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8. 페사 (20/24)

Episode 18. 페사

페사 자작 가문은 내가 하녀로서 세 번째로 일하게 된 귀족 가문이다.

트리비아체 가문에서 일할 때만 해도 하녀 일을 이리도 오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내 천직은 하녀 일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분위기로 치자면 페사 가문은 일하기에 가장 편한 곳이었다. 나쁘게 말해서 고용인들이 대체로 게을렀다는 의미다. 닐슨을 제외하면 하녀장도 집사도, 모두 적당하게만 일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는 페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연고가 없는 탓에 집 밖을 나서면 뒤따라오는 시선과 말들도 적잖았지만, 그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시간들은 내게 마치 한낮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로움이었다.

‘두 달이 지나서야 이곳에 익숙해진 건가?’

처음부터 페사가 살 만한 땅이라고 느꼈던 건 아니다. 페사는 황성에서 일주일가량을 멈추지 않고 달려온 곳이었다. 중간에 말과 마부가 정확히 두 번 바뀌었다. 식사는 마차 안에서 해결했지만 목욕은 당연히 꿈도 못 꾸었다.

나는 현금만 잔뜩 챙긴 거지꼴이 되어서 페사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일주일은 노란 지붕 집에서 시체처럼 지냈다. 남은 식료와 물을 이용해 말 그대로 생을 연명하기만 했다. 하루하루 몸에 생기가 빠져가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복수라는 목적이 배제된 삶이란, 내게 너무나 낯선 시간이었다.

‘이보시오. 당신은 이곳에 죽으러 온 거요?’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처음으로 열린 건, 일주일에서 사흘이 더 흐른 뒤였다.

‘페사를 당신의 무덤으로 택한 거면 말리지 않겠소. 하지만 적어도 이 집이 아닌 저 뒷산에서 소리 없이 죽었으면 하는군. 페사의 사람들은 오랜 시간 평화롭게 살아온 터라, 당신 같은 젊은 여자의 죽음은 여러모로 안 좋은 영향만 끼칠 거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내 어깨 옆으로 작은 바구니를 놓고 나갔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황홀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자가 가져온, 갓 지은 빵의 냄새였다. 나는 남자가 놓고 간 빵과 우유를 미친 듯이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눈과 머리가 맑아졌지만 잠시의 일이었다. 나는 다시 바퀴벌레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남자는 그로부터 이틀 후에도 나를 찾아왔다.

‘이보시오.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요? 처자의 젊음이 아깝군. 당신의 옆집에 사는 노인은 일흔이 되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밭을 가꾸는데 말이지.’

그 다음의 다음날도.

‘오늘은 말린 과일을 좀 가져왔소. 물이나 우유에 띄워 마시면 먹을 만하지.’

그 다음의 다음의 다음날도.

‘내 이름은 니빌이요. 아가씨의 이름은 뭐요? 아니지, 일단 좀 씻읍시다. 마구간 냄새가 다 나는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거지꼴에서 탈피하고 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남자가 빗자루를 놓고 가면 가구 밑을 쓸었고 걸레를 두고 가면 바닥을 닦았다. 그것만으로도 사나흘이 눈 깜짝할 새 훌쩍 흘렀다. 내 말동무는 옆집에 사는 노인과 니빌이 전부였다. 그들은 이틀에 한 번씩 돌아가며 날 찾아와 시답잖은 대화를 하고 사라졌다.

‘수잔 양은 몇 살이오?’

‘스물은 넘었지만 서른은 안 됐어요.’

‘나는 몇 살처럼 보이오?’

‘서른은 넘었으나 마흔은 안 되어 보이네요.’

‘무슨 일을 하다 왔소?’

‘하녀 일을 했어요.’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된 거요?’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니빌은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나는 페사 가문의 일원이고, 따라서 페사의 사람들은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요. 내가 당신을 도우겠소. 그러니 앞으로도 발버둥 치며 잘 살아 보시오.’

그날부터 니빌의 방문은 뜸해졌다. 대신 그는 장정을 불러 내 집의 보수를 도왔다. 덕분에 내 집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커다란 나무 상자가 도착했다. 못으로 단단하게 밀봉되어 안의 물건을 확인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내게 도착한 건 다름 아닌 발레리아의 머리가 든 유리병이었다. 황성에서 급히 도망치느라 미처 데려오지 못했었는데.

‘드디어 그 좁은 유리병에서 나올 수 있겠어. 다행이지 않니?’

다음날 오전에 유리병을 들고 뒷산에 올랐다. 서너 시간 동안 흙길을 따라 올라 푸른 새싹이 돋기 시작한 너른 초원에 도착했다. 나는 그곳에 발레리아의 머리를 묻었다. 완전히 묻고 나자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서 황성을 나오지 않았는가. 발레리아의 머리를 보내 준 이가 리히튼인지, 비비안느인지, 모리타트인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날 이후부터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다만, 늦은 밤마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리히튼의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마지막 날 보았던 그의 불안한 시선과 체념한 듯 어두운 낯이 망막에 맺혀 아른거렸다. 사막처럼 삭막하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비안느가 아닌 리히튼을 찾아갔더라면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까? 분명히 달랐겠지. 후회도 많이 했다. 그와의 관계가 어찌 변할지 몰라 두려워서 도망친 내가 몹시 한심하게 느껴졌다.

리히튼이 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향한 감정이 옅어지기는커녕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그를 생각하느라 며칠 내리 밤잠을 설쳐서 불면증이 생겼다. 한데 리히튼은 더 멀어지지 않고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리히튼이 어떤 생각으로 페사를 방문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우연의 우연일 수도 있었고, 고의적으로 날 찾아온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 아무리 고민해도 후자가 맞았다.

‘날 이곳에 보낸 게 비비안느니까 리히튼이 모를 수 없어.’

하지만…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아.”

이래서 리히튼의 일로 고민하면 나만 힘들어진다. 근시일 내 이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리히튼의 방을 쳐들어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못 그럴 확률이 더 높지만.

***

“오늘은 리히튼 각하께서도 본관에서 저녁 식사를 하실 겁니다.”

이른 오전. 일과를 앞둔 하녀장의 말에 고용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리히튼의 방문에 긴장했는지 말하는 동안 짧은 한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때문에 점심 이후부터는 식사를 준비하느라 매우 바쁠 거예요.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작은 실수 하나라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

고용인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나는 그들 틈 사이에 껴 대충 아침을 먹고 청소를 시작했다.

오늘은 페사 가문에서 일한 지 사흘이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리히튼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내 존재를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리히튼은 사흘 동안 저택 외곽의 정원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정말 이곳에서 묵고 있기는 한가 의심될 정도였다.

“아가씨와 도련님이 무척 들뜨신 것 같아요.”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한참 공들여 계단을 닦던 때였다. 페사에서 오래 일한 하녀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라도 그럴 거예요. 그렇게 대단하신 분을 뵐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오늘 저녁이 되면 페사 부인이 아가씨를 각하 앞에 내보이느라 기를 쓰실 걸요?”

“혹시 모르죠. 아가씨의 미모와 심성이 워낙 고우시니 각하와 잘 될 수도….”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다보면 어느새 점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부터는 식탁이 부러질 만큼 화려한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했기에 상당히 바쁠 터였다. 특히나 고용인들의 수도 적은 페사에서 누가 무슨 일을 맡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이 떨어지면 쉬고, 생기면 누군가가 당장 나설 뿐이었다.

“여기! 누가 도련님께 차를 가져다 줘!”

때문에 나는 엉겁결에 티 트레이를 끌고 주방을 나와야 했다. 마침 손이 비어 있던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탓이다. 잡일만 했지, 시중을 드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페사 가문의 장남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을 향해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그때 비비안느 전하를 뵙고 다짐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 그분의 방패가 되어 드리겠다고!”

응접실은 아담하고 따스했다. 페사의 도련님은 누군지 모를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는 혼자 떠드는 것에 가까웠다. 도련님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남자는 흰 종이에 말없이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뒤쪽에 위치한 테이블에서 조용히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도련님은 무언가에 잔뜩 심취해 남자에게 일장연설을 펼치는 듯했다. 잠시 후, 남자의 고개가 살짝 창가로 돌아갔다. 보이는 것은 옆선에 불과했으나, 나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남자는 다름 아닌 리히튼이었다.

‘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그는 나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제게도 그런 기회가 생길까요, 각하?”

“그거야 본인만이 알겠지. 내가 그대의 기회까지 두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니까.”

담담한 리히튼의 대답에 페사 가문의 도련님이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각하께서는 항상 옳은 말씀만 하셔서 제가 참 부끄러워지네요.”

나는 차를 따르면서 리히튼이 그리는 그림을 힐끔 살폈다. 그가 쥔 연필이 그려내는 선은 상당히 유려했다. 마치 낙서라도 하듯 가벼운 획이었으나, 한데 모이니 훌륭한 화병을 완성시켰다. 그런 와중에도 도련님의 순수한 호기심과 호기가 든 질문을 무시하지 않고 대답했다. 도련님이 말을 이었다.

“검은매 기사단의 그 대단한 킨 경이 가문의 명예를 되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억울하게 눈 감은 전 캐롤드 후작의 숙원이 드디어 풀렸군요. 모두 각하의 노고라고 칭송합니다.”

“익히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어투처럼 들리는군.”

“캐롤드처럼 명망 있는 가문이 갑작스레 명을 달리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반역죄는 마치 흐르는 물 같아서, 원하는 틀에 쉬이 끼워 맞출 수 있다고요.”

킨이 살았구나. 찻잔에 차를 따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를 대신해 황족 시해 혐의를 뒤집어썼음에도, 살아남아서 멸문했던 가문까지 일으켰다. 도련님이 말했듯, 이 모든 게 리히튼의 은혜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캐롤드로 돌아와 줘.’

킨. 정말 그런 날이 올 수 있는 걸까? …정말로?

“경솔해. 자네의 아버지가 다른 말은 안 했나? 그런 경솔한 발언은 쉬이 입에 담는 것이 아니라고.”

리히튼의 지적에 도련님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예에…. 각하를 뵈어서 그런가, 제가 너무 들뜬 모양입니다.”

“이해하네.”

리히튼의 목소리와 어조는 몹시 평화롭게 보였다. 페사의 고즈넉한 공기에 알맞은 평온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에게선 외나무다리를 한 발로 오른 것처럼 불안한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잉고르드와 황성에서 보였던 그의 예민하거나, 우울하거나, 진흙탕에 머리를 박고 숨 쉬는 듯한 분위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그럼에도 리히튼은 무언가 어긋나 보였다.

‘사람들 앞에서 속내를 숨기는 게 정말 능숙하구나.’

그 사실이 내 마음을 더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리히튼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는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아, 차를 이리로 줘! 내가 직접 각하께 드리지.”

그리 말하며 달려오는 도련님의 얼굴이 완연한 행복으로 젖어 있었다. 리히튼을 향한 그의 호의와 경애는 꾸며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리히튼을 존중했고, 그 마음을 숨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리히튼이 대단한 남자이기는 해.’

보통 대단한 게 아니라, 몹시 대단한 남자야. 리히튼은 마지막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할 일을 마친 나는 방을 나왔다.

‘어쩐지 아쉽다.’

아쉬웠지만 억지로 그를 아는 체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기도 했고….

‘어쩌면 리히튼은 내가 도망갔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어.’

그와 나는 닮았다. 긴 시간 염원해 온 숙원이란, 삶을 잇는 원동력인 동시에 삶을 망쳐 버리는 주범이다. 우리는 그 숙원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는 점에서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나는 복수를 위해 살았고, 그 복수를 끝마친 후에는 허무함을 못 이겨 자살했다. 리히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를 살리기 위해 살아왔다. 그것이 리히튼의 숙원이었으니까.

“누구, 손 남는 사람 있어? 저택 뒤편에 가서 솔레르 양을 모셔 와야 해. 부인께서 긴장이 심하신지 복통을 호소하셔!”

“제가 갈게요.”

“아, 수잔. 그래… 너라면 안심이지. 부탁할게.”

나는 빌힐름을 죽이고 황성에서 도망쳤다. 길고 긴 시간을 건너, 리히튼의 숙원이 결국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황성에서 도망친 그날. 리히튼이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지 감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티 트레이를 놓고 주방을 벗어나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리히튼을 망쳤어.’

리히튼은 나를 증오한다. 그건 애증에 가까웠다. 나는 빌힐름을 통해서 애증이란 것이 사람을 얼마나 갉아 먹는지 배웠다. 상대방이 살아도 괴롭고, 죽어도 괴로운 것이 바로 애증이었다. 두 달 반을 페사에서 지내며, 나는 뒤늦게나마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리히튼도 그럴 거야. 우리는 닮았으니까.’

내가 곁에 있으면 그는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겠지만… 내가 떠나면, 그 괴로움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게 되겠지. 부디 그러기를 바랐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리히튼이 자신을 위한 시간을 살아가길 바랐다. 어쩌면 나를 영영 잊게 된다 하더라도.

“수잔?”

솔레르는 본관 뒤쪽에 마련해 둔 약방에서 커다란 책을 펼친 채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페사 부인이 아프다는 사정을 전하고 함께 본관으로 향했다. 솔레르는 페사 저택 밖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 보였다.

“불면증은 어때요, 수잔?”

그녀는 하루걸러 한 번씩 나의 건강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나를 자신이 돌봐야 하는 환자로 인식한 것 같았다.

“많이 나아졌어요.”

“다행이에요. 확실히 이곳에 온 후 수잔의 안색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날 괴롭히던 리히튼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몸이 피곤한데 불면증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머릿속이 복잡할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인가 봐요.”

고개를 끄덕인 솔레르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저어, 수잔.”

“네.”

“혹시 별관에서 일할 생각은 없나요?”

갑작스러운 제의였다.

“생각이 있고 말고를 떠나서, 그런 건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에요.”

“아니요, 아무래도… 가능할 것 같아요.”

“가능하다니요?”

“제가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모습이 리히튼 각하의 눈에는 무료하게 보였나 봐요. 저번에 수잔을 언급했던 걸 기억하고 계셨는지, 원한다면 별관으로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솔레르의 말은 나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었기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요?”

“네. 하녀장께 먼저 여쭈었었는데, 수잔은 일도 깔끔하게 잘하니 문제없을 거라고 허락하셨어요. 그러니까…. 수잔만 괜찮다면 별관에서 일했으면 해요.”

리히튼이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모른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의미인가?’

그간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던 그였다. 게다가 내가 페사 저택까지 와 리히튼을 만나게 된 일은 완벽한 우연에 불과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부르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는 건….

‘그에게 나의 존재가 이제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일까.’

가슴 안쪽이 아팠다. 머리는 다행이라고 여기는 게 분명한데. 마음은 정반대인 듯했다.

“조금 생각해 볼게요.”

나의 대답에 솔레르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러운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리히튼 각하는 생각하는 것만큼 강압적이고 무서운 분이 아니에요. 오히려 아랫것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는, 굉장히 자비로우신 분이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리히튼은 자비로운 게 아니라 다른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솔레르에게 그런 제안을 한 이유도 한 번쯤 나를 만나려는 의도일 테니까.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날 밤, 페사 저택은 영주 가족의 화목하고 즐거운 웃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페사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꾸역꾸역 눈을 감아 겨우 잠들었다.

***

리히튼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자주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의 뒤에서 하녀로서 은근하게 도울 일이 잦았다는 뜻이다. 페사의 장녀는 시 낭송을 즐겼는데, 요즘처럼 추위가 가시고 햇빛이 내리쬐는 날이면 정원에 가족을 불러 시를 낭송하곤 했다. 그 자리에는 리히튼과 솔레르도 늘 함께였다. 하녀장은 리히튼이 함께 하는 자리엔 신중하고 꼼꼼한 하녀들을 보냈는데, 그 하녀들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잔, 이번에 네가 추천했던 농장의 홍차를 주문했단다. 부인께서 향이 아주 고급스럽다고 좋아하시더구나.”

“뭘요.”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나 차를 타주고 가는 것도 만족스러워하셨다. 당분간은 네가 윗분들을 도와주거라.”

내가 하녀로 일했던 트리비아체와 잉고르드는 이곳 페사에 비하면 제도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커다란 영지였다. 게다가 내게는 황성에서 지내 온 경험도 있으니, 이제껏 습득해 온 상류층의 생활 지식들이 페사 부인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나는 차와 간식을 준비해 정원으로 나갔다. 언제나처럼 리히튼 곁을 차지한 페사의 남매가 종달새처럼 까르르 울어댔다.

“제리가 쓴 시는 제 것에 비하면 욕심 많은 딱따구리에 불과해요. 시끄럽기만 하니까요!”

“누이야말로 욕심 많은 수컷 공작새지. 이해하지 못할 괴상한 시만 써 온 주제에, 각하께서 오시니 구구절절 사랑을 읊은 시만 낭송하잖아?”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니?”

나는 뒤쪽 정원 테이블에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페사의 아가씨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다, 단지 리히튼 각하께서 사랑의 시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 그랬을 뿐이야!”

“허. 각하께서 사랑의 시를 선호하신다고? 이곳에서 함께 지낸 지 며칠이 흘렀는데 아직도 몰라? 리히튼 각하께서는 고작 사랑 놀음에 빠질 분이 아니시라고. 대업을 위해 인생을 바치실 사내대장부라면 모를까.”

“얘, 제리. 그런 경솔한 소리는 조심해야 한다.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는 건 옳지 않아.”

곁에 앉아 있던 페사 부인이 제리를 나무랐다.

“저는 사람을 아는 데 하루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어머니. 한데 각하께서는 페사에 오신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니, 서로를 알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죠.”

“신중하지 못한 소리하지 말렴. 사람의 진정한 내면은 고작 하루 이틀로 알 수 없어.”

“누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얼굴에서 다 드러난다는 격언 몰라? 앞으로 일 년을 더 각하와 산다고 해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을걸.”

“어쩜, 그런 생각 얕은 티가 나는 소리를 하다니! 각하. 각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세요?”

그리 묻는 아가씨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리히튼은 다리를 꼰 채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좌중을 쭉 훑는 그의 시선의 끝은, 찰나의 순간 내게서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숨이 멈추었다. 그의 눈이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러나 곧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리히튼은 내게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척하는구나. 내심 그 모습에 상처를 입었다. 돌연 모든 일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리히튼이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도 제리의 의견에 동의하는 축에 속하지.”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동시에 약간의 흥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 봐!”

“하지만 궁금하기는 하군. 모든 사람이 나의 첫인상을 ‘대업을 위해 인생을 바칠 사내대장부’로 인식할지.”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대로라면 곧 하나둘 손을 들어 자신이 느낀 리히튼의 첫인상을 밝힐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전에 리히튼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 하녀에게 나의 첫인상을 물어보면 되겠군.”

시선의 끝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혹스럽게 주위를 둘러 봤으나, 이 주위에 하녀라고는 내가 전부였다.

“그대의 눈에도 내가 사랑 놀음에 빠지지 않을 사람처럼 안 보이나?”

확실한 건, 나보다 다른 이들이 더 당황했다는 점이다.

“각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 하녀는….”

“괜찮아요, 어머니. 각하께서는 하녀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타박할 분이 아니니까요! 이봐, 하녀. 각하의 질문을 받았다는 걸 감사히 여기라고. 뜸들이지 말고 어서 대답하도록 해.”

다들 숨을 죽인 채 나만 쳐다봤다.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오직 리히튼만이 여상했다. 그는 느슨했던 자세를 곧게 편 후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나를 골리려는 심상인가. 샐쭉해진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리히튼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잠깐이나마 서운했던 감정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후였다.

“고작 하녀인 제가…. 어찌 리히튼 잉고르드 각하의 첫인상을 논하겠습니까?”

질문을 물려 달라는 의미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페사 도련님이 나를 닦달했다.

“어허! 어서 말해보래도? 아까도 말했지만, 각하께서는 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랄 분이 아니시다. 나 역시 궁금하니까 어서 말해 봐.”

저 빌어먹을 꼬마가. 고개를 들어 힐끔, 리히튼을 확인했다. 낯선 하녀를 대하던 시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퍽 즐거워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내가 난감해하는 이 상황을.

‘역시 날 골리려던 게 맞았어.’

나 혼자 도망쳐서 잘 살고 있는 모습에 배가 아팠던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히튼 잉고르드가 페사에 온 까닭은, 날 괴롭히기 위함일 수도 있다고.

“각하. 정말 제가 어떤 대답을 하든 벌을 내리지 않으실 겁니까?”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리히튼이 긍정했다.

“하녀 한 명을 벌준다고 해서 내 명예가 높아지지는 않지.”

“그렇다면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뒤쪽 정원 테이블에서 남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리히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어디 한 번 해 보라는 표정이었고, 나는 그에 착실히 보답했다.

“각하에 대한 제 첫인상은 제리 도련님과 같습니다.”

“대업을 위해 인생을 바칠 사내대장부로 보인다는 의미인가?”

“아니요. 사랑 놀음을 모른다는 평에 더 가까워요.”

“이유는?”

“사랑이란 건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마음이에요. 하지만 각하께서는 진실 된 사랑이라 여기기엔 너무나 많은 여자들과 단기간에 교제하셨죠. 설마 그 여자들을 모두 사랑했다고 말씀하시진 않겠죠?”

리히튼과 엮인 여자들은 전부 나의 기억을 지니고 있던 여자들이었다. 리히튼은 그들을 레그윈 가문을 무너뜨리고 네 가문에 복수하는 데 이용했다. 그렇다면, 리히튼은 그들에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까? 나는 리히튼의 입으로 직접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물은 건 나에 대한 첫인상인데, 수잔 양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군.”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소문이 각하에 대한 저의 첫인상이니까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한때 내게 리히튼이라는 존재는 소설 『태양이 흐르는 강』 속의 악역, 리히튼 잉고르드였으니까. 리히튼은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말하는 소문이 번복된 약혼을 말하는 것이라면, 귀족들 중에는 연애 감정으로 결혼하는 자가 없다. 만약 약혼이 아닌 또 다른 소문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소문들이 전부 사실이란 보장은 없지.”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두루뭉술하게 피해갈 뿐, 확실한 부정은 아니지 않은가?

“그 말은 즉 많은 여자들과의 스캔들이 모두 헛소문이란 뜻인가요?”

“헛소문일지 진실일지에 대해서는 수잔 양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으리라 보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판단해요? 혹시 모르죠. 할 일, 못할 일 다 했을지.”

리히튼이 모욕적인 소리라 주장해도 할 말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를 타박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리히튼은 기분 상한 티를 내기는커녕 흥미가 만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수잔….”

솔레르가 불안한 눈빛으로 내 옷깃을 쥐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못 배운 하녀라 아직 말을 가릴 줄 모릅니다.”

이어지는 페사 부인의 말에는 하마터면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너그럽게 넘어가 줄 거라면서?

“할 일, 못할 일 다 했던 여자는 따로 있지.”

그때 들려온 리히튼의 대답에 사위가 다시 고요해졌다. …아. 나는 지극한 혼란을 느끼며 두 눈을 멍하니 깜짝였다. 내 표정 변화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뜯어 살피던 리히튼이 뻔뻔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내 생에 그런 짓을 할 여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오직 한 명밖에 없어. 수잔 양이 궁금하다면 그 여자의 이름을 알려 주지.”

나는 속으로 커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고개를 내저으며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착각이 아니라면 리히튼은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같지 않은 낯선 웃음도, 수치를 모르며 지껄이는 혀도 내겐 너무나 놀라운 것들이었다.

“각하의 사생활을 캐내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차는 다시 가져다 드릴게요.”

이보다 더 빠를 수 없는 움직임으로 자리를 떴다. 내가 당황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쩐지 그의 입에서 ‘아그레인 캐롤드’라는 이름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생에 그런 짓을 할 여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오직 한 명밖에 없어.’

목이 막히고 얼굴에 열이 몰렸다. 나는 침착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니야, 수잔. 리히튼이 말한 여자는 네가 아닐 수도 있잖아.

‘내가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열이 날 일이다. 오직 나를 위해 열네 번의 시간을 되돌린 남자가, 사랑은 다른 여자랑 한다고?

“수잔!”

그때였다. 누군가 내 곁으로 급하게 뛰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수잔? 미안해요. 내가 도와주었어야했는데….”

솔레르였다.

“걱정하지 마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본래 저리 짓궂으신 분이 아니에요.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리히튼이 그런 성격이 아니란 건 내가 가장 잘 안다.

‘…아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의 성격이 두 달 반 만에 뒤바뀔 수 있는 거였나. 아니면 본래부터 사람을 놀릴 때는 그런 얼굴도 할 줄 알았던 건가. 리히튼의 웃음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그에게선 절대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당신이 수잔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던 걸까요? 수잔의 인상착의를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데….”

그야 내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니까. 심지어는 ‘수잔’은 가명이고 ‘아그레인 캐롤드’가 진명인 것도 알지. 리히튼과의 대화 한 번이 내게 미친 영향은 몹시 컸다. 아직도 얼굴의 열이 식지 않았는데, 리히튼을 생각할 때마다 무거웠던 마음이 느슨하게 풀려 버린 것이다.

“솔레르. 저번에 했던 제안, 아직도 유효한가요? 별관의 하녀로 내가 들어왔으면 한다는 이야기요.”

솔레르가 반색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이죠! 수잔이 와 준다면 남은 시간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들어가면 될까요?”

“오늘 하녀장님께 말씀드릴게요. 각하를 모시는 일이니까 인수인계도 필요하고….”

“인수인계는 필요 없어요.”

잉고르드에서 리히튼의 시중만 몇 달을 들었다. 인수인계 같은 건 내게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설명 정도만 들으면 충분할 거예요. 솔레르의 말대로 남은 삼 주를 더 편하게 보냈으면 좋겠네요.”

내가 당하고만 못 사는 성격이라서. 머릿속에 박힌 리히튼의 웃음기 서린 눈매를 억지로 지워냈다. 나는 다른 하녀에게 대신 정원으로 나가 주길 부탁하기 위해 주방으로 발을 디뎠다.

***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나는 별관으로 재배정되었다. 인수인계는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페사 저택의 사람들이 내 출신을 아는 것도 아니었기에 오전 내내 하녀를 따라 별관을 돌아다녀야 했다.

“나는 여기서 사 년을 일했어. 그런데 너희 같은 뜨내기들 때문에 뒷전이 된다는 게 말이 돼?”

하녀는 십 분에 한 번씩 분에 넘치는 얼굴로 내게 화풀이를 했다.

“귀족들이 그리 쉬운 줄 알아? 얼마나 더럽고 악랄하게 노는데. 너희처럼 예쁘장한 얼굴 하나만 믿고 나댔다가는 단물만 쏙 뜯기고 버려질걸.”

처음에는 상대하는 것도 귀찮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했다.

“아니면 각하의 몸종이라도 되고 싶은 거니? 응? 네 젊음을 무기로?”

한데 십 분 간격이 오 분이 되고, 오 분 간격이 일 분이 되었을 때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솔레르가 내게 함께하자는 제안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여자와는 하루도 함께하기 싫었을 터였다.

“그분이 너를 거들떠보기라도 할까? 어디서 굴러 들어와선….”

“입 닥쳐.”

이제는 참는 것조차도 짜증이 나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습관처럼 옷 안쪽에 지니게 된 작은 나이프를 빼어 들곤 말했다.

“시끄러워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아니면 혀가 뽑혀야 닥칠래?”

하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만 들이키다가 도망쳤다.

당한 대로 갚아야겠다는 마음에 솔레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리히튼에게 당했다’라 표현하기에는 분명한 어폐가 존재했다. 그가 직접적으로 내 이름을 거론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할 일, 못할 일 다 했던 여자는 따로 있다’ 정도로만 언급했을 뿐.

‘그 존재가 나라고 여기는 것도 어찌 보면 자의식 과잉이지.’

그래서 나는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담당하는 구역이 본관에서 별관으로 바뀌었을 뿐, 하녀로서의 명분을 다했다. 어차피 하녀란 주인이 방을 비울 때만 나타나 정리하고 가는 사람이었다. 잉고르드에서 지내던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그의 흔적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물론, 당시처럼 완벽하게 일을 끝내지는 않았다. 무언가 억울했다. 그렇다고 해서 구정물로 침구를 세탁한다거나, 일부러 셔츠를 뒤집은 채 걸어 둔 것은 아니었다. 리히튼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예민하고 까다로운 남자다. 나는 미세한 부분에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었다. 책상 위의 만년필을 거꾸로 놓아두기. 책장의 책을 위아래 거꾸로 꽂아 두기. 테이블과 의자 사이의 간격을 반 뼘 더 넓게 두기. …음.

“너무 유치한가.”

알아도 그만 둘 마음은 없었다. 그만 둘 필요도 없어 보였다. 벌써 이틀이 흘렀지만, 리히튼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 며칠 동안 리히튼의 얼굴 한 번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의 유치한 짓거리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를 더 건드려 볼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장식장을 올려다봤다. 리히튼은 장식장의 위에서 두 번째 칸에 늘 독이 든 유리병이나 술잔을 두곤 했다. 페사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칸의 물건을 세 번째 칸으로 옮길까?’

까치발을 들고 깨끗하게 장식된 술잔 쪽으로 팔을 뻗었다. 본래는 나무 사다리를 가져와야 하지만, 장난치는 일로 사다리까지 가져오려니 양심이 찔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닿을락 말락하는 손끝을 힘겹게 밀어 넣는 순간. 내 몸이 돌연 날아오르듯 허공으로 솟았다.

“아?”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 정도로 시야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조심스레 시선을 내리니, 내 허리를 휘감은 맨 팔뚝이 보였다. 접어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팔뚝을 산맥처럼 가로지르는 핏줄이 나타났다. 흰 피부였으나, 골격은 웬만한 남자보다 훨씬 단단하고 두터웠다. 내 허리를 한 팔로 감아 들 정도니 힘은 말할 것도 없었다.

“뭘 그리 넋 빼고 있는 거지? 잔을 꺼내려면 어서 꺼내.”

그의 핀잔에 나도 모르게 와인 잔을 한 개 집어 들었다. 남자는 김빠진 음성으로 등 뒤에서 채근했다.

“겨우 하나? 어느 세월에 다 청소하려고?”

처음부터 청소할 마음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들고 있던 잔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남자의 팔 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꼼짝도 안 했고, 결국 상체를 돌려 나를 받친 너른 어깨를 밀어내야 했다.

“각하. 됐으니 이만….”

이만 내려놔 주세요, 라고 말하려 했는데. 막상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세 달 가까이가 흘렀어도 절대 잊지 못했던 눈이었다. 서릿바람처럼 차가운 청회색 눈동자. 하지만 지금은 예전만큼 서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오히려 남자의 양쪽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청소하려는 게 아니었나?”

“아니에요. 내려 주세요.”

“아니면. 또 그 얌체 같은 짓거리를 하려고?”

물론 그럴 의도였지! 내려가기 위해 몸을 흔들자 남자, 리히튼은 내 허리를 더 당하게 옥죄었다. 나는 홧김에 그의 어깨를 세게 깨물었다.

“읏.”

앓는 소리가 들렸으나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리히튼은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나를 내려놨다. 그리고 내게 물린 어깨를 가볍게 뒤로 돌렸다.

“설마 물기까지 할 줄은. 하기야 내가 너를 개로 키우기는 했지.”

어이가 없었다.

“함부로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세요.”

“함부로?”

“저는 페사의 하녀이지, 리히튼 각하께 바쳐진 여자가 아닙니다.”

하. 보란 듯이 코웃음 친 리히튼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등 뒤는 이미 장식장으로 가로막힌 상태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 여자로 만들면 되겠군.”

그는 내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한쪽 팔만 뻗어 활짝 열린 위쪽 장식장의 유리문을 닫았다.

“하녀에서 공작 부인이라니, 다들 뒤로 넘어갈 만한 신분 상승이야. 적어도 그대에게 손해는 아니겠어. 그렇지?”

어린아이를 달래는 목소리도 이보다 더 달콤할 순 없을 터였다. 타이르듯 말하는 그의 음성은 따스한 우유에 녹인 크림과 초콜릿처럼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무감각하거나 냉혹하거나, 혹은 울 것처럼 절절하던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의 그는 한때 연회에서 보았던 것처럼, 여유를 잃지 않고 분위기를 주도해 가는 남자였다. 심지어는 능글맞기까지 했다. 내가 알던 리히튼은 이러지 않았는데. 나는 되레 당황해 바보처럼 굴어야 했다.

“지금 저 놀리세요?”

“누가, 내가? 나는 농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연회장에서야 눈치껏 받아 주기는 해도.”

리히튼은 자연스레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내쳤다. 잘 내쳐지지도 않아서 뺨 때리듯 손등을 때리고 밀어내야 했다. 그럼에도 리히튼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여유롭기만 했다. 심지어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손을 뻗기에, 그 손을 쳐내며 경고했다.

“죄송하지만 공작 부인이라는 신분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다른 사람을 구해 보시죠. 제 몸에 손도 그만 대시고요.”

“어째서?”

어째서냐고?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냥 거절을 위한 거절이었으니까. 한데 우습게도 리히튼은 퍽 진지해진 표정으로 나를 설득했다.

“잉고르드 부인이라는 자리는 취향의 문제가 아닐 텐데. 나는 그렌페르크의 황제가 그대의 발등에 입 맞추게 할 수 있다.”

헛소리하지 말라는 반박은 나오지 못했다.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네게 무엇이든 바칠 수 있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음식,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성과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정원….”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해서 입 안이 바짝 메마르고 목이 탔다. 그에게 장난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내게 구애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래서 진심으로 묻고 싶어졌다.

“페사에는 왜 온 거야?”

내 정면에서 살짝 몸을 튼 그가 장식장에 어깨를 기댔다.

“설마 우연히 머물게 된 거라 말하지는 않겠지, 리히튼.”

그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장 입을 열지 않고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고요한 얼굴은 내가 알고 있던 그 리히튼 잉고르드가 맞았다. 한참 만에 입을 연 리히튼의 목소리는 지독한 몸살을 앓은 것처럼 무겁게 쉬어 있었다.

“네가 죽지 않고 황성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 있으면 된다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그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차고 넘쳤어.”

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리히튼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고, 그 얼굴이 내게는 넋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목적을 상실했다. 네가 빌힐름을 죽이고 매번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유를 확실히 깨달은 거야. 한때 내가 상상했던 그 감정과는 너무나도 다르더군. 기쁘지만 허망했고, 내 존재의 의의가 사라진 기분을 실감했다.”

리히튼의 모든 말이, 내게는 태산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무덤덤한 음성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진심이 녹아들어 있었다. 나는 그러한 사실이 서글펐다. 심장이 꽉 짓눌린 것처럼 괴로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리히튼이, 다른 감정도 아닌 그 허망함을 느꼈다는 사실이…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보다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계속 살아가야 했어. 열흘 같은 하루를 버티고, 이 년 같은 일주일을 버텨야했지.”

왜냐는 물음 대신 용기 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독에 중독되었을 적, 파충류의 피부처럼 차갑고 서늘한 감촉이 아니었다. 그에게선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손바닥 아래로 맞닿은 살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리히튼은 숨을 뱉어 내듯 읊조렸다.

“네가 돌아올까 봐.”

그제야 흐릿한 호수의 안개 같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커다란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가여운 리히튼.

“네가 돌아올까 봐, 아그레인. 혹시 모를 그 순간이 찾아올까 봐 나는….”

아아, 나의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리히튼.

“나는 자꾸 욕심이 난 거야.”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그와 나는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숨결이 맞닿은 입술은 더없이 황홀했다. 내 몸을 감싸는 리히튼의 몸짓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마치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은 더듬듯 내 어깨를 타고 내려가 허리와 등을 끌어안았다. 리히튼의 손이 내 턱을 쥐고 벌리자 우리의 숨이 더 깊고 농밀하게 뒤섞였다. 내 전부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비틀어 입 안을 헤집었다.

나는 호흡하기도 벅차 그에게 끌려다니기만 했다. 내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손짓과 달리, 그의 뜨거운 입술은 내 입가를 맴돌다가 살을 깨물고 목선을 따라 흘렀다. 눈앞이 어지럽고 이성은 열에 녹아내려 뭉근해졌다. 이대로 어두운 밤이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꺼지지 않으면 이대로 모든 걸 놓아 버릴 것만 같아서. 내게 고정된 리히튼의 시선을 피해 불이 꺼진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가장 어둡고, 뜨거운 밤의 아래로.

***

이튿날에는 이른 오전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잎사귀를 구르는 물방울처럼 보슬보슬 내리던 봄비는 낮 즈음 되어서 굵어지기 시작했다. 별관에는 사람이라곤 나를 비롯한 고용인 셋과 약사인 솔레르, 그리고 리히튼이 전부였기에 비가 내리면 건물 안은 더더욱 조용해졌다. 조용하다 못해 음산해, 어디선가 유령이 나타날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오늘 낮부터 리히튼이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터라 더더욱 그러했다.

“저, 친구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에요.”

그리 말하는 솔레르의 뺨이 장미처럼 붉었다. 평소의 차분한 인상이 술에 취하자마자 나사 풀리듯 풀려 헤실헤실 웃기 바쁘다.

“그나마 친구들이랑도 잘 안 마시는데….”

“왜요?”

“으음. 그야 시,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친우 사이에 술 먹고 일어나는 실수가 무슨 대수일까.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마른세수를 한 솔레르가 이제껏 말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저는 속으로 항상 친구들을 험담하거든요. 술을 마시고 이성을 놓으면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있어요.”

“어떤 험담인데요?”

“시, 심해요. 네 얼굴은 돼지 밥으로 쓰지도 못한다, 그 얼굴로 거울 보면 깨진다….”

독설인 건 확실한데, 내가 생각한 독설과는 방향이 조금 다르기는 했다. 안 지 얼마 안 된 내게 속마음을 밝힌 것도 신기했지만, 다름 아닌 솔레르가 저런 생각을 한다는 게 더 놀라웠다. 솔레르는 누가 보더라도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예의 바른 아가씨였다. 물론 사람의 겉과 속이 다를 순 있겠지만, 그녀에게선 그런 느낌을 조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 친구들이 당신을 따돌리나요?”

“예에? 아니요.”

황급히 고개를 저은 솔레르는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 아니. 따돌리는 걸 수도 있어요. 절 아니꼽게 여기거든요. 정확히는 제 얼굴을요.”

이후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이 저를 어떤 방식으로 괴롭히는지 구구절절 늘어놨다. 친구들이 가만히 있던 자신을 남자 공포증을 가진 여자로 몰았다는 이야기. 남자와 대화하면 거짓말쟁이로 몰아간다는 이야기. 잘생긴 남자의 시선을 받으면 얼굴은 다가 아니라며 아닌 척 비꼰다는 이야기 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녀의 삶은 시골에서 태어난 미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수잔을 이 별관으로 꼬신 것도… 하녀 중 한 명이 저를 괴롭혔기 때문이에요. 폭력이란 게 꼭 육체적인 폭력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 여자의 폭언을 견딜 수 없었어요.”

“그런 것 같았어요.”

“아, 알고 있었군요? 미, 미안해요. 이용해서 미안해요, 수잔….”

그런 건 이용했다고 말하기도 뭐한데. 가벼운 술자리는 금세 솔레르를 위로하는 자리로 뒤바뀌었다. 내내 서러움을 토로하던 솔레르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했는지 그대로 식탁에 엎어져 잠들었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듣는 자리는 처음이라, 이상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솔레르가 잠들자 안 그래도 고요했던 저택은 더 고요해졌다. 나는 그녀를 방에 데려다 놓은 후 주방으로 돌아왔다. 남은 술과 마신 잔을 정리하던 와중에 누군가 거칠게 뒷문을 두들겼다.

쾅쾅!

워낙 급한 두들김이었기에 설거지도 멈추고 뛰듯이 걸어가 문을 열었다. 빗속을 뚫고 찾아온 방문자는….

촤악!

“어머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빗물에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를 하고 말았네!”

처음으로 느껴진 건 역한 냄새였다. 그 다음에는 고의가 다분하게 느껴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를 참고 시야를 가리는 물을 닦아냈다. 걸레를 빤 물이구나. 우비를 입고 나타난 여자들은 본관의 하녀와, 내가 별관에 배치되면서 본관으로 넘어가게 된 하녀, 두 명이었다. 그들의 손에서 커다란 나무통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내게 쏟아낸 구정물이 저 통 안에 가득 들어 있었겠지.

“누군지는 몰라도 굴러온 돌들이 참 살판났다. 그 구정물, 며칠 묵혀 둔 거야. 냄새가 배기 전에 어서 씻는 게 좋을걸? 비도 내리는데 아예 빗물로 씻지 그래?”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쓰레기 냄새가 나는 미인은 각하께서도 혐오하실걸?”

“아! 내일 오전 일과를 마치면 본관으로 찾아와 일을 돕도록 해. 요즘 일손이 너어무 부족해서 네가 도와야 할 것 같거든. 무시하면 오늘 같은 꼴을 또 보게 될 줄 알아.”

하녀들은 가소롭다는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구정물을 맞은 그 자리 그대로 서서 홀딱 젖은 앞치마를 벗었다. 문 바깥으로 앞치마를 꼬아 짜니, 회색 구정물이 줄줄 떨어졌다.

“으음.”

그래, 바보처럼 잊고 있었네. 이런 작은 시골일수록 고용인들의 텃세가 심하다는 걸.

‘내일 오전 일과가 끝난 후라.’

아무래도 이 저택에서 조용하게 지내는 건 오늘로 끝일 것 같았다.

“수잔 양.”

앞치마를 털며 내일 어떻게 일을 치를지 고민하던 때였다. 커다란 신장이 나를 위협적으로 가로막아 섰다. 처음에는 산적인 줄 알고 긴장했지만, 남자는 다름 아닌 내가 이 동네에 정착하는 것을 도왔던 페사 가문의 일원, 닐슨이었다.

“괜찮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저택의 하녀들과 문제가 생겼나 보오.”

그는 고작 몇 달 지내지도 않은 페사에서 내가 가장 신뢰하고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대충 둘러댔다.

“흔한 직장 내 불화죠. 금방 해결될 거예요.”

“누구 한 명이 그만두지 않는 이상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 않네만.”

“이런 건 어린 애 장난에 불과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적어도 그들은 내 머리를 잘라서 유리병에 보관한다거나, 말을 총으로 쏴 안장에서 떨어뜨리진 않으니까.

“닐슨 씨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그를 들이기 위해 반쯤 닫아 놨던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닐슨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닐슨은 곧 우비 아래로 무언가 뒤적이더니 내게 건넸다.

“받으시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 두 개였다. 둘 다 앙증맞게 포장되어 있었다.

“푸른 리본으로 묶은 상자는 솔레르 양의 것이고, 붉은 리본으로 묶은 상자는 그대의 것이오.”

“이게 웬 물건인가요?”

솔레르의 것은 옆구리에 끼고, 내 것이라던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당신들은 억지로 이 저택에 온 것이잖소. 약소하게나마 선물을…. 아니, 면전에서 뜯는 게 어디 있소?”

안에 든 것은 작은 오르골이었다. 황성에서 보던 것들에 비하면 그리 섬세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꽤 마음에 드는 오르골이었다.

“예쁘네요. 고마워요.”

나의 감사 인사에 닐슨이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잠시 주춤하던 그는 품 안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더 꺼내어 내 품에 올려놨다.

“이것도 솔레르와 나의 선물인가요?”

“아니. …그건 당신 거요.”

어흠. 고개를 돌린 닐슨이 헛기침을 했다.

“내 용건은 이것으로 끝이오. 감기에 걸리기 전에 어서 씻는 게 좋겠소. 그렇다고 해서 당신에게서 역한 내가 난다는 건 아니고, 오히려 늘 좋은 향이… 크흠! 이게 아니지. 좋은 밤 보내길.”

그는 급한 일이라도 떠오른 양, 바삐 두 다리를 움직여 진흙탕을 가로질렀다. 커다란 등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닐슨에게서 받은 상자를 방 안에 옮겼다. 종이봉투 안의 물건은….

‘급하지도 않은데 다음에 확인하자.’

몇 분이나 흘렀다고 구정물을 맞은 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을 끓이려면 장작을 가져와야 하고, 끓이는 데만 적잖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차라리 그것들이 말한 것처럼 빗물로 씻을까.’

오늘은 왜인지 어떤 일에도 의욕이 일지 않았다. 왜일까. 리히튼이 방 안에서 꼼짝도 안 하기 때문일까. 몸을 일으켜 저택 밖으로 나가 빗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올해 추위가 유독 미적지근했던 탓일까? 떨어져 내리는 봄비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올려 묶은 머리를 풀고 멍하니 나무 벤치에 앉았다.

‘누가 보면 미친년인줄 알겠어.’

문제는 옷이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을 것 같아 의복을 벗고 빗물에 몸을 닦았다. 그리고 몸이 으슬으슬해질 때쯤 몸을 일으켰다. 이유는 몰라도 빗속을 걷는 느낌이 무척이나 익숙하다. 그럴 만도 했다. 잉고르드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비가….

‘아.’

잉고르드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그리고 비는 리히튼의 광증을, 기억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과거의 편린을 불러낸다.

‘이런.’

비 때문이었어. 리히튼은 비 때문에 방에 갇혀 있던 거야.

나는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뒤늦게 그의 고통을 알아차린 내가 이토록 머저리처럼 느껴질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문 앞에 섰을 땐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광증을 겪는다고 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나? 리히튼이 겪는 광증의 원인은 바로 나였다. 오히려 내가 곁에 있는 게 그에게 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둘 순 없잖아.’

리히튼은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나를 기다리다가 더는 참지 못해 페사까지 온 것이다. 나는 그런 리히튼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외면할 수 없었다.

똑똑.

아무리 노크해도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암막이 창문을 전부 가리고 있는 탓에 방 안은 바깥보다 더 어두웠다. 나는 등에 불을 붙이고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리히튼은 침대 위에서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괜찮아, 안 죽었어.’

식은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기가 이마에서 떨어졌다. 나는 한참 동안 리히튼의 안색을 바라보다가, 그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후 소파에 앉았다. 차마 이 방을 나갈 수 없었다.

‘이제야 찾았군요. 당신처럼 허약한 여자가 가을비를 맞는 게 죽자는 행위란 걸 모르는 겁니까?’

‘아니, 빌힐름밖에 없지.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당신에게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잉고르드의 숲에서 리히튼을 발견했던 날도 이른 시각은 아니었다. 그러니 리히튼의 광증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내가 곁을 지켜야 해.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전신을 에워싸고 있던 습기는 씻은 듯 사라진 후였다. 비에 젖었던 몸이 바짝 말라 보송보송해져 있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도 내가 누운 곳이 리히튼의 침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리히튼은 내가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꼴을 못 보는 남자였으니까. 몸이 다소 무겁기는 해도, 우려했던 몸살감기는 걸리지 않은 듯했다. 다만 이불에 감싸인 내 꼴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맨 어깨와 가슴 윗부분이 훤히 드러나는 슬립 드레스에, 엉망으로 풀어 헤쳐진 머리칼. 심지어는 홀로 침대 위에 널브러진 모습까지.

“…신분 높은 귀족과 그렇고 그런 관계인 하녀.”

누군가에게 이 상황을 들킨다면, 명백하게 그런 소문이 돌 것이다. 뭐, 이제와 그런 소문이 페사에 돈 들 어쩌겠는가. 적어도 헛소문은 아닐 테니까. 멍하니 천장의 붉은 캐노피를 올려다 볼 때였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나를 내려다보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이 방에서 리히튼의 침대와 그 침대에 누운 여자를 구경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왜 자꾸 보는 거야?”

“잠도 덜 깬 채 재밌는 소리를 하기에.”

리히튼이 침대에 앉자, 내 몸이 파도 위에 놓인 듯 작게 흔들렸다. 그는 어제처럼 편한 차림이었다. 맨 위 단추를 풀고 소매를 접은 하얀 셔츠 차림. 잉고르드에서는 간간히 봤다고 해도 황성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곳에선 빈틈없는 완벽한 외양이 곧 방패이기도 했으니까.

“누구라도 그렇게 여길 상황 아니야? 물론 내가 그런 의도로 이 방에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건 누군가 봐줬으면 한다는 의미인가?”

“어차피 볼 사람도 없어. 이 낡은 저택에 사람이라곤 고작 다섯에 불과한데.”

눈을 감았다. 마음이 편안했다. 노란 지붕 집에서 홀로 식사하고 작은 텃밭을 가꾸었던 날보다 더 평온했다. 이대로 눈을 뜨면 모두 사라질 신기루처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리히튼이 똑같은 자세 그대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보느냐는 물음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광기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거야?”

그제야 리히튼은 고개를 돌려 몸을 일으켰다.

“그것 때문에 이곳에 있었군.”

내가 새벽녘에 머물렀던 소파에 자리를 잡은 그가 내게 손짓했다.

“이리로 와. …아니지.”

앉기 무섭게 다시 일어선 리히튼이, 침구에 둘둘 쌓인 내 몸을 안아 들었다.

“네 차림은 불순해.”

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변명 같은 대답을 했다.

“어쩔 수 없었어. 옷은 물에 젖었는데….”

그것 때문에 리히튼이 겪고 있을 외롭고 추운 긴 밤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나를 만나러 오는 게 더 중요했다는 뜻이겠지. 황송한 일이야.”

리히튼은 나를 소파에 앉혔다. 테이블에는 뒤집힌 책과 이 인분으로 보이는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그는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었던 듯했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단 건…,’

하녀가 올라왔었단 의미다. 이는 곧 내가 리히튼의 방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이 페사 저택에 일파만파 퍼질 거란 걸 뜻하기도 했다. 아마 리히튼은 이 인분의 아침 식사만 중요할 뿐, 내가 어떤 꼴로 누워 있는지는 상관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어쩌면 보란 듯이 내버려뒀을 수도. 생각하니 괘씸했다.

식사하기 위해선 결국 몸에 두르고 있던 침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도저도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내 차림이 속옷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자리에서 팔에 턱을 괴고 있던 리히튼이 스쳐지나가듯 말했다.

“어차피 다 본 사이에.”

눈동자만 굴려 그를 노려봤다. 리히튼은 뻔뻔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엊그제 밤.”

“시끄러워.”

“미치도록 예뻤는데.”

어디까지 말하는지 두고 볼 심정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표정을 보니 왼쪽 뺨이 따갑지도 않은 모양이다. 리히튼은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 놓은 책을 집어 들곤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가 자리를 비켜 주고 나서야 침구를 치우고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정작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는 걸 상기하고 다시 물었다.

“…나아질 방법은 없는 거야?”

무엇에 관한 물음인지는 덧붙이지 않아도 알겠지. 내가 진정으로 궁금한 건 그의 광기가 아닌, 광기를 진정시킬 방도였다. 비가 내리면, 리히튼은 과거의 기억 속에 갇힌다. 왜 하필 비가 내리는 날일까? 떨어지는 비의 어떤 풍경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걸까?

“네가 옆에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아.”

무슨 뜻인가 싶어 그를 쳐다봤다. 리히튼은 침대 머리에 기대어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 증거로 어젯밤은 꽤 괜찮았지.”

“어떻게 괜찮았다는 건데?”

“적어도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정신을 잃고 돌아다니진 않았으니까.”

리히튼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듣는 나는 아니었다. 차를 마시는데도 목이 탔다. 그날의 장면이 눈앞에 되살아났다. 잉고르드에서 함께 비를 맞았던 그날이.

“또 당장이라도 놈들을 죽이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지도 않았지.”

몸을 일으켜서, 이번에는 내가 리히튼에게로 갔다. 그의 옆에 침구를 덮고 눕듯이 앉았다. 너른 어깨에 기대니 금세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네가 옆에 있다면 나는 아무런 문제없어, 아그레인. 네가 내 옆에만 있다면.”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음으로서 더 고통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리히튼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그 생각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내게 극도의 안도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리히튼이 내 옆에만 있다면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네 말은 모순적이야, 리히튼. 그렇다면 어제는 왜 하루 종일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건데?”

“이곳을 나가면 엊그제의 일이 모두 꿈으로 바뀔 것 같았거든.”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그가 책을 덮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네가 이 저택에 있고,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입에 입 맞추고, 새벽이 지나도록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모두 허상이 될까 싶었지.”

“너는 가끔 어린아이보다 겁이 많아.”

리히튼이 픽 웃고는 나를 바라봤다. 감히 깊이를 예측할 수 없는, 만감이 서린 시선이었다. 그의 애정은 순수하지 않다. 리히튼은 잉고르드에서 이미 나를 향한 강렬한 증오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의 집착은 나를 위해 소모한 시간과 감정에 대한 보상 의식일 수도 있었다. 그 갖가지 경험과 감정이 지금의 리히튼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의 눈썹과 콧등, 뺨을 배회하던 시선의 끝이 입술로 향했다.

“네 말이 옳아, 아그레인. 나는 겁도 많고 인내심도 없어. 네가 떠나고 처음에 며칠간은 멀쩡하게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네가 내게 돌아오는 그날까지 기다릴 수 있을 거라 여겼어.”

부드러운 손끝이 내 턱을 가만히 쓸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도저히 내 욕심을 이길 수 없더군. 널 가지고 취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숨통이 트일 것 같았지….”

리히튼이 천천히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와 입술을 포갰다. 그는 이제 내 몸을 다루는 데 거침이 없었다. 한쪽 손으로는 내 허리를 거칠게 끌어 당겼고, 남은 손으로는 뒷머리를 감쌌다. 내 허리에 머무르는 그의 손길이 간지러우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내가 벅찬 숨에 몸을 뗄 때마다 그는 더 진득이 붙어왔다. 리히튼은 끈질기게 내 입술에 매달렸다. 유린당한 입술이 아릴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엊그제 밤처럼 일을 치룰 거 같아 겨우겨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리히튼은 몹시 아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그 욕심을 이룬 지금은 어때? 미친 듯이 좋아?”

리히튼이 내 머리를 다시 끌어 당겼다.

“한 번 더 해 봐야 알 것 같군.”

그가 말한 ‘한 번 더’의 주체가 입맞춤인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입 안으로 뜨거운 숨이 감겨오는 동시에 슬립 드레스가 천천히 밀려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리히튼은 내 다리를 천천히 매만지고 쓸었다.

“아.”

머리에 열꽃이 핀 것처럼 어지러웠다. 숨소리가 거세졌다. 그 소리를 제외하곤 사그락거리는 천의 소음과 살결이 부딪히는 낯부끄러운 소리가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이틀 전 밤의 기억을 떠올린 내가 몸을 떨 때마다, 리히튼의 행동은 더더욱 과감해졌다. 의도가 명백한 손길로 내 허리와, 다리를 느릿하게 눌렀다.

“네 향이 나를 미치게 해.”

그 역시 흥분을 이기기 힘든지 수십 번 내 귀와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흔적이 남겨질 때마다 전신에 힘이 빠졌다.

똑똑.

그때였다. 나는 바짝 굳은 채 반사적으로 리히튼의 몸을 밀어냈다. 누군가 급작스레 방문을 두들긴 것이다.

“각하. 아가씨가 각하를 뵈러 왔습니다.”

리히튼을 찾아온 건 아가씨의 방문을 알리러 온 시종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리히튼은 그런 나의 어깨를 잡아 침대 위로 내리눌렀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따지자면 불안해 할 이유는 없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리히튼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소리쳤다.

“곧 나가지. 십 분만 기다리라고 전해라.”

이윽고 문 앞에 멈춰 있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조용해지기 무섭게 리히튼이 내게 키스했다. 닿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며 내 몸 위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셔츠를 벗으려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짐승이야? 아가씨가 찾아왔다는데 지금 뭐하는 짓이야?”

부끄러움도 모르는 걸까? 리히튼은 괜찮다는 듯 내 뺨을 핥으며, 나의 불안을 다독였다.

“괜찮아, 아그레인. 십 분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 우리 사이에는 충분한 시간이야.”

헛소리 말라는 의미로 그의 가슴팍을 치며 철옹성 같던 두 팔 사이에서 벗어났다. 리히튼은 무언가 한참 아쉬운 표정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그의 손장난에 엉망이 된 차림을 다듬었다. 아래 부분을 빼면 어깨끈을 올리는 걸 제외하곤 다듬을 부분도 없었지만.

“리히튼. 안 나가?”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눈이었다. 뭐하는 거람. 밥그릇을 빼앗긴 개도 아니고.

“한 달이 지나면 잉고르드로 와. 이 빌어먹을 페사에선 일주일도 버겁군.”

리히튼의 다소 쉰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결연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거절하면 큰일이라도 치를 것처럼.

“내가 잉고르드를 왜 가? 가도 캐롤드를 가겠지.”

황성에서 도망치던 그날 밤.

‘그리고 언젠가는… 캐롤드로 돌아와 줘.’

킨이 내게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당시 킨의 표정과 목소리, 몰아치던 겨울바람의 세기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는 어찌 되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킨의 안부를 입에 담았다.

“킨은 어때?”

며칠 전 정원에서 페사 가문의 아가씨가 시 낭송을 하고 있었을 때, 킨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리히튼과 비비안느 덕분이라는 것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리히튼은 접어 두었던 소매를 느리게 풀며 대답했다.

“캐롤드 가문의 재건에 남은 일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바친다는 건….”

“킨은 검은매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반납하고 캐롤드로 돌아갔다. 나 역시 이제 캐롤드 후작이 될 남자를 내 기사단의 검으로 휘두를 순 없지.”

그랬구나. 킨이 캐롤드로 돌아갔구나.

“본관은 불에 타 재가 되었지만,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쓸 만한 저택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더군.”

리히튼이 말하는 저택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저택은 별장이었다. 같은 캐롤드 영지에 무슨 별장인가 싶겠지만, 대양처럼 거대한 호수 옆에 그림처럼 자리한 저택이라 한여름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그곳으로 피서를 가곤 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모든 것이 느리게나마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황성에서 도망친 내가 이런 시골에 틀어박혀 있을 동안, 킨은 무너진 가문과 영지를 일으키는 데 힘쓰고 있던 것이다.

아버지와 가신들이 목숨을 잃은 그 끔찍하고 그리운 땅에서.

“킨과는 어떻게 만났던 거야?”

이런 식의 질문은 리히튼에게 너무 두루뭉술하려나.

“그러니까… 나는 지금 가장 첫 만남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야.”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채운 리히튼이 소파 위에 가지런히 걸쳐져 있던 베스트를 주워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황성에서 나갈 수 있는 힘과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 때, 킨 캐롤드가 나를 찾아왔지. 그것도 잉고르드 저로 직접. 사라진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더군. 『태양이 흐르는 강』의 서약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어.”

베스트를 걸치고 넥타이까지 걸치자, 그는 완벽한 잉고르드 공작이 되었다. 뒤로 대강 넘긴 백금발의 머리칼조차 본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킨은 캐롤드 가문의 명예를 되찾고, 레그윈 가문을 무너뜨리는 그날까지 내게 복종하기로 약속했다. 더불어 아그레인 캐롤드가 내 앞길을 가로막게 된다 하더라도 그 아이의 목숨만은 살리겠다는 약속 또한.”

“그 약속이 아니면 날 죽일 수도 있었겠네.”

꽉 맨 넥타이를 살짝 풀며 다가온 리히튼이 짧은 미소와 함께 내 귀를 매만졌다.

“널 죽일 수 없으니 그의 복종을 받아들인 거지.”

안다. 알면서도 그냥 물어본 거였다.

“비비안느는?”

“빌힐름 황자가 자리를 비운 동안 황실을 장악했다. 그가 시체와도 다름없었던 시기에 황위 후계자 자리를 찬탈했지. 그녀는 곧 황위에 오를 거야.”

빌힐름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 표현에 내포된 진실은 짧지만 확실했다. 나는 리히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뜻을 다른 이도 아닌 그의 입으로 말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리히튼, 이제 나가 봐야 하지 않아? 벌써 십 분이 흐른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아가씨를 만나러 나가면 조용히 방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리히튼은 묵묵히 내 귀를 매만지기만 했지, 나갈 마음은 전혀 없어 보였다.

“질문은 그것으로 끝인가?”

“그래.”

리히튼은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그레인, 네가 묻지 않으니 내가 말하지.”

그리고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빌힐름은 죽지 않았다. 시간이 다소 걸리기는 했지만 독에 녹았던 내장은 모두 회복되었어.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그 역시 죽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황자 빌힐름이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왔단 소식은 그렌페르크 제국민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이야기였다. 사경을 헤매던 빌힐름은 서서히 회복되어 결국 정신을 찾았다. 동복누이인 비비안느가 이미 황위를 찬탈한 후였기에, 어쩌면 빌힐름 입장에선 죽는 것보다 못한 소생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온전히 빌힐름을 보는 제삼의 시선에 불과했다.

“너는 다시 그를 죽이러 갈 건가?”

“나는….”

처음에는 두려웠다. 정신을 차린 빌힐름이 내게 복수하러 올까 봐. 나에게서 이 신기루 같은 평화를 빼앗으러 올까 봐. 그 다음에는 화가 났다. 그의 목숨을 제대로 끊어 내지 못한 나 자신에게. 그리고 지금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 거야, 아그레인.”

귀를 쓸던 손이 내 턱을 거세게 잡아 끌어올렸다. 리히튼은 눈 한 번을 깜빡하지 않은 채 나를 응시했다.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뜨겁게 끓는 시선이었다.

“너는 나를 선택했어. 나와 몸을 섞고, 내 것이 되었지. 나는 이제 너를 빌힐름에게 양보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차라리 전부 죽여 버리고 말지언정.”

리히튼이 내게 명령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내게 명령해. 빌힐름을 죽이라고.”

나는 불복했다.

“빌힐름을 죽이는 건 나야, 리히튼.”

찰나의 순간, 리히튼은 마치 무너지는 듯했다. 그는 마치 가시밭 위를 걷는 것 같았다. 피를 철철 흘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괴로운 얼굴을 하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라, 리히튼. 예전처럼 빌힐름의 존재가 내 삶의 이유인 건 아니야. 나는….”

나는 네가 더 소중해. 나는 너를 갈구해. 아마 그게 맞는 것 같아. 네가 나를 염원할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만족감이 피어나. 네가 나를 포기하지 못할 때마다 두 팔 가득히 끌어안고 싶어. 빌힐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느낀 증오보다, 리히튼이 페사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느낀 비애가 더 크고 애달팠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만하면, 리히튼이 나를 기다려 온 시간들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빌힐름을 향한 증오가 눈 녹듯 녹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만 내게는 그 증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겼다. 바로 리히튼이. 그는 느리게 허리를 굽혀 내 어깨를 껴안았다. 나는 매달리듯 리히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그레인, 너를 사랑할수록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오히려 더 괴로워져.”

알아. 그래도 나를 놓지 마.

“그러니까 너는 반드시 나를 책임져야 해….”

리히튼의 애원은 족쇄가 되어 나의 팔과 다리를 감았다.

***

내 방으로 돌아가 다시 환복하고 주방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고용인이라곤 고작 세 명에 불과한 주방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뀜을 느꼈다. 리히튼의 아침을 가져온 하녀가 방에 있는 나를 봤다고 했으니, 마땅한 변화였다.

미혼의 귀족이 고용인이나 기사와 사통하는 것은 만연한 일이다. 리히튼도 아직 혼인 전이지 않은가? 나 역시 비록 지금이야 하녀로 지내고 있으나 반역죄라는 불명예를 벗어난 귀족 자제니 꿀릴 것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왜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 장장 열네 번의 과거를 반복하면서 구애해 온 건 다름 아닌 리히튼 잉고르드인데.

‘트리비아체에서부터 하녀 일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이러다가는 진짜 하녀가 되어 버리겠어.’

종이 울리고, 시종이 리히튼과 아가씨의 시중을 들기 위해 주방을 나갔다. 하녀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수잔은 인생 펴서 좋겠어. 맞아, 너처럼 기도 세고 남 눈치 안 보는 애들이 보통 나이 먹고도 고생을 안 하더구나. 네 덕분에 무료하기만 한 페사 생활에 조금 활기가 돋네. 질투에 미쳐 눈이 돌아간 것들이 얼마나 우스운지.”

리히튼의 침대 위에서 잠든 나를 볼 사람은 저 하녀밖에 없었다. 나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대답했다.

“그걸 굳이 또 소문내셨나 봐요.”

“나를 탓하게? 그리 대놓고 연애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소문나게 되어 있어. 또 각하께서도 딱히 숨기실 마음이 없어 뵈던데.”

하녀는 담뱃재를 털곤 주방을 나갔다. 나는 뻔뻔한 낯으로 하녀를 맞이했을 리히튼을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이윽고 솔레르가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잔, 혹시 예전에 하녀로 일했다던 곳이….”

하지만 그녀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되어서 입을 닫았다. 나는 그런 솔레르에게 되물었다.

“예전에 하녀로 일했던 곳이 잉고르드냐고요?”

“아, 네, 네….”

“왜 묻다 말아요?”

“수잔이 기분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요.”

공부만 한 아가씨치고는 눈치가 빠르네. 나는 그녀의 잔에도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맞군요?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각하께서 수잔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던 게 떠올라서요.”

리히튼이 꼬치꼬치 캐물어 내 이름까지 밝히게 됐다던 그날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저는… 이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각하께서 제게 관심이 있으신 줄 알고….”

솔레르가 얼굴을 붉히며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그래서 혼자 쓸데없는 망상도 많이 했거든요. 계속 각하를 살피고, 자꾸 말 걸려고 하고…. 한데 각하를 살피면 살필수록 그분의 시선이 늘 수잔을 향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솔레르는 말하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리고 제게 종종 수잔의 불면증은 나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때 확신했어요. 각하께서 수잔을 마음에 두셨구나, 하고.”

고용인은 자리에 없는 듯 행동해야 했다. 따라서 하녀가 고용주와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기껏해야 차와 간식을 나르는 때가 전부였으니까. 그러니 솔레르의 말은, 내가 차를 나르면서 아닌 척 사각지대로 숨어들 때, 리히튼은 대놓고 나를 살폈다는 의미였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힘든 선택은 아니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수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잡일에 거칠어진 손톱만 조용히 매만졌다. 솔레르에게서 나와 리히튼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리히튼이 나를 마음에 둔 것처럼 보였구나. 마치 연애하는 것처럼, 몰래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던 거야. 그러한 사실이 나를 미치도록 낯부끄럽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나와 리히튼의 관계를 지켜보며 조언하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기도 했다.

정말로 그와 내가 연애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솔레르. 그런 말은….”

“거,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의도치 않게 길어지는 정적이 느껴졌다. 눈치가 보였던 것일까? 솔레르가 분위기 전환이라도 하듯,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본관에서 사람이 왔다 갔어요. 수잔이 본관의 일을 돕기로 해 놓고 오지 않았다던데요?”

퍼뜩 떠오르는 두 개의 멍청한 얼굴이 있었다. 굳이 비까지 뚫고 찾아와 구정물을 붓고 갔던 하녀들의 얼굴이었다.

“맞아, 그런 약속도 있었네요.”

마침 잘 됐다 싶어, 몸을 일으키고 주방 안쪽 창고로 향했다. 나는 오래된 유리잔을 집어 양철통에 든 양잿물을 한 컵 떴다. 컵을 든 채 본관으로 향하기 직전, 뒷문을 열며 솔레르에게 물었다.

“솔레르. 혹시 당한 만큼 갚는 편이에요?”

솔레르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아, 아닌 것 같은데요.”

“본인에 관한 대답이면서 ‘같은데요.’는 뭐예요?”

짧은 고민 끝에, 솔레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늘 속으로만 삭혀 왔어요. 누구에게 복수한다는 건 늘 상상만으로 해 온 일이에요.”

“갚고 싶다는 생각은 해 봤어요?”

“수백, 아니 수천 번은 했죠.”

“그럼 따라와요.”

컵을 들고 본관으로 향했다. 솔레르는 내가 주방을 나선 지 한참이 흐른 후에야 뒤따라왔다. 그 짧은 틈에, 내가 컵 안에 든 양잿물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려는지 추측했던 모양이다.

“수, 수잔. 양잿물은 너무 위험한데… 괜찮을까요?”

“세상에 괜찮은 건 없어요.”

쉬는 시간이었는지 본관의 뒷문 쪽에는 고용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로 거침없이 발을 디뎠다. 다수의 시선이 내게로 모여들었다. 호기심과 적의, 흥미가 한데 모인 시선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찾고 있던 하녀는 진작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견한 즉시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나를 조롱하며 타박하는 목소리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얘.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곤 이제야 일을 도우러 나타나다니. 하! 심지어는, 뭐? 천박한 계집애가 어딜 각하의 침실에서….”

딱히 더 들어 줄 가치가 느껴지지는 않네. 나는 담배를 쥐고 있는 하녀의 손등에 컵을 부었다.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꺄아아악!”

하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담배가 흙 위를 굴렀다.

“아, 아아악!”

일그러진 얼굴이 처참했다. 나는 그녀를 도와서 내게 구정물을 부었던 하녀에게 말했다.

“뭐 해? 이대로 가만히 두면 더 큰 화상을 입을 텐데. 구경할 시간에 물이라도 떠오지 그래?”

또 다른 하녀는 그제야 헐레벌떡 주방으로 들어가 나무통에 물을 떠 왔다. 그에 몸을 웅크리고 울기 바쁘던 하녀가 나무통 안에 손을 넣고 미친 듯이 휘저었다. 한차례 거친 숨을 내쉬던 그녀는 악에 찬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너, 이 정신 나간…!”

“왜, 억울해? 나는 구정물인데 너는 양잿물이라?”

“수, 수잔.”

솔레르가 내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밀어내며 물이 든 나무통을 발로 찼다. 그리고 벌겋게 부은 하녀의 손등을 짓밟았다.

“개 같은 짓도 형평성을 봐가면서 해야 하는 거였나? 한심하기 그지없네.”

“어흑, 흑…! 손, 손을…!”

“그만 둬!”

근처의 하녀가 내 양팔을 붙잡을 기세로 다가왔다. 나는 옷깃 안쪽에 넣어 두었던 나이프를 꺼내, 이 사단을 일으킨 원흉의 턱 아래로 들이 밀었다.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면 네 친구 목에 구멍을 뚫어 버릴 거야. 농담 같지? 궁금하면 확인해 봐도 돼.”

사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내게 손등이 밟힌 채 우는 하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래서 사람은 조용하게 주위 눈치만 보며 살아선 안 된다. 하라는 대로 하는 머저리로 알거든.

“나를 건들려면 양잿물에 코 박을 각오 정도는 하고 건드려. 알았어?”

“흑, 흐윽….”

울음소리와 무거운 적막 외에는 모든 것이 조용했다. 뒷문이 거칠게 열린 것은 그로부터 고작 몇 초가 흐른 뒤였다. 사건의 경위를 전해 들었는지, 달려 나오는 하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수잔!”

나는 하녀의 턱 아래에서 나이프를 거두며 대답했다.

“무슨 짓은요.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닌 걸요.”

“그런 소란을 일으키라고 널 고용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일도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다고 봐요. 이래봬도 제가 닐슨 씨의 초대를 받고 온 몸이잖아요?”

페사 백작의 사촌인 닐슨의 이름을 언급하자, 하녀장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리히튼 공작이 방문한 와중에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겠지.

“뒷담이든 뭐든, 내 성질만 안 건드리면 조용히 지내다가 이곳을 떠나겠다는 뜻이에요. 이런 시답잖은 것들이 대뜸 찾아와 똥물을 던지고 가지 않는다면요.”

“그게 사실이냐, 리냐?”

“저, 저는….”

나는 하녀의 손등을 밟고 있던 발을 천천히 치웠다. 하필이면 이름조차 재수 없게 리냐라니. 그때, 누군가 하녀장의 뒤에서 대뜸 내 이름을 불렀다.

“수잔? 아가씨께서 널 부르셔. 지금 당장 올라가 봐!”

그건 너무나 뜬금없는 부름이었다.

‘나를? 무슨 일로?’

길게 한숨을 쉰 하녀장이 내게 턱짓했다. 무슨 사건이든 적당히 마무리 지으려 하는 하녀장들 특유의 성정이 오늘만큼 마음에 드는 날도 없었다.

옷차림을 정돈하며 아가씨의 방이 있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노크를 하고 정중한 태도로 들어섰을 때, 아가씨는 넓은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아. 네가 수잔이니?”

굽혔던 허리를 펴서 그녀를 마주했다. 정면으로 눈을 마주칠 수는 없다. 고용주의 뺨이나 코언저리에 시선을 고정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고용인의 옳은 태도였다.

“네.”

나는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표정을 통해 직감했다. 아가씨는 나를 대하는 데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너….”

“말씀하세요.”

“레, 레몬 크렘브륄레 좋아해?”

대답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자, 급히 몸을 일으켜 달려온 아가씨가 나를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지금 뭐하자는 걸까?

“우리 주방장의 크렘브륄레는 최고야. 어서 맛봐 봐.”

무슨 볼일로 나를 부른 거지? 당장 떠오르는 이유는 리히튼과의 소문이 전부였다. 그와 정분이 난 하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심심풀이로 불렀을 확률이 높았다.

“아이, 참. 먹어 보래도?”

하지만 아가씨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정말 그러한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긴장하긴 했으나, 아가씨는 분명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을 숨기고 싶은지, 아닌 척 시선을 살짝 돌렸다. 나는 크렘브륄레 접시를 밀어내고 아가씨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아가씨. 제 눈치를 보실 필요 없어요.”

“그….”

“네.”

“있잖아, 별건 아니고. 그냥 나는 네가 어떤 소문에 대해 아는가 싶어서….”

“소문이라니요?”

후, 하. 그녀는 깊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무언가 다짐한 듯,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빌힐름 황자의 약혼자에 관한 소문 말이야.”

이런. 생각지도 못한 주제였다. 나는 아마, 아니 분명 표정이 굳는 것을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가씨는 말을 이었다.

“있잖아, 빌힐름 황자 전하를 해한 범인이 그 약혼자래. 하필이면 그 여자가 황성에서 사라진 날과 전하께서 습격 받은 날이랑 겹친다지 뭐야?”

나는 별다른 대답이나 반응 없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 그런데도 모두가 쉬쉬하는 이유는… 그 약혼자가 리히튼 각하와 그렇고 그런, 사이의… 여자라는….”

문득 그녀의 가족이 리히튼과 한데 모여, 시 낭송을 즐기던 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페사의 도련님이 아가씨에게 ‘리히튼의 앞에서 사랑의 시를 읊기 바쁘다’고 조롱하던 것도.

‘…리히튼에게 반해서 은근슬쩍 마음을 고백한 게 아니라, 나와 리히튼의 소문을 떠본 거였나.’

내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이 놀랍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래, 오히려 나는 그런 소문이 돌 수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힐끔 내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다들 각하께서 그 여자를 숨겨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부, 붉은 머리에 예쁜 녹안을 가진 대단한 미녀래. 나는 그냥… 수잔이 그 소문을 알까 싶어서….”

그래서 그 대단한 미녀가 나냐는 물음이겠지. 눈앞의 아가씨는 스물도 안 되는 어린 숙녀다. 어리고, 겁 없고, 무모한 나이의 숙녀. 장단을 조금 맞춰 줄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제가 이곳으로 도망친 건 비밀로 해 줬으면 합니다, 페사 영애.”

“…역시!”

“최대한 조용히 살고 싶어요. 적어도 제가 이곳에 있을 동안은 모르는 척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아가씨의 두 눈이 환희로 가득 찼다. 그녀는 나를 품에 껴안을 기세로 두 팔을 커다랗게 벌리다가 멈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횡설수설하며 크렘브륄레를 떠먹었다.

“물론이야! 아니, 물론이죠! 저만 믿으세… 아, 아니지. 걱정하지 마, 수잔. 나만 믿으렴.”

참 독특한 아가씨이지 않은가? 아니지, 독특할 것도 없나. 그러한 소문이 도는 상태에서, 주인공으로 보이는 인물이 눈앞에 떡하니 놓여 있다면… 나 역시 진상을 확인하고 싶었을 테니까. 아가씨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꾸역꾸역 크렘브륄레를 삼키던 때였다. 똑똑.

“드, 들어와!”

하녀가 다소 당황스러운 낯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는 입가의 크림을 닦아 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아가씨….”

이윽고 하녀가 입에 담은 이름은, 내 심장을 발 아래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하녀의 전언을 들은 직후, 아가씨는 가장 먼저 나를 돌아봤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당혹감과 혼란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정작 내 머릿속은 차갑게 식었다. 미친 듯이 뛰었던 심장 박동이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수잔. 너, 너도 이만 돌아가서 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하녀가 나간 후, 아가씨는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문 쪽으로 밀어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왜 저에게 호의를 보이세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나에 대해 무얼 안다고 숨어 있으라는 말을 하는가.

“단순하게 재밌으신 건가요? 이런 시골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일이 몇 없기는 하죠.”

아가씨는 어깨를 움츠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버지가… 캐롤드는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가문이라고 하셨는걸. 무고한 사람을 돕는 건 당연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야. 전제부터 틀렸어. 나는 무고하지 않아.

캐롤드가 반역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태양이 흐르는 강』의 존속을 바랐던 다나한 2세와 빌힐름 황자가 정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 역시 많은 이들을 해했으므로 무고하다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죄인으로 취급받지 않는 이유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실세인 리히튼과 비비안느가 나의 복수를 사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빌힐름 황자를 해한 사람이 무고하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당신의 집안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치면 어쩌려고요?”

자의든 타의든 충분히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아가씨는 충격 받은 눈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 그럴 거야?”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나보다도 어린 아가씨를 데리고 무얼 하는 걸까. 호의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화풀이를 하다니.

“…아니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진실을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몸을 돌려 문을 열자 아가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수, 수잔. 별관에 조용히 있어야 해. 정 불안하면 저택에서 나가도 좋아. 내가 잘 말해 둘게.”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 지겨운 연쇄를 끊어낼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빌힐름.’

어떤 의도로 페사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어떤 의도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리히튼을 위해서라도 빌힐름과의 결말을 보고 말 것이다.

저택 뒤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낯선 마차가 보였다. 페사의 마차와는 격이 다른 외양이었다. 적색과 금색으로 호화스럽게 꾸며진 마차를 보자, 빌힐름이 정말 페사에 왔다는 것이 체감됐다. 두렵지 않았다. 되레 궁금했다. 빌힐름은 무엇을 위해 왔을까?

“…아!”

내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거부하지 못할 거센 힘이 내 팔목을 잡아끌었다. 본능적으로 팔을 비틀려 했지만, 머릿속을 뒤덮는 익숙한 향에 반항이 저절로 멈추었다. 리히튼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그레인.”

방 안은 어두웠다. 암막이 쳐진 탓에, 커튼 틈으로 새어나오는 미세한 빛 한 줄기가 내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이곳에 얌전히 박혀 있겠다고 말해. 주인만 기다리는 개처럼, 얌전히 나를 기다리겠다고 말하라고.”

“리히튼, 나는….”

말문이 막혔다. 부드러운 살결이 내 입술을 씹어 먹을 기세로 삼켰다. 뒷목이 저릴 만큼 난폭한 입맞춤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제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리히튼의 몸은 땅에 박힌 기둥처럼 꼼짝도 안 했다. 단단한 손이 내 머리와 허리를 끌어당겨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 입 안을 샅샅이 삼키는 움직임에 발끝이 저리고 손이 떨렸다.

“아그레인.”

입술이 떨어질 때면, 리히튼은 마치 사라질 신기루를 기리듯 절절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가 부르는 나의 이름은, 마치 마법을 부리듯 내 심장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저항을 포기하고 몸에서 힘을 빼자, 그의 입맞춤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나를 꽉 안고 있던 손은 머리칼을 쓸며 내려와 내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었다. 허리를 구속하고 있던 팔은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아그레인….”

리히튼의 입술은 뜨거우면서도 차가웠다. 서로를 훑는 숨결이 농밀해질수록 그의 손길도 과감해졌다. 리히튼은 절실히 나를 원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순간만큼은 빌힐름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인지할 수 있는 건 눈앞의 리히튼이 전부였다. 그의 무게에 밀려 뒷걸음질 치다 보니 어느새 차가운 석벽에 기대듯 쓰러져 있었다. 열기에 무너진 몸은 오로지 그의 팔을 버팀목 삼아 버티고 있었다.

“너를 위해 빌힐름의 목을 바칠게. 지금 당장이라도.”

“그런…. 아.”

벌어진 입술이 내 귓불을 깨물었다. 그의 혀가 나를 핥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부서졌다. 목과 어깨를 타고 떨어진 온기가 가슴께에 닿을 때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서 그렇게 하라고 말해.”

틀림없다. 리히튼은 내 몸을 녹여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내 몸은 그를 원했고, 리히튼은 그런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러면서도 절대 벽을 허물지 않았다. 그와 하나가 될 수 없는 마지막 선을 지켰다.

“아그레인.”

두 팔을 리히튼의 목에 둘러 더 깊이 입을 맞추었다. 그를 달래는 동시에 가까이 이끌었다. 벽을 허물고 어서 나를 안으라고 속삭였다.

“제발, 아그레인….”

숨이 거칠어지며 그의 손길이 점차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살살 매만지기만 하던 손끝이 내 피부를 강하게 짓눌렀다. 불꽃처럼 뜨거운 입술이 내 어깨와 그 아래에 흔적을 남겼다. 그의 두 팔이 내 몸을 안아 일으켰다. 캄캄한 시야 속에서, 나는 오직 리히튼의 목소리와 그가 주는 감각에 의존해 숨을 내쉬었다.

내게 안절부절못하는 리히튼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몸도 마음도 한결같이 내게 귀속된 그가 가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나만 바랄 수 있는 거야?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느슨하게 풀린 목소리로 그에게 고백했다.

“사랑해.”

아주 잠깐, 리히튼의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들어 올렸던 팔이 무너졌다. 나는 그런 리히튼의 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사랑해, 리히튼. 너도 알잖아. 나는 이제 너를 버릴 수 없어. 그러니까 더는….”

불안해하지 마. 하지만 그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모순된 감정이 내 심장과 이성을 잡아먹고 있었다. 리히튼의 집착이 또 한번 나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함을 안다. 빌힐름이 페사에 도착했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이성이 이렇게 덜덜 떨고 있지 않은가? 그가 괴롭더라도. 그 괴로움으로 인해 나를 놓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리히튼이 평생을 고통 받길 바랐다. 평생 그 고통 속에서 나만 바라보길 염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무너졌던 리히튼의 팔이 다시 나를 붙잡았다. 거센 악력이 내 턱을 거칠게 끌어 올렸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이 나를 씹어 삼킬 듯 노려봤다.

“어서. 다시 한번 말해, 아그레인.”

“사랑해.”

“한번 더.”

“사랑해.”

“더….”

“사랑해, 리히튼.”

그의 커다란 몸이 내게 안겼다. 리히튼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나는 리히튼의 너른 어깨 위에 뺨을 올렸다. 그리고 죽은 듯 멈춘 등을 천천히 쓸었다.

“사랑해.”

리히튼은 끊임없이 사랑한다 말하기를 요구했다. 나는 입이 닳도록 그에게 고백했지만, 리히튼은 마치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더, 더 원하기만 했다.

“사랑해.”

그에게 나의 고백은 빈껍데기처럼 들리는 걸까.

“사랑해, 리히튼….”

그는 나의 고백을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는 걸까.

“사랑해, 리히튼. 영원히.”

불안하기에 나를 놓을 수 없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

늦은 밤, 나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어쩐지 공기가 스산했다. 팔을 뻗어 침대 옆자리를 더듬었다. 리히튼이 누워 있어야 할 자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한참 동안 넋을 뺀 채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고 방을 나섰다. 백작저는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본관에는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다.

타는 듯 밀려오는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누군가 주방의 뒷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리 큰 신장에 거친 걸음걸이를 지닌 남자는 페사에 한 명밖에 없었다.

“닐슨 씨.”

민망할 만큼 거칠게 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 부름에 닐슨이 등을 돌렸다.

“…아. 수잔 양이로군.”

나는 목을 겨우 가다듬곤 그에게 물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두통이 누그러지지 않아서 솔레르 양에게 약을 부탁하던 참이오.”

“감기라도 걸리셨어요?”

닐슨은 문손잡이를 잡은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늘 머리가 아프곤 했지.”

“신경 쓰이는 일?”

질문과 함께 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닐슨은 그런 나의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무언가 체념한 것 같기도 했고.

“내가… 며칠 전에 선물했던 종이봉투는 열어 보았소?”

그 말을 듣고서야 서랍 구석에 넣어 두었던 물건이 생각났다. 상자는 닐슨의 앞에서 열어 봤기 때문에 그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진작 알았지만, 종이봉투 안의 물건은 아직 보지 못했다.

“미안해요, 그간 바빠서 확인해 보지 못했어요. 지금 당장 돌아가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닐슨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오. 그럴 필요 없소. 급하게 확인할 필요 없어. 나는 그저….”

적절한 단어를 고르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닐슨이 말을 이었다.

“그 물건은 그저… 순수한 고마움에 건넨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되오.”

“아. 그럴게요. 고마워요.”

닐슨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을 나갔다. 그러나 닫히려던 뒷문은 금세 다시 열렸다. 몸을 돌린 닐슨이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수잔 양.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고개를 주억이자 그가 겨우겨우 입술을 떼었다.

“마음에 둔 이가 있소?”

…그런 거였나.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최대한 밝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있어요.”

닐슨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좋은 밤 보내시오.”

문은 소음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닫혔다. 이전처럼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닐슨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 것 같아 입 안이 썼다. 그래도 봉투 안의 물건이 무엇이었는지는 미리 확인해 볼 것을.

그렇게 꽤 긴 시간을 주방에 머물며 입을 축였다. 내가 다시 몸을 일으킨 건 물 잔을 정확히 세 번 비운 뒤였다. 세 번이면 충분했다. 이제는 빌힐름과 재회해도 목이 타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는 새벽바람을 뚫고 본관으로 향했다. 본관이라고 해서 리히튼이 지내는 별관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내는 어둡고 고요했다. 태풍의 눈 한가운데 선 듯 긴 침묵이 감돌았지만, 그 침묵이 평화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계단을 올라 길게 늘어선 복도를 거닐었다. 벽에 걸린 수많은 액자 사이로 기다란 장식 검이 보였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곧장 그 장식 검을 빼들었다. 잉고르드에서 리히튼이 내게 쥐어 주었던 장식 검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혼자서 충분히 들 수 있는 무게였다.

‘발소리 죽이는 법을 배워야겠군. 그건 고작 구두를 벗는 일로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

문득 잉고르드에서 리히튼을 죽이려 했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구두를 벗었다. 이번에는 발소리를 죽일 수 있어야 할 텐데.

빌힐름의 방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명색이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자인 그가 사용할 방은 정해져 있었다. 페사 백작저에서 가장 높고, 넓으며, 아름다운 방이겠지.

검을 들고 그 방 앞에 섰다. 나는 빌힐름이 나를 절대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내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지만, 빌힐름에게는 저주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일이었다. 오늘이야말로 그의 심장을 꿰뚫고, 리히튼에게 돌아갈 차례였다.

숨을 죽이고 문을 열었다. 테이블 위의 노란 등불이 일렁였다. 그림처럼 첨예한 빌힐름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는 소파에 앉아 그 등불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네가 살아온 세계는 몹시 아름다워, 아그레인.”

빌힐름의 붉은 눈동자 위로 등불의 불꽃이 일렁였다.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내 세계가 아름답다니. 빌힐름이 내뱉는 개소리는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 이제는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더 많은 소리와 더 많은 것들이 보여서인가? 머리는 무겁지만 피는 오히려 맑아지는 기분이야. 상상하면 할수록 흥분이 되어서 참을 수가 없더군.”

빌힐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그가 표현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더 많은 소리, 더 많은 것들. 예민해지는 감각.

‘잉고르드의 독.’

그날, 나의 피를 삼킨 빌힐름이 죽음에서 돌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그 역시 나와 리히튼처럼 불사였기 때문에. 불사의 육체로 잉고르드의 독을 이겨냈기 때문에. 그의 피가 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천천히 다가온 빌힐름이 내 앞에 섰다. 그의 낯은 석고처럼 창백했다. 적안에는 생기가 아닌 날것의 욕망만이 존재했다. 빌힐름은 끔찍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네 숨결과 향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다는 상상 말이야, 아그레인. 밤마다 그 생각에 미쳐 버릴 것 같았지.”

머리카락 끝이 쭈뼛 섰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려는 거친 숨을 참으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빌힐름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검의 날을 막았다. 아무리 장식이라고 한들 검은 검. 붉은 피가 날을 타고 내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예전에도 분명 이런 적이 있었는데, 언제였지? …아아, 그래. 잉고르드에서 리히튼이 이런 식으로 내 검을 막았었다.

“안 그래도 아쉬웠던 참이야.”

장식 검으로 빌힐름의 심장을 찌르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차가운 그의 손끝이 내 뺨에 닿았을 때, 나는 검을 내던지고 품 안의 나이프를 쥐었다. 그러나 그보다 빌힐름이 내 턱을 쥐는 게 더 빨랐다.

“그때 너와의 입맞춤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거든.”

“읏….”

턱이 빠질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강제로 내 입술을 벌린 빌힐름은 고개를 숙여 나의 숨을 갈취했다.

아니, 갈취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코가 맞닿은 거리에서 보란 듯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짓이겼다. 곧이어 빌힐름이 내 손목을 비틀어 버렸고, 쥐고 있던 나이프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날 병신으로 여기는 거야? 이거 서운한걸, 누이.”

그는 내 몸을 인정사정없이 벽으로 밀쳤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게는 이미 익숙한 통증이자 감각이었다. 잊었던 극한의 공포가 눈앞에 되살아났다.

‘사랑스러운 개가 되고 싶다면, 주인의 말을 잘 들어야지.’

아니야, 나는 극복했어.

‘이리로 와, 아그레인.’

머리를 뒤흔들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과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내 것이 되었으니, 내 것에 걸맞게 네 정신을 뜯어고쳐 줄게.’

피범벅이 된 손이 내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흐릿했던 시야에 빌힐름의 얼굴이 나타났다. 빌힐름은 웃고 있었다. 우리가 어렸던 그 시절처럼. 내 목줄을 쥐고 흔들던 그때처럼.

“나는 말이지. 누이가 이 빌힐름의….”

코끝이 맞닿았다. 이가 갈릴 정도로 상냥한 음성이 내게 속삭였다.

“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줬으면 해.”

그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강제로 벌어진 입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빌힐름은 두 손으로 나를 아주 쉽게 다루었다. 턱이 닫히지 않아 그의 혀를 씹을 수도 없었다. 빌힐름은 내가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했다.

결박했나? 아니, 그는 결박하지 않았다. 나의 두 팔과 두 다리는 자유로웠다. 나는 그저 얌전하게 빌힐름의 입맞춤을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말을 잘 듣는 그만의 소녀가 되어서. 그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발작하듯 빌힐름의 어깨를 밀어냈고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빌힐름은 아주 손쉽게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목을 내어 준 채 쉴 틈 없이 웃음을 흘렸다.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아그레인.”

하아. 그의 한숨은 길지만 가볍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웃음기 서린 눈동자가 또렷했다. 그 안에 나의 얼굴이 어떻게 비칠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형편없이 굳어 있을 것이다.

“한때는 너 역시 그러했지. 누이가 내 아비를 죽이고, 더 나아가 나까지 죽이려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온 힘을 다해 손 안의 목을 졸랐다. 하지만 빌힐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건 아주 간단하지. 누이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야. 가진 게 없으니 잃는 두려움도 없을 수밖에. 두려움이 없는 너는 마치 불나방처럼 뜨겁고….”

나의 오른손을 가볍게 거머쥔 빌힐름이 손목 위에 입을 맞추었다. 입가에 그려진 웃음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매혹적이었지.”

차라리 백작의 방에서 수렵 총이라도 훔쳐 왔더라면. 나는 빌힐름을 밀어냈다. 그리고 바닥을 더듬어 근처에 널브러져 있을 나이프를 찾아 헤맸다. 제발, 제발…. 등 뒤에서 심해를 기는 듯한 옅은 웃음소리가 나를 뒤따랐다.

“지금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빌힐름의 목소리는 목이 탈 정도로 끔찍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 사이사이를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절벽에 선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지금도 그런가? 어때, 누이…. 지금도 누이는 혼자인가?”

손에, 손에 무언가 잡혔다. 감촉도, 크기도, 내가 바닥에 떨어뜨렸던 그 나이프가 맞았다.

“너는 그때처럼 나의 불나방이 될 수 있을까?”

“입 닥쳐!”

나이프를 집어 빌힐름의 허벅지 위로 찔러 넣었다. 힘이 부족한지 깊게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나이프를 밀어 넣으려 했다.

“읏.”

하지만 손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목 안쪽이 매캐하고 눈앞이 빙그르르 돌았다. 심장이 불타오를 것처럼 뜨거워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과연…. 반쪽이 아닌 완전한 불사의 육체는 남다르다는 건가? 반쯤 죽어 가던 나와는 영 다른 반응이야.”

이건 잉고르드의 독에 중독되어 가는 고통이었다.

‘페사에서 지내는 동안 분명 해독됐을 텐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렇다면 언제지? 어떻게 중독된 거지? 그때, 머저리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입맞춤이 떠올랐다. 빌힐름의 숨이 내 입 안을 지배했던 순간. 그 짧은 순간에 빌힐름의 혈액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온 게 확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턱을 잡아 올렸다.

“내 생각이 옳아. 하하. 역시 나의 누이는 우는 얼굴이 가장 아름다워.”

내가? 울고 있다고?

나이프는 분명히 빌힐름의 허벅지에 얕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붉게 물든 바닥이 보였다. 하지만 빌힐름은 허벅지의 상처 따윈 조금도 문제될 것 없다는 듯, 더없이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의 손아귀에서 힘겹게 벗어났다.

‘리히튼.’

안 돼. 정신 차려, 아그레인. 리히튼이 왜 널 혼자 둔 채 방에서 나갔겠어? 네 말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야. 기필코 빌힐름을 죽이고 말겠다는, 네 바람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제 돌아가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 턱을 꽈악 잡아 고정시킨 빌힐름이 내 뺨과, 턱과, 입술과, 살갗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피부에 입을 맞추었다.

“자유는 이 정도면 충분했어. 그렇지? 누이에게 이곳은 어울리지 않아. 우리에게는 더 아름다운 새장이 있어….”

목 안쪽이 뜨거웠다. 울컥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았다. 다른 방법이라면 그를 죽일 수 있었을까?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했다면…. 아니야. 그런 가정은 이제와 아무런 의미 없어. 빌힐름이 내 몸을 안아 들었다.

“내게는 네가 전부야.”

나는 달뜬 숨만 내쉬며 죽을힘을 다해 정신을 붙잡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성이 흐릿해져갔다. 그는 내 몸을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뉘였다.

“네가 있어야 내가 완성돼…. 그러니 나를 받아들여, 아그레인. 너와 함께라면 나는 완벽해.”

그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빌힐름은 내 곁을 계속 지켰고, 그렇게 방문자는 다시 돌아가는 듯했다.

똑똑.

하지만 노크는 멈추지 않았다. 앓는 도중에도 덜컥 겁이 났다. 지금의 빌힐름은 페사 백작저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미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정신이 흐릿했다. 익숙한 두통과 어지럼이 나를 괴롭혔다.

그 와중에도 문 두들기는 소리는 계속됐다.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빌힐름은 방문자를 맞이했다.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는 내게 퍽 익숙한 음성이었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전하. 수잔이라는 하녀가 전하를 찾아온 것으로 아는데, 그 아이와…. 저, 전하? 다리가….”

“수잔은 이곳에 없습니다.”

아가씨였다. 방을 찾아온 이는 페사의 아가씨임이 분명했다.

“예? 하지만 저 침대에 누운 여자는 분명….”

짧은 한숨과 함께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어떤 힘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페사 영애.”

나긋한 부름이었다. 이윽고 어지러운 시야 너머로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빌힐름은 아가씨를 벽으로 밀어 붙여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가씨의 하얀 얼굴이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대답해야지, 영애.”

“흡…. 예, 예, 전하.”

“지금 당장 황성으로 돌아갈 마차를 준비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겨우 균형을 잡아 침대에서 벗어났다. 처음 겪는 중독 현상도 아닌데 왜 항상 처음처럼 몸을 가누기 힘든 거지? 등 뒤로 식은땀이 그치지 않고 흘렀다. 방 안을 아무리 살펴도 둔기로 쓸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게요. 당장 그럴게요. 한데 수잔, 수잔은…. 수잔도 데려가시나요? 그, 그 애는 페사 가문의 하녀예요.”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촛대를 쥐기 위해 뒤돌던 것도 멈추고, 빌힐름에게로 달려갔다. 꽉 조여지는 손아귀 안에서, 아가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누가 누구의 것이라고?”

“아, 흣!”

“그대는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빌힐름의 목소리에는 그답지 않게 깊은 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죄, 죄송…!”

나는 온 힘을 다해 빌힐름을 밀어내고 아가씨의 어깨를 껴안았다. 작고 연약한 몸이 내 품 안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수, 수잔.”

아가씨는 그새 쉰 목소리로 끊임없이 마른기침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고작 하루 전까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던 눈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느냐 다그치려다, 윗입술을 깨물었다. 끊임없이 들리던 노크 소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한 악력이 나를 일으켰다. 나는 그야말로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졌다. 극도의 어지럼으로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곧 급박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벽을 짚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쾅, 하는 격렬하게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가씨의 외침이 작아졌다.

“전하! 무, 문을 열어 주세요, 전하!”

빌힐름이 닫힌 문의 손잡이가 열리지 못하게 쇳대로 고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벽에 걸려 있던 촛대였다.

“저, 전하! 문을 열어 주세요!”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안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동안 시야가 수십 번 점멸했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디인지 모를 곳에 앉아 있었다. 흐릿한 잿빛 하늘 아래에서 빌힐름이 내 볼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누이.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나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홀로 남겨졌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전신이 바위에 눌린 것처럼 무거웠다.

‘리히튼.’

아, 안 돼.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두 다리는 꼼짝하지 않았고, 혈관이 익어 가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수마가 나를 덮쳤다.

***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꿈을 꿨다. 어느새 푸른 초목이 자라나기 시작한 너른 초원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하늘은 어둡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내릴 듯 캄캄하고 흐릿했다. 빌힐름이 내게 속삭였다.

[어서 이리로 와. 누이가 돌아와야 할 곳은 내 곁이야. 꽤 즐거웠지? 이제 그만 이 장난을 끝내자.]

나는 뜨거운 불길이 솟는 벼랑 위에 서 있었다. 아귀처럼 타오르는 불꽃에 저택이 무너지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탄내가 저택에 한가득했다. 나는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리히튼이 서 있었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아. 기억났다. 이 장면은 내가 황성에서 보았던 미래 중 하나였다. 나는 이곳에서 빌힐름과 함께 벼랑 아래로 떨어졌었다. 그와 함께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리히튼을 위한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돌아가자, 아그레인. 그때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고…. 우리의 처음으로.]

빌힐름의 목소리가 짙어져 간다. 반대로 리히튼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왜지? 불안했다. 리히튼은 어째서 이리도 조용한 걸까? 그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잔.”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다르다. 빌힐름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리히튼을 위한 배려가 아님을 안다. 그를 위한다면 나는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

“…잔!”

리히튼을 위해서, 그리고 또 나를 위해서 끝까지….

“수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하늘은 아직 연기에 뒤덮인 것처럼 흐릿하고 어두웠다. 속이 타오를 듯 아픈 건 여전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이윽고 누군가 억지로 내 몸을 일으켰다. 급박해 보이는 얼굴을 한 솔레르였다.

“솔레르? 이곳에는 어떻게….”

“아가씨께서 알려 주셨어요. 일단 당장 일어나요. 어서!”

대답하는 음성이 이상하리만치 초조하다. 그래, 무언가 이상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색빛 구름이 한데 모여 강처럼 흘렀다.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코를 찌르는 탄내가 느껴졌다.

“뒤쪽 별관에 불이 났어요. 일대가 건조해서 금방 번질 거예요. 어서 피해야 해요.”

나를 부축하는 솔레르의 손을 밀어냈다. 불길에 휩싸였다는 저택은 고작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솔레르의 말이 맞았다. 붉은 화마가 별관을 야금야금 집어 삼키고 있었다. 저곳은 리히튼이 지내던 저택이다. 그는 아직도 저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꿈에서 그러했으니까.

“…수잔? 안 돼요, 수잔! 돌아와요!”

나를 괴롭히던 모든 고통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두통도, 어지럼도, 메스꺼움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두 다리가 미친 듯이 움직였다. 머릿속에는 그저 리히튼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빌힐름이 리히튼에게 어떤 짓거리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욱 두려웠다.

“안 돼. 안 돼, 제발….”

타오르는 저택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불길이 위쪽부터 번졌기 때문인지 일 층은 아직 연기만 자욱했다.

“리히튼!”

그의 방으로 올라가며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히튼!”

계단을 올라갈수록 열기가 뜨거워진다. 리히튼의 방이 이토록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힘겹게 도달한 그의 방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렇게 문 안으로 겨우 발을 디뎠을 때. 그때. 나는 리히튼의 복부에 박힌 검을 보고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리히튼.”

아아아,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빌힐름이 리히튼의 몸에서 검을 뽑았다. 테라스의 커튼이 휘날렸다. 커튼의 붉은색보다 리히튼이 뱉는 피가 더 붉었다. 무너진 리히튼의 몸이 테라스로 쓰러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이어 그에게 다가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런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덜덜 떠는 두 손을 들어 붉어져가는 리히튼의 복부를 틀어막았다.

“리히튼. 피가….”

누군가 그런 나를 비웃었다.

“그만 둬, 아그레인. 그곳만 뚫린 게 아니니까.”

빌힐름의 목소리에는 확실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의 말대로 리히튼의 오른쪽 허벅지 역시 찐득한 피에 젖어 있었다. 리히튼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리히튼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내 탓이야. 눈앞이 흐릿해졌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열기보다도 훨씬 더. 리히튼은 빌힐름을 위협할지언정 죽일 수는 없었을 터였다. 다름 아닌 나 때문에. 그가 아닌, 내가 직접 빌힐름을 죽여야 하니까. 그것이 내 유일한 바람이었으니까.

“울지 마.”

힘없는 손길이 내 눈가를 쓸고 떨어졌다. 리히튼의 목소리는 죽은 이의 것처럼 바짝 메말라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건 내가 만든 악몽이었다. 결국은, 내가 리히튼을 이런 꼴로 만든 것이다. 등 뒤에서 빌힐름의 긴 한숨이 들려왔다.

“아그레인. 나는 너를 위해 여기까지 왔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빌힐름은 그 어느 때보다 지친 얼굴로 손 안의 검을 내던졌다. 그리고 바닥을 구르고 있던 촛대를 집었다. 아가씨에게 그러했듯, 리히튼을 이곳에 가두고 문을 잠글 생각 같았다.

“그러니 어서 이리로 와. 누이가 돌아와야 할 곳은 내 곁이야. 꽤 즐거웠지? 이제 그만 이 장난을 끝내자. 슬슬 지루해지려 하는군.”

“…빌힐름.”

“누이에게는 안타깝게 됐지만, 나는 리히튼 잉고르드를 살려둘 생각이 없어. 이대로 불에 타 재가 되거나, 아래로 떨어져 천천히 죽어 가겠지.”

빌힐름이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미소였다.

“어서. 내가 진심으로 화내기 전에.”

여기서. 바로 여기서 내가 그와 함께 떨어진다면. 그렇게 한다면, 리히튼이 살 수 있을까? 불사는 완벽하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목숨이 더 질길 뿐 치명적인 양의 피를 흘리면 죽고, 불에 타도 죽는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오직 나만이 멀쩡한 상태였다. 그래, 맞아. 내가 테라스 아래로 빌힐름과 함께 추락한다면…. 그리할 수만 있다면….

불현듯 꿈에서 보았던 미래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미래였다. 그 미래에서처럼 빌힐름과 땅 아래로 추락한다면, 리히튼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야.”

그때, 기다렸다는 듯 리히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치 내 머릿속을 헤집어 본 것처럼,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은 목소리로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야, 아그레인. 그게 아니야….”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잡아끌었다. 마른 꽃잎처럼 거친 입술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리히튼이 내게 말했다.

“너를 영원히 사랑해.”

이윽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주 느리게 빌힐름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니 이번에는 네가 나를 구하러 와 줘.”

리히튼이 빌힐름의 어깨를 밀며 쓰러졌다. 나이프에 찔린 빌힐름의 왼쪽 다리가 힘없이 구부러졌다. 리히튼을 붙잡을 겨를도 없었다. 둘의 몸은 순식간에 테라스 아래로 기울었다.

“리….”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히….”

나는 홀리듯 테라스 아래로 몸을 기울였다. 붉은 빛 속으로 리히튼이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리히튼의 푸른 눈동자는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리히튼의 눈은 하늘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나만을 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 마치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리히튼의 메마른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너를 사랑해, 아그레인.

너를 사랑해.

너를….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리히튼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어디선가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열기에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나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어둠 속을 내려다보며 상상했다. 리히튼이 없는 나의 삶이 어떠한 형태를 지닐지에 대하여.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도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리히튼이 없는 나의 세상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그가 나를 지배했을 때의 시간들에 비하면, 지금 당장은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빌힐름이 내 삶의 이유였다면 리히튼은 나의 신이었다.

내가 황성을 벗어난 순간부터, 내 삶의 이유와 신 모두 리히튼이었다. 페사에서 그와 함께한 모든 입맞춤과 모든 정신적 교류, 모든 시간, 모든 웃음, 모든 하늘, 모든… 그야말로 모든 것이 내 혈관에 흐르는 피와 폐에 흐르는 공기를 새롭게 했다. 나는 리히튼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니 리히튼이야말로 내 세상의 주인이 맞았다. 그 세상의 주인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영원히 사랑해.’

내게 속삭이던 리히튼의 목소리. 나를 바라보던 리히튼의 눈동자.

‘이번에는 네가 나를 구하러 와 줘.’

나는 타오르는 연기와 불꽃을 뚫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숨을 쉬지 못해 눈앞이 흐릿해져도 계속 달렸다. 계단을 내려가고 홀을 가로질렀다. 흔들리는 샹들리에 아래를 지나 그을린 벽을 따라 뛰었다.

마침내 보이는 새까만 밤하늘 아래에서, 누군가 멍하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흠뻑 젖은 여자였다. 금방이라도 불타는 저택에 들어갈 태세였던 여자는 곧 급박하게 내 이름을 외쳤다.

“수잔!”

솔레르가 비틀거리는 내 몸을 부축했다. 그녀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번진 눈물을 닦아 내며 애원했다.

“제발 나를 도와줘요, 솔레르. 후원에 죽어 가는 사람이 있어요!”

“진정, 진정해요, 수잔.”

솔레르의 얼굴에도 분명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무너지는 내 몸을 일으켜 세우곤 등을 밀었다.

“정신 차려요, 수잔! 도와달라고 했잖아요? 별관이 무너지기 전에 데려와야 한다고요!”

그에 나는 다시 메마른 초원 위를 뛰었다. 흙과 재에 엉망이 된 몸은 밤하늘보다 더 검고 무거웠다. 먹먹해진 머릿속에는 온통 그의 생각만이 부상했다. 리히튼의 육체는 불사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죽지 않을 거야. 아무리 치명적이어도 그는 살아날 거야. 그걸 알기에 내게 구해 달라고 말한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면?’

심장이 터질 정도로 뛰는 동안, 내 사념 속의 리히튼은 수십 번을 죽고 살길 반복했다. 저 멀리 오래된 화단 위에 널브러진 두 개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 위로 까만 재와 불꽃이 떨어진다. 어떤 정신으로 리히튼의 앞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추락한 그의 모습은 망가진 진흙 인형처럼 처참했다. 제발. 나는 리히튼의 손을 붙잡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수잔? 아직 죽지 않았어요. 믿기지 않지만,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어요.”

리히튼을 확인한 솔레르가 이번에는 뒤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리히튼에게 그러했듯, 몸을 숙여 상태를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빌힐름 황자 전하도….”

“아니요.”

그자는 안 돼. 나는 솔레르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빌힐름 황자는 이곳에서 죽은 거예요.”

솔레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눈이 되어 내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수잔, 빌힐름 전하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자 전하예요. 우, 우리가 감히….”

“내 말을 들어요, 솔레르. 아가씨에게 들었죠? 페사 아가씨를 가둔 건 다름 아닌 빌힐름이에요. 오직 나를 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온 남자라고요. 그 자가 살아나면 나도, 당신도, 페사도 전부 불태워 버릴 거예요.”

까맣게 타 버린 나뭇가지가 불꽃 잔재를 남기며 떨어졌다. 환하게 빛나다 사라진 불길이 땀과 물에 젖은 솔레르의 얼굴을 비췄다. 불안과 공포가 선명하게 그려진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 역시 그러할까? 나는 꽉 멘 목으로 외쳤다.

“빌힐름, 그 악마는 그러고도 남을 새끼야. 절대 살려서는 안 돼요. 절대, 절대 안 돼!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해 가며 여기까지 살아남았는데!”

솔레르는 비명을 내지르는 내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 가족과, 집과, 리히튼이… 그들의 손에 망가졌어. 그들이 내 모든 걸 파괴했다고요. 내 모든 것을 가져갔어….”

가녀린 손가락이 내 눈과 뺨을 쓸었다. 나는 가슴을 쳐가며 울었다. 솔레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나만이 그녀의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모든 눈물을 쏟아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마치 쌓인 것을 토해 내듯, 나는 계속해서 울기만 했다.

“알았어요. 그럴게요,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 어서 각하를… 머리는 최대한 조심해서….”

솔레르가 리히튼의 머리를 받쳤다. 나는 한계에 다다른 몸을 움직여 솔레르와 함께 리히튼을 부축했다. 가느다란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차갑게 식은 그의 육신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잿빛 하늘 사이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비는 이틀 동안 더 내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이틀 동안 페사의 분위기는 어둡고 침울했다. 고작 하루 사이에 빌힐름 황자가 사망하고 리히튼 공작이 혼수 상태에 빠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가량이 더 흐른 후, 황성에서 관이 도착했다. 상복을 걸친 페사 백작가와 고용인들이 빌힐름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그의 관을 실은 마차는 앞으로 나흘을 쉴 새 없이 달려 황성에 도착할 것이다. 모두들 빌힐름의 입관식이 치러진 후에 비비안느의 즉위식이 거행될 거라 예상했다. 혹은 즉위식 다음에 입관식이 열릴 수도. 어느 쪽이든 황위에 오를 비비안느의 선택에 달려 있을 터였다.

처음 며칠간은 끔찍했다. 나는 리히튼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조금도 잠들지 못했다. 해가 뜨나 지나 그의 옆자리를 지켰다. 잉고르드의 독, 리히튼, 불안, 초조, 공포, 그 모든 요소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솔레르조차 리히튼의 회복을 장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만은 그가 돌아올 것이라 확신했다. 리히튼은 죽지 않아.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어. 이 빌어먹을 저주의 쓸 만한 부분이라곤 목숨이 질기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니 리히튼은 살아야 했다. 리히튼이 내 세상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흘렀다. 바깥에는 이제 봄의 기운이 만연했다. 칙칙하던 페사 백작저에 조금씩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체와 다름없던 리히튼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놀라워요. 이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솔레르는 그런 리히튼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 속도면 며칠 안에 눈을 뜨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말 보름도 안 되어서 완치라니….”

그날, 나는 마치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것 같은 안도와 평온을 느꼈다. 두 다리의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자, 솔레르가 그런 나를 급히 부축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완치되신다면… 그건 분명 수잔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분일 거예요. 이제 제발 휴식을 취해요, 수잔. 각하께서 깨어나셨을 때 수잔이 쓰러져 있으면 어쩌려고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열흘이 넘도록 쌓여 있던 수십 가지의 감각이 나를 덮쳤다. 수마, 고통, 어지러움, 배고픔, 피로….

***

그대로 쓰러진 나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날부터 아가씨와 솔레르는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와 시답잖은 대화로 시간을 보냈다. 기껏해야 한두 마디 받아 주던 나였지만, 이삼일이 흐른 뒤에는 제법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어제 새벽에 각하께서 아주 짧게 눈을 뜨셨대요.”

모든 것이 차츰 나아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들었어요. 빌힐름 황자의 장례식은 황위 즉위식 후에 치러진대요.”

더럽고 끔찍한 늪지대 같던 나의 세계에, 한 줄기의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 수잔. 잠깐 시간 괜찮아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름이 아니라, 리히튼 각하께서….”

리히튼이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그 소식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놀랐던 점은 리히튼이 기억을 잃었다는 점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내 스스로가 그 사실을 마땅히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다행이다.’

나는 그저 리히튼이 살아 있음을 감사히 여겼다. 리히튼이 두 눈을 뜨고 평범하게 숨을 쉬어서 한없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른 부가적인 건 필요 없었다. 리히튼이 나를 잊었다든지, 그런….

“수잔….”

솔레르가 천천히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녀의 품에 한참을 안긴 후에야, 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솔레르의 어깨가 옅게 젖어 있던 것이다.

“외부 충격으로 인한 단기 기억 상실일 거예요. 이런 경우에는 금방 기억을 되찾아요. 희망을 잃지 말아요, 수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히튼이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그를 위한 일일까? 오히려 리히튼은 나와 빌힐름을 잊음으로써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은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리히튼은 침상에서 일어났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나를 모르는 리히튼을 받아들일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괜찮을 리 없었다. 며칠이 더 흘러서, 페사에는 또 다른 마차가 도착했다. 잉고르드 가문 소속의 마차였다. 리히튼이 마차를 타고 페사를 떠난 후, 나는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는 킨에게 서신을 보냈다.

페사 백작저에서의 고용 기간을 채운 마지막 날. 저택 밖에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캐롤드 가문의 마차였다.

“솔레르.”

내 곁에 말없이 서 있던 솔레르가 한 박자 늦게 나를 돌아봤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어른스러워 보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네.”

“나와 함께 갈래요?”

그녀의 반응은 예상 외로 차분했다. 솔레르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고개를 주억이며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다음 과정은 길지 않았다. 우리는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몇 가지 물건만 챙기고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나는 캐롤드로 돌아갔다.

너무나…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 귀향이었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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