진 마음으로 아그레인의 손을 잡았다.
“나는 아그레인, 네가… 혹시 좋지 않은 선택을 한다면….”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아그레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짧게 웃었다.
“그럴 리 없잖아. 리히튼을 위해서라도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악착스럽게 살아야겠어. 이런 몸이 죽기는 할까 의문이지만.”
비비안느는 가슴 깊이 안도했다. 빌힐름의 존재는 아그레인에게 더 이상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평생 동안 집착하고, 갈구해 온 존재에게 완벽히 버림받았다. 비비안느가 생각하기에,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그레인, 네가 빌힐름을 죽인 거야. 그를 죽일 수 있는 건 처음부터 너밖에 없었어. 비비안느는 기쁨에 벅차오르는 기분을 겨우 진정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아그레인을 붙잡고 이 너른 사원에서 춤을 추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캐롤드에서는 잘 지내?”
“잘 지낼 수밖에 없지. 비비, 네가 위로금이랍시고 너무 많은 도움을 줬으니.”
잠시 말이 없던 비비안느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그레인. 리히튼이 내게 서신을 보냈어. 올해 안으로 잉고르드 부인을 들일 예정인 것 같아.”
아그레인이 크게 상심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날 두고? 어림없지. 그가 책임져야 할 사람은 다른 어여쁜 귀족 영양이 아닌 바로 나야.”
그 말과 함께 아그레인은 다시 몸을 돌려 사원의 입구로 향했다. 비비안느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아그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아그레인!”
다소 급하게 느껴지는 부름에 아그레인이 뒤를 돌았다. 말해. 말해야 해. 이 날만을 고대하며 버텼잖아. 비비안느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녀 앞에만 서면 모자란 이처럼 구는 스스로가 너무나 답답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그러니까, 언제든 괜찮으니….”
“그럴게.”
망설임 없는 긍정이었다. 고마워, 비비. 착각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비비안느는 아그레인이 미련 없이 떠난 자리에서 한동안 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한참이 흐른 뒤에야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