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6. 빌힐름
: 열두 번째 삶에서
유독 따스했던 십이월의 마지막 날.
빌힐름은 그해 세상에 태어났다. 다나한 2세가 황위에 오른 후 낳은 첫 적자였기에 빌힐름은 태어나자마자 황자가 되었다. 그렌페르크 제국은 황손 탄생일에 민간 및 귀족의 출산을 금지한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기록된, 그해 마지막 날에 태어난 아이는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손이 전부였다.
빌힐름은 날 때부터 다나한 2세의 총애를 무한히 받았다. 그가 다나한 2세의 첫 자식이기 때문은 당연하고, 무엇보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총명함 덕이 가장 컸다. 날 때부터 성숙하고 차분했던 빌힐름은 그의 스승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사고의 깊이가 남달랐다. 모두들 빌힐름 조나단 레그윈이 황위에 오른다면 그렌페르크 제국에 태평성대가 찾아올 것이라 칭송했다. 그들은 빌힐름이 황태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실의 유일한 적자이기 때문에 다나한 2세의 총애가 저물 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란 평이 지배적이었다. 유일한 적자. 그렌페르크 제국에서, 빌힐름은 황실의 유일한 적자였다.
“비비안느.”
모두가 빌힐름을 그리 대우했다. 실상은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도.
“너는 이 아비의 말이 말처럼 들리지 않는 게냐?”
다나한 2세의 지적에 비비안느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낯에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그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들었습니다.”
“한데 딴짓을 하는구나.”
“전부 빌힐름에게 하시는 말씀이잖아요. 제가 귀 기울일 필요 있을까요?”
비비안느는 빌힐름의 유일한 친남매로, 둘은 쌍둥이였다. 하지만 비비안느는 그렌페르크 제국에서 황녀 취급을 받지 못했다. 적녀의 신체나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황제는 비비안느를 서자만도 못하게 대했다.
모두들 그 이유를 비비안느가 늦게 태어난 쌍둥이이기 때문이라 여겼다. 누군가는 황후가 비비안느를 낳다가 영원히 눈을 감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빌힐름은 두 예측 모두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미적지근한 비비안느의 태도에 다나한 2세가 노성을 터트렸다.
“비비안느, 너는 언제쯤 그 반골 같은 성향을 고치려는 게냐? 그게 레그윈 가문의 후계자가 보일 태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멍청한 년, 대충 대답하고 말면 될 것을. 빌힐름은 이 시간이 가장 지루했다. 굳이 반박해 이 지루한 시간을 늘리는 비비안느의 주둥이를 꿰매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추호도 모를 비비안느는 오늘도 다나한 2세에게 대적하기 바빴다.
“누가 저를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녀로 생각하겠어요? 그 누구도 그리 여기지 않을걸요. 빌힐름의 시녀는 저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더군요.”
“네가 신분에 맞게 군다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테지! 하아, 됐다. 너와 대화하니 내 머리가 다 아프구나. 당장 이 방을 나가거라.”
다나한 2세의 명령에 비비안느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을 나갔다. 다나한 2세는 멀어지는 비비안느의 뒷모습도 보기 싫다는 양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같은 배에서 태어났으면서 하나는 멍청하기 그지없군.”
빌힐름은 영혼 없이 대답했다.
“얼굴은 예쁘장하니 어느 방면으로든 쓸모가 있겠지요.”
“저 잘난 줄 알고 사는데 얼굴이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비비안느는 레그윈 가문의 수치다! 여태껏 그리도 제멋대로인 계집애를 본 적이 없어.”
그렇담 이용해 먹기 위해 어릴 적부터 싸고돌기라도 했어야지. 하지만 빌힐름은 가만히 입을 닫았다. 황제는 옳은 말이든 그른 말이든, 제 주장에 토 다는 행위를 몹시 싫어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조심스럽게 제의하는 편이 나았다. 머저리만도 못한 여동생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지만.
“네가 가르쳐라.”
그러나 이어지는 명령에는 빌힐름조차 토를 달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십 분 늦게 태어난 누이입니다. 제가 가르치면 무얼 가르치겠습니까?”
“너는 내 뒤를 이을 자식이야. 그렌페르크 제국의 황위를 잇기 위해서는 사람을 무는 개를 아주 잘 다룰 줄 알아야 하지.”
“비비안느를 개 다루듯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다나한 2세는 부정하지 않았다.
“레그윈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비비안느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애를 타이르든 무얼 하든, 네 말에 잘 따르도록 만들거라.”
그 말은 즉 개 다루듯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빌힐름은 비비안느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다나한 2세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불필요한 소모품처럼 대하질 말아야지. 그런 주제에 본인에게 일을 떠넘기다니. 빌힐름은 다나한 2세의 무심함과 멍청함에 짜증이 났다.
“잘 따르기만 하면 됩니까?”
“그래.”
빌힐름은 다나한 2세의 눈에서 기대감을 읽었다. 그 흐릿한 눈동자 속에서, 빌힐름은 죽어 간 여자들의 비명을 떠올렸다. 육포처럼 붉던 하녀의 얼굴과 유리병 속에 담겨지던 머리들. 다나한 2세는 여자의 피를 보면 흥분하는 광인이었다. 빌힐름과 비비안느는 열 살 무렵에 그 사실을 접했다. 황제가 몸소 그들 앞에서 유희를 위해 사람을 어찌 사냥해야 하는지 시범을 보인 탓이다. 그때, 비비안느는 다나한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짐승과도 같아요. 반드시 천벌받을 거예요.’
그러나 빌힐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그날부터 그럭저럭 동등하다고 할 수 있었던 남매의 대우가 완전히 달라졌다. 다나한 2세의 성향을 이해하지 못한 비비안느는 황제를 반목했고, 다나한 2세 역시 비비안느를 없는 자식 취급했다. 빌힐름은 비비안느가 피를 두려워했기에 다나한 2세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을 알게 되고, 그 일원이 된 후에는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레그윈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하늘의 힘’은 적통 장자에게만 대물림된다. 다나한 2세가 비비안느를 버린 이유는, 빌힐름이 그 ‘하늘의 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비비.”
그날 저녁, 빌힐름은 비비안느를 찾아갔다. 여동생은 울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눈가가 벌겠다. 아닌 척해도 다나한 2세의 냉대에 마음이 찢어질 만큼 아팠던 모양이다. 제아무리 쓰레기 같은 아버지라 할지라도 비비안느는 제 핏줄에 그리 모질지 못했다.
“빌힐름, 네가 이 시간에 내 방까지는 무슨 일이야?”
비비안느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빌힐름을 노려봤다. 근 몇 년 동안 사적인 만남이라곤 단 한 번도 없던 빌힐름이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빌힐름은 대답 없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황실 기사들이 비비안느의 양팔을 속박하고 무릎 꿇렸다. 비비안느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몸을 비틀었다.
“무엄한 것들! 황녀의 몸에 손을 대다니, 뭐하는 짓이냐! 빌힐름, 이게….”
비비안느의 의문은 입 밖으로 온전히 나오지 못했다. 기사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 여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빌힐름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비비. 네게 매번 말했었지. 무얼 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내가 번거로운 일을 하게만 만들지 말라고.”
비비안느가 열심히 발버둥 쳤지만, 고작 어린 여자 한 명이 장정 둘을 밀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으, 읍!”
“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은 이유는 고통을 모르기 때문이란다, 비비.”
‘그들’이 레그윈 가문에 반발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이유 역시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고통과 공포에 학습되어 있기 때문에. 긴 시간 개처럼 살아 온 역사가 피에 새겨졌기 때문에.
“오늘부터 네 그 돼먹지 않은 성정을 고쳐 주마. 이 오라비에게 고맙게 생각하렴.”
비비안느의 두 눈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날부터 빌힐름은 비비안느를 길들였다. 다나한 2세는 종종 제 맘에 드는 사냥감을 동쪽 숲에 숨겨 개처럼 기르곤 했는데, 빌힐름은 그 방식을 비비안느에게 그대로 사용했다. 반복된 폭력과 정신적 핍박 속에서 긴 시간을 버티도록 하는 것이다.
빌힐름은 그 과정에서 동정심도, 즐거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하기에 할 뿐이었다. 그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다 죽어 가는 비비안느에게 세뇌를 반복했다.
“너 같은 아이를 불결한 아이라고 부른단다.”
“등을 낮추고 살아가렴, 비비. 쓸모가 없다면 눈에 보이지라도 말아야지.”
“널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같은 핏줄이라도 너와 나는 달라, 비비. 스스로를 개라고 생각하는 게 옳지.”
정의로우나 고집이 셌던 그의 여동생은 점차 순종적으로 변해 갔다. 한 계절이 다 흐르기도 전에 총명했던 두 눈은 빛을 잃었다.
한데 비비안느에게는 그가 다나한 2세로부터 물려받은 개들과 조금 다른 점이 존재했다. 등의 살 껍질이 벗겨져도 보름이면 새살이 완전히 올랐다. 빠진 손톱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어 다리를 부러뜨리면 한 달 만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빌힐름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기묘하게 말을 바꾸어 다나한 2세에게 이 비이상적인 회복력의 근원을 물었다. 다나한 2세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으로, 그에게 가르치듯 답했다.
“그건 빌힐름, 네가 하늘의 힘을 지닌 까닭이다. 힘을 지닌 자들은 불사에 가까운 육체를 가지지. 하루가 흐르면 뚫린 상처에 새살이 나고, 이틀이 흐르면 부러진 뼈가 다시 붙게 되는 것이다.”
그는 드물게 진중한 표정으로 빌힐름에게 당부했다.
“그 사실을 네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귀한 황손의 육체에 쉬이 상해를 입을까 염려스러운 마음 때문이었거늘. 너는 레그윈 가문의 후손이자 장차 그렌페르크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하늘의 힘을 지닌 후계자다. 그러니 불사의 힘을 지녔다고 육체에 상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할 게다.”
빌힐름은 황제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의 힘을 지닌 자는 비비안느가 아닌 그였다. 한데 왜 제 쌍둥이 누이가 불사의 육체를 지녔단 말인가.
‘…비비안느의 골절이 이틀 만에 회복되었었나?’
아니었다. 게다가 뚫리기는커녕 뜯겨진 피부가 회복되기까지는 보름이 소요되었다. 마치 불완전한 불사의 힘을 지닌 것처럼. 그날, 빌힐름은 직감했다. 그만이 지녀야 할 ‘하늘의 힘’이 비비안느에게도 주어졌단 사실을.
빌힐름은 처음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다. 어느 날, 그는 달리는 말에서 떨어져 양다리와 양팔에 자의로 골절상을 입었다. 한 계절은 꼼짝도 못할 몸 상태였으나, 고작 한 달 만에 침상에서 일어났다.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빠르고, 불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느린 회복. 빌힐름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저히 감퇴한 회복력이 아니었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캐롤드와 잉고르드의 능력자를 제어하는 하늘의 힘이 어떠한 상태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불사의 육체가 반쪽이 됐으니, 제어의 힘도 온전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운이 좋다면 내 세대는 문제없이 지나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레그윈 가문은 곧 대가 끊길 수도 있다.’
미래를 보는 힘인 ‘태양의 힘’은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래왔듯 우리에 가두어 놓고 개처럼 기르면 되니까. 하지만 시간을 돌리는 힘인 ‘강의 힘’은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회귀가 반복된 후라면?’
그렇담 그것으로 이미 끝이다. 길고 길었던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과 레그윈 황실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한다는 뜻일 테니. 몸을 회복한 빌힐름은 곧장 예일 성으로 향했다. 강의 힘을 지닌 잉고르드의 후계자가 갇힌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해 리히튼 잉고르드에게 물었다. 아니, 묻기도 전에 마치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리히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게 강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기 위해 찾아왔다면, 그렇다고 대답해 주지. 과거를 몇 번 돌렸느냐고 묻는다면 열한 번이라고 대답하겠다. 레그윈이 무너지느냐는 물음에는 그럴 예정이라고 해 두겠어.”
그야말로 쓰레기를 쳐다보는 냉랭한 시선이었다.
‘열한 번.’
그렇다면 리히튼은 오늘을 열두 번째로 보았다는 뜻이었다. 오늘과 똑같은 날이 그리도 잦게 반복되었다는 소리인가. 빌힐름의 예상은 옳았다. 리히튼 잉고르드는 강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미 여러 번 시간을 반복한 후였다.
내심 놀랐지만, 절망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미련을 버렸기 때문일까? 그러나 미련이 하나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은 참으로 오묘했다. 때문에 빌힐름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리히튼의 말에 반응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너를 죽일 수도 있다. 불사의 힘도 심장이 뚫리면 무력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리히튼은 이런 대화마저 무료하다는 양,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네 그 말도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군. 죽일 거면 죽이고, 말 거면 가라. 여기서 날 죽여 봤자 미래가 조금 더 밀리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렇담 정말 죽여 버릴까. 그러나 빌힐름은 금세 포기했다. 리히튼 잉고르드의 눈을 본 순간, 섬광처럼 깨달은 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빌힐름 본인보다도 빌힐름 조나단 레그윈에 대해 더 자세히 꿰뚫고 있었다. 아마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란 사실 또한. 성으로 돌아온 후에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뒤늦게나마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방도가 있었다.
‘당장 자식을 낳아 하늘의 힘을 물려준다면, 강의 힘을 제어할 수 있을까?’
유일한 실마리를 찾은 듯한 느낌에, 빌힐름은 곧장 다나한 2세를 찾아갔다. 레그윈의 핏줄을 존속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빌힐름은 생물이든 사물이든 그 어떤 것에게도 애정이라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발아래에 두어야 할 존재를 제어할 수 없단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빌힐름은 다나한 2세에게 물었다.
“폐하. 저의 부인이 제 자식을 낳는다면, 그 즉시 하늘의 힘이 계승되는 겁니까?”
물음에 대한 다나한 2세의 대답은 이러했다.
“레그윈도, 캐롤드도, 잉고르드도… 모든 힘의 후계자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들려온 답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빌힐름, 너는 부인과 첩을 가질 수 있으나 아이를 가질 순 없어. 그래서 비비안느가 있는 게다. 네 누이가 귀한 혈통의 사내와 혼인하여 네 후계자를 낳아 줄 것이다. 새로운 후계자가 태어난다면 너 역시 내가 그러했듯 불사의 힘을 잃겠지.”
황위는 대대로 하늘의 힘을 지닌 자가 차지했다. 그 말은 즉, 빌힐름과 비비안느 또한 레그윈 가문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다나한 2세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개족보나 마찬가지인가.’
열 명에 다다르는 다나한 2세의 사생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황제의 건강이 온전하다는 것을 내보이기 위한 가짜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멍청했군. 리히튼 잉고르드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을 텐데.
“마음에 드는 여자라도 생긴 것이냐? 네 눈에 들다니 참으로 대단한 숙녀로구나. 어느 가문의 누구지?”
다나한 2세는 퍽 흥미로운 얼굴이 되어 빌힐름을 내려다봤다. ‘하하.’ 빌힐름은 목을 젖히고 미친 듯이 웃었다. 얼마나 크고 경박한 웃음이었는지, 나중에는 진노한 다나한 2세가 그를 쫓아낼 정도였다. 그러나 빌힐름은 쫓겨난 후에도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시종장이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우신 겁니까? 전하의 그런 모습은 처음 뵙니다.”
“카이로 백작. 나는 즐거운 게 아니라, 우스워서 웃는 것에 불과해. 즐거운 것과 우스운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안타깝지만, 다나한 2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황위 후계자를 낳아야 할 비비안느도 그처럼 하늘의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힐름도, 비비안느도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지난 이백 년이 넘는 그렌페르크의 역사 속에서, 황위를 잇는 자는 늘 레그윈 가문의 적통이었다. 그러나 다나한 2세가 그토록 사랑했던 전통의 레그윈 가문은 다나한 2세 본인의 대에 멸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날 이후 빌힐름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게임은 이미 승자가 정해진 게임이었다. 그렇다면 더는 발버둥 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이제는 억지로 주어진 옷에 몸을 끼워 맞출 필요가 없었다. 빌힐름은 원하는 대로 거리낌 없이 살기로 했다. 국가와 가문의 명예를 위해 본능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해서 힘을 기르고 검을 휘둘렀다. 밟고 선 피 웅덩이가 깊어질수록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우러러 봤다.
빌힐름이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가 비비안느가 별채에 갇혀 살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 터라 황성에는 ‘다나한 2세의 광증이 황자와 황녀를 망쳤다’는 소문이 은근하게 돌았다. 다나한 2세는 그런 빌힐름을 다그치기는커녕 멀찍이서 관망하기만 했다. 그동안 빌힐름은 자신이 유일하게 흥미를 느꼈던, ‘말하는 개’를 키우는 일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황실에 깊게 관여하는 주요 가문들만 이 사실을 알았을 뿐, 대외적으로 그는 여전히 재능 있고 매력적인 황자였다.
“지루하군.”
그런 그가 간과했던 중요한 진실이 하나 있었으니.
“지루해.”
제아무리 흥미로운 일이라도, 정도와 제한 없이 즐기기만 한다면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내일이 새롭지 않았다. 기대되는 사건도, 인물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빌힐름의 세상은 완전한 회색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하늘은 그가 무료한 생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늘이 보낸 그의 여자, 아그레인 캐롤드는 빌힐름이 삶의 전환점을 맞도록 한,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아그레인 캐롤드. 캐롤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태양의 힘’을 지닌 소녀. 그녀가 진짜 후계자라는 사실은 우연한 과정에서 밝혀졌다. 힐 성의 삼 층에서 떨어진 수잔 캐롤드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기 때문이었다. 수잔 캐롤드는 캐롤드 가문이 황실에 바친 ‘태양의 힘’의 후계자였다. 캐롤드 가문이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에 반발했단 사실을 알게 된 다나한 2세는, 바로 다음날 빌힐름과 황실 기사단을 캐롤드로 보냈다. 캐롤드 저택은 반역죄를 명목으로 하루아침에 불바다가 되었다.
아그레인은 그 과정에서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끌려왔다. 빌힐름에게 아그레인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쉬이 절망하지 않는다는 점에 존재했다. 빌힐름은 그 이유가 핏줄의 복수에 의거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그레인은 쓰러지지 않는 풀꽃이었다. 어여쁘고 하찮았지만 결코 죽지는 않았다. 귀족 영애로선 감당 못할 그 어떤 수치와 고통에도 아그레인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눈물로 범벅이던 낯도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간 웃음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여름의 초목과 같이 빛나는 두 눈은 늘 그를 향한 살의를 숨기지 못했다. 아그레인은 복수를 꿈꾸었고, 그랬기에 살아 있었다. 제아무리 밟아도 지겹도록 다시 일어났다. 그녀를 곁에 두니 리히튼의 존재는 금방 잊혀졌다. 언제부턴가는 지친 아그레인이 목숨을 포기해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일기도 했다.
그때부터 빌힐름은 일정한 선을 지키고 그 선 안에 아그레인을 가두었다. 옆에 서면 정신을 잃게 할 정도로 황홀한 향을 풍겼음에도 목숨을 내버릴까 두려워 그 여린 몸을 취하지 않았다. 빌힐름에게 있어 아그레인은 그토록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어쩌면 정말 사랑일지도 몰랐다. 그의 잿빛 세상에서, 오직 아그레인만이 선명한 초록빛을 띄었다. 빌힐름은 그의 사랑스러운 아그레인과 꽤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리히튼이 그녀를 데리고 황성 밖으로 도망치기 전까지는.
“그래, 아그레인….”
그때, 주인 없이 텅 비어 버린 힐 성을 마주했을 때.
“희망을 느껴야 더 깊은 절망을 맞이하는 법이니까.”
빌힐름은 처음으로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곧바로 다나한 2세에게 가 직접 리히튼과 아그레인을 끌고 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나한 2세는 기다렸다는 듯 불허했다.
“그들을 쫒지 말거라.”
“어째서입니까?”
“황실이 리히튼 잉고르드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태양의 힘과 강의 힘을 우리 레그윈 가문에 바치는 대가로, 『태양이 흐르는 강』 서약은 곧 파기될 게다.”
빌힐름은 헛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그레인은 황성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고 있었다. 한데 뭐? 힘을 바치는 대가로 서약을 파기해?
“백 년이 넘도록 연구했으나 내리 실패해 온 염원을 그가 어찌 가능케 한다는 겁니까?”
술잔을 비운 다나한 2세가 욕망에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조용히 답했다.
“무어 리올을 아느냐?”
무어 리올은 리올 백작 가문의 장녀로, 다나한 2세의 유일한 조카이자 빌힐름의 유일한 사촌이었다.
“잉고르드 가문이 독자적으로 힘과 혈족의 관계성을 연구해 왔다고 하더군. 그 결과로 무어 리올에게 두 번째 태양의 힘이 발현할 거라 예측했다. 미래를 보는 힘이 캐롤드 가문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말했지.”
그건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흘 전, 리히튼 잉고르드의 주장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무어 리올이 미래를 보았다고 하더군. 그 아이가 예지한 미래 중 몇 가지는 실제 내 머릿속에 그려둔 미래였다. 다만, 스스로를 다른 이로 착각하는 부작용이 있는 듯했으나….”
다나한 2세가 손짓하자 곁에 앉아 있던 여자가 술을 기울였다. 그 모습이 기특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다나한 2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부작용이 다 무슨 대수겠느냐? 드디어 우리 레그윈 가문이 모든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게야! 잉고르드 공작이 직접 짐을 찾아와, 서약을 파기하는 대가로 우리에게 모든 힘을 바치겠다고 약조했다. 벌써 절반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황실은 잉고르드의 실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지.”
아! 빌힐름은 다나한 2세의 멍청함에 탄식했다. 황제가 결국 리히튼이 만들어 놓은 덫에 완전히 걸리고 만 것이다. 무어 리올이 태양의 힘을 지닌 채 태어났다고? 그럴 리 없었다. 과거를 반복해 온 리히튼이 견고하게 쌓아 올려놓은 속임수일 게 분명했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하지만 빌힐름은 황제의 무지에 대해 하나하나 파고들어 직접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나한 2세가 리히튼의 진실을 알고 그를 잡아 죽인다고 해도,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강의 힘을 이용해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그만일 테니까. 이는 빌힐름과 비비안느가 쌍둥이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필멸이었다.
“이건 혁명의 시작이다, 빌힐름.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우리 레그윈은 그렌페르크 제국만이 아니라, 전 대륙의 주인이 되는 거야. 짐이 바로 그 혁명의 기점이 될 것이다. 네게 제국이 아닌 대륙을 물려주마, 아들아.”
빌힐름은 다나한 2세가 헛된 기대에 부풀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결국, 이 모든 건 의미 없다. 황실의 미래는 리히튼 잉고르드가 짜놓은 판대로 흘러가는 것에 불과했다. 그도, 눈앞의 황제도. 빌힐름에게 남은 건 아그레인밖에 없었다. 그래,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렌페르크 제국이고 대륙이고, 누가 주인이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러니 아그레인만은 내 손에 쥐어야겠어.’
이 회색빛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아그레인.
빌힐름은 그것 하나면 족했다. 아그레인 캐롤드는 내 거야. 그것이 열두 번째로 반복된 삶에서 빌힐름이 가진 유일한 욕구였다.