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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7. 솔레르 (19/24)

Episode 17. 솔레르

페사는 그렌페르크 북쪽의 작은 땅으로, 살인이 한 번 일어나면 영지 전체가 뒤집어질 정도로 퍽 평화로운 지역이다.

솔레르는 그런 페사 영지에 터전을 둔 약사 집안의 외동딸이었다. 가업을 잇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그녀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점이었다. 솔레르의 미모는 근방 영지에까지 정평이 나 있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반나절을 달려 페사까지 오는 남자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솔레르의 친부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을 소똥에 몰린 파리로 취급했다. 귀족과 상인은 갖가지 보석과 금화를 바치며 솔레르를 부인이나 첩으로 들이길 원했다. 그럴 때마다 솔레르의 친부가 죽어도 안 된다며 미쳐 날뛰는 통에 누구도 그녀를 데려갈 수 없었다. 솔레르의 집안은 페사 영지의 유일한 약사 집안이었기에, 페사 자작이 그들의 편의에 특별히 신경 써 준 덕도 있었다.

혹자는 미인으로 태어나 고생하는 솔레르를 안타깝게 여겼고, 혹자는 여자는 미모만 가지면 그 외의 것들도 다 가질 수 있다며 그녀를 질투했다. 하지만 페사 영지인들은 상냥한 성정을 지닌 솔레르를 가엽게 여기거나 질투할 뿐, 미워하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놓고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너희는 봤니? 검은매 기사단 말이야.”

“당연하지! 페사에서 겨우 사흘간 묵는다는데 담장을 넘어서라도 봐야 하지 않겠어?”

“어떻든?”

“잉고르드 공작 가문의 기사단답게 하나같이 잘생기고 날씬하더라. 이곳의 산적 같은 사내들과는 분위기부터가 달라.”

“글쎄, 곁을 지나가면 귀부인들처럼 향긋한 향이 난다니까?”

“페사에 머물면서 처녀나 한 명 꼬시려는 수작이겠지.”

“날 꼬셔 주면 소원이 없겠다. 나와 사랑에 빠지면 나도 잉고르드 영지로 데려가 주겠지? 아아… 이 지긋지긋한 시골을 벗어나서 큰 도시로 떠나고 싶다.”

네 얼굴을 봐라. 어느 기사가 미쳤다고 너 같은 애를 집으로 데려가겠어? 양심이 있다면 거울이라도 보면서 지껄이렴. 물론 입 밖으로 내민 질책은 아니었다. 속마음과 상반되는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솔레르는 제 친우에게 말했다.

“네 매력이라면 그 대단하다는 검은매 기사단의 기사들도 한눈에 반하고 말 거야.”

그녀의 칭찬에 한참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던 여자들이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이지! 우리 정도면 페사에 있기 아까운 미녀라구.”

“오늘 가서 꼬셔 봐. 내 사파이어 머리핀도 빌려 줄게!”

그 촌스러운 머리핀을 꽂는다고 못난이가 사람이 될까?

“보니까 정오가 되면 광장에 모여서 카드 게임을 하는 모양이더라. 오늘 정오가 되자마자 그리로 가자!”

“좋아!”

까르르 웃던 여자들이 하나둘 웃음을 멈추더니, 돌연 솔레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너는 안 갈 거지? 솔레르는 남자를 싫어하잖아.”

“솔레르가 남자를 싫어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이 남자 저 남자, 꼬리 치고 다녔다면 이곳 분위기도 안 좋았을걸?”

“얘, 솔레르. 너는 검은매 기사단에 관심 없지? 그치?”

솔레르는 밝은 웃음 뒤로 영악함을 숨긴 제 친우들을 천천히 둘러 봤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강요다. 그들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솔레르에게 남자를 멀리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 추한 시기와 질투를 견뎌 온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그 남자들과 어깨라도 부딪혔다간 나를 또 남자에 미친 계집애로 몰아가겠지.’

진짜 여우는 내가 아닌 너희들이야. 하지만 솔레르는 오늘도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마음속으로 그들을 헐뜯는 게 전부였다.

“응, 공부할 부분이 많아서 오늘은 아무래도 너희랑 어울리지 못할 것 같아.”

“걱정 마, 솔레르! 광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우리가 내일 자세히 알려 줄게.”

“남자에 관심 없는 네게는 덜 흥미롭겠지만… 그래도 꽤 즐거운 주제가 될 거야.”

이윽고 그들의 관심은 다시 검은매 기사단으로 옮겨졌다. 금발의 기사가 가장 잘생겼다는 둥, 귀부인의 후원을 받는 기사도 있을 거라는 둥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솔레르는 남자가 화두인 대화에서는 겉돌아야 했다.

“설마… 그 여자가 나오지는 않겠지?”

“그 여자?”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 가던 시점이었다. 남 헐뜯기를 가장 즐겨하는 여자가 은근슬쩍 화제를 뒤바꾸었다. 솔레르는 친구가 가리킨 ‘그 여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것 같았다.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이 친구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던 그 여자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언덕 아래의 그 노란 지붕 집 여자 말이야. 한 달 전에 갑자기 나타났던….”

“아아. 빨간 머리의 여자를 말하는 거구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수잔?”

“나, 그 여자 꺼림칙해. 엄청 칙칙하지 않니? 말수도 없고… 혼자 지내는 걸 생각해서 대화하려 해도, 고작 인사만 하고 지나가고.”

또 시작이구나. 솔레르는 뒷담화를 늘어놓기 시작한 여자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페사 영지의 숙녀들 가운데 도는 헛소문은 대개가 이 모임에서 생성된 소문들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타깃은 영지에 새로 들어온 또래의 여자인 듯했다. 여자들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소문 들었니? 남자들에게는 그렇게 몹시 상냥하다던데. 우리 앞에서 하는 꼴이랑은 다르대!”

“세상에. 어쩜 그런 계집애가 페사에 왔담?”

“걸음걸이는 또 얼마나 살랑살랑하던지. 남자들이 제 뒷모습에 홀리는 걸 즐기는 게 틀림없어.”

인사밖에 나눠보지 못했다면서 어찌 저리 쉽게 험담하는지 모르겠다. 솔레르가 아는 ‘노란 지붕 집의 여자’에 대한 정보는 고아한 분위기를 지닌 적발의 미인이라는 점이 전부였는데.

‘더하자면 조금… 지쳐 보이기도 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 꺼림칙하다는 표현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노란 지붕 집의 여자는 페사의 사람들과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해가 떴을 때보다 져 있을 때 더 자주 보인다는 점도 한몫했다.

“얘, 솔레르. 너도 그런 여자랑 함부로 어울리지 마. 그 여자가 못된 여우 짓을 알려 줄 수도 있어. 알았지?”

“아, 응….”

단언컨대 노란 지붕 집의 여자는 그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을 것이다. 교류라고는 인사와 간단한 안부가 전부였으니 당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자들은 몸을 치장하기 위해 한시 바삐 솔레르의 집을 떠났다. 그제야 솔레르의 귀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겨울의 끝 무렵이라 그런지 날이 꽤 따스했다. 마음 같아선 산책이라도 즐기고 싶었지만, 오늘은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집을 나가면 안 된다. 솔레르는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돌아갔다.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방문한 건 정오가 조금 지난 후였다.

“안녕하세요, 솔레르 양.”

솔레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방문자는 노란 지붕 집의 여자, 수잔이었던 것이다. 가까이서 본 여자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풍성한 적발도 적발이지만, 결 좋은 흰 피부에 에메랄드처럼 박힌 녹안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솔레르는 한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여야 했다. 이토록 화려한 미모를 지닌 여자는 그녀의 생에 처음이었다. 황족이 버린 첩일 수도 있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테너 씨는 안 계신가요?”

“아… 네, 네. 아버지는 잠시 약을 구하러 영지를 나가셨어요. 한데 무슨 일로…?”

잠시 말이 없던 수잔은 힘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요. 별건 아니고 제가 최근 심한 불면증을 겪고 있어서요. 약을 부탁드리려 왔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검게 내려앉은 수잔의 눈매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낯에는 생기가 없었다. 시체 같은 느낌은 아니었고, 며칠 밤을 샌 듯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도 병에 걸린 것처럼 추욱 늘어져 있었다. 솔레르는 이 여자, 수잔이 이곳에 정착한 직후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을 떠올렸다.

‘도통 뭘 하다 온 여자인지 모르겠더구나. 몸가짐은 귀부인과 다름없는데, 허드렛일을 아주 잘하는 게 이상해. 웬만하면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말려무나. 새벽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위험한 여자 같다.’

아버지의 촉은 대체로 맞았다. 하지만 솔레르에게는 잠들지 못해 다 죽어 가는 눈앞의 여자가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어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었던 어제까지와 달리, 지금의 수잔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수잔이 솔레르에게 물었다.

“테너 씨는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아마 나흘 후면 돌아오실 거예요.”

“고마워요. 그럼 그때 다시 찾아올게요.”

그렇게 작은 어깨가 멀어지려 할 때였다. 솔레르는 본능적으로 수잔을 붙잡았다.

“제, 제가 만들어 드릴까요?”

그에 수잔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한때 남자들의 구애와 여자들의 시기를 못 버티고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던 솔레르였다. 때문에 그녀는 수잔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도 어릴 적에 불면증이 심했거든요. 아직 배울 게 많기는 해도, 불면증 치료약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생각해 보면 수잔의 처지도 그녀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여자들은 없는 소문을 지어내 수잔을 험담하고, 남자들은 그런 수잔의 뒷모습을 훔쳐보기 바쁘다. 심지어 수잔은 가족 한 명 없이 혼자였다. 솔레르는 그런 그녀를 돕고 싶었다. 어떻게 말하면 얄팍한 동정심이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고맙죠. 그럼 부탁드릴게요, 솔레르 양.”

다행히 수잔은 그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솔레르는 오늘 저녁을 기약하고 수잔을 돌려보낸 후, 급히 약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환자를 위해서 직접 약을 제조하는 건 처음인지라, 긴장으로 가슴 안쪽이 온종일 떨렸다.

그날을 기점으로 솔레르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

늦은 저녁, 수잔에게 불면증 치료약을 전해 주기 직전. 내일이 돼서야 찾아올 것 같았던 친우들이 우르르 솔레르의 집을 방문했다. 술에 취했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그들의 낯은 평소보다 몇 배 더 들떠 있었다.

“얘, 솔레르! 너 그 이야기 들었니?”

“페사 자작가에서 한 달 동안 일할 하녀들을 구한대.”

귀족 가문에서 고용인을 구한단 소식이 그리 들뜰 일이었을까. 그것도 고작 한 달이지 않은가? 여자들은 어리둥절한 그녀 앞에서 줄지어 입을 열었다.

“한데 이 한 달 일한다는 자리가 참 별거야.”

“글쎄, 대단한 혈통의 귀족이 한 달간 페사 저택에서 묵는다더라고.”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잘생기고 젊은 미남이래. 인어의 비늘처럼 투명한 백금발을 지닌 미남.”

“부인과 함께 오지 않은 걸 봐선 미혼인 게 분명해. 그 대단한 귀족을 모시기 위해 한 달 동안만 일할 하녀를 뽑는 거지.”

여자들 사이에는 그런 꿈이 있다. 잘생기고 부유하며 로맨틱한 귀족 남자를 만나,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는 꿈이. 하나같이 반짝이는 눈을 보아하니 솔레르의 친우들은 모두 그런 꿈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렇게 대단한 귀족이라면 페사 저택에서 일하고 있던 베테랑 하녀들이 대접하지 않을까?”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무려 한 달이라구. 그 한 달 동안 백금발의 귀족 나리를 한 번 못 뵈겠어?”

봐서 무엇 하려고? 귀족 가문의 하녀들은 태도도 태도이지만, 외모도 중요하게 봤다. 그런 곳에 너희가 들어가 봤자 들꽃을 받쳐 주는 잡초밖에 안 될걸.

“우린 모두 그 일에 지원할 생각이야. 봉급도 두 배래. 용돈 벌이인 셈이지. 아마 이 동네 처녀들은 죄다 달려들지 않을까?”

두 배의 봉급이라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임시 고용이니만큼 가벼운 잡일만 처리할 게 분명했으니, 그들 말대로 용돈 벌이에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솔레르는 가업을 이어야 했기 때문에 한 달 동안 약방을 비울 수 없었다. 친우들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좋아라하고 알리러 왔을 터였다.

“게다가 페사를 방문했다는 그 귀족이 말이야….”

한 여자가 아주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낮추고 속삭였다.

“우리 같은 사람은 감히 만나 볼 수 없는, 아주 대단한 귀족이라는 거야.”

그녀는 무덤덤한 솔레르의 반응을 보고선 두 주먹을 꽉 쥐고 호들갑 떨었다.

“솔레르, 이 바보야! 아직도 모르겠니? 검은매 기사단이 왜 이 시골구석을 지나가겠어?”

“얘는… 확실하지도 않은 걸 알려서 뭐하려구.”

옆에 앉은 친우가 솔레르의 눈치를 보며 여자의 어깨를 건드렸다. 솔레르가 알지 말았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그 귀족이 누구길래 저런 반응일까. 그러나 솔레르가 묻지 않아도, 잔뜩 흥분한 여자가 알아서 입을 열었다.

“잉고르드 공작이 찾아온 거야, 그 대단한 잉고르드 가문의 가주!”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 그 이름이라면 정치에 무관심한 솔레르도 익히 알고 있었다. 서거한 전 황제인 다나한 2세의 이름보다도 더 자주 들려온 이름이었던 까닭이다. 잉고르드 공작이 지닌 권력과 부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최정상에 존재했다. 황위 후계를 앞두고 있던 빌힐름 황자가 돌연 습격을 받게 된 사건도 리히튼 공작의 계략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빌힐름 황자가 추락하고 비비안느 황녀의 즉위가 결정된 현 시점에서,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의 위용은 황제도 부럽지 않았다.

“잉고르드 공작은 바람둥이이지만 아직 미혼이야. 최근에 윌 백작 가문의 차녀와 약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파기됐대.”

“황족도 울고 간다는 권력을 지닌 남자잖아. 어디 첩이 대수겠어? 공작의 눈에 들기만 하면 인생 펴는 거라고!”

망상에 젖어 깔깔거리던 여자들은 금세 차분해졌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가만히 앉아 있던 솔레르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솔레르, 너는… 공부하느라 하녀 일은 생각도 못하겠지만. 그렇지?”

“안타깝다. 솔레르, 너라면 분명 각하의 눈에 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가업을 잇기 위해선 열심히 공부하는 게 옳아. 한 달도 길어.”

“너 하나만 보고 사시는 아버지를 생각해야지.”

한숨이 나왔다. 그 대단하신 공작 나리의 눈에 너희가 들어오겠어? 너희가 질투해 마지않는 내 얼굴조차 그분의 눈엔 띄지도 않을 텐데. 길가의 돌멩이와 다름없는 너희가 눈에 들어오겠냐구. 물론 마음속으로만 화를 식혔다. 갑작스레 찾아온 친구들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꿈을 가진 후 사라졌다. 그들의 바람이 너무나 허황되게 느껴진 탓일까? 비웃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익숙하게 친구들의 흔적을 치우고 집을 나왔다. 수잔에게 약속했던 불면증 치료약을 전해 줄 시간이었다. 그녀의 집을 방문해 약을 건네자, 수잔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공부하는 중이라 들었는데…. 시간을 할애해 주어서 고마워요, 솔레르 양.”

“부작용이 생기면 곧장 찾아오세요. 약을 먹은 후에 잠들어도 그리 개운하지 않을 거예요. 음. 한데 혹시…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나요?”

잠시 고민하던 수잔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 없어요.”

“없지 않을 거예요. 잘 고민해 보세요, 수잔 양. 그 근원을 알지 못하면 불면증도 치료되지 않을 테니까요.”

솔레르의 눈에 수잔은 사연이 많아 보이는 여자로 보였다. 아마 그녀뿐만 아니라 영지민 모두가 그리 느끼고 있겠지. 그러니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일 터였다.

‘내가 도와주어야 할까?’

솔레르 본인 역시 불면증을 이겨 냈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수잔은 여자의 몸으로 낯선 타지에서 혼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수잔을 멀리하라고 하셨지만, 이상하게도 솔레르는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커다란 덩치를 지닌 남자가 그들 곁으로 뛰어왔다.

“…니빌 씨?”

솔레르에게는 낯익은 인물이었다. 페사 가문의 일원이 병을 앓을 때마다, 집까지 찾아와 아버지를 저택까지 모셔가던 남자였기 때문이다.

“아! 마침 솔레르 양도 있군! 잘 됐어. 수잔 양과 솔레르 양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시간을 빌려도 되겠소?”

솔레르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수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잔은 별달리 경계하는 기색 없이 니빌과 솔레르를 집 안으로 들였다. 니빌은 수잔이 차를 내오기도 전에 급히 입을 떼었다.

“다름이 아니라… 한 달간 페사 저택에서 일해 줄 수 있나 묻기 위해 찾아왔소.”

아무래도 니빌의 용건은 그녀가 친구들에게서 전해 들었던 그 사안인 듯했다. 솔레르가 되물었다.

“혹시 임시로 고용할 하녀를 구한다는 공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소. 높으신 분이 갑작스레 찾아온 터라 이런저런 일로 바쁜 참이오.”

“다른 여자들도 많을 텐데 왜 꼭 우리인가요?”

귀족 가문은 고용인을 고용할 때 외모를 중요시 여긴다. 한데 하필이면 찾는 이가 자신과 수잔이라니? 너무나도 뻔한 목적이지 않은가. 솔레르는 표정을 굳히고 되물었다.

“얼굴이 쓸 만해서요?”

그녀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 대단하다는 귀족 나리에게 페사 영지의 미녀들을 바칠 의도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니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뭐? 하하하! 아니오, 그런 게 아니야…. 솔레르 양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테너 씨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솔레르 양이 페사 영지의 유일한 약사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수잔 양에게 부탁하는 까닭은 일전에 귀족가에서 하녀 일을 했던 때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지.”

아! 솔레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세상에, 맞아…. 지금 상황에서 약사라고 할 법한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솔레르는 얼굴로 몰리는 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등을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니빌 씨. 제가 억측을….”

“아니오, 괜찮소.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의심할 만하오.”

크흠. 니빌 역시 겸연쩍었는지, 짧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곧 솔레르와 수잔에게 재차 부탁했다.

“부탁하오, 솔레르 양. 페사 영지가 워낙 작아, 만약의 사태에 대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솔레르 양밖에 없소. 수잔 양도 마찬가지요. 적어도 두 명의 고용인 자리가 비는데, 이 영지에서 하녀 일을 해 본 여자는 수잔 양밖에 없지 뭐요?”

정말 급한 모양이구나. 솔레르는 힐끔, 수잔의 반응을 살폈다. 이것으로 귀족이 숨겨둔 첩이라느니, 버려진 귀족 가문의 서녀라느니 등은 전부 헛소문이었다는 게 확실해졌다. 수잔을 멀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하녀 일을 했었다니. 생각보다 굉장히 평범했구나.’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저 여자를 잠 못 들게 하는 걸까? 순간, 수잔과 눈이 마주쳤다. 솔레르는 자신이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음을 인지하고 급히 시선을 돌렸다.

‘지, 지금 일에만 집중하자.’

아버지는 집을 비우셨으므로, 이번 일은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 지체 높은 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그만큼 보상이 크다고 하더라도, 솔레르는 아직 배우는 처지이지 않은가? 귀인의 몸에 해라도 입히게 되면 무슨 벌을 받게 될지 몰랐다.

“한데 그 귀인이란 분이 누군가요?”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수잔이 니빌에게 물었다. 니빌은 두 눈을 날카롭게 뜨고 주변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 각하요.”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노파심에 말해 두는데, 수잔 양이 직접 그분을 모실 필요는 없소. 각하는 우리 저택의 하녀가 모실 테니 수잔 양은 빈자리만 한 달간 메꾸어 주면 되는 거요.”

하지만 솔레르는 직접 공작을 치료해야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안을 거절해야겠네.’

상대는 무려 비비안느 황녀를 황위에 올린 인물이었다. 잘못 엮이면 삼대가 목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다. 거절하기 직전, 솔레르는 수잔을 힐긋 훔쳐봤다. 불안함 때문일까? 그녀보다 조금 더 연상으로 보이는 수잔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했다.

‘…어?’

수잔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당황한 솔레르와 니빌이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상태로 꽤 긴 시간이 지났다. 다시 고개를 든 수잔의 표정은 이전과 동일했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낯과 가라앉은 눈매 그대로였다는 뜻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언가 다짐한 듯, 푹 꺼져 있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좋아요, 할게요.”

솔레르는 당황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그러고 보니 수잔 양은 나와 달리 손해 볼 게 없구나!’

이윽고 모두의 눈이 솔레르에게로 향했다. 니빌의 시선은 더없이 간절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솔레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도 할게요.”

말한 직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다시 안 된다고 말할까? 말해야겠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솔레르는 수잔의 집을 나서며 니빌에게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결정을 물러야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니빌은 쏜살같이 달려 나가 말을 타곤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거절하려는 솔레르의 낌새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튿날. 솔레르는 결국 이른 아침부터 집 앞에 대기하고 있는 페사 가문의 마차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저택 안은 조용하면서도 소란스러웠다. 한겨울임에도 정원사들이 달라붙어 나무와 땅을 손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녀를 데리러 온 마부도 평소보다 훨씬 더 단정한 차림인 것처럼 느껴졌다.

‘수잔 양은 이미 도착했을까?’

지난 새벽에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고민 끝에, 솔레르는 다가올 한 달을 기회라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고작 한 달뿐이라지만 고위 귀족의 약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남은 평생 동안 다신 오지 않을 경험일 터였다.

“어서 오십시오, 솔레르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솔레르는 시종을 따라 저택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녀는 본관에서 오 분가량을 더 이동해야 나오는 오랜 고택으로 안내받았다. 본래 잉고르드 공작쯤 되면 본관에서 대접받으며 지내야 함이 옳다. 한데 공작은 어째서 이런 누추한 고택을 선택한 것일까?

“그런데 저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으며, 솔레르가 시종에게 물었다. 본래 약사는 일이 생겨야 불려 오기 때문이다.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 대답에 솔레르는 심장이 멈출 뻔했다.

‘내가 잉고르드 공작을 만나다니….’

무려 그 리히튼 잉고르드였다. 다나한 2세가 버린 자식이나 다름없던 비비안느 황녀를 황위에 앉힌, 그렌페르크 제국의 실세. 항간에는 살인귀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아버지께서는 ‘대개 그 정도의 권력을 지닌 귀족에겐 그런 악평이 뒤따르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솔레르는 공작이 무섭기보다 과연 어떤 존재일지 궁금했다.

“한데 공작 각하씩이나 되시는 분이 어찌 저를….”

“아무나 그 분의 약사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물음에 대한 응답은 시종이 아닌 다른 이에게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대여섯 발자국 건너편에 등을 곧게 편 채 서 있었다. 매서운 인상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품위가 풍기는 남자였다. 누구일까.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온 솔레르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솔레르 그록 양. 저는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 각하를 모시는 베르크네라고 합니다.”

솔레르는 말없이 놀랐다. 리히튼 공작을 따라올 정도면 최측근이라는 뜻일 텐데, 그녀의 눈에 비친 베르크네는 너무나 젊었다.

“안녕하세요, 베르크네 씨. 편하게 솔레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지요.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솔레르 양. 각하께서는 솔레르 양과 가벼운 대화 몇 마디만 나눈 후 돌려보내실 겁니다.”

그 대화 몇 마디 때문에 입 안의 침이 다 마를 지경이었다. 베르크네는 솔레르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었다. 솔레르는 비명을 삼키며 베르크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급하게 방 안을 꾸몄는지 확실히 저택의 외관과 통로에 비해선 방의 내부가 고상했다. 솔레르는 몸을 낮추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각하. 약사 솔레르 그록 양을 데려왔습니다.”

그녀가 리히튼 잉고르드 공작을 만난 첫 감상은 단출했다.

‘고요해.’

공작은 마치, 파문 하나 없이 잔잔한 가을 끝자락의 호수와도 같았다. 그는 숨을 쉬지 않는 듯했다. 인형처럼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했으나, 생기라고 할 것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남자를 호수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공작에게서는 보는 것만으론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분위기가 존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리히튼 공작은 다가가는 것조차 몹시 버거운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각하. 저는 솔레르 그록입니다. 아직 견습에 불과하나, 페사 영지의 유일한 의원인 아버지께서 자리를 비우셨기에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을까? 말은 제대로 나온 걸까? 솔레르는 고개를 땅에 박은 채 덜덜 떨었다. 공작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 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더 어리군.”

들려오는 공작의 음성은 분위기만큼이나 차분했다. 솔레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공작은 창가에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견습이라 했는데, 환자를 위해서 약을 제조한 적은 있나?”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차후를 위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최근에 한 번 있습니다.”

“누구에게, 무슨 일로?”

얼마나 세세하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는 대로 전부 고했다.

“분수 광장 북쪽의 노란 지붕에 수잔이라는 여자가 사는데, 그 여자의 불면증 치료약을 제조했었습니다.”

착각이 아니라면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듯했다. 그녀의 눈을 응시하고 있던 공작이 시선을 느릿하게 창밖으로 돌렸다. 그에 솔레르는 눈치를 살폈다.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무언가 실수를 했던 걸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르크네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당황한 솔레르는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공작과 독대하려니 안 그래도 답답했던 숨이 이제는 꽉 막힌 것만 같았다. 오랜 적막 끝에 공작이 입을 열었다.

“수잔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데. 그녀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별걸 다 묻는구나 싶었지만, 이내 곧 생각을 바꾸었다.

‘혹시… 내 긴장을 덜어 주려는 호의인가?’

그리 여기니 무거웠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솔레르는 숨을 들이마시고 최대한 말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녀는 한 달하고도 보름 전에 페사에 정착했습니다. 진한 적발에 녹안을 지녔는데, 근방에 사는 영지민 중에서 가장 하얀 피부를 지녔습니다. 몸은 가녀리지만 자세가 좋아 허약한 느낌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마음으로 리히튼 공작을 바라봤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솔레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적어도 실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듯했다. 솔레르는 말을 이었다.

“저와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과 그렇다 할 교류가 없는 터라 찾아왔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불면증 치료약을 요구했는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버지께서 자리를 비우셨기 때문에 제가 대신 제조하게 되었습니다. 불면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요.”

마땅한 반응이랄 것 없이, 그녀가 선 방은 두 번째 침묵에 휩싸였다. 이것으로 부족한 건가. 억지로라도 말을 이으려던 솔레르에게 리히튼 공작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그녀는 어떠한 이유로 불면증을 앓았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메마르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물어봤으나 그녀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는 듯 했습니다.”

“얼마나 겪은 것처럼 보였나?”

“정확히 얼마나 앓았는지는 모르지만, 보통 불면증 때문에 찾아오는 환자들은 장기간 불면증으로 고통 받은 환자들입니다.”

어째서인지, 수잔의 보호자에게 수잔이 겪는 증상을 고하는 기분이다. 리히튼 공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정한 사람일 수도. 솔레르는 자신도 모르게 공작의 옆얼굴로 고정되는 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녀와 교류하는 이가 딱히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예.”

“나는 앞으로 한 달 동안 페사에서 지낼 예정이나, 따로 솔레르 양을 부르게 될 날은 없을 거다. 병치레로 고생할 일이 없을 테니까.”

확신하는 투였다. 그렇다면야 솔레르의 입장에선 감읍할 일이었다. 평소처럼 공부하면서 거액의 용돈 벌이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 한 달 동안 이 저택에서 지내 주었으면 하는군.”

“아….”

공작은 그녀에게 마치 명령하듯 제안했다.

“봉급은 열 배로 올리도록 하지. 가능하겠나?”

하녀 봉급의 열 배.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숫자였다. 여자 한 명이 귀족가에서 일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봉급이지 않은가. 무슨 연유에서일까? 무슨 연유로 내게 이리 잘해 주는 거지? 아닌 척하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기대가 자꾸만 솔레르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흥분에 도취되어 있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등을 후려쳤다.

‘잉고르드 공작은 바람둥이지만 아직 미혼이야.’

‘황족도 울고 간다는 권력을 지닌 남자잖아. 첩이 어디 대수겠어? 공작의 눈에 들기만 하면 인생 펴는 거라고!’

‘안타깝다. 솔레르 너라면 분명 공작 각하의 눈에 들 수 있을 텐데.’

아,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헛된 생각 말고 정신 차려야 했다. 이제껏 친구들의 헛된 망상을 비웃어 온 게 바로 그녀였다. 나는 그 애들과 달라. 솔레르는 스스로에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다독였다.

“예, 알겠습니다.”

“시종에게 마차를 부탁해 두지. 아래에서 기다리도록.”

그것으로 리히튼 공작과의 독대는 끝났다. 워낙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어떤 대화가 오갔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솔레르는 멍하니 저택을 나왔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 짐을 조금 옮겨야 할 듯싶었다. 그때, 저 멀리 익숙한 적발의 여자가 보였다. 흔들림 없이 곧게 걷는 걸음의 주인은 수잔이 분명했다.

“수잔 양!”

걸음을 멈춘 수잔이 천천히 솔레르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지쳐 보이네요, 솔레르 양. 무슨 일 있었나요?”

“그, 그런가요? 리히튼 공작 각하를 만나 뵙느라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말하면서도 자랑하는 투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수잔의 반응이 무덤덤한 걸 봐선 잘 숨긴 듯했다.

“미안해요, 수잔. 공작 각하께서 제게 이것저것 물으셨는데, 어쩌다 보니 수잔의 이야기도 나와서요. 당신의 불면증에 대해서 알려 드려야 했어요.”

“신경 쓰지 마요. 그 정도는 상관없으니까.”

정말로 상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솔레르는 이상하게 애가 탔다. 그래서인지 굳이 알리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까지 입에 담고 말았다.

“또…. 저 이곳에서 한 달간 지내게 됐어요. 각하께서 제안하셨거든요. 그러니 아픈 곳이 생기면 바로 찾아오세요.”

이번에는 어떻게 반응할까? 솔레르는 기묘한 기대감을 갖고 수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당신은 참 상냥하군요. 그럴게요.”

하지만 돌아온 건 맥 빠지는 반응이 전부였다. 그녀가 무어라 더 입을 열기도 전에, 수잔은 등을 돌렸다. 솔레르는 마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괜스레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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